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국빈을 찾습니다.
안녕하세요
얼마전 항산구익균 선생 102세 생일파티에 다녀왔는 데..
거기서..도산 안창호 선생의 대독립당 관련 건으로...
당시 대독립당 단원이 안창호 이동녕 김두봉 조상환 최동오 신영삼 신국권 권국빈 구익균 김기승
등인데..
여기서 권국빈(權國彬) 1930년 당시 33세 정도.. 피혁기술자..과학자..그의 아버지가 서울에서 여관을 하고 있었고..
이 분이 1930년경 상해에서 활동중 구익균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 아 술을 먹으면 도산 안창호도 별개 아니다 그러고 말이 너무 많아서 당시 비밀 조직으로 막 시작하려는 대독립당이 일본 밀정에게 발각되면 머리 아프다 말이야.. 그래서 동지들과 함께 모의하여 그 상해 음식점(기억이 필요)에서 술을 잔뜩 먹이고 살해(방법은 모름)하여 음식점 뒷마당에 묻어버렸어.. 그 뒤로 안창호 선생이 1932년에 윤봉길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울에 와서..감옥에 들락 거리 실때.. 그 권국빈 아버지가 경영하는여관(서울시내 자세히 모름)에 가니..우리 아들이 상해에 있는 데..안선생 혹시 소식 모르오? 그러는 데 안창호 선생이 안절 부절 했다는 게야..이 말은 그 당시 1933-6년 사이에 그 안선선생이 용양하던 산장에 몇 번 갔는 데 그 때 그러시더라고,,
그리고 1930년 그 사건 당시에도 안선생에게 보고 하니.. 애석해 하시며 '내가 원래 교육자 인데 이거 나라가 망하니 부득불 독립운동을 하다보니 이런 불상사가 났구나 하면서..침통해 했었지..'
뭐 대충이런 내용인데..족보를 두들겨 보면 이름이 좀 특이 하니 나올 법도 한군요..
제가 생각 컨데는 이 권국빈이 과연 민족을 배반 햇는 가? 아니면 어쩌다 일어난 불상사인가? 다져 볼 필요도 있고..
이제 大獨立당의 정신이 필요한 시점에서 걸르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 후손이나 관련자가 있으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고 싶기도 합니다..
아래는 권국빈이 20세때 독립신문 반입 배포하다가..1년 징역형
이외에도 흥사단 원동지부(상해)에서 본부(미국)로 보낸 보고서에 권국빈 활동 상황 일부 있음..
-----
이름/별명 권국빈(權國彬) 당시나이 20세
본적/주소 황해도 봉산군 사원면 적천리 505번지 판결기관 경성지방법원
죄명 정치범 처벌령 위반 생산년도 1921년
주문 징역 1년, 미결구류일수중 200일 본형에 산입 관리번호 CJA0000268
판결날짜 1921.05.17 M/F번호 00930913
사건개요 조선의 독립을 열망 직,간접으로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자금 제공을 권유 및 혁명사상을 선동하는 기사를 가득 기재한 독립신문 수천부와 상해임시정부 공보 수백부, 신한청년 이란 잡지 수백 부를 배포를 위해 보관하고 오학수, 박윤삼, 김재덕,손재흥, 김이욱 등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등 안녕질서를 방해한자들이다.
판결문
원문보기
판결주문
내용보기
관리번호 : CJA0000268 문서번호 : 772253 성명 : 이원직 외 17인 쪽번호 : 183-216
피고 이원직(李元稙) 등은 모두 조선의 현 정치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제국의 속박에서 이탈하기 위해 독립 국가 형성하기를 기도(企圖)하고, 다중이 공동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第一. 이원직은 피고 정의도(丁義道), 이기하(李起夏), 이병의(李丙儀)와 오학수(吳學洙), 박윤삼(朴允三)이라는 박승명(朴承明) 등과 위의 목적으로 경성방면에서 피고 김청풍(金淸風)은 피고 정의도, 조한호권정빈(權國彬), 김치현(金致鉉)과 김재덕(金在德)손재흥(孫再興), 김이욱(金履郁) 등과 같이 황해도 사리원 방면에서 각각 공모하여 <단체명>상해임시정부와 양쪽 지방간에 연락을 하고, 서로 기맥을 통하게 하여 동 정부로부터 송부하여 온 조선독립목적으로 하는 치안방해 행위를 선동하는 기사를 게재한 인쇄물을 배포하고, 동지를 규합함은 물론 임시정부로 송치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대정 9년(1920년) 4월 이래 동년 7월 사이에 피고 김청풍, 김재덕은 손재흥의 손을 거쳐서 상해가정부 발행의 직간접적으로 조선독립사상을 고취 격려하고, 또는 독립운동자금의 제공을 권유, 혹은 혁명사상, 과격사상을 선동하는 기사를 게재한 「독립신문」 수천 부와 상해임시정부 공보 수백 부, 「신한청년」 제목의 잡지 수십 부를 입수하였다. 동년 4월중 피고 정의도는 독립신문 수십 부를 받아 즉시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한포리에서 허필(許), <인명>이용하(李龍夏), 조병학(趙炳學), 민영한(閔泳漢) 등에게 배포하였다. 피고 김청풍 등은 경성 방면에서 반포하였으며 동월 중 독립신문 400매를 동년 5월중 동 신문, 상해임시정부공보 약 500매 모두를 피고 정의도와 김이욱이 공모하여 피고 이원직 주소지로 지참하여 배부하였다. 동년 7월중 피고 김청풍, 권국빈(權國彬), 김치현 3명은 독립신문 약 4,000매, 잡지 신한청년 약 40부를 몰래 경성에 반입하여 정의도, 이원직 등에 교부하고, 동월 중 피고 김청풍을 사리원 적천리에서 독립신문 약 200매를 피고 권국빈에 교부하고, 다시 수취하는 등 각 피고 등은 상기와 같이 민가와 일반에 배포할 목적으로 상기 인쇄물을 보관하고 있었다.
