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골 마을에 살았던 봉구 아부지 이름은 “끝불이”이라고 불렀다.
잿마을 동철이네 형님 이름도 "후씨" 라 하였는데 끝불이나 후씨는
같은 맥락의이름으로서
"후씨는 후에 씨앗으로 쓸 사람이고"
"끝불이는 끝까지 불알을 잡아야 한다"
뭐 그런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둘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행여 씨 손자가 잘못될까 미리 이름으로 붙여서
평생 잡신이나 불행이 근접 못하도록 단도리를 한 이름들이다.
3대 독자인 봉구 할배가 청송 심씨 봉구 할매와 혼사를 치루고 딸만 내리
세명을 놓자 봉구 할매가 안신영골 점쟁이 할매에게 보리쌀 서되 들고 찾아가서
세 번째 딸 이름을 후불이라고 지어온 후에 낳은 아들이 봉구 아부지다.
그래서 행여 4대 독자 아들이 잘못 될세라 이번에는 아들 이름을 끝불이라
지었는데 그만 그 아들이 육이오 사변 통에 덜컥 죽어버리자 서둘러
어린 손녀 딸 이름을 다시 “바래”로 지어서 불렀고 그런 후 유복자로
태어난 것이 바로 조금 모자라는 봉구다.
“바래”라는 이름은 손이 귀한 집안에 시집온 봉구 할매가 간절히
씨 손자를 바라다, 뭐 그런 절절한 심정으로 지어 부른 것이다.
봉구가 유복자로서 열 달을 어메 배속에서 지낼 때 봉구 할매는
새벽같이 일어나 웃(위에)땅골 우물물을 버지기로 퍼 다가 삼신 할매에게
싹싹 빌었다.
그리하여 봉구가 조상 제사상 돌봐 줄 씨 고추를 달고 세상에 나오자
봉구 할배는 왼손새끼를 꼬아서 참 숯덩어리 달고 붉은 고추도 달고
차돌도 달아서 삽짝 걸이에 금줄을 쳤다.
참 숯은 일부 지방에서는 잡병을 금하는 것이라하나 실은 불알이요
노란 씨앗이 담뿍 든 붉은 고추는 씨 육두를 뜻하고
차돌은 아이들이 태어나서 바람에 씨 날러가듯 잘 죽으니까 못 날아가게
무게를 달아 놓은 것이다.
금줄로 사용할 새끼는 오른손 새끼를 꼬지 않고 왼손 새끼를 꼰다.
봉구 할매는 손녀 딸 이름을 “바래” 지은 것에 삼신 할매가
탄복하여 씨 손자를 준 것이라
하며, 그 후로는 비록 바래는 납딱 고추를 달고 태어난 여자 아이지만
엄청 귀여워 하시였다.
그 당시는 그저 며느리 택할때는 입이크면 혹 없는 살림에 밥많이 먹을까봐
덜컥 걱정을 하였지만 엉덩이가 큰 처자를 보면 시어머니 될 사람람들은
입이 벌어지면서 그저 좋아서
"아이고 처자 궁뗑이가 방티보다 커서 아는 잘 놓겠다!" 좋아라 하시고
부디 손자 만큼은 많이 낳커라 많이 낳커라 하였는데, 혹 먹을것이
걱정되더라도 일단은 씨 고추를 놓고 보자는 바램으로
“맹-엥 지가 먹을 것은 안 갖고 태어 날씨껴?”
하면서 배속에 들어서는 아이들은 다 놓아 다산을 (多産) 고집 했었다.
문제는 다산도 중간 중간 씨 고추가 썩어서 나와야 하는데 내리
납딱 고추만 태어나는 날은 당당하게 시어머니가 나서서 또 다른 여자를
물색하여 한 지붕에 두여자가 살아도 본 부인은 행여 소박 맞을 까봐
숨소리도 낮추고 그저 죄없는 딸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서 긴긴 세월
가슴 조렸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집집마다 아이들이 줄줄이 솔방울처럼 8남매 9남매가 많았는데
태어난 아이들은 결국 먹을 것이 충분치 못하니 꽃피는 춘궁기에는
허기에 지처 병약해지고 죽어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야산에는 그런 아이들 죽으면 그저 헌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깊이 파지도 아니하고 뭍은 일명 애촉 묘가 여기저기 많았다.
