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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수선화님의 부탁으로 이 글을 씁니다.
오래 전의 기억이라 부분부분 사실관계가 조금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김명호와는 서울대학 이학년 때 수학과로 전공을 정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학부 일학년 때는 전공이 정해지지 않아서 단과대학별로 몇 반 몇 반 그렇게 구성돼있었다. 나는 S-5반이었는데 김명호는 아마 S-4 반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고등학교 동창들끼리 자주 모였을 것이고 삼차희망까지 희망학과를 적어내고 이학년 때 수학과로 모인 사람들은 25명 정도였다. 김명호는 수학과를 일차희망으로 적었을 것이다. 학기 초에는 다들 서먹서먹한 분위기였고, 과대표를 뽑았지만 어느 날 교련시간 후에야 처음으로 회식을 했다. 지금 노량진 전철역 건너편에 있던 튀김집이었는데 튀김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고, 나는 도심까지 나가지 않았지만 이차하러 많이들 명동으로 진출했다고 들었다. 김명호는 뭐랄까 그런게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이라 아마 명동진출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모여 있다가도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김명호가 조용히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서 노래가 끝날 때까지 들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야 들었다. 김명호가 좋아하던 노래를 나도 하나 아는데 가수 정태춘이 불렀던 "촛불"이다.
소리없이 어둠이 내리고
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오면
창가에 촛불 밝혀 두리라
외로움을 태우리라
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에
오늘도 잠 못 이뤄 지새우며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 밤이 다 가도록
사랑은 불빛 아래 흔들리며
내 마음 사로잡는데
차갑게 식지 않는 미련은
촛불처럼 타오르네
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에
오늘도 잠 못 이뤄 지새우며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 밤이 다 가도록
당시는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이라 걸핏하면 휴교에 휴강을 했는데 방학을 앞두고 학교가 휴교를 했다. 김명호와는 기하학개론을 함께 들었는데, 김명호는 집이 노량진이어서 방학도중 학교에 한 번 가보니까 수학과 게시판에 언제까지 기말리포트를 제출하라는 공고가 붙어있었다고 했다. 김명호는 그 공고를 보고 수학과의 고등학교 동창에게 연락했는데, 나는 집이 시골이라서 게시판에만 붙은 공고를 볼 수 없었다. 김명호까지 포함해서 서울에 살던 학생들은 몇 명이 공고를 보았거나 아니면 연락받아서 모두 리포트를 제출하고 A 학점을 받았고 나를 포함해서 집이 시골인 두 명은 그런 공고가 있던 것도 모르고 있다가 B 학점을 받았다. 수학과나 학교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학생들끼리도 서로 연락처를 잘 알지 못했다. 이제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도 재판했으면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당시에 내가 느꼈던 것은 휴교한 학교에 가보는 애도 있구나 하는 거였다.
이학년 가을부터 수학과 동기생들이 축구를 했는데 김명호도 열심히 축구를 했고 경기에 진지했다. 물론 우리들이 했던 것은 건물 사이의 조그만 공터에서 하는 동네축구였지만 운동에 관심 없던 나도 끼어서 수비를 맡았고 축구가 끝난 뒤에는 대개 개울건너편 관악산 초입에 있는 가게에서 오가피주를 마시거나 봉천동 중앙시장 근처의 달과 육펜스라는 생맥주 집으로 나갔다. 내가 아직도 달과 육펜스의 내용을 모르는걸로 봐서 수학과 동기중에 그 단편소설을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던 것 같다. 김명호는 뒷풀이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는데, 축구 이야기를 더 해보면 김명호는 수학과의 스타플레이어 수준까지는 안됐던 것 같다. 축구를 잘하던 다른 애들이 말하는 경기 평가를 들어보면 김명호는 축구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즐긴다는 거였다. 스포츠를 돈벌이나 편가르기 애국심과 결부시키지 않는 그런 종류의 진정한 축구팬이었던거다. 미국 유학시절에도 오하이오 주립대에서는 주말마다 유학생들이 모여서 축구를 했는데 김명호는 얼마 뒤 미시간대학으로 옮겨서 학위를 마쳤다. 미시간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축구가 유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명호는 유학시절에 결혼했고 나는 김명호 가족을 미시간에서 학생일 때 그리고 김명호가 졸업 후 위스컨신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찾아가보았다.
