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근대라는 시대는 ‘인간의 시대’다. 적어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인간의 시대’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인간의 존귀함이 선언되고, 그 존귀한 존재인 인간이 모든 일의 목적이 되며, 또한 모든 일의 바탕이 되는 시대, 그리하여 어떠한 것도 인간과 결부된 한에서만 의미를 갖고,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데 기여하는데 따라 가치가 매겨지며, 인간을 위한 것임이 증명될 수 있다면 어떠한 것도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는 시대. 요컨대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일반명사로서 ‘인간’이 명명되고, 그것의 이름으로 모든 것의 가치가 근거지워지며, 그것을 통해서 모든 것이 행해지는 정당화되는 시대가 바로 근대다. 그런 점에서 근대란 ‘휴머니즘의 시대’기도 하다.
하지만 혹자는 이렇게 물을 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이 이렇지 않은 적이 언제 있었던가? 어째서 인간의 시대, 휴머니즘의 시대를 ‘근대’로 제한하려 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사례를 잘 알고 있다. 르네상스 이래 서양의 이른바 ‘휴머니스트’들이 자신의 기원으로 찾아냈던 그리스의 대철학자였던 그는 “노예란 말할 줄 아는 도구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 바 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만의 편협한 견해도 아니고, 고대 그리스만의 덜 깨인 생각만도 아니다. 실제로 그 시대에 노예는 인간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다. 더 시간이 지나 중세나 심지어 절대왕정 시대였던 17-8세기처럼 신분에 의해 사람들이 귀족과 평민, 농노나 천민으로 분류되던 시절(아직도 인도에서는!)에 천민이나 농노가 귀족이나 왕족과 ‘맞먹는’ 한 사람의 인격이요 인간이라는 생각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노예문제를 내걸고 남북으로 갈라 전쟁을 하던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도 흑인이 백인과 동일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카스트적 신분이나 인종차별 같은 현상이 비인간적이며 휴머니즘에 반(反)한다고 느끼는 우리에게 ‘인간의 시대’란 적어도 원칙상으로는 모든 사람이 ‘인간’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범주에 묶일 수 있는 시대다. 그것은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도록 사회·정치적으로 등가화(等價化)되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이런 등가화는 언제 발생했는가?
서양에서 통상 휴머니즘이 발생한 시대를 말할 때 르네상스 시대를 떠올린다. 아마도 ‘인간’이나 ‘휴머니즘’이라는 말들이 중요하게 부상한 시대라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 시대에 휴머니즘을 찾아서 저 ‘암흑의 시대’를 거슬러 고대 그리스를 발견했다. 그것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이 새로운 의미를 갖고 되살아난 시대임이 분명하다. 스스로 그 고대의 문명이 ‘재탄생re-naissance’한 시대로 간주하는 겸허함까지 갖추고 있던 시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때 말하는 ‘인간’이란 누구인가? 이미 말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도 인간이란 개념이 있었고, 인간을 척도로 삼던 ‘인간중심주의’(휴머니즘)가 있었지만, 노예를 인간으로 보지는 않았다. 확실히 이점에서 서양 근대문명의 개화기라는 르네상스 시대는, 등가화된 인간 개념이 출현한 시대라기보다는 ‘인간’이란 개념이 다른 것들 사이에서 강력하게 부상한 시대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서양 문명 내부에서도 사람들이 서로 등가화될 수 있는 존재란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아마도 적어도 원리상으로나마 사람들을 ‘인간’이란 이름으로 등가화했던 것은 홉스T. Hobbes였을 것이다. 그는 국가에 대한 이론을 구성하기 위해, 인간에서 출발한다. 그는 “인간이 나면서부터 평등하다”고 명시한다(?리바이어던?, 1부 13장).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에 대한 전쟁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그를 피하기 위해 계약에 의해 국가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입론은 일정한 변형을 거치면서 이른바 ‘사회계약론’이라는 이론의 형식으로 발전해간다. 하지만 신분을 넘어서, 최소한 법적 등가성을 명시화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였다(?인권선언?). 그때를 전후하여 인간은 모든 것의 기원이자 목적이라는 실질적인 중심에 자리잡게 된다.
역사의 선을 그리며 과거와 미래로 한없이 연장되었고, ‘문명화’의 배를 타고 이른바 ‘신대륙’으로 확장되었던 ‘인간’이란 개념은 사실은 근대에 이르러 서구에 나타난 형상을 시간·공간적으로 일반화하고 척도화하여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그 ‘인간’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 알 수 있는 자명한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의 신체 위에 드리워지면서 우리의 신체를 포개려 하는 특정한 모델이고, 그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인간’으로서 자격을 획득하고 유지하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요구하는 당위적 도덕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람들을 가르고 선별하며, 선별된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각이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경계선의 형식을 갖고 있다.
