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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로, 국사 연구와 교육을 중시하였다. 기존의 왕과 영웅 중심의 전근대적인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사학을 내세웠다. 신채호와 박은식을 통해 정립된 민족사관은 일제에 의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주체적 역사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특히 역사관을 낭가사상과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았다.
신채호는 논설, 시, 소설 등에서 역사가 애국심의 원천이라고 주장했고 애국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역사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3대 영웅전을 썼고, 무력의 중요성을 주장했고, 영웅이 나와서 이 나라를 구하는 데에 적극적인 도움을 한다고 주장했다.
또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고 주장했다. 김부식의 사대적이고 중국 의존적 사관으로 인해 조선역사상에서 만주벌판이 역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보았으며, 묘청을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정신을 가진 정치가이자 승려로 생각했다. 또한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를 사대주의로 점철된 역사서로 강렬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관
신채호는 각 독립, 계몽운동에 대한 평을 남겼다. 갑신정변은 특수세력이 특수세력과 싸운 궁궐 내의 일시적 활극이며, 의병운동은 충군애국의 대의로 일어난 '독서계급'의 사상과 운동이며, 민중적 각성이 없어서 실패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신채호는 '안중근 열사의 폭력적 행동은 열렬했지만, 그 후면에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었다 며 비판하였다. '3.1 운동은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보였지만 폭력적 중심을 갖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독립운동가
무정부정의자(아나키스트)로 동방 아나키스트 연맹에 참여하였다. 또한 독립을 위해서는 ‘철저한 비타협적 투쟁과 민중 중심으로 민중을 혁명의 본영’으로 규정하고 테러와 폭력을 인정하였다.
연보
1880년 12월 8일 -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출생
1887년 - 할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로 이사하였다. 마을 서당 훈장인 할아버지에게 어린 시절부터 한문을 배웠다.
1888년 -《통감》을 해독하고 10세에 행시를 지었다.
1893년 - 사서삼경 독파. 시문에 뛰어남.
1895년 - 풍양 조씨와 성혼.
1897년 - 할아버지의 소개로 천안에 있는 학자이자 구한말 학부대신 신기선의 집에서 신·구 서적을 섭렵.
1898년 - 성균관 입교,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
1905년 - 성균관의 박사가 됨.
1907년 - 신민회 가입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1908년 - ‘독사신론(讀史新論)’ 발표.
1910년 - 칭다오로 망명했다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감.
1913년 - 신규식의 주선으로 상하이로 가서 박은식, 조소앙과 박달학원을 설립.
1915년 - 조선사 집필 시작.
1916년 - 소설 '꿈하늘'집필.
1919년 -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상하이로 가서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였으나 이승만의 미국 위임통치 노선에 반대하여 북경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군사통일주비회의 소집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2년 - 의열단의 행동강령 조선혁명선언을 기초 및 작성.
1927년 -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1928년 -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국제위폐 사건에 연루되어 타이완의 기륭항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여순감옥에 투옥. 죄수번호411
1930년 5월 - 대련 법정에서 유가증권위조 및 동행사, 치안유지법위반 혐의로 10년형을 선고 받음.
1936년 2월 21일 - 여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옥사.
1962년 -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됨.
2009년 3월 1일 - “왜놈이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스스로 무국적자가 된 지 97년 만에 가족등록부에 이름이 올라감으로써 국적을 회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