집합론을 서울대 이학년 가을학기에 들었는데 그 무렵부터 나와 김명호는 좋아하는 세부전공이 달랐다. 나는 지금도 수학기초론이나 수리논리학이 연관된 그 과목을 무척 좋아하는데 김명호는 그 과목을 신청하라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수학과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함께 들었던 것 같다. 그 과목이 졸업하려면 반드시 들어야 했던 필수과목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김명호는 당시부터 기하학적인 것을 많이 좋아했다고 생각나고, 나는 지금도 기하학을 잘 모른다. 여담이지만 현대수학은 기하학적 상상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고만고만한 논문은 쓸 수 있더라도 어떤 분야에서도 크게 성공할 수 없게 돼버렸다.
한데 나중에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결국 내가 하는 분야와 김명호가 하는 분야를 모두 연구한 독일 수학자 리만의 논문을 마주치게 된다. 현상금 백만불이 걸린 리만가설이라는 문제가 내 분야에는 있는데, 김명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나오는 리만기하학을 좋아해서 리만의 논문으로 제이외국어시험을 보게된다. 나는 당시에는 리만가설의 중요성을 알지 못해서 다른 독일 수학자의 논문으로 제이외국어시험을 보았다. 불어 독어 러시아어 중에서 두 개의 언어로 자기 전공분야의 책이나 논문을 읽고 내용을 구두로 설명하는 방식이었는데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김명호를 포함해서 불어와 독일어를 시험과목으로 선택했다. 나중에 김명호는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와 이론물리학에 대한 공동논문을 한 두 편 써서 발표한다. 아마도 성균관대학은 그 논문을 수학논문이 아니라며 연구업적으로 쳐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김명호의 홈페이지에 나온 자료를 한 번 봐야 정확하게 알겠다. 김명호가 먼저 리만의 기하학에 대한 논문을 읽고 리만기하학에 관한 내용을 문외한에게 아주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는데, 지금도 내가 가지고 있는 기하학과 리만에 대한 존경심은 거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 덕택에 리만의 논문 몇 줄을 읽어보기도 했는데 철학자를 연상케할 정도의 생각의 깊이에 감탄했고, 김명호와 함께 (리)만이형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얼마 전 도서출판 승산에서 리만가설에 대한 책을 두 권 발간하면서 그중 한 권에 대한 서평을 의뢰해서 서평에 김명호와 리만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적을까 생각한적도 있었다.
학부 삼학년 이후는 몇이서 술을 많이 마셨는데, 김명호는 술을 마신적이 별로 없었지만, 우리들은 그 무렵부터 술을 마시면 학교와 가까운 김명호의 집에 자주 찾아가서 김명호를 괴롭혔고 더러 자고 가기도 했다. 당시 고등학교를 다니던 김명호의 여동생들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밤 늦게 찾아왔던 우리를 맞아주신 김명호의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김명호는 투덜대면서도 항상 우리를 맞아주고 집 앞의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사다주기도 했다. 그 무렵에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도 있었고 그래서 서울 도심까지 나가는 일은 별로 없었다.
김명호가 미시간대학으로 옮긴 후 다시 만난 것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었다. 나는 서울올림픽 직후에 귀국했는데 김명호는 일이년 후에 귀국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 말기부터 그 당시까지 학계의 상황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데, 박정희 시절에는 군대를 가지 않은 사람은 3년간 외국유학을 가지 못했다. 군대간 사람들이 제대한 뒤에 동등한 시기에 유학가가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전두환이 그 제한을 풀어주어서 유학생 숫자가 많이 늘어났다. 또한 전두환은 대학생들의 과외를 금지했고, 대학입학정원을 늘려주는 대신 졸업생 숫자를 제한하는 졸업정원제를 만들었다. 여하튼 여러가지로 정책을 바꾸었는데 그 중 하나는 통행금지를 없앤 것이다. 대학입학정원을 늘려서 당장 많은 수의 대학교수가 새로 필요했는데, 당시에는 석사학위만 가지고 교수로 취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요즘과 달리 교수사회에 그런 시절이 존재했던 것이다. 자신의 선배교수가 학교에 교수자리 났다며 귀국하라고 국제전화 하니까 며칠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이삿짐싸서 귀국해버리는 유학생도 미국에서 본적이 있다. 나는 전두환 취임직후 유학을 일찍 가버려서 그런 길이 생겨난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당시에 눈 앞의 교수자리라는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제대로 공부하겠다며 학생신분으로 유학갔던 사람들은 사실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 분위기는 내가 귀국했을 무렵까지는 지속되었고 그때만해도 대부분 미리 사람을 정해놓고 교수로 채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김명호가 귀국했을 무렵부터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전두환 초기에 나간 많은 유학생들이 졸업하고 귀국하기 시작할 무렵이기 때문이다. 가끔 서울에서 김명호를 만나곤 했는데 당시 김명호는 서울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을 잠시 하고 성균관대학에 취직했다. 그 무렵의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는 김명호, 나, 후배 셋이서 숙대 앞의 호프집에 들어갔더니 (물 흐린다며) 나가달라고 했던 일이 있다. 결국 후배가 지배인에게 잘 말해서 구석진 곳에 잠시 있을 수 있었다.