2.근대적 ‘인간’의 경계
‘인간’이란 개념은, 그 말을 들으면서 우리 각자 다른 단어를 떠올리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역사적 내용을 지울 수 없는 구체적 개념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확장되면서 일반화된 것이기에, 어느 시절에나 보편타당한 개념처럼 여겨지기 십상이다. 인간의 타고난 동등성에 대한 관념이 그러한 보편성에 대한 믿음에 확고한 기초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처럼 보편성의 형식을 취하는 인간이란 개념이야말로 근대에 이르러 나타났던 ‘인간’ 개념의 요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전에는 누구도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생각을 명시하지 못했다. 반면 홉스 이래 근대의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인간’에 보편적 형식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펼쳐갔다. 하지만 그러한 평등성의 관념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알다시피 시장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귀족이든 농민이든, 아니면 상인이든 장인이든,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갖고 있는 상품과 화폐로 사고 팔며, 교환은 등가성에 따라 이루어진다. 여기선 신분적 특권이나 열등함이 이익이나 손해로 이어지지 않는다. 교환하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계약이란 형식은 바로 시장에서 인간관계를 특징짓는 것이다. 사회나 국가 자체를 계약으로 설명하는 이론은 근대 사상의 발단에서부터 확장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이는 반대로 시장의 인간관계가 사회 전체로 확장되어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을 인간의 타고난 권리(자연권)로 규정하는 이러한 개념은 즉각 어떤 이율배반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이처럼 평등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욕구를 이루기 위해 행동한다면, 이들 욕구는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게 될 터인데, 그렇다면 대체 이들을 질서지우는 ‘사회’란 대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를 가장 먼저 극적인 방식으로 제시한 것은 홉스였다.
홉스는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평등하다”고 명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 사이에 발견되는 육체적인 힘이나 정신적인 능력의 차이는 크지 않다. 가령 직접적인 힘이 약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공모하여 가장 강한 사람조차 죽이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능력의 평등’에서 ‘희망의 평등’ 혹은 더 정확히는 욕구의 평등이 생긴다. 하지만 그 욕구가 원하는 것을 모두가 향유할 수 없는 한, 인간은 그것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불신하는 적이 된다(?리바이어던?). 따라서 이를 그대로 방치한 상태(자연상태)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한 적이요 늑대가 된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 대한 모든 사람의 잠재적인 전쟁상태를 뜻한다.
여기서 유명한 홉스의 질문이 제기된다. 즉 사정이 이러하다면, “대체 사회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홉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전쟁상태를 피하기 위해, 평화와 방어를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여 어떤 대표자에게 양도하는 계약을 맺는다. 그러한 양도의 결과 하나의 국가가 탄생하고, 그것이 사회를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홉스는 국가란 “하나의 인격으로 통일된 다수”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발상은 형태를 달리하지만 이후 로크나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반복하여 나타난다.
여기서 홉스가 제시한 질문은, 혹은 적어도 그것이 담고 있는 근대 사회의 근본적인 이율배반은, ‘인간의 동등성’이란 관념을 가정하는 한 근대 사상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그처럼 평등하고 인간의 모든 욕구가 그처럼 동등하다면, 그 욕구의 상충과 대립, 경쟁과 적대는 논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 서구 근대 사상 전반을 특징짓는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연관해 스미스A. Smith와 칸트I. Kant, 벤섬J. Bentham은 홉스와 더불어 근대적 인간상을 특징짓는 고유한 극점을 보여준다.
먼저 스미스는 그에 대해 “그냥 내버려 두라Laissez faire!”라고 대답한다. 시장에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과잉과 결여를 치유하면서 균형과 질서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시장 그 자체가 욕구와 생산을 조절하는 기능을 갖고 있으며, 여기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오히려 그 질서를 교란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홉스나 계약론에서 말하는 국가적 모델 대신에 시장 그 자체를 사회의 모델로 설정하고 있는 셈이고, 계약에 의한 권리의 양도와 대의/대표라는 정치적 모델 대신에 가치법칙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의 경제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들이 가치법칙에 따라 계산하면서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하며 행동한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인간을 ‘공리적(功利的) 인간’이라고 부른다.
한편 칸트는 시장보다는 법정의 모델을 제안한다. 그는 먼저 도덕적 선(善)이 법을 기초한다는 고전적인 관념을 뒤집는다. 즉 선하기에 법이 되는 게 아니라 법이기에 선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실천적 삶을 규제하는 이성(실천이성)은 “너의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적 입법원칙이 되도록 행동하라”고 요구한다. 그것이 바로 선한 행동이고 도덕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해야 한다, 고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슬로건이었다. 개인의 상이한 욕구에 대한 법 내지 도덕법칙의 절대적 우위를 통해서, 시장에서의 평등성은 법 앞에서의 평등성으로 대체된다. 따라서 홉스처럼 인간의 동등성은 무질서를 뜻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법 앞에서의 동등성이기에, 인간의 동등성은 질서를 뜻할 뿐이다. 그리고 그 법이 인간 자신이 주체가 되어 만든 것인 한(이는 계약론과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 법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다. 즉 그것은 강제에 따른 속박이 아니라 자신의 의미에 따른 행위요 자유를 뜻한다. 법정의 모델와 주체화.