특히 보리농사가 몇 년 거듭 흉년이 들면 마을에 아이들이 먹지를 못해서
모가지는 시들은 등 칡 줄기처럼 가늘어 지고 배는 앞산 만해지고 배꼽은
자두처럼 검붉게 튀어 올랐다.
“겉보리 석삼년에 자식농사 절반 타작이면 그만해도 천만 다행”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소위 보리 고개가 얼마나 궁핍했는지
짐작 할 수 있는 일이다
오죽하면 태어난 아기가 100일을 넘게 살았다고 백일잔치를 하고 호적에도
2-3년 늦게 올렸을까?
그런 와중에 손녀보다 손자가 죽으면 큰일이니 그저 여자아이들은
자신을 위한 이름보다는 다음에 태어날 남자 동생을 위하여
말자, 후불이, 끝순이, 필자, 후남이, 끝분이,톡떨이(딸은 이제 다떨어내고
아들만 놓아라는 뜻) 뭐 이런 종류의 이름을 달고 살아가는
여자 아이들이 괘 많았다.
따지고 보면 봉구 누나 “바래” 도 바로 그런 종류의 이름인 것이다.
정 바래... 집안 살림이 워낙 궁핍하여 책이야 얻어서 본다지만
공책 살 돈이 없으니 소학교 3학년까지만 다니다가 그만 두었지만
워낙 속이 곱고 영특하여 한글과 셈은 그래도 다 깨우쳐 집안일을
야무지게 도우는 10살 난 여자 아이다.
그 이름이 특이하니 학교 다닐 때 통지표 받는 날은 선생님이
“정 바래! 니는 수 하고 우 만 바래는데 고만 바래라!
하면 아이들이 와! 하고 웃었다.
이런 여자 아이들의 이름을 순수한 우리말로 번역하여 미국 인디언들과
수인사를 나눈다면
내 이름은 “늑대와 춤을”이라고 하며
내 아내 이름은 “참나무 아래 풀 먹는 들소” 라고 부릅니다
한국 처녀 당신 이름은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내 이름은 “나는 여자아이로서 마지막이다(끝순이)”라고 하고
그리고 내 남동생은 “끝까지 불알이다(끝불이)” 라고 불러 주시길 바랍니다.
뭐 이런 식으로 불러야 하는 이름인데 세상에 이런 이름이 어디 있는가?
우째거나 바래는 자기 이름 덕택으로? 태어난 봉구 동생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무엇이라도 입안에 넣을 것이 생기면 무조건
“봉구야 아-입 벌려라!”
하고는 동생 입안에 넣어주고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라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동생 봉구를 늘 업고 키워서 지금도 봉구 다리는 물푸레 나무 휘어 놓은 것처럼
안짱다리다.
늘 봉구 녀석이 바래 등 어리에 업혀 다니면서 침을 질질 흘려서
어느 한시 한적 바래 등 어리가 안 물러 빠진 적이 없었지만 바래는 단 한번도
봉구를 나무라거나 아무 땅에 떨석 내려놓지를 아니하고 귀하게 돌보았다.
마을에 잔치가 있는 날에는 봉구를 업고 그 집에 가서 왠 종일 설거지를
해준 후 얻어온 떡을 몇날 며칠 두고두고 동생 봉구 입에만 넣어주는
그런 누이 이였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늘
땅골(원래는 塘谷이지만 갱상도 발음으로 땅골이라 연음됨) 마을에 절기가
청명을 넘어서면서부터 한바탕 살구꽃이니 개 복숭아꽃이니 신나게 흐드러지고
돌 고개 넘어오는 봄바람이 낮은 야산을 휘돌아 제법 싹이 올라온
산 밑 보리밭을 살랑살랑 흔들며 잔파도를 이르키고 여기저기 밤늦도록
두견새가 울음이 들리면서 봄이 깊어지자 자연 마을 이집 저집
점심 굶는 집들이 늘어났다.
