소백산 산행기
이제 산행기를 쓰는 것도 노동이 되었나 보다. 오늘 아침 일어나서 산행기를 쓰려는데, 쓰기가 싫다. 하지만 내일부터 기말고사 시험문제 출제해야되고, 이래저래 다음 주가 빡빡하게 일정이 잡혀있어, 오늘 쓰지 않으면 쓸 시간이 없을 것 같다. 오래되면, 기억도 가물가물 할 것이고, 다 잡고 앉아서 글을 써 본다.
소백산(1439m)은 태백산에서 남서로 뻗어, 백두대간의 목 부분1) 쯤에 위치해있다. 남서 방향의 종주 능선을 따라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의 삼봉에서 갈라진 여러 지맥들이 북서방향과 남동방향으로 뻗어 내리며 그 사이에 천동계곡(비로봉-천동동굴), 어의계곡(국망봉-어의곡리), 희방계곡(제1연화봉-희방사), 비로계곡(비로봉-비로사), 죽계구곡(국망봉-초암사)등 여러 계곡들이 위치해있다.
소백산은 지난 2008년 1월 산행장소로 선정이 되었다가 폭설주의보로 취소되었던 곳이다. 회원님들과 필자도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모른다. 산행일 전날, 폭설주의보가 발효되어 산행이 취소되었으나, 막상 당일에는 눈은 한껏 쌓였으나, 눈이 그치고, 햇빛이 쨍쨍, 산행하기 더없이 좋은 맑은 날씨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곳을 이제, 겨울 눈 구경, 봄 철쭉구경 다 지나고, 여름 계곡의 매미소리를 듣기에는 아직은 이른, 아직은 여린 푸르름이 더해가는 한가한 6월 둘째 주에 이곳을 찾는다.
이곳은 다른 사람보다는 나에게는 남다른 정감이 있는 곳이다. 소백산의 국망봉 아래 죽계구곡 하단부에 순흥면이란 곳이 있는데, 그 이름대로 이 지역이 나의 순흥안씨 관향이다. 서기 1100년경에는 도 아래에 부, 목, 군, 현 등의 지방행정구역을 두었는데, 도에는 관찰사, 부에는 부윤, 목에는 목사, 군에는 군수, 현에는 현령이 지방을 관활했다고 한다. 당시에 이 지방이 순흥부[順興府]로 풍기, 영주, 봉화지역을 통괄한 행정구역이었다 하니 그 당시에는 꽤 대도시(?) 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의 수레는 또 한바퀴를 도는 것인지, 몇 일 전, 경북도청이 영주와 예천 사이의 지역에 들어선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다.
순흥 지역의 흥망성쇠는 우리 순흥안씨의 슬픔과 깊은 연관이 있다. 조선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성상문 등의 사육신과 함께, 일으킨 단종복위 모반사건과 관련하여 이 지역으로 유배를 와 있었는데, 1458년(조선 세조 4년)에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기천 현감의 고변으로 거사가 탄로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세조는 순흥부의 지세를 꺾기위해, 순흥부를 폐지하고 영주군 및 봉화군으로 나누어 격하시켰다한다. 이때 순흥지역에 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순흥부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안씨에게 엄청난 재난이 닥친 것이다. 피신한 사람이 겨우 몇 안되었다하니... 내가 대학 다닐 때, 안씨종회대학에서 삼박사일 교육을 받을 때 들은 이야기로는, 이 때 죽은 안씨들의 피가 내를 이뤄 죽계천을 흘러내렸는데, 그래서 믿거나 말거나, 죽계천의 돌을 보면 위로는 힌색인데 밑바닥이 붉다한다.
이왕 나온 이야기이니, 나의 순흥 안씨를 좀 더 소개해보겠다. 모르는 사람들은 광주안씨와 순흥안씨를 같은 시조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광주안씨와는 씨가 전혀 별개의 성이다. 순흥(順興) 안씨의 시조는 고려 때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냈던 안자미(安子美)이다. 그는 당시 흥령(興寧:현재의 풍기, 영주, 봉화)지방에 세거하여 영유(永儒), 영인(永麟), 영화(永和)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3형제가 크게 번성하여 3대 분파를 이루었다. 영유 할아버지 가계를 1파라하고, 영인 할아버지 가계를 2파, 영화 할아버지 가계는 3파를 하는데, 필자는 3파, 문숙공파 28대손이다.