반면 최대행복의 추구를 개인적 행동의 원리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사회적 통치의 원리로 선언하는 공리주의자 벤섬은 감옥의 모델을 제안한다. 그는 사람들이 항상 공리성의 원리에 따라 산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대개는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공리성)를 얻어야 하는 사회적 통치는 이러한 원리에 따라 확고하게 조직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원형감시장치’panopticon은 이러한 공리주의적 세계의 유토피아다. 원형으로 배열된 감방들, 뒤에서 빛이 비추게 함으로써 수인(囚人)들의 행동을 최대한 눈에 잘 보이게 배려한 감방, 그리고 한 눈에 모든 감방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만든, 하지만 감방에서는 감시자가 보이지 않게 만든 감시탑으로 구성되는 건축적이고 기하학적 장치가 그것이다.
이 장치는 ‘보되 보이지 않는 감시자’를 통해 수인 스스로 자기감시하게 하는 장치다. 즉 감시자가 보이지 않기에 감시자가 있든 없든 언제나 감시당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게 만드는 장치다. 이는 확실히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감시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임에 틀림없다. 감옥을 모델로 하고 있는 이러한 장치를 벤섬은 공장이나 병원, 학교는 물론 사회의 모든 영역에 도입할 것을 꿈꾸었다. 심지어 정부의 행정기관도 수상 한 사람이 모든 관리들을 감시할 수 있는 이 장치를 통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칸트처럼 개개인이 입법원리를 자신의 ‘의지의 준칙’으로 삼아 행동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미 자유와 동등성을 확보한 개인이 자의적으로 하는 행동이, 적어도 사회적 수준에서 행복의 총량을 감소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보이지 않는 눈’을 통해 언제나 스스로를 감시하는 그런 체제를 꿈꾸었던 것이다.
요컨대 시장에서 기원하는 인간의 자유와 동등성이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보편화되기 위해선, “대체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가?”하는 질문으로 요약되는 근대사회의 이율배반을 해결해야 했다. 홉스와 스미스, 칸트와 벤섬은 이를 해결하여 인간 위에 군림하는 어떤 특별한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인간들 사이에 ‘평화’와 ‘질서’가 가능해지는 방법에 대한 모델을 제시했다. 권리의 양도 계약에 의해 대표/대의체제를 만들고 그에 복종하는 인간(홉스), 가치법칙에 따라 최대 이익을 추구하는 공리적 인간(스미스), 입법자이면서 입법원칙에 따라 의무 준수의 자유를 행사하는 입법자-주체(칸트), 그리고 감시자를 대신하여 자신의 신체와 행동을 감시하는 인간(벤섬). 그들 중 누구도 이러한 제한과 규정이 없다면,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 보편적인 존재로서 ‘인간’이란 전쟁상태나 무정부상태, 무질서를 뜻할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네 가지 극(極)은 국가와 시장, 법과 감옥을 모델로 탄생한 것이다. 그런 만큼 대의적 관념(혹은 국가주의), 가치법칙, 법과 의무, 자기감시를 각각 자신의 짝으로 하고 있는 규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것은 사실상 ‘인간’이라는 개념이 보편적인 것이 되기 위해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갖추어야 할 요건이다. 이는 아무리 역사와 공간을 넘어서 탈역사화되고 확장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지워지지 않을 근대의 흔적일 것이다. 우리 자신의 삶, 우리 자신의 신체에 항상-이미 새겨져 있는 흔적, 그리하여 의식하든 말든 우리의 삶을 어느새 규정하고 있는 흔적.
그렇다면 이제 인간중심주의Humanism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 그것은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한 ‘인간’의 보편성을 확인하려는 태도요, 그것을 사람들의 활동이나 가치평가의 확고한 중심으로 수립하려는 태도고, 바로 그 ‘인간’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한에서 어떤 것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척도로 간주하는 태도다. 또 그것은 근대적 사회, 근대적 질서를 위해 요청되는 인간의 요건을 보편적인 가치척도로 만들어 인간 활동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태도다. 따라서 그것은 보편성의 형식을 취하는 저 ‘인간’이란 개념으로 하여금 모든 인간들 사이에 중심이 되게 만들려는 의지의 표현이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삶을 그 ‘인간’이란 모델을 통해 동일화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3.‘인간’을 넘어서
알다시피 우리 자신이 사는 이 근대라는 시대를 넘고자했던 시도들이 있었다.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귀속되지 않는 지대를 포착하고, 그것을 통해 근대인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던, 혹은 거기서 벗어나는 선(탈주선)을 그으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이는 때론 이런저런 운동으로 표현되기도 했고, 때론 이런저런 삶의 방식을 만들기도 했으며, 때론 새로운 사유를 촉발하는 철학이나 예술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런 노력이 명확하게 하나의 문턱을 넘어간 경우로 맑스, 니체, 카프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인간’을 넘어서기 위해 어떻게 했으며 어디로 갔는가?