피고 이원직은 동년 5월 중 자택 또는 경성부 내자동 권세중(權世重) 집에서 유갑순(柳甲順)에게 독립신문과 상해임시정부공보, 각 수매와 적십자회 영주증 용지 40여 매를 교부하여 조선독립운동 참가에 힘쓸 것을 당부하고, 또 그 인쇄물을 이용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할 것을 명하였다. 유갑순은 그 후 강원도 평강군 남면 정연리 황학노(黃學老)로부터 금 70원을, 동리 김군욱(金君郁)으로부터 금 400원을 징수하였다.
피고 정의도는 동년 6월 하순 진남포에서 손재흥으로부터 상해임시정부 발행 액면 500원 공채 1매, 동 100원 공채 2매를 수취하여 피고 이원직에 교부하고 동월 말경 피고 김청풍 역시 손재흥으로부터 위와 같은 액면 500원 공채 1매, 동 100원 공채 2매를 수취하여 종잠예배당 내 목사댁에서 피고 정의도에 교부하였다.
동 피고는 동일 이원직 집에 이를 지참하여 교부하였고, 이원직은 응모자를 물색하여 500원권 1매를 피고 이기하에게 교부하였다. 이기하, 이병의 두 사람은 김진동(金鎭東)이란 자에게 그 매입을 권유하였다. 이원직은 동년 4월 8일 경성부 황금정 1정목 중국 요리점 「아서원」에서 오학수를 만난데 이어 동년 5월 초순경에는 종잠예배당에서 박윤삼을 만나서 상해임시정부 및 사리원교통국과 연락을 취하고 조선독립 운동기관인 경성교통국 설치문제를 협의하였다. 그 후 피고 이원직, 정의도, 이기하 3명과 박윤삼 등은 동년 5월 이래 6월에 이르기까지 동 예배당과 경성부 누상동 백호정, 고양군 숭인면 청량리 홍릉 등에서 수차 회합하고 경성교통국 설치와 상해, 사리원간 연락을 도모하는 등 불온 인쇄물을 배포하였다. 또한 이들은 상해가정부 발행 공채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공채금 모집 등을 전담하고, 이원직, 정의도, 이기하 등 3명이 그 실행을 위하여 협의하였다.
第二. 김태용(金泰鏞), 김청풍, 이정률(李廷律), 권국빈, 김치은(金致殷), 변인봉(邊麟鳳), 곽익호(郭益浩), 곽선호(郭善浩), 손봉국(孫鳳國), 변도준(邊道俊), 손재흥 외 수명은 대정 9년 6월 6일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어수리 피고 곽익호 집에서 회합하고 조선독립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단체명>독립청년단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의 행동강령으로 첫째,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상해임시정부로 송부하고 둘째,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조선인 경찰관, 관리 밀정을 살해하고 셋째, 조선인으로써 독립운동자금 제공을 거절 또는 독립운동자를 관에 밀고하는 자를 살해하고 넷째, 조선내 독립운동 상황을 상해임시정부에 보고하고 다섯째,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송부되어 오는 독립운동 인쇄물을 일반 조선인에 배포하여 사상을 선전할 것을 결의하였다. 동단 역원으로써 손재흥은 단장, 이정률은 부단장, 김청풍, 김태용은 총무, 변인봉, 김치은은 서기, 권국빈, 곽익호, 곽선호는 교통원에 선임하고 모두 임무를 충실히 실행을 할 것을 서약하였다. 이 때 이정률은 손재흥으로부터 교부, 수취한 상기내용의 기사를 등재한 독립신문 기타 수종의 인쇄물 수십 매를 사리원에서 피고 곽선호에게 교부하고 곽선호는 같은 장소에서 변도준에게 교부하고 동인은 다시 봉산군 구연면 관대리 서당에서 손봉국에게 교부하였다. 동 피고가 보관하고 수수한 이 모든 것들은 일반에 배포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피고 정의도는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한포리 조한호(愼表晟) 집에서 동인에 대하여 조선독립이 가능하도록 청년은 마땅히 이 시기에 분기하여 독립운동자금을 헌납하고 또 몸을 상해임시정부에 던질 것을 권유하였다. 신표성(愼表晟)은 이에 감격하여 동년 6월 7일경 소지금 1,070여원을 가지고 봉산군 사리원 손재흥 집에 도착하여 집안에서 금 500원을 조선독립 운동자금으로 상해임시정부에 제공함은 물론 자신도 상해임시정부에 투신, 독립운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동년 7월 20일 평남 중화군 중화면 석전리 김태용 집에 도착하여 동인과 피고 김치은 등과 회합하고 김태용, 김치은, 손재흥으로부터 신표성이 제공한 금 500원과 김부인(金夫人)이 모집한 독립운동자금 2만원을 상해가정부로 송치하기 위하여 평북 의주군 위북면 북하동 도선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 정부 파견원 최명식(崔明植)에 전달할 것을 명하자 이를 승낙하였다. 김태용, 김치은, 신표성은 그 금원을 휴대하고 동년 8월 1일 의주군 의주면에 도착하였으나 최명식은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이전에 체포되었다. 이로써 각 피고들은 안녕과 질서를 방해한 사실이 있다.
피고 김창집(金昌執), 김정집(金淀輯)은 무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