이번 기회에 내가 알고 있는 순흥안씨 자랑을 좀 해보자면, 고려조에는 우리나라 주자학의 태두 안향(安珦)선생과, 「관동별곡2)」과 「죽계별곡」을 지어 국문학사에 우뚝 빛나는 근재 안축(安軸)이 있다. 안축 할아버지가 노래한 죽계별곡의 배경이 소백산 국망봉 아래의 죽계구곡이다. 조선조 들어 초기 안평대군과 교류를 했으며 그에게 몽유도원도를 그려 준 안견이 있고, 중종~명종 대에 많은 정승 판서들을 배출하며, 여식들은 정경부인(貞敬夫人)3)으로 가문의 전성기를 누렸다. 조선 후기에는 대표적인 양반화가 안중식(安中植)이 있고, 한말 이후에는 애국충정의 문중정신을 되살리어 많은 애국적 인물들을 배출했는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천여 의병을 진두지휘 홍주산성에서 항일전을 치뤘던 의병장 안병찬(安炳瓚), 삼흥(三興)학교를 세워 인재양성에 힘써다 국가의 혼은 지키고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安重根), 3.1운동 후, 독립군사령부를 창설했던 안무(安武),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상해 임정에 독립운동자금을 공급했던 거상(巨商) 안희제(安熙濟), 대동학교를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독립신문을 창간한 안창호(安昌浩), 독립을 해서는, 미군정 당시 민정장관을 지냈던 독립운동가 안재홍(安在鴻),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천재음악가 안익태(安益泰)가 나의 조상이다. 소백산 기슭이 나의 관향이니, 이곳을 찾은 나의 감흥이 다른 사람의 그것과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10시 30분에 삼가리를 출발한다. 출발할 때 비로사에서 단체촬영을 하기로 하고 떠났는데, 비로사 입구에서 다리 건너 곧바로 산행 길을 재촉한다. 이번 산행길에는 무전기를 3대 가지고 와서, 필자와, 산행대장, 사무국장이 하나씩 가지고 움직이는데, 대산고 선생님들이 보이지 않아 확인을 해보니 선생님들께서 비로사에 들리셨단다. 후미에 있는 산행대장에게 연락해서 알아보라고 하니 염려가 줄어든다. 문명의 이기가 이렇게 편리하다.
원래 비로자나라는 말은 태양을 의미하는 산스크리스트어로, 기독교에서 하나님, 메시아가 현생에 나타난 분이 예수라 하듯이 비로자나가 현세에 출현하신 분이 석가모니라 한다. 비로자나불은 지권인(智拳印)4)이란 수인(手印)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이 원래는 하나라는 뜻이란다. 유대교가 예수보다는 메시아를 기원한다고 들었는데, 비로사도 그런 식으로 이해해도 될런지 모르겠다.
소백산에서 가장 단거리 등산길이 비로사에서 비로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보니, 우리 일행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다. 아시아나 그룹의 금호석유화학 본사 직원 200 여명이 오늘 이 길로 산행을 하고 있단다. 그들은 모두 몸자보를 하고 있는데, 그 몸자보에는 “뜨거운 열정(熱情)!! 끊임없는 혁신(革新)!!” 이란 표어가 보인다. 끊임 없이 쥐어짜는 자본의 근성! 스트레스에 몸살이 날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조금은 속이 뒤틀려, 쓸데 없는 농을 건네본다. ”끊임없는 혁신이라는데 끊임없이 변하면 결국은 어떻게 되나요?“ ”비행기도 음속을 돌파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고 효용이 떨어진다는데, 끊임없이 변하면 그렇게 되지는 않나요?“ 이 말은 들은 30대 중반쯤 되 보이는 회사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듣기가 싫은 것인지, 상사에게 물어보지 왜 나에게 물어봐 라는 뜻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네들은 산을 싫어하는 사람도, 산을 좋아하는 사람도 모두 함께 되어 힘들어 하며 산을 오른다. 목표는 오직 산을 정복하는 것이고, 함께 하는 것이다.