맑스가 초기부터 모든 종류의 ‘보편성’이란 형식과 투쟁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헤겔에 대한 비판, 특히 모든 국가적·법적 형식에 보편성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했던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열과 적대가 지배하는 세계를 본 청년 맑스가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던 과제였다. 그가 보기에 국가가 가족이나 시민사회, 혹은 개인에 대해 행사하는 힘의 ‘외적 필연성’이란, 개별적인 ‘법률’이나 ‘이익’이 국가의 ‘법률’과 ‘이익’에 충돌하는 경우 후자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국가가 취하는 보편성의 형식은 억지로 꾸민 가상적 동일성을 표시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다(?헤겔 국법론 비판?). 이런 점에서 그는 계약과 합의에 따른 양도와 대의(代議)의 모델 밑에서, 시민이란 이름조차 근본적인 대립과 충돌로 균열되어 있다는 것을 본다. ‘인간’이란 이름은, 아직 ‘휴머니즘’을 탈각하지 못한 시기의 그가 보기에도, 이런 분열과 대립을 은폐하고 보편성의 형식에 따라 특정한 인간에게 다른 인간들이 복종하게 만드는 허구적 개념이다. “근대 국가 자체가 현실적 인간으로부터 추상되어 있거나, 혹은 인간 전체를 단지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방식으로 만족시키고 있”다는 것이다(?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보편적 ‘인간’ 개념이 갖는 허구성은, 현실적 인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로 나아간다. 알다시피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제시되고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충분히 부연되는 인간에 대한 정의는 이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들의 집합emsemble이다.” 이 정의가 갖는 의미는 ?임노동과 자본?에 나오는 다음 문장이 잘 보여준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 요컨대 인간이란 어떤 생물학적 종이 갖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이 아니라, 같은 생물학적 개체나 심지어 동일인조차 다른 존재가 되게 만드는 ‘특정한 관계’의 집합이란 것이다. 같은 사람도 그가 속한 관계에 따라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이 파격적인 정의는 ‘인간’이란 이름에 부여된 모든 종류의 보편적 환상과 초역사적 일반성을 깨고, 역사 자체로, 사회 관계 자체로 우리를 돌려보낸다. 이로써 ‘인간’이란 모든 것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초월적 척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따라 변환되는 어떤 결과물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문제는 사회적 관계의 문제고, 사회적 관계의 변혁을 통해 주어진 ‘인간’을 넘어서는 문제다. 그것은 그 ‘보편적’ 형식이 근대적 사회관계,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는 것이고, 그 관계를 전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보편성의 형식을 취하는 근대적 인간을 넘어서는 것이고,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맑스가 보기에 인간의 문제란 오직 혁명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혁명을 통해 인간이 자동적으로 바뀐다는 안이한 생각을 뜻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규정하는 다양한 관계의 집합이 단순히 생산관계로 환원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역으로 맑스는 코뮨주의 혁명을 하기 위해선 “전면적인 인간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독일 이데올로기?). 가치법칙에 따라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자기 이익의 극대화만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 대표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고 그를 바라보며 그에 복종하는 인간, 법은 자신이 만든 것이니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고 믿고 사는 인간, 어디선가 나를 감시하고 있을 시선을 항상 의식하며 사는 인간, 대중들이 이런 인간에 멈추어 있는 한, 혁명이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니체는 인간과, 휴머니즘과 직접 대결한다. 지구나 우주의 중심에 인간이 있으며, 그것들은 바로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발상은 그가 보기엔 가소로운 것이다. 그것은 숲 속의 개미가, 자신이 숲의 중심이며, 숲의 존재목적이라고 여기는 것과 동일한, 어이없는 아집이자 자만심의 표시일 뿐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런 인간이 자연에서 분리되어, 자신의 잣대를 자연에 들이댔던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 시기는 인간을 발견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질서를 세우려던 시기였다(?권력의지?). 거기서 인간은 자연과 마주설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주체로 탄생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하나의 대상으로 객관화되기 시작한다.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가”를 물었던 칸트의 질문은 객관적인 대상이자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선험적 주관)로서 인간이 세계의 보편적 척도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이란 사실 이미 법적 형식 아래 고착된, 다만 그에 반작용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고, ‘금지’라는 법적 형식의 부정적 권력의지 아래 무력화되어 버린 존재다. 위반의 대가를 가르치고 기억시키는 형벌에 의해, 혹은 스스로 억제하고 자신의 욕망과 생각을 억누르는 법을 가르치는 노동에 의해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능력을 상실한 존재다. 사회적 안전을 보장하는 습속의 도덕에 길들여진 존재, 자신의 능력과 의지를 어떤 대표자에게 양도함으로써 스스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그 대표자의 뜻에 따르는 존재, 바로 이런 존재가 우리가 말하는 ‘인간’이다.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근대에 이르러 선언된 인간의 승리란 바로 이런 인간의 승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근대인들을 일러 ‘가축떼’라고 부른다. 채찍과 형벌이 보장하는 명령에 중력을 견디는 낙타의 정신으로 충실히 따르고, 어디선가 짖기 시작하면 이유도 모른 채 따라 짖으며, 새로운 길을 찾아가길 포기한 고개 숙인 존재. 이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세상 모든 일의 척도로 숭배되는 우상.
