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죽음으로 창씨개명에 항거한 곡성 선비 유건영(柳健永1883∼1940)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송사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최익현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입진하였다. 최익현과 임병찬(林炳瓚) 등이 패하여 대마도(對馬島)로 압송됨에 농촌에 들어가 청년자제들을 교육했다. 총독부가 1940.2 창씨개명을 추진하자 항의문을 전달하고 이로 인하여 일제의 모진 박해를 받고 울분을 참을 수 없어 1940년 7월 24일 독(毒)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광복 후 곡성의 유지들이 무산사(武山祠)라는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다. 정부는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창씨개명
조선총독 미나미는 1939년 <국민징용령>, <창씨개명:조선민사령>을 공포했다. 그는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 다음날 총독으로 부임했다. 역대총독 중 가장 악명 높은 총독이다. 5년 9개월 동안 조선민족의 정신과 육체를 송두리째 앗아가려고 했다. 조선의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조선의 젊은이들을 지원병과 정신대로 내몰고, 전국에 신사를 지어 참배하게 하고, 황국신민서사를 만들어서 맹세하게 하고, 조선, 동아일보를 폐간했다. 종전 후 극동군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일본에 성씨는 대단히 많고 개명도 자유롭게 한다. 조선에서 개명은 거의 없으며 결심의 확고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 결심을 어긴다면 성을 바꾸겠다.”고 할 정도이다. 미나미는 이런 조선에 창씨를 명했다. 강요는 아니라 하나 안하면 입학, 취직, 행정서류 접수, 유학 등 모든 면에서 불이익을 주었다. 윤동주도 일본 유학을 가기 위해 부득이 창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40년 2월부터 6개월간 신고하도록 했으나 3개월이 지나도록 신청률이 7.6%에 불과했다. 일제는 행정력과 경찰력을 총동원해 강요했다. 그 후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한 사람이 인구의 80.5%에 이르렀다. 창씨개명을 저항한 방법으로, 자신의 성을 이누노코(犬子)라고 비하하거나, 가네다(金田), 가네무라(金村)라고 성의 흔적을 남기거나, 최(崔)를 요시야마(佳山)라고 파자(破字)했다. 기존의 일본인 이름과 혼동되는 이름으로의 개명은 금지했다.
3. 호남 삼창의(湖南 三倡儀)
담양 고경명, 곡성 유팽로, 나주 김천일(또는 김덕령, 양대박)을 말한다.
3.1. 월파 유팽로(柳彭老 1554-1592): 외눈 책사
유팽로는 합강리(옥과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곳) 생이다. 옥과의 도리산은 옥이 난다하여 옥출산이라 부르고 옥출산성이 있다. 성균관 학유시절, 임란 발발로 낙향해 곡성, 담양, 순창에서 의병을 모았다. 양대박, 안영 등과 담양에 집결, 고경명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금산 왜적은 수만이라, 대적하기 힘들다. 우리는 험한 요새를 점거하고 적이 교만에 빠져 태만해 지기를 기다려 정예를 사방에서 공격케 하자.”고 제안했으니 여러 장수들이 듣지 않았다. 7월10일 2차 금산전투에서 순절(29)했다. 충마가 장군머리 물고 3백리 밤길을 달려 합강리까지 가서 부인에게 건네주고 죽었다. 부인 원주김씨와 마을 사람이 말을 송전리에 묻으니 그 무덤을 의마총이라 한다. 옥과면소에 월파관이 있다. 학유시절 왜란을 대비하자는 상소를 3회, 권력 비리를 폭로하는 직언을 하여 미움을 사 홍문관 박사에서 학유로 좌천되었다. 순창의 반란 토적단(고을을 점령해 일본에 항복하려던 노비들 기병200, 보병 300)을 감화, 설득, 교화하여 의병으로 만들었다. 임란 최초의병(1592.4.20.)이다. 옥과에서 전라도 최초로(4.25) 창의 격문을 발했다. 곽재우는 4월22일에 의병을 일으켰다.
3.2. 청계 양대박(梁大撲 1544-1592)
유팽로와 이종 간이다. 충장공 양대박은 사수곡(사 시암골, 율사골, 묵방골) 생이다. 지금의 청계동에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무기를 만들었다. 노적봉을 쌓고, 백회를 강물에 풀어 전세를 위장했다. 6월25일 호남 첫 전투(임실 운암전투)에서 왜군 1,200을 섬멸했으나 과로로 진중에서 병사했다.
3.3.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1533∼1592)
1558에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91 동래부사를 끝으로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중 임란이 발발했다.