긴 겨울 동안 우물 섶에서 돌에 짓눌려서 누렁물을 울겨 내던
콩 잎 파리 뭉치도 하나 둘 사람들 입으로 사라졌다.
가난한 사람들은 쑥이 나오기 전까지는 여름 콩잎을 겨울 내내
물에 담가두었다가 춘궁기에 허기진 배를 채우는데 활용하였다.
이 산골 마을도 벌써 몇 년 째 보리농사가 흉년이 들어서 이미
봄 쑥이 올라오던 달포 전부터 칠구네는 그저 아침은 보리 곡기 밥이지만
저녁에는 멀건 조당수나 국시를 해먹고 점심은 그저 건너 뛰었다.
쑥이 돋아나면서 부터 그나마 싸래기 가루로 훌훌 뿌려서 쪄낸
쑥 털털이이로 배를 채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마을 아이들도 눈 흰자위가 더 커 보이고 머리에 허옇케 피는 마른버짐도
더 많이 퍼졌다.
지난해는 칠구 배다른 여동생 하나가 오월 달에 시름시름 아프다가 죽었고
동탁이 젖먹이 여동생도 젖이 적어서 동탁이 아부지가 젖나오는 데 좋다는
술막지를 우씨 도가 집에서 얻어다가 부인에게 먹이는 참에 아이는 크게 울지도
못하고 숨을 한번 몰아쉬더니만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러니 아이들은 그저 시간만 나면 개울이나 산에 두 눈을 말똥거리면서 매달렸다
초봄에 빼기를 캐먹던 아이들은 양력 4월 보름을 지나서 산 여기저기
연분홍 참꽃(진달래)이 피어나면
“와 참꽃 봐래이!”
외치면서 늘 다니던 길을 포기하고 참꽃 많은 야산으로 들어가서 허겁지겁
참꽃 순을 흩어 먹었다.
참꽃은 쌉쌀한 맛과 단맛이 동시에 나고 부드러워서 먹기 좋았다.
그리고 양지 섶에는 이미 찔레 순이 돋아나고 그 보들 야들한 찔레 순을 꺾어서
먹었는데 늘 그런 찔레 덤불 속에는 뱀들이 웅크리고 있어서 찔레 순만 보고
손을 들어 밀다가 쉬-익 하는 독사 소리에 혼쭐이 나는 적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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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가 벌써 열흘이 넘도록 초여름도 아닌데 초점을 앓고 있자 봉구 할배는
읍내에 나가서 열병에 좋다는 금계락 사러 내려가시고 봉구 할매는 그저 먹지도
못하고 자리에 누워서 초점을 심하게 앓고 있는 바래를 위하여
조당수를 끓이고 있었다.
지난번 먹다가 만 흑새미 가루가 남아 있었지만 영 내키지를 아니했다.
바래가 열병으로 자리에 눕기 전에 봉구 할매가 건너 마을 권씨 집에 디딜방아
다리품을 팔아서 싸래기를 서너 대박 얻어왔었는데, 그때 함께 얻어온 흑세미를
솥에 넣고 달달 뽁아서 온 식구가 다 먹고는 그만 모두가 배탈이 나서
눈만 뻐꿈하니 더 들어 가버린 꼴이 되었다.
벼를 디딜방아에 넣고 찧을 때 처음 나오는 것이 겨요
두불 찧고 채로 까불면 나오는 것이 당가리다.
당가리는 거칠고 소화도 아니 되어 사람이 도저히 못 먹는 가루인지라 대체로
소 먹이로 사용했고 그다음 다시 찧고 채로 까불면 싸라기가 나오는데
흑세미는 바로 그 싸리기와 당가루 사이 쯤 되는 가루다.
이 흑세미 또한 억센 당 가루나 마찬가지여서 일반인들은 닭 먹이로 하였지만
먹을 것이 워낙 부족한 봄철이라서 사람들은 손으로 아름아름 짐작으로
골라내어서 그것을 무쇠 솥에 넣고 달달 뽁았다.