그리고 그 반대편에 또 다른 우상들이 있다. 국가주의, 혹은 우상이 된 국가, 그것은 신을 대신하여 숭배되는 새로운 신이고, 근대에 나타난 허무주의의 징표다.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음독자가 되는 곳,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자기자신을 잃어버리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 국가가 끝나는 곳에서,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락이 시작된다.
그래서 니체는 혁명을 말하는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이 가축떼 같은 인간들로 대체 어떻게 혁명이 가능하단 말인가! 니체가 보기에 혁명이란 그런 인간을 넘어서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통상 ‘초인’이라고 번역되는 ‘Ubermensch'는 ’인간‘ 이후 도래할 어떤 새로운 종(種)의 이름(명사)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뜻하는 하나의 동사(uberwinden)고, 그 동사로 표시되는 실천철학적 요구다. 거기 내포된 인간은 국가와 법, 감옥, 화폐에 의해 길들여진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하는 새로운 가치와 삶의 방식을 통해 자신을 길들이는 인간이다. 거기에 내포된 삶의 방식은 주어진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반동적으로 반응하면서 사는 부정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능동적으로 생산하는 긍정적인 삶의 방식이다. 그런 방식으로 사는 것, 그런 삶을 통해 자신의 신체와 자신의 생각, 자신의 감각과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까지 끊임없이 변이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니체가 인간을 넘으라고 말하면서 요구하는 것이다.
카프카가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은 법과 관료제, 그리고 그러한 것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이를 통해 카프카는 권력이 무엇보다도 우선 욕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성?에서 K가 묵게 된 여관의 여주인은 ‘성’의 권력자 클람이 준 기념물을 평생 간직하고 산다. “클람이 신호를 보냈을 때, 내가 클람에게 달려가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남편이 어디 있겠어요?” 면장의 아내는 자신에게 보낸 것도 아닌 클람의 편지에 도취되어 “꿈을 꾸는 듯한 모습으로 클람의 편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소송?에서 K를 유혹하던 정리(廷吏)의 아내는 예심판사와 학생의 욕을 하지만, 자신을 부르러 온 학생이 나타나자 그의 얼굴을 어루어만지며 “예심판사님이 부르셨어요. 나는 당신과 함께 가지 못하겠어요”하며 그에 안겨 간다.
이런 식으로 카프카는 권력에서 욕망을 보고, 욕망에서 권력을 본다. 지배와 억압이 지배자와 억압자보다는 피지배자, 피억압자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바로 이 때문이다. 가령 ?성?에서 관리 소르티니의 ‘비열한 유혹’을 거절한 아말리아의 가족은, 그 소문을 듣고 그 가족과 모든 것을 끊어버리는 이웃들에 의해 파멸한다. 아말리아의 아버지는 무언지도 모르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이후 관리들을 찾아다니며 소명하지만, 관리들도 무슨 죄인지도 모르는 죄를 용서할 순 없었다. 관리보다 더 가혹하고 관리보다 더 비열한 대중 자신의 단죄와 처벌. 변호사 앞에서 K를 비난하는 ?소송?의 또 다른 피고인 블로크는 변호사의 의뢰인이 아니라 “변호사의 개”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초월적 형식, 보편성의 형식을 취하는 법 또한 하나의 욕망이며, 국가적 권력 역시 하나의 욕망임을 보게 해준다. 칸트가 법의 밑(기초, 근거)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법이 바로 선의 기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카프카는 법의 밑바닥에 욕망이 있으며, 법전에는 포르노 사진이 있고, 법정에선 강간 내지 간통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법이 하나의 욕망일 뿐이라면, 다른 욕망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그러한 충돌이 바로 ‘소송Prozeß’이다(법으로부터의 이탈과 충돌이 없다면 소송은 있을 수 없다!). 또한 그런 만큼 최종적 ‘해결’은 없다. 최종심급은 무한히 연기된다. 따라서 카프카는 소송 가운데서 욕망의 끊임없는 변용과 변화만을 본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보편성의 형식 아래 정의된 ‘인간’이란 개념 또한, 경계선을 가변화하는 끝없는 소송/과정을 통해서 무한한 가변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카프카는 출구가 없어 보이는 이런 세계에서 출구를 찾는다. “저는 자유를 원했던 게 아닙니다. 저는 다만 하나의 출구만을 원했습니다.”(?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하지만 종종 ‘구원’이라는 단어로 표시되는 그 출구는, 우리를 에워싼 벽들 사이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곳 바로 거기라고 그는 말한다. 벤야민 말대로 카프카의 세계가 하나의 극장이라면, 그리고 그에게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무대에 서 있는 존재요,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자신을 연기하는 능력일 뿐이라면(?프란츠 카프카?), 우리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로 그 구원의 장소일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연기(演技)를 통해, 자신은 다른 것이 되고, 이로써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서 언네자 벗어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방, 사무실, 복도, 도로, 광장 등에서 막다른 골목을 보는 것만큼이나, 그 모든 곳에 출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보편적 형식의 ‘인간’이 사실은 끊임없이 가변화되는 상이한 욕망의 양상들을 묶는 끈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새로운 삶을 시도하고 새로운 동작을 시도하는 순간 어느새 풀려버리는 허술한 끈인 셈이다. 그래서 카프카는 ‘인간’이란 이름에 별 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미 그 안에서 항상-이미 넘어서고 있는 것이라면, ‘인간’이란 이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대체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4.근대적 ‘인간’의 외부
이미 오래 전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했다. ‘신’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의 척도가 되는 초월적인 어떤 것, 가변적인 것들로 가득한 한심한 현실을 떠난 피안의 불변적이고 영원한 어떤 것, 그리하여 이 피곤한 세계를 사는 우리가 의당 도달하기를 꿈꾸며 절하고 숭배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어떤 초월적인 신일 수도,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세계일 수도, 혹은 철학자들이 발하는 불변의 영원한 실체일 수도, 혹은 형이상학이 모든 것의 기초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확고부동한 ‘근거’일 수도 있다.