대처수상과 레이건 대통령 이래로 우리 자본주의 사회는 가치 창조를 위한 효율과 능률에 사활을 걸고 있다. 회사는 변함이 없는데 회사의 주식은 어제와 오늘 엄청난 차이로 오르 내린다. 산업자본에서의 가치 창조가 아니라, 금융자본에서의 가치 창조이다. 어떤 물건이 만들어지고 팔리느냐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회사의 이미지, 상품의 이미지, 미래에 대한 전망이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중국의 공장과 회사는 변함없이 생산활동을 지속하고 있는데, 주식은 6000포인터에서 이제 3000포인터 이하로 곤두박질 쳤단다. 본질이 중요한 시대는 이미 지났다. 사르트르가 현대를 존재가 본질을 앞서는 시대라 했던가? 비쳐지는 피상이 가치있게 평가 받아야 한다. 현대는 그 평가를 위해 끊임없는 혁신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인류를 위한 변화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1986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백은 '위험사회-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란 책에서 현대경제사회의 중심 원리를 상품(goods)의 분배가 아니라, 해악(bads)의 분배라고 갈파하고. 따라서 현대사회는 점점 위험사회로 전이되어 간다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단적인 시각으로 지능로봇의 개발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로봇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유전자변형 농산물이나, 복제생명의 발달도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모른다. 신발은 얼마나 실용적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가 값을 결정하는 준거가 된다. 본질은 더 이상 중요한 시대가 아니다. 자본이 바라보는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는 아닌지...
글이 너무 무겁고 이상하게 흐르는 것 같다. 소백산으로 돌아오자. 자연의 이야기는 100년 전이나, 1000년 전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자연을 이야기 하는 것이 편하다.
소백산 비로사 길은 그렇게 아기자기 하거나, 멋을 부린 길은 아니다. 굴곡이 그렇게 있는 것도 아니고, 암봉이 즐비한 경치를 조망할 수 도 없다. 등산길 내내 비탈을 묵묵히 쉼 없이 올라야 한다. 오늘은 명곡고등학교 전 선생님이 오랜만에 오셨다. 친구인 웅상고 정 선생님은 아침에 운동장까지 나오셨다가 몸이 좋지 않아서 돌아가셨단다. 함께 하지 못함이 못내 아쉽고, 잘 돌아가셨는지 모르겠다.
전 선생님과 명곡고 정보부장님인 정선생님이 함께 산행을 하는데, 나도 학교에서 정보부 일을 맡고 있어, 정보부(?)의 모토인“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농을 건넨다. 학교에서 정보부란 명칭이 맹랑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것도 40-50대 사람들에게 정보부라는 용어는 좀은 무시무시한, 거북한 용어이다. 중앙정보부시절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고, 일반인이 이해하지 못할 역할을 한 전력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곳에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표지석이 입구에 있었다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교육정보부“를 “교육지원부”나 “교육기자재부”정도로 명칭을 바꾸면 뉘앙스가 나쁘지는 않을 것도 같은데..., 나만의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비로봉을 400M정도 남겨두었는데, 선두 조는 정상에 도착했다는 무전이 왔다. 한 10여분 이면 정상에 도착할 것 같다. 여러 사람을 제쳐두고 체력 테스트 겸 속도를 내본다. 정상도착 12시50분. 정상에는 금호석유화학 직원들이 단체사진 촬영하느라 분주하다. 문성고 조선생님, 경일고 날쌘돌이 김선생님, 안선생님, 신선생님, 안민초 이 교장선생님, 여러 분이 이미 올라오셔서 김밥 전을 펼쳐, 거의 마무리 단계이다. 작년 계룡산 갔을 때, 이 교장선생님께서 막걸리를 얼려 오셔서 정말 맛있게 얼얼하게 마셨는데, 그래서 기대 아닌 기대를 해보는데, 교장선생님께서 수건으로 똘똘 뭉쳐온 막걸리를 꺼내신다. 이 교장선생님께서 건네시는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며, 산정에서 느끼는 상큼한 공기도 맛본다.