침체된 조직에 의욕을 가진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기존 구성원들이 여러가지 반응을 보이는데, 대개의 연배있는 교수들은 이미 자신의 지위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그래 네가 잘한다며, 간섭하지 않을테니 우리는 절대 귀찮게 하지 말고, 네가 얼마나 잘났는지 한 번 볼테니 열심히 해봐라 하고 놓아둔다. 그렇게 해서 조직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김명호가 성대출신이었으면 아마 성대 수학과의 슈퍼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옜날 이야기에도 보면 아들이 부모의 이불 속에 들어가서 따뜻하게 데워놓는 것을 보고, 어떤 부모는 자기 아들이 효자라며 감동하는데, 또 다른 부모는 자기 아들이 불효자라며 때려서 내쫓는 것이 있다. 김명호가 성대에 간 이후 수학과 졸업생들이 서울대나 다른 학교 대학원에 입학하기 시작했다는 언론보도는 맞다. 김명호는 다른 대학의 석사과정에 진학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팀을 짜서 가르치기도 했다. 언젠가는 김명호의 부탁으로 국내 여러 대학원의 기출문제나 해외 대학원의 자격시험 문제를 구해서 준 적도 있다. 하지만 방금 적은 옜날 이야기와 똑같은 이유로 그것을 보는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다른 학교로 학생들을 보내면 해교행위가 되기도 하고 학생에게 추천서를 써줘서 유학보내면 매국교수도 된다니 말이다. 사실 김명호는 대학시절부터 사회의 부조리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하다 나오는 요정의 정인숙, 평양에서 온 황태성, 만주군관학교 파벌, 사상계의 장준하, 삼성의 사카린 밀수 그런 이야기를 듣고 김명호는 너희는 별걸 다 안다라고 말하곤 했고, 너희가 그렇게 사회 부조리에 관심 있다면 나서서 행동하지 않는건 왜 그러는거냐고 했다. 그런 것들을 포함한 사회 부조리에 대해 김명호가 관심갖게 된 것은 성대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나서 법원과 접해보면서부터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수학을 하지 않는, 대학시절 자주 어울리던 친구 하나가 말했던 것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부정부패에 영합을 해서라도 살아남아서 먼저 출세하고, 출세한 다음에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더러운 세상을 확 뜯어 고쳐놓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인간들은 출세한 뒤에도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직도 아니다 조그만 더 기다려보자 하면서 평생 그렇게 살다 죽는다는 것이다. 사실 그런 인간들은 가면 속 본모습이 가면보다 더 추악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박정희 정권 말기의 미국 대통령은 인권을 내세웠던 카터였는데 유학시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카터는 미국의 본질이 제국주의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상한 대통령이었다며 그래서 미국 대통령으로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라는 언급을 했다. 지난번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장을 추천하면서 변호사인 조순형 국회의원 이외의 어떤 판사도 헌법은 아예 읽지도 않았기 때문에 헌법을 위반했던 사건이 있었다. 김명호는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헌법에 적힌대로 양심과 법률에 따라서만 재판한다고 믿어줬기 때문에 대한민국에게 사기당했던 것이다.
첫댓글 담백하고도 간결한 문구에서 김교수의 학창시절을 엿보는거 같아 감회가 새롭네요. 미사여구없이도 소박하고,순수햇던 모습을 그려주시는 친구분으로 인해 교수님의 삶은 외롭지 않았을 꺼라 생각되네요....다음 편을 기대하며~
잔잔한 여운을 느끼게 하는 에세이 같습니다. 후속편 기대됩니다. 그런데........ 김교수님은 휴강한 학교에 왜 갔었을까요?