인간중심주의(휴머니즘)은 인간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가치의 척도며 ‘만물의 영장’이고 만물의 중심에 있는 존재라고 선언한다. 그에 따라 휴머니즘의 시대인 근대에 ‘인간’은 신이 죽은 이후 신의 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우상, 새로운 신이 되었다. 따라서 푸코M. Foucault는 적어도 근대 이후의 우리에게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이란 다름 아닌 ‘인간의 죽음’을 뜻한다고 말한다(?말과 사물?). 니체가 말한 ‘초인’이 인간을 넘어섬을 뜻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 말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이 어떤 생물학적 종의 이름이 아니며, 우리가 그 말을 듣고 떠올리는 어떤 모호한 표상도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보았다. 그것은 국가와 시장, 법, 감옥을 꼭지점으로 하는 사변형의 경계를 갖고 있으며, 보편성의 형식으로 작동하는 사회·역사적 구성물이다. 그런데 인간이 근대의 ‘신’이라는 차지했다고 한다면, 인간의 경계를 구성하는 네 개의 꼭지점 또한 그에 상응하는 나름의 신들을 갖고 있다. 개별적인 욕망의 상충으로 인한 전쟁상태를 피하기 위해 전권을 위임받은 (근대)국가가 새로운 초월적 존재, 새로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굳이 홉스를 읽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 가치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화폐가 모든 사람들의 열광적인 숭배 대상이 되었으며, 그들의 모든 활동을 평가하는 초월적 척도가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근대에 이르러 나타난, 공리적이고 보편적인 형식을 극단화한 법이 또 다른 초월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도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감옥에서 탄생한 새로운 신을 위해서만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정상성’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개인’, 혹은 개인들을 자유롭게 방치해도 별 탈이 없을 조건으로서 ‘정상성’이라는 형식 자체일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 그것은 정상적인 신체를 갖고, 정상적인 ‘욕망’에 따라, 정상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가령 과도한 성욕을 가진 사람, 변태적인 성욕을 가진 사람, 남의 일에 과도한 관심을 가진 사람, 외도를 즐기는 사람, 어떤 한 가지 일에 미친 듯 몰두하는 사람, 돈버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 탈주범을 숨겨주는 사람, 남들의 생활에 걸핏하면 참견하는 사람 등은 모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신이, 혹은 자신과 만나는 사람이 이런 사람은 아닌지 끊임없이 관찰하는 시선, 그것이 바로 감시자의 시선을 대신하는 자신의 시선이다. 보되 보이지 않는 시선의 권력이 ‘정상성’이란 형식을 만들며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자유를 만끽하려는 ‘자아’와 상관적이다. 남에게 자신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침해받지 않기 위해, 또한 남들의 그것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서로 간의 사이에 높은 벽을 쌓는 근대적 개인이 그것이다. 일찍이 엘리아스는 근대 문명Zivilization이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간에 이런 벽을 쌓아왔다는 것을 세밀하게 지적한 바 있다(?문명화과정?). ‘정상성’이란 자유롭게 움직여도 남의 신체에 닿지 않는, 나를 항상-이미 둘러싸고 있는 그 경계, 그 벽들의 다른 이름이다. 절대화된 프라이버시, 절대화된 개인의 삶, 그것은 근대에 이르러 새로이 숭배의 대상이 된 또 하나의 우상인 셈이다.
