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계에서는 각 사람이 원하는 것, 즉 각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이루며, 그가 원하는 것에 따라 즉 그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만의 독특한 생명의 영향권이 마치 호흡 즉 내쉬는 숨처럼 흘러나와 그 사람을 감싸고 있고 또 그 주위에 자신을 소위 '확장'한다. 그 영향력이 발산되는 방식은 마치 이 세상에서 식물들이 주변에 발산하는 것이 있어 멀리서도 그 향기로 알 수 있다든지, 동물들에게서 발산되는 것이 있어 후각이 예리한 개는 실제로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사람에게서도 그와 같이 발산되는 것이 있음은 많은 경험에 의해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람이 육체를 벗고 영이나 천사가 되면 그 발산되는 것 또는 내쉬는 것은 이 세상에서처럼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떠한 대상을 사랑함에서 흘러나오는 영적인 어떤 것이다. 이 사랑이 그의 주위를 둘러싸는 영향권이며 그것으로 다른 영들은 멀리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Everyone's will or love constitutes the entire person there, and the sphere of life from it flows out from him like breath or an exhalation, envelops him, and constitutes an extension of himself, so to speak, around himself, in a way scarcely different from the emission around plants in the world, which is also detected at a distance through their odours, and also that around animals, which is actually detected by a dog with its keen sense of smell. There is a like emission from every human being, as also a wealth of experience makes known. But when a person lays aside the body and becomes a spirit or an angel that emission or exhalation is not material, as it was in the world; instead it is something spiritual flowing from his love. This love produces a sphere around him, which enables other spirits to detect at a distance what he is like.
*will과 love를 단순히 '의지'와 '사랑'이라고 하면 좀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들린다. 특히 사랑이라는 것은 더욱 그렇다. "너의 사랑이 너를 만든다"고만 하면 그 사랑이 어떤 실체를 의미하는지 단번에 이해하기는 좀 어렵다.
스베덴보리 저서에서 '의지'와 '사랑'은 단순히 어떤 굳센 의지력이나 따뜻한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대한 선택적 추구, 인생의 방향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추상명사가 아니라 동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의도함'과 '사랑함' 이라고. 그렇게 풀면 의지와 사랑은 대상을 빼놓고 논할 수 없다는 인식을 더 확실하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의도한다, 사랑한다는 타동사는 '무엇을' 이라는 목적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뜻하고 바라고 사랑한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대상을 전제하는 일이다.
이런 접근방식은 스베덴보리의 논조를 더 쉽게 납득할 수 있게 해준다. 스베덴보리가 위 본문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는 이렇다. 내가 어떤 대상을 원하고 사랑하느냐가 나의 전인격이 되고 생명이 되어 저절로 주변에 퍼져나가 영향을 준다.... 영계에서는 내가 원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나를 만들어가고 나를 확장시키며 그것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소통되고 알려진다.
추상성을 싫어하는 스베덴보리는 역시 '사랑'을 말할 때마다 사랑의 '대상'을 함께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때 사랑은 '무엇무엇을 향한 사랑'이다. 이는 대상과 하나가 되려는 추구를 말한다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사람들의 사랑의 대상은 무수히 다양하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즉 본질적으로 보면, 크게 주님, 이웃, 그리고 나 자신, 세상, 이렇게 넷으로 분류된다고 카테고리화의 달인 스베덴보리는 말한다.
누구나 주님 아니면 자신을, 이웃 아니면 세상(물질)을 사랑하게 되어있다. 이건 무슨 소린가.
사람은 곧 사랑이다. 위에서 말한 그 동사적 방향성으로서의 사랑이 우리의 본질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존재에 대한 이런 정의는, 우리에게 무한자유는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원리 자체를 벗어날 자유가 없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을 자유, 사랑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제한적인 우리의 자유는, 또다른 2차적 의미에서도 제한적이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선택하는 것,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 자유다. 그러나 그 '대상'들은 우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의 개성과 독특함을 발휘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근본적으로 창조주냐 나 자신이냐, 이 커다란 두 범주 중 하나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저서에서 '나온다'는 말을 빈번히 사용하는데, 이 단어가 바로 범주를 설명하는 단어다. '이웃사랑은 주님사랑에서 나온다' '세상(물질)사랑은 나만사랑에서 나온다'...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에서 모든 선이 나온다', '나만사랑과 물질사랑에서 모든 악이 나온다'... 신과 자아, 이 근본적인 두 범주로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분류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현대는 개인의 자유가 증대되는 익사이팅한 과도기가 아닐 수 없는데, 그 흐름에 따르는 문제 중 한 가지는 '일반화의 오류'에 대한 지나친 알러지 반응이다.
개인의 고유성과 개성을 강조하다 보면 모든 분류나 정형을 부인하는 데 이르기가 쉽다. 그런데 칸트가 'categorical imperatives'라고 멋진 철학용어로 표현해줬듯이, 스베덴보리 저서는 분류와 정형에 충실하다. 매우 충실하다.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이 범주들 중 하나에 속한다", "누구나 이런 단계를 거치게 되어있다", 등등의 매우 '일반화'하는 선언들로 가득하다.