그런 후에 다시 찧어서 식용으로 사용했는데 거무틱틱한 것이
대체로 쌀눈이 떨어져 나온 것이라서 배탈 나기가 일수였다.
그날 봉구 할매가 디딜방아에 벼 찧는 주인 눈치를 살피면서
“아이구 아깝니더 흑세미는 지가 얻어도 될씻겨?” 하여 얻어온 것 이였다.
다들 겉 보리를 찧을때 당가리 다음에 나오는 보리가루로 만드는 개떡이
가장 궁핍한 사람들이 해먹는 음식으로 알고 있으나 실은 그 보리 개떡은
흑세미에 비하면 아주 맞있는 음식에 속할 정도이므로 춘궁기에 허기가져서
먹었던 음식 중에 가장 가난한 음식은 흑세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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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봉구네 쪼자리 땅 무너미골 보리밭에 보리가 익으려면
달포를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얼마 남지 않은 보리쌀을 아껴 먹으려니 자연 부엌에서 일하는 바래는
늘 허기가 졌다.
솥 바닥에 누러 붙은 마지막 보리밥을 숟가락으로 달달 끓어서
몇 숟가락 먹으려하면 먼저 밥을 먹기 시작한 봉구가 밥 한 그릇을
떡 개구리 파리 삼키듯 후딱 먹어 치운 후 무언가 모자란 듯이 하는 눈치에
바래는 늘 지 밥그릇을 봉구에게 주고 사랑방에서 할배 밥상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할배가 옥시기 그릇에
조금 남긴 보리밭을 찬물에 말아서 먹는 것이 전부였다.
봉구 할배도 익히 손녀딸이 자주 밥 굶는 것을 알고는 매끼마다 보리밥을
조금씩 남겼다.
그러던 아이가 덜컥 열병에 일어나지를 못하고 그저께부터는 열이 한참 올라가면
헛소리를 하였고 코피도 솥아 내자 덜컥 두 노인은 여간 걱정 되는 것이 아니였다.
이러다가 하나 밖에 없는 손녀딸을 잃는 것이 아닐까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읍내에서 쓰디쓴 금계락 알약을 사와서 바래에게 먹여도 당체 열이 내리지 아니하고
하루에도 몇 번 씩 높은 고열에 코피가 터지면서 급기야 혼절은 거듭하면서 바래는
야위어져 갔다.
미음 죽을 입안에 넣어줘도 먹은 후에는 곧바로 토하니 날이 갈수록 가는 바래 손목이 더욱 가늘어져 가고 누나가 저러니 소학교 일학년인 봉구도 하루 종일 그저 엉거주춤 안절부절 누나가 걱정스러웠다.
어느 날 윗마을 잔치 집에 올라가서 왠 종일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다가
떡을 한 조각 얻은 봉구가 당당 걸음으로 집으로 달려와서
“누나-아 떡 묵어라, 내 시루떡 얻어왔다!
희죽거리면서 누워 있는 바래에게 떡을 내밀자 멍하니 천정을 응시하고만 있던
바래가 힘없이 손을 가로 저으면서
“봉구야..시루떡은 나는 싫다..니 먹어라”
“묵어라 칼때 묵어라”
“나는 시루떡 보다 참꽃이 더 묵고 접다”
“참꽃?”
“그래 참꽃....참꽃이 먹고 싶다”
“참꽃 내가 따오까?”
“니 혼자 가지마라 산에 애촉 귀신 나온데이”
“..........” 애촉 귀신 이야기에 봉구는 흠질 했다.
긴긴 겨울밤 이미 아이들은 마을 큰 형들로 부터
“양철 영감 큰 둠벙에 물귀신”
“수박 골 버드나무 밑에 나오는 처녀귀신”
“작녁골 길섶에 있는 총각무덤의 몽달귀신”
“통시칸에 정낭귀신”
“학교 두 번째 변소에서 나오는 손목 잘린 귀신”
“불땅골 애촉 귀신” 오만 귀신 이야기를 다 들었지만 그중에 유독 참꽃 꺾으로 오는 아이들만 잡아먹는 다는 불땅골 애촉 귀신이 제일 두려웠다.