갑자기 어제 일처럼 미소를 짓게 되네요~그땐 풍족하진 않았지만, 모든 가족이 함께 있었는데....우르르 몰려왔던 오빠친구들,엄마는 즐거워했고,전 그때 초딩이지만 싫어 하진않았어요^---^ 언니도 역시~
토종 녹차를 마시는 듯한, 청량감이 넘치는 추억들 입니다. 한편으로는 부렵기도 하고 나 자신을 되 돌아 보는 듯한 아름다운 美談 인 듯 합니다~ 오월님 계속 건필 하여 주십시오? 자질 운운한 파렴치한 유림성대와 사법부의 음흉한 짓 들에 치가 떨립니다... 감사 드립니다.. 추가 글 계속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김교수에 대해서 알면 알 수록 빠져 드는 기분이 듭니다.다시 한번 더 감사드립니다.
읽을수록 한편의 산문 같군요^^ 젊은 시절의 김교수를 만났더라면 좋았을텐데....
네. 저도 자꾸 자꾸 다음 얘기가 궁금해 지는데 어쪄죠?? ^^;; 인간미 물씬 풍기는 소박하고 담담한 얘기가 그 시대상황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결국 이런 사연들이 알려져야 김명호교수님이 겪으신 시대의 일들과 분위기에 대한 상황이 석궁우발사건으로 연결된 이유를 알게 해 주는 것이니깐요. 감사합니다. ^^
성균관대학은 신설 자질없는 교수 양성학과나 교육부에서 인가 하여야 됩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다음글이 몹시 궁금해지는군요 // 가족 분께 부탁하나 해도 될른지.... 김교수님의 재판 투쟁에 관한 기록은 그의 홈페이지에 너무 넘치고 넘쳐서 제가 치어 죽게 생겼네요. 어쩔수없이 조국을 등지고 외국에서 생활하며 연구할 때의 그의 삶이 궁금하군요
그시절에 살진 않았지만,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기분입니다.학창시절때 김교수님의 순박하고,학문에 대한 열정이 보입니다. 자유로왔던 유학시절의 김교수와 토론하고 싶을 정도입니다...참! 신기한 점을 발견했어요.그당시에도 호프집에서 "외모"를 보았나요? 김교수 사진을 보았는데,물흐릴정도는 아닌거 같은데 ㅎㅎ
마지막 문장에 전적으로 동감, 또 동감입니다.
성균관대 김교수님과 같은 단과대학 모 교수는 딸을 십여년전 성대 부정입학을 시켜놓고도 잘만 교수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학부를 성대 나온 교숩니다. [인의예지] 웃기는 소리지요...
" 부정부패에 영합을 해서라도 살아남아서 먼저 출세하고, 출세한 다음에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더러운 세상을 확 뜯어 고쳐놓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인간들은 출세한 뒤에도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직도 아니다 조그만 더 기다려보자 하면서 평생 그렇게 살다 죽는다는 것이다" 이 대목,,,참 슬프네요. 인간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듯... 그러나 그것이 당연하다고 받아 들이면 절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도덕은 참 자유를 만들어야 하니깐요. 세상에 비굴하게 영합하면 결국 세상살이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겠나요? 오월의 기억님, 아름다운 글 감사합니다.^^
저도 이부분을 인용할려고 했는데... 출세한 다음에 뜯어 고쳐보겠다고 하지만 이미 겨묻고 똥묻고 해서 자격 상실 상태가 되지요. 스스로 자기가 더러워진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나서지 못하지요. 어떤 선배가 말하기를 처음 마음 먹은 것 미뤄두면 절대 하지 못한다고 학교에 건의할 것 있으면 깨끗할 때 하라고 하더군요.
누구나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그다음 남을 돌아보지요...그런점에서 교수님은 무모하리만큼(?) 순수하신거 같아요.사법부의 개혁은 누구나 생각하면서 아무도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투쟁한 사람이 없었은니까요..저역시 비겁한 사람중의 한사람입니다.....
제가 님의마음을 불편하고 거스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래도 님의 글이 감사합니다... 제가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