현대인들이 종교적 신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하는 요인들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정형'의 선언이 일반화의 오류라고 느껴지기 때문인데, 사실 종교는 본질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그 누구도 세상의 모든 사람의 본질적 상태를 분석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도 이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종교를 개념화의 견지가 아니라 삶의 수련이라는 견지에서 본다면, 모든 수련이라는 것의 이치는 정형이나 원리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정형이나 원리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데서 자유자재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얘기가 빗나갔다.)
우리는 죽은 뒤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 '규정(!)'되고 '분류(!)'되고, 사랑이 같은 사람들끼리 함께 모인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해준다. 이 세상에서 사회 안에 자유가 증대할 수록 '같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결성되는 숱한 '동호회'는 사실 이런 영적 원리의 자연스런 반영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무슨무슨 '사모'가 유행하기 시작한지 벌써 한 10년은 된 것 같다.
쉽게 말하면 영계는 크게 네 가지 '사모'로 나뉜다... 주사모, 이사모, 나사모, 세사모. 앞의 둘은 천국이고 뒤의 둘은 지옥이다.
첫댓글 사향을 지녔거든 절로 향기가 풍겨나리니
어찌 바람맞이에 설까보냐. -명심보감
존재하지 않을 자유가 없고
사랑하지 않을 자유가 없으며
엄밀히 사랑의 대상마저 창조할 자유 없이
자유 없는 그 속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시어
그 손에서 뺏을 자 없이 급기야 온전한 주의 것으로 삼으시는 사랑이 사무칩니다.
빌헬름 켐프(Wilhelm Kempff, 1895-1991)는 어린 시절부터 베토벤에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베토벤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무거운 악보를 펴고 피아노연주를 시작했다.
피아노 위에 올려놓은 악보의 갖가지 악상지시가 마법의 기호처럼 느껴졌다.
음악에 취한 나는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께 여쭈었다.
‘ 이건 누가 쓴 거죠? ’
어린 나는 당연히 ‘하나님’이라는 답을 기대했는데 아버지는 ‘베토벤’이라고 대답했다.
@딸꽁이 꽁이님도 켐프를 좋아하시나요?
저도 팬입니당.^^
@해바라기 ^^ 켐프 팬이시라면.. 킁 크응.. 베토벤도 좋아하시겠네요??
아이 우리선생님 통째로 핥아 먹어버려야겠다 볼딱지 이리 와.. 쪽! 쪽! 쪼옥 - ! ㅋㅋㅋ
주사모 주! 주인님. 저 왔습니다.
이사모 이! 이그 내새끼! 어서 내 품에 안겨라. 온갖 기쁨을 영원히 같이 하자꾸나..
나사모 나! 나다! 나! (대문을 발로 차며) 냉큼 문 열어라 탕탕
세사모 세! 세발낙지는 가져왔겠지? 낙지만 놔두고 당장 꺼져! (나 혼자 먹기도 부족한데..흥)
세발낙지에서 ㅋㅎㅎ 전 이래서 딸꽁이님이 좋아요. 이런 동심을 대체 어디다 서리서리 누벼두셨다가 구뷔구뷔 펴시는지 알고싶습니다.^^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똥 말똥 잠을 안 자고
- 윤석중 먼길
@딸꽁이 윤석중 동시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동시 중 하나입니다.
아기와 아빠는 과연 잠들 수 있었을까요?
잠 못 자고 먼 길 떠난 아빠는 하나도 안 피곤했을 거예요.
내 사랑이 가는 곳에서만 나는 살아 있다 - 라기
금이야 옥이야
의지와 사랑은
a. 어떤 굳센 의지력이나 따뜻한 감정을 의미한다 땡!
b. 어떤 대상에 대한 선택적 추구, 인생의 방향성을 내포한다 뽀!
c. 무엇을 의도함. 무엇을 사랑함.
남발되는 이 낱말들에 대한 정체모를 반감이 그래서 있었나 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딸꽁이 감동은 같은 성품간에 상호작용으로 일으키는 것 아닐까요.
그 대상이 나였다고 해서 그의 아름다운 마음을 못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요.
고마움으로 느낀다면 자기애는 아닐 거예요.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감사한 마음이 되는 것이 자기애는 아닐 것이고
그 사람의 따뜻함은 결국 그의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거니까요.
@해바라기 상황이나 상태를 과장되게 바라보는 것. 완벽을 추구하는 자세.
이 두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이타성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이타적 자아가 아닐까 하는 질문입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요..
@딸꽁이 그것은 전적으로 본인과 주님 사이의 문제이지 남들이 판단할 문제가 아닐 듯해요.
스스로 차분히 되짚어 보셔서
그런 도움의 행동을 하실 때 어떤 마음이신지 자문해보신다면 어느정도 답이 내려지실 거예요.
타고난 것이라고 해서 모두 악이라는 생각은 오해세요. 선한 성품도 당연히 유전이 된답니다.
그 선을 마음에서 그치지 않고 실행하심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계시네요.
만일 완벽을 추구한다 해도 상대방이나 누군가에게 자유침해나 부담, 폐가 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인간이 가진 자유의 성격
A. 본질적인 제한성
a. 존재하지 않을 자유 없음
b. 사랑하지 않을 자유 없음
B. 사랑하는 대상의 제한성
a.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이나
b. 그 대상을 자유롭게 창조할 수 없기에
c. 사랑하는 대상은 창조주냐 나자신이냐 큰 두 범주 중 하나에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