애촉은 어린아이 무덤을 말한다,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 못 먹고 죽은 어린아이 귀신이 배가 고파서 저승까지 못가고 구천을 엉엉 울면서 헤메다가 어른들은 힘이 세어
못 잡아먹고 힘없는 아이들만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애촉 귀신은 그런 아이들 무덤 주변에서만 출몰하는데 특징이 모든 귀신은 첫 닭이 울면 사라지지만 유독 애촉 귀신은 낮에도 나오는 알록달록한 귀신이란다.
아래 땅골에서 웃땅골을 지나 고개를 하나 넘으면 마을 공동묘지가 나오는데
그 공동묘지 건너편 야산이 불땅골이다.
불땅골은 산세가 마치 베를 짜는 베틀 지형이인데 여인들이 삼베를 짤 때에
화로 불을 삼베 바디 밑쪽에 피워 실을 건조해가면서 삼베를 짠 연유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소문에 봄이 오면 그 산에는 참꽃이 무진장 핀다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을 일찍 먹은 봉구는 아래 방에 축 늘어진 채로 반듯이 누워있는
바래 누나를 보고
“누나 나 참꽃 꺾으로 간데이 쪼매마 기다려”
하고는 동구 밖으로 달려가니 벌써 칠구, 동철이, 진환이,동탁이가 와 있었다.
어제 동무들에게 봉구가
아이들은 지금껏 같이 놀아도 봉구가 어디 먼저 가보자! 하는 일은 처음이라서
의아하게 생각 하였고 애촉 귀신 이야기에 겁이 났지만 참꽃이 많은 곳이라는
소리에는 모두들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라서 눈이 말똥 거렸다
이봄에 배 채울 수 있는 꽃이 있다는데 애촉 귀신이 무슨 문제인가?
“가보자!” 그래서 약속을 한 후에 오늘 느티나무 아래 모이기로 한 것이다.
조금 후에 만수도 오고 택상이도 오고 기철이도 왔다.
그런대 아이들은 기철이 뽈떼기에 붙은 쌀 밥풀떼기를 보고 눈이 동그라졌다.
늘 감자,칼국수,보리밥 같은 것을 먹는 가난한 기철이가 왼쪽 볼에 하얀 이밥
한 알을 붙이고 온것이다.
칠구가 침을 꿀걱 삼키면서
"야 기철아 너거 오늘 아침 이밥 묵었나?"
"그래"
"먼 손님 왔나?"
"안 왔다" 기철이 표정이 아무래도 이상타.
"야 이누마야 니 볼떼기에 붙이 쌀 밥풀은 너거 할배 옥시기 그릇에서 하나
떼같고 붙인거지?" 칠구가 말했다.
그랬다, 그당시 아이들은 볼떼기에 일부러 쌀 밥풀떼기를 슬쩍 붙여서 동무들을
만나로 나왔는데 그것은
"야 이누마들아 우리도 오늘 이밥 먹었데이!"
무언의 은근한 자랑이요 부자의 표상이였다.만수가 볼떼기에 쌀 밥풀을 붙이고
나타나는것은 이해가 되지만 기철이는 아무래도 의심쩍은 행동이다.
"야 이느마야 니 보리밥 먹고 이밥 먹은척 구라치만 되나?"
"구라 아이다 진짜 먹었다 카이"
동구밖에서 갑자기 기철이가 붙이고 나온 이밥 밥풀떼기 이야기로 시끄러웠지만
아침에 진짜로 기철이가 이밥을 먹었다카이 다들 부러운 눈치다.
아이들이 개울을 건너고 상여 집을 돌아서 이제 꽃이 다해서 바람에 우르르
눈발을 날리는 살구나무 집을 지나 웃땅골로 올라가면서 누군가
“나에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복숭아 꽃 살구꽃....하고 노래를 부르자
다들 따라 부르며 공동묘지 고개를 넘었다
아이들 노래는 그저 붓꽃, 제비꽃, 민들레꽃, 산 벚꽃이 피는 봄 골짜기로 간지럽게
타고 올라 머-얼리 아지랑이 타는 산까지 날러가고 있었다.
