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경주임란의사 추모회가 주관하는 경주임란의사 추모 행사」가 황성공원 임란의사창의공원에서 열린다.
임란의사 추모 행사는 임진왜란 당시의 “문천회맹” 의사들의 정신을 추모하고자 매년 6월 9일에 열린다
문천회맹”은 참혹하고 처절했던 임진왜란 당시 백척간두의 나라를 구하고 향토를 지켜야 한다는 충의의 일념으로, 선조 25년 6월 9일 지금의 반월성 주변 문천가에서 말을죽이고 말의 피로 맹세 하고 왜적을 맞아 끝까지 싸워 죽기를 맹세하는 결의이다.
이행사에는 경주시장, 경주시의회 의장, 시의원, 도의장을 비롯한 각 기관단체장, 유림단체 대표,들이 추모식에 참석한다
해마다 거행되는 임란의사 추모 행사는 임진왜란 당시 구국의 일념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일어섰던 조상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받고자 매년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조선 선조 25년부터 31년까지 7년간에 걸친 참혹하고 처절했던 임진왜란 당시 신라의 고도인 경주가 가장 많은 인명 살상과 신라천년 유물을 비롯한 귀중한 문화재가 모두 소실 또는 탈취 파괴됐다.
이에 분노에 찬 의사들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고 향토를 지켜야 한다는 충의의 일념으로 선조 25년 6월9일 지금의 반월성 주변 문천가에서 왜적을 맞아 끝까지 싸워 죽기를 맹세했다.
이 얼마나 숭고한 행사인가 후손들이 반드시 배우고 지켜나가야할 행사임에 틀림없다
많은후손들이 참석하고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이면에는 겇치레 행사만 중요시하고 조상의유적에 대해서는 관심도 가지지 않고 외면하는 경주시가있다
경주시 안강읍산대4리 에 위치하는 표충각은 임진왜란 때 순절하신 두촌 이팽수(李彭壽) 선생을 봉향하는 곳이다
서기(西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내 청장년과 인근 장정들을 이끌고 홍천 등지의 적을 격퇴하고 나아가
문천회맹(蚊川會盟)에 참가하여 경주부 탈환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갑오년 무과에 등제한 후에는 복병장으로 임용되어 경주 울산지방의 요충지인 서생포에 포진하여 장기간에 걸쳐 적의 후속 상륙을 차단 하였으나 끝내는 중과부적으로 백병전 끝에 선조 29년(1596) 공의 나이 38세를 일기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그 후 정조(正祖) 7년(1783)에 당시의 전공이 추인되어 정려를 명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증직되었다.
표충각의 정려비문은 영의정 정존겸이 짓고 글씨는 경주 부윤홍양호 가 썻다.
또 홍양호와 예조참판 김상집은 비문을 지었다. 碑의 높이는 199Cm, 너비 54Cm, 폭 23Cm,
비의 篆額은 ‘참판 이공 정려비’ 라고 하였고, ‘표충각’ 이란 扁額 글씨는 예조 판서 김노진이 썻다.
현재 이 표충각은 단청이 다벗겨져 흉하게 변해 있으며 페인트는 다 벗겨져 보는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많은세월이 흐른탓에 기와에는금이가 있고 주변에는 논으로 방치되어 있다 거기에다 표충각 앞에는 그 흔해 빠진 안내판 하나도 배치하지 않고았다
표충각 주변에 나무를심어 수려하게 가꾸고 잔듸로 단장하여 유적에 대한가치를 높여야 하지 않을까
1조 5000억이라는 돈을 경주시는 도대체 어디에다 솟아 붓는단 말인가
생색만 낼려는 행사에만 치중하지말고 좀더 내실있는 보다나은 문화정책을쓰는것이 조상들에 대한 후손들의 예의가 아닐까
임란의사 추모탑
표충각과 다벗겨진 단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