따라서 ‘인간’을 넘어선 새로운 인간은 이러한 경계를 통해 정의되는 근대적 인간의 형상을 넘어서는 것, 그 경계선에 갇힌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통해 정의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해야 한다, 고로 할 수 있다”는 칸트 식의 행동준칙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행동과 실천을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법적 형식, 의무의 형식에서 벗어나 실천이나 행동을 산출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근대적 허구 아래, 자신에 복종하는 환상이 덧씌워진 의무의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욕망의 배치를 만드는 것이다. 단순화하면, “하고 싶다, 고로 할 수 있다”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 새로운 욕망의 배치.
하지만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홉스적 전쟁상태로 되돌아가게 되진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몽상적 이상가의 순진한 무정부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전쟁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국가를 정당화하는 홉스의 논리에는 이미 원자화된 개인, 오직 자기 눈 앞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개인, 그것을 위해 어떤 상대와도 경쟁하고 대립하는 근대적 개인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개인이 시장이라는 ‘특정한 관계’의 산물이며, 그 관계가 만들어내는 특정한 욕망의 표현임을 알고 있다. 폴라니K. Polanyi나 많은 인류학자들은 인간의 역사에서 살벌한 경쟁으로 특징지어지는 그런 인간관계가 매우 짧고 제한된 역사만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 그것은 시장 가운데서도 가치법칙이 지배하는 시장, 가격기제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시장이 만들어낸 욕망의 배치다.
폴라니는 호혜성과 쌍대성이라는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다양한 교환의 형태들을 보여준 바 있다(가령 ?인간의 경제?; ?거대한 변환? 등). 생의 말년에 푸코는 근대적 인간을 만들어내는 권력의 ‘외부’를 사유하기 위해 그리스 문헌을 뒤져 새로운 욕망, 새로운 권력의 배치를 찾아낸 바 있다. ‘자기에 대한 배려’만으론 ‘왕따’가 되고 나쁜 놈이 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되기에 사실은 결코 ‘자기에 대한 배려’가 되지 못하는 권력관계를 거기서 발견한다. 거기서 그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통해서만 타인들의 인정을 받기에, ‘타인에 대한 배려’를 통해서만 ‘자기에 대한 배려’가 가능해지는 새로운 권력의 배치를 본다(?성의 역사 2: 자기에의 배려?). 그것은 홉스가 생각한 욕망의 배치--권력의 배치기도 한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욕망의 배치가 가능하며, 실제로 역사적으로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감시자의 시선을 스스로 대신하는 종류의 배치를 넘어서는 지점과 연결되어 있다. 혹자는 그래도 감시의 시선이 통과하지 않는 ‘프라이버시’의 중요성에 대해 말할 지도 모른다.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한, 그리고 적당한 노동, 적당한 매너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한,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든” 방안에서 하루종일 TV를 보든 무슨 상관이랴! 그러나 푸코는 이미 성욕을 히스테리화하고 자위를 교육대상화하며 섹스를 병리학의 대상으로 다루는 방식으로, 가장 내밀한 침실 안에서조차 ‘정상성’의 형식을 만들면서 작동하는 권력의 존재를 드러내 보여준 바 있다(성의 역사 1: 앎의 의지?). 건강한 정신, 건강한 신체를 생산하기 위해 우리는 침실 안에서조차 자신의 신체를 의사의 시선으로 본다. 따라서 자기감시의 배치란 사실은 ‘정상성’이라는 영역 안에 개인의 욕망을 가두고 통제하는 배치며, ‘프라이버시’나 ‘내밀성’은 그 배치의 일부일 뿐이다.
반면 타인에 대한 배려를 통해 자기를 배려하는 욕망의 배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또 그러한 배려의 시선으로 타인을, 또한 자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의 배치가 가능하리라고 상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은 자신의 건강, 자신의 정상성에 대한 집착 속에서 스스로 자기감시의 체제 안에 포섭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삶, 다른 종류의 배치가 가능하리란 것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자율주의autonomia'는 단지 외적 강제에 의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활동한다는, 자기감시와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이는 어떤 행동의 방식이라기보다는, 다른 종류의 인간 관계, 다른 종류의 욕망의 배치를 내포하는 하나의 중요한 사례라고 할 것이다.