공동묘지 고개에는 조금 협소한데 여기저기 묘들이 다슬기처럼 옹기종기 붙어 있었고 그 사이를 걸어가는 아이들은 조금씩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앞서거니 뒷 서거니 하였는데 겁이나니 맨 뒤쪽은 아무도 안 서려고 하였다.
공동묘지 골을 빠져 나오자 저만치 불땅골 중봉이 보였는데 과연 불땅골에는
참꽃이 지천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야 참꽃봐래이!”
“산이 벌겉타! 아이구 저래 참꽃이 많이피나?”
“나는 저래 많은 참꽃은 처음 본데이...아이구 많테이!
아이들은 키 작은 조선 참솔 사이로 붉게 피어오르는 참꽃을 보고 탄성을 지르면서
달려들어서 한 움큼씩 참 꽃잎을 따서 입으로 쑤서 넣으면서 희죽 거렸다.
봉구는 윗도리로 입은 란닝구를 벗어서 모가지 구멍을 묶은 후에 열심이 참꽃을
따서 다른 아이들처럼 먹지 않고 담았다.
아랫방에 미음도 마다하고 그저 눈만 헹하니 뜨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바래 누나가 이 참꽃을 먹으면 금새 힘을 내어 일어 날것이라는 생각에
신나게 참꽃 잎을 따 모았다.
한참을 꽃잎을 따는데 느닷없이 칠구가
“애촉이다!”
하고 겁먹은 듯 소리를 질렀다.
일순 아이들은 모든 동작을 멈추고 칠구가 가르키는 곳을 응시했는데
과연 솔가지 몇 개를 걸쳐놓고 떼딴지(잔디) 흙으로 덮어놓은 애촉 묘가 있었고
그 위에 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지만 삐죽이 튀어나온 썩은 소나무 가지가
흉물스럽게 보였다.
“저기도 있다!”
“어디?”
“조 아래 소낭구 옆에 쪼매 큰거있제 ...고거도 애촉 묘 같데이.. 맞제?”
과연 소나무 아래는 또 다른 애촉 묘가 보였고 그 애촉 묘는 삭은 가마니가
일부 옆으로 삐죽이 보였다.
아이들은 모두 가슴이 콩당콩당 거렸고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알록달록한 애촉 귀신이 나올 것 같아 영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흠질 아이들이 뒤로 물러서는데 그때 또 제일 뒤에 있던 동탁이가 이번에는
낮은 목소리로
“야들아 업드려라! 빨리”
“왜글는데?”
“저어기- 대목재 고개를 봐라”
대목재 고개에 쪽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누구로?”
“애촉 귀신 아이가?”
“아이다 자슥아 껄베이(거지) 같다”
“아이다 문디 같다..팔이 이상하잖아 문디다”
“아이고 문디만 우리 빨리 도망 가야한데이”
그랬다, 육이오 이후 나병환자가 많았는데 그런 문둥이들이
“아이들 간을 세 개만 꺼내 먹으면 문등 병 다 낫 는다”
소문이 돌면서 산골 아이들은 문등이 들을 만나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대목제 고개를 넘어오는 문등이는 벌써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워지자
그만 겁을 참지 못하던 기철이가 후다닥 뛰면서
“빨리 도망가자-아”
소리치자 아이들은 마을 쪽으로 우르르 뛰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좁은 산길이라서 뛰기가 불편한 것보다 제일 앞쪽과 제일 꽁지가
자연히 있기 마련이라서 서로 꽁지 되지 않으려고 혀를 빼 물고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헉헉 쌕쌕 헉헉 쌕쌕”
“아이고 숨차다”
“헉헉 쌕쌕..하필 이때 문디가 나타나노 씨”
단숨에 공동묘지 골 고개를 넘어와서 윗 땅골 우물가에 다다라서야 이제 겁이
사라졌지만 목이 말라서 큰 노가지 나무 아래있는, 구름 뜬 우물에
우르르 머리를 처박고 꿀꺽 꿀꺽 시원한 물배를 채웠다.
