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르: 소설
- 추천: 누군가를 잃어본 모든 분께
2p
소설의 운명은 반은 작가의 몫이고 반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가 소설을 읽음으로써 작품은 하나의 인격체로 완성된다.
120p
토마스는 운전석에 올라탄다. 그는 떠나고 싶다. 멍하니 운전대를 바라본다. 벽을 피하려면 기계는 오른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러려면 운전대를 어떻게 해야 되더라? 슬픔이 밀려와 그 질문에 답할 수가 없다. 운전대가 마침내, 완전히 그를 패배시켰다. 토마스는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속이 지긋지긋하게 메스꺼워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영혼이 고통스럽고 기계를 운전하는 데 진절머리 나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영혼이 고통스럽고 기계를 운전하는 데 진절머리 나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그의 시련이 절반만 끝나서다. 이제 리스본까지 그 먼길을 운전해야 할 테니까.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씻지 않고 면도를 하지 않아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며칠 낮을 계속 낯선 땅에서, 며칠 밤을 계속 춥고 비좁은 자동차 안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직장을 잃어서다. 이제 무슨 일을 할까, 어떻게 먹고사나?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아들과 연인이 그리워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그가 아이를 죽여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이유는, 이유는.
그는 숨을 멈추고 딸꾹질을 하면서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은 채 아이처럼 흐느낀다. 우리는 멋대로인 동물이다. 그게 우리이고, 우리는 우리일 뿐 더 나은 무엇이 아니다-더 숭고한 관계 따윈 없다. 다윈이 태어나기 오래전, 광적이지만 명석했던 한 신부는 아프리카의 외진 섬에서 침팬지 네 마리를 만났다가 대단한 진실과 마주쳤다. 우리는 진화된 유인원일 뿐 타락한 천사가 아니다. 토마스는 외로움에 짓눌린다.
124p
모든 시신은 들려줄 사연이 담긴 책이다. 각각의 장기는 소단원, 소단원들은 공통적인 서술로 어우러진다. 외과용 메스로 페이지를 넘기며 사연을 읽고, 마지막에 독후감을 쓰는 게 병리학자인 에우제비우의 임무다. 일지에는 주검에서 읽은 바가 정확히 반영되어야 한다. 그것은 빈틈없는 시 같은 것이 된다. 어느 독자가 그렇듯 그는 호기심에 사로잡힌다. 이 시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죽었을까? 왜 죽었을까? 그는 우리 모두를 압도하는 그 교활하고 강제적인 부재를 탐색한다. 죽음은 무엇인가? 시신이 있다-하지만 그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다.
126p
곱상한 얼굴에 커다란 갈색 눈을 지닌 50대 여인이 서 있다. 그녀는 한 손에 가방을 들었다. 에우제비우는 그녀를 보고 놀란다. 여인이 그를 쳐다본다. 그녀는 따뜻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한다.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않으시고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습니다.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습니다. 내 입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습니다. 아 사랑하는 이여, 속히 나를 도와주십시오!"
148p
"슬픈 사실은 의사들이 뭐라고 하든 자연사는 없다는 점이에요. 모든 죽음은 살해로, 사랑하는 이를 부당하게 빼앗긴 것으로 느껴지죠.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살면서 적어도 한 번의 살해를 맞닥뜨리죠. 바로 자신의 죽음 말이에요. 그게 우리의 운명이에요. 우리 모두는 자신이 피해자인 살해 미스터리에서 살아요.
202p
"이곳은 영장류의 행동과 의사소통을 연구하는 최전선입니다. 침팬지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보통의 사람이 예상하는 것 이상을 배웁니다. 침팬지는 진화론적으로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입니다. 우리는 침팬지와 공통의 영장류 조상을 갖고 있지요. 인간과 침팬지가 갈라진 것은 600만 년 정도밖에 안됩니다. 로버트 아드리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진화된 유인원일 뿐 타락한 천사가 아니다.'
261p
내가 당신과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당신이 나를 웃게 만들기 때문이야.
내가 당신과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당신이 나를 진지하게 봐주기 때문이야.
내가 당신과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당신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야.
내가 당신과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당신이 나의 불안감을 덜어주기 때문이야.
내가 당신과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당신이 모자를 쓰지 않기 때문이야.
내가 당신과 같이 있고 싶은 것은 하늘의 구름 모양 때문이야.
내가 당신과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당신이 나한테 죽을 주기 때문이야.
내가 왜 당신과 같이 있고 싶은지 나도 몰라.
내가 당신과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뭐 뭐 뭐 때문이야.
268p
하지만 오도와 투이젤루로 이주한 후 캐나다에 돌아가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 이제 그와 같은 종인 인간은 피로를 안겨준다. 그들은 너무 시끄럽고, 너무 성미가 까다롭고, 너무 오만하고, 너무 믿음이 가지 않는다. 피터는 오도의 곁에서 느끼는 강렬한 고요가, 무슨 일을 하든 생각에 잠긴 더딘 움직임이, 대단히 간결한 수단과 목적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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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너무도 사랑하는 작가 얀 마텔입니다.
이 작가의 모든 책을 다 읽었는데도, 신작이 나오지 않아, 화를 내고 있습니다. ㅋㅋㅋ
연락을 해야겠어요.
얼른 쓰시라고.
아무튼,
상실을 다룬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얀 마텔의 이야기는 좀 독특합니다.
상실감이 어떻게 우리에게 스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로 부터 누군가에게로 옮아가고,
또 우리로부터 이별을 고하는지, 너무도 섬세하게 글로 옮겨 놓았습니다.
위로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결국 상실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상실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없는 감정에 빠지고 맙니다.
이 책도 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책이 함께 진심을 다해 울어주고 있다는 생각은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