다른 한편 가치법칙과 화폐의 문제는 근대적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기 위한 또 다른 중요한 조건이다. 가치법칙이란 모든 것이 화폐화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이 근대 세계의 ‘법칙’이다. 뒤집어 말하면 화폐화되지 못하는 것, 가치화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결국 사라지게 된다. 돈이 되지 않으면 생산하지 않으며, 돈이 되지 않으면 멀쩡한 곡물도 바다 속에 처박아 버린다. 모든 생산의 흐름은 더 많은 돈이 벌리는 것으로 몰려간다. 사과는 상품성이 좋은 ‘후지’로 점점 단일화되고 있으며, 벼나 옥수수도 소출량이 많은 것으로 단일화되어 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노동을 해야 한다. 노동이란 ‘자본에 의해 구매되는 활동’, 쉽게 말해 ‘돈이 되는 일’이다. 혹시 돈이 되지 않을 일만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공부든, 창작이든, 혹은 무언가를 두드려 만들어내는 ‘공작(工作)’이든, “쓸데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돈이 되지 않는 활동, 가령 가사노동이나 음악을 듣는 것은 노동이 아니다. 즉 ‘가치 없는’ 활동이다. 자신을 가치화하는데 능숙한 사람은 유능한 사람이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능한 사람이 되었다가, ‘인간’의 경계에서 벗어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또한 가치법칙은 모든 교환을 등가성에 의해 정의한다. 즉 동등한 가치를 갖는 상품 간에만 교환이 성립한다. 이는 모든 교환되는 것에 대해 “얼마짜리인가?”를 보게 만든다. 맑스는 이로 인해 모든 것이 냉혹한 계산의 찬물 속에 들어가게 된다고 묘사한 바 있다. 이젠 선물도 의무가 되고 계산의 대상이 된다. ‘나는 당신에게 선물을 했는데, 왜 당신은 나에게 선물을 하지 않지?(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군!)’ 혹은 ‘나는 5만원짜리 선물을 했는데, 너는 고작 1만원짜리 선물을 해?(이런 괘씸한!)’
확실히 ‘타인을 위한 활동’이나 ‘타자에 대한 배려’는 가치법칙을 넘어서지 못하고선 불가능하다. 가치법칙은 타인을 위한 활동조차 등가적 내지 준-등가적 가치를 갖는 무언가로 돌려 받고 싶다는 욕망을 자동적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확실히 “하고 싶다, 고로 할 수 있다”라는 명제는 가치법칙을 넘어서지 못하고선 무의미하다. 가치법칙은 ‘타인에 대한 배려’조차 끊임없이 계산하게 하여, 이익과 손해를 분별하게 하며, 그 계산된 결과에 따라 움직이는 타산적(打算的)인 활동으로 바꾸어버리기 때문이다. 각자를 자기 손에 남은 이익만을 계산하는 홉스적인 개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계산하지 않고, 돈이 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 타인을 배려하며 사는 사람이 생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화폐화되지 않는 모든 일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그런 삶의 방식을 자동적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해야 한다, 고로 할 수 있다”가 다시 나타난다). 등가성과 무관한 호혜적 교환, 비자본주의적인 화폐의 사용, 화폐적 척도로 환원되지 않는 ‘가치’의 가치화, 가치법칙에 따르지 않는 욕망의 배치.
더불어 우리는 ‘대의’ 내지 ‘대표’의 형식으로 정치를 정의해선 안 된다. 정치란 선거로 선출된 대표자들이 대의적으로 구성된 국가기관에서 행하는 활동, 쉽게 말해 남들이 대신해주는 그런 활동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는 활동, 우리 자신의 삶 자체가 되어야 한다. 정치라는 개념에서 국가주의적 관념을 제거하는 것.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을 구성하는 모든 종류의 실천, 근대적 권력에 우리를 길들이는 모든 종류의 습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모든 활동, 상생적인 관계을 만들어가는 모든 일상적 행동들, 그리하여 ‘나’나 ‘우리’라는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하면서 접속가능한 모든 것에 자신을 여는 삶을 만들려는 모든 노력들, 그것이 바로 ‘정치’란 말로 우리가 새로이 지칭해야 할 것들이다.
사실 맑스가 분명히 한 것처럼, 어떤 개인도 추상적인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속하게 되는 관계에 의해, 어떻게 생산하고 어떻게 활동하는가에 의해 그가 누구인가가 결정된다. 어떻게 생산하는가, 어떻게 살고 활동하는가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하는 욕망에 의해 추동되며, 동시에 그러한 욕망을 만들어낸다. 이는 그런 관계만큼이나 상호 간에 형성되는 욕망의 형태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관계는 인간 상호 간의 관계를 넘어서, ‘인간’과 언제나 짝하는 ‘비인간’과의 관계를 항상-이미 포함한다. 여기서 ‘비인간’이란 동물, 식물, 대지와 공기 등을 포함하는 자연, 혹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들, 생산수단, 사물 등,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간주되던 모든 것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서도,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 다른 종류의 욕망의 배치가 있을 수 있음을 뜻하는 게 아닐까? ‘비인간’을 포함하는 타자들에 대한 배려를 통해서만 자기 배려가 가능한 그런 욕망의 배치, 혹은 권력의 배치가 있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생산한 것만이 ‘가치’를 가지며, 그것을 생산하는데 든 인간의 노력이 그 가치의 크기(값)를 결정한다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경제학적 휴머니즘을 던져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생명의 연장 안에서 ‘생명’을 정의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다른 모든 생물을 ‘진화’라는 위계 속에 배열하는 생물학적 휴머니즘을 넘어설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언어’를 소통의 특권적인 수단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의 ‘메시지’를 고요한 침묵 속에 밀어 넣으며, 인간이 그것들에 부여한 의미가 바로 그 각각이 갖는 진정한 의미라고 간주하는 언어학적 휴머니즘을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휴머니즘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