한숨을 고른 후에 아이들은 지천으로 핀 불땅골 참꽃이 영영 아쉬웠고 놀라서
도망 치는 바람에 참꽃도 꺾어 오지도 못한 것이 영 알찌근한데
봉구가 제법 많은 참꽃을 란닝구 봉다리에 들고 있자
“ 우잉? 봉구는 참꽃 많이 땄네, 야 바보야 같이 농가(나누어)묵자!
“............안돤다” 흠질 놀라서 봉구가 뒷걸음치자 칠구가 봉구 참꽃 보따리를 핵 낚아채자 참꽃이 우물 위로 일부 흩으러 졌다.
“같이 농가 묵자 이자숙아!”
“......안돼 바래 누나 갖다 줄끼다”
“아 바보야” 동철이가 봉구 멱살을 잡으려하자 봉구가 후다닥 아래 땅골
저거 집으로 향해서 뛰기 시작했다.
“저누마 잡아라!” 아이들은 또 봉구를 따라서 뛰기 시작했다.
봉구 걸음은 뒤뚱거리지만 빠르다, 도망가는 봉구를 따라잡지 못하자 아이들은
“어이 봉구 불알 짝 불알!
하고는 단체로 고함을 질렀다.
또 한 차례 봄 돌개바람이 보리밭을 흔들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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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구가 헉헉거리면서 집으로 들어서자 이상하게 마당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봉구 가슴이 덜컹 했다.
옆집 감늠이 할매가 봉구를 보자 와락 부여잡고는
“아이고 봉구야 니는 어데갔다가 이제오노 어잉?,,
아이구 봉구야 봉구야
너거 누나 저래두고 어디 갔다오노 이일을 우짜노 이 일을 우짜노,
하시면서 울음을 터트렸고 침통한 얼굴을 한 봉구 할매는 바가지에 찬물을 떠서
바래누나 방으로 들어가고 할배는 사랑채 앞에서 그저 말없이 담배만 물고
땅이 꺼져라 함숨을 내 쉬었다.
곧이어 건너 마을에 사는 봉구 큰 고모가 마당으로 들어서더니만 대성통곡을 하시였다.
“바래야 아이고 바래야 니가 왜 그 카노 눈뜨거래이 바래야!
이날 이적까지 이밥 한 끼 제 되로 못 먹고 니가 어디가노 니가 어디가노
아이고 이느므 지지바야 할매 할배 두고 니만 가만 고만이라 어이?
봉구는 우야노
봉구야 너거 누나 우야노
저세상 갔뿌면 봉구는 우에 사노, 이놈의 지지바야 어서 눈뜨거래이
아이고 바래야 아이고 바래야 눈 뜨거래이 눈 뜨거래이
고모가 아래 방에 들어서면서 통곡을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도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고
갑자기 이런 상항에 당황스런 봉구도 그제야 바래 누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송아지 같은 큰 눈에 그저 닭똥 같은 눈물을 찔끔 떨어 뜨렸다.
바래 누나는 아랫방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그저 잠자듯 누워 있었다.
얼굴이 전에 보다 아주 하얗게 된 채로 명주실처럼 누워 있었다.
봉구는 그런 바래 누나를 보자 들고 있던 참꽃 봉 다리를 마당에 패댕이 치고
집 뒤 안으로 돌아가서 혼자 발로 땅을 푹푹 찼다.
봉구 할매는 손녀를 마지막으로 씻겨준 후에 그만 혼절을 하시어
“아이고 할매요 할매마져 왜긋니껴?
하면서 동네 아지매가 차디찬 우물물을 입에 물고 할매 얼굴에 훅훅 뿌렸다.
연이어 소식 듣고 뒤늦게 달려온 마을 아낙들도 이미 숨을 거둔 바래를 보고
또 한 차례
“바래야 착한 바래야 우째 니가 봉구 두고 눈을 깜노!
일나거라 일나거라! 바래야 지발 일나거래이! 하시면서 꺼이꺼이 울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그런 아낙들의 울음이 다 낡은 초가지붕 위로 바람을 타고 사라지자
봉구 할배가 가마니를 덮은 바래누나를 지게에 지고 불땅골로 오르고
마을 청년 몇몇이 삽자루를 들고 뒤를 따라갔다.