60 노구로 고향인 전남 장흥과 담양 등에서 의병 7,000여명을 규합했다. 7월9일 방어사 곽영과 좌우익이 되어 금산성 5리 밖에서 진을 치고 기병 수백으로 토성을 공격했다. 석양에 기술자 30명이 성문을 파괴하고, 활과 진천뢰로 성중의 창고와 야적장을 태웠다. 7월10일 추촌 앞산에 결진하여 기병 800으로 서문을 공격했다. 곽영은 사직당 뒷산에 결진하고 관군은 북문을 공격했다. 일본군(고바야카와)은 북문의 관군이 허술함을 집중 공격하니 선봉장 영암군수 김상헌이 도주했다. 뒤이어 방어사 곽영도 도망했다. 관군 패전 소식에 의병들이 동요하니 고경명이 격려, 독전하다가 차남 인후(32)와 함께 순절했다. 좌부장 유팽로에게 “나는 말을 잘 못 타니, 달려가라.” 하니 유팽로가 “어찌 대장을 버리고 가겠습니까?”하고 싸우다 안영(28)과 함께 순절했다.
3.4. 안영
안영은 남원 생으로 양자징의 사위이다. 양자징은 양산보(소쇄원 건립)의 아들, 김인후의 사위이다. 전쟁이 나자 서울 친정에 계신 모친을 찾아가다 길이 막혀 유팽로와 의병을 도모하고 고경명의 종사관이 되었다.
3.5.김덕령(1567-1596)
형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92년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고경명(高敬命)과 연합하여 전라도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다가 어머니를 공양하라는 형의 권유에 따라 귀향했다. 1593년 다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떨쳤다. 1594년 전주에 있던 세자 광해군으로부터 호익장군(虎翼將軍)의 호를 받고, 이어서 선조로부터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 뒤 남원에 머물다가 진주로 옮겼는데 조정에서 의병을 통합하여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여,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영남 서부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았다. 곽재우와 협력하여 수차에 걸쳐 적의 대군을 무찔렀고, 1595년에는 고성(固城)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기습하여 격퇴시켰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투옥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그해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순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서울에 압송되어 옥사했다. 1661년(현종 2) 신원(伸寃)되었다. 장군이 태어난 마을도 석거촌에서 충효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1681년 병조판서가 더해졌다. 광주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는데,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4. 조헌(趙憲, 1544~1592)
6월 28일 경기도 김포현 감정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황해도 배천(白川)이며, 자는 여식(汝式), 호는 후율(後栗) 또는 도원(陶原)이라 하였다. 널리 알려진 중봉(重峯)이란 호는 만년에 지은 것이다.
선조와의 갈등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충북 옥천에 내려와 후학을 가르치며 지내던 시절,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헌은 1,6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의병단을 구성하고, 왜적에 당당히 맞섰다. 6월 청주성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우고 8월 금산전투에서 칠백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과 중봉(重峯) 조헌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비록 뒷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분들의 말을 끄는 마부가 되어 모시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졌다. 중봉은 질정관(質正官)의 신분으로 연경에 들어갔다. 조선에 돌아와서는 왕께 [동환봉사(東還封事)]를 올려, 중국의 문물을 보고서 우리 조선의 처지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남의 훌륭한 점을 발견하고서 자신도 그와 같이 되고자 노력하는, 적극적이고도 간절한 정성을 담았다.>
이 글은 조선후기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북학의(北學議)에 쓴 서문이다. 조헌에 대한 존경심이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북학을 시대정신으로 강조했던 박제가가 자신보다 200년을 앞서 살았던 조헌을 높이 평가했다.
조헌은 붕당정치가 처음 시작될 무렵 서인의 중심인물이었다. 여러 차례의 상소문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적극 개진했다. 특히 중국 명나라를 다녀온 후에 토지, 교육, 군제(軍制), 공물, 서얼 차별의 폐지 등을 구체적으로 상소했다.
5. 금산전투와 700의총
1592년 8월 18일 충청도 금산에서 의병장 조헌(趙憲)이 이끄는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이다. 조헌의 의병은 8월 1일에 청주성을 수복하고 온양에 이르렀다. 여기서 금산을 점거한 고바야[小早隆景]의 일본군을 무찌르기 위해 공주로 돌아왔으나,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시기와 방해로 의병들이 흩어지고 700여 명만이 남았다. 8월 16일 조헌은 남은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향했다. 이때 별장 이산겸(李山謙)이 금산에서 패하여 후퇴하면서 일본군의 세력이 만만치 않다고 조헌을 만류하였다. 조헌은 전라도 관찰사 권율(權慄)과 공주목사 허욱(許頊)에게 협공을 제의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저하자 영규(靈圭)의 승병과 합해 8월 18일 금산성 밖 10리에 진을 치고 관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일본군은 관군의 지원이 없음을 알고 복병을 내어 공격했다. 조헌은 "한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義)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고 군사들을 독려하여 왜군의 3차례 공격을 물리쳤다. 그러나 화살이 떨어져서, 육박전으로 대응하여 모두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도 무수한 전사자를 내고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왜병과 함께 퇴각했다. 이 싸움으로 인해 호남·호서 지방을 공격하려던 일본군의 목적이 좌절되었다. 이해 9월 조헌의 문인 박정량(朴廷亮)이 이들의 유골을 모아 합장했으며, 후대에 이를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