보는 눈은 마음의 눈이라 했던가? 일어서 보니, 북동쪽으로 국망봉의 암봉이 유달리 가까이 보인다. 한걸음에 달려가고픈 마음이 일어서 인가? 가보고 싶은 곳이다. 국망봉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슬픔에 엄동설한에도 배옷 한 벌만을 걸치고 멀리 옛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는 연유를 가지고 있다 한다. 마의태자를 생각했기에 국망봉이 그렇게 눈에 또렷이 들어오는지도 모르겠다.
비로봉 주위는 나무가 거의 없는 목장풍경이다. 북동쪽으로는 국망봉이 보이고, 남서쪽으로는 천문대가 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에 연화봉이 있다. 눈이 오는 겨울에는 연화봉 쪽으로 능선 길을 걸으면, 정말 눈 구경 원 없이 할 수 있는 좋은 등산로이다. 이곳은 훤한 전망만큼이나, 시원한(?) 바람이 강하게 부는 곳이기도 하다.
선생님들이 거의 다 정상에 올라오셔서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맑은 날씨지만 바람이 강해, 점심 식사를 주목군락지관리소 쪽에서 하기로 하고 산을 내려간다. 주목군락지는 천년기념물로 지정되어 울타리가 쳐져있다. 주목은 살아서 1000년, 죽어서 1000년을 간다고 한다. 산의 하단부에 있지 않고, 산정에만 있는 주목, 그 주목은 100년을 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과거와 미래를 굽어보며 살아갈 것이다.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볼 것인지...
역시 점심 식사로 용남초 전선생님의 야채 맛을 따라 올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이번에도 푸짐하게 가져오셔서 맘껏 먹어도 된다. 점심식사를 미리한 선생님들도 쌈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한 술씩 거든다. 신월중 강교장선생님과 친구분들이 막걸리를 내놓는다. 역시 연륜은 무시할 수 없다. 어른께서는 산정에서 무엇이 입맛을 당기게 하는지를 이미 알고 계신 것이다. 강교장선생님과, 친구분들은 어젯밤 약주를 많이 하셨다는데, 그래도 아무 탈 없이 올라오셨다. 감사한 일이다. 가지고 오신 막걸리에 산행의 맛이 한껏 고취되어 여러 선생님께서 뿅 가셨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천동계곡으로 하산 길을 잡았다. 하단부에 석회동굴인 천동동굴이 있어 천동계곡이라 하는데, 천동계곡은 풍부한 수량과, 녹음으로 여름에 더할 수 없이 좋은 산행길이다. 영주까지 올라오던 곳곳의 저수지들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 그렇게 기대하지는 않았었는데, 아니다, 천동계곡의 물소리는 6월에도 우렁차고, 그 소리가 앗아가는 시원함은 오히려 겉옷을 껴입게 한다. 산은 높으나, 낮으나 내 발걸음으로 올라간 만큼, 그만큼을 내려와야 한다. 세상사가 다 그러한 것이거늘. 하산시간 4시30분. 참가한 선생님 37분.
저녁식사는 마늘돌솥정식을 먹었는데, 수육과 더덕을 쌈에 싸서 장을 얹어 먹는 맛도 일품이고, 곤드레 나물과 육종 마늘이 얹혀진 돌솥밥도 좋았다. 즐거운 6월의 두 번째 토요일이었다.
2008년 6월 15일
산악회 회장 안병철 올림
1) 오른쪽 그림은 백두산을 뿌리로 보고 배치한 백두대간 모습
첫댓글 창원고 김태형입니다. 저희 어머님이 순흥 안씨라 평소에 관심이 좀 많아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