봉구가 지게를 부여잡고 질질 짜면서 뒤 따르자 당체 손자보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화를 낸 적이 봉구 할배는
"봉구야 왜 우노? 안그치나 엉?
니가 오늘 할배 생 목숨 끓는 꼴 볼라카나?
울기는 왜 우노! 따라 오지 말고 집에 가거라!"
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착 하디 착한 손녀딸 바래를 지게에 지고 불땅골을 넘어갔던 봉구 할배는
해가 서산에 떨어질 때 쯤 얼굴이 불콰하니 술에 대취해서 걸음을 잘 가누지 못하고
고개를 넘어오는데 자꾸 옆으로 픽 픽 쓸어지자 결국 마을 청년들의 등에 업혀서
땅골 마을로 돌아오시였다.
고향의 내친구 누이 이름은 붙들이다.
아래로 아들 둘을 잃고 그친구 부모가 개명을 한 까닭이다
"석아~놀다가라..."
앞개울에서 빨래를하던 붙들이 누이가 자기동생과 동무되어 놀다가라고
말을 붙이면...
"안뎌...소깔(풀)비야뎌..."하고 달아났는데!!!
그 맘씨곱고 장난끼많던 붙들이 누이도 오십줄이넘어
아주머니가 되었으리라!!!
어려서야 그러려니하고 지나쳤던 고향의 마을 이름도
이제금 생각하면 참 정겹게 다가온다.
노루목/너멍골/가루실/다락골...
.
.
.
아파트 옆 공터에 어느할머니가 보리를 심더니
엇그제 지나다보니 보리를베어 넡알을따서 널고있었다.
무심코 지나칠땐 화초로 가꾸나보다~했는데...
그할머니가 보리단을옆에끼고 낱알을 훌터 너는데 몰두하는모습을보며
문득 저 할머니는 지금 보리를 너는게 아니라 옛추억을 풀어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적 등하교길에는 고개를 몇개 넘어야했는데
그중에 한곳에 공동묘지가있고 고개중턱에 베개만한 "애장"들이 몇개있었습니다
그 봉긋한 애장옆 잔듸에서 다리쉬임을 하는곳인데
비가오면 애 울음소리가난다고 소문난곳이죠...
아이들은 맑은날에는 겁없이 지나다니지만 밤이나 비가오면 신작로로
돌아 다니는데 어느가랑비오던날 동무들과 무리지어 그 고개를 넘는데
갑자기 묘지쪽에서 "후루루루~"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다 돌아보니 좀 모자란 우핑(우평)이 아제가 소꼴을베다
낫자루를 입에대고 소리내어 놀린것입니다
"에이~씨발...."
우리는 욕을해대고 팔매질을 했습니다
농사철이 시작되면 어른들도 바쁘지만 덩달아 아이들도 바빠집니다
"너 어제 뭐하느라 안나왔어???"
전날 결석한 아이에게 담임선생님이 불러 물으면
"모쟁이 하느라 못나왔어요..."
"내일 학교 빠지래요..."
"왜???
"모심는다고 애기봐야해요..."
보리와 밀을 구워먹고...
감꽃과 아카시아꽃,진달래꽃이며 찔래순을 꺽어 주린배를 채우고
가재잡고 개구리잡아 삶아먹고 자라던 세대!!!
다람쥐와 족제비를잡아 운동화를 사는데 보태며 유년을보낸 그때가
불과 2~30년전의 시골에서 자란 우리들의 보편적인 모습인데...
그들이 아비와 어미가되어 자식을 키우며 살아가는지금...
그 자식들은 그때의 부모들의 정서와 추억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수 있을까!!!
캔터키 치킨과 피자와 햄버거에 길들여져
배고픔에 고통도 자연과 물질의 소중함도 모르는채...
너무나 편안하게,너무나 넘치게 키우고 살아가게하는것은 아닌지!!!
마치 우리세대가 살아온 그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심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