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지교수의 결단
-힘 든 길을 택한 "우지(宇治)"교수
사람들은 아프면 병원을 찾는다. 병원에선 위나 대장 등을 검사하려면 내시경을 쓴다. 물론 그 때에도 독일에 스텐레스 쇠로 만든 74cm 길이의 위경이 있었으나, 검사 시 이가 깨지기도 하고 식도가 터져 사망하는 사고도 생겨 위암 등 검사에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다. 그래서 내시경이 없던 그 시절에는 아픈 증세만을 듣고 추측 정도의 진단을 하였을 것이다.
요즘은 위나 대장의 궤양이나 암등 증세를 검사할 땐 내시경으로 직접 모니터를 보며 검사를 한다. 따라서 이 내시경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내과적 병을 알아내고 치료하는데 큰 기여를 하는 의료기구이다.
이 유용한 내시경의 개발은 1949년 태풍이 몰려온다 하여 한촌의 철로에 온밤을 정차한 열차에서 일본 도교(東京)대 의대의 당시 나이 32세 젊은 교수 "우지(宇治) 다츠로"와 올림푸스공학의 기사 “스기우라”가 만나 위암 검사의 애로를 얘기하는데 그의 말에 감동한 스기우라와 의기투합하면서 시작되었다.
둘은 직장이 끝나면 올림푸스에 모여 설계를 하고 12mm 의관에 6mm의 필름과 직경 2.5mm의 랜스를 만드는데 성공한 스기우라는 작은 전구를 생각하다 크리스마스 츄리의 전구를 만드는 회사였다. 당시 23세의 전구 기사 ‘마루야마 마사토‘를 찾아가 밝은 불빛이 나는 작은 전구를 만들기 위해 필라맨트를 2중으로 넣고 만들었으나 3번 빤짝 켜졌다 끊어지는 현상을 극복하고 관은 염화비닐의 부드러운 관을 이용하여 오늘날과 같은 위내시경을 세계 최초로 만들어 냈다 한다.
그러니까 위내시경의 유용성과 개발의지는 우지가, 또 소형 렌즈가 달린 카메라는 올림푸스사의 스기우라가, 또 위장 속을 밝힐 소형 전구는 전구회사의 마루야마가 실패를 거듭하며 4개월 만에 시제품을 만들었다.
처음은 개(犬)의 위(胃)에 물을 주입하여 실험한바 위액과 물이 섞여 컴컴하여 뭐가 뭔지 분간할 수가 없었고, 두 번째는 개의 위에 공기를 주입하고 실험한바 그 때에야 위속을 볼 수 있어 어느 부분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었다 한다.
그래서 사람에게 실험을 하려고 지원자를 수소문하였더니 위병을 앓는 우지의 선배 ’사카모토‘가 자청하여 실험에 응했다. 사람에 대한 첫 실험을 어렵게 하고 바로 현상실로 달려가서 카메라를 열었으나 필름을 넣지 않는 채 촬영하어 실패하고 말았으나 다시 양해를 구하고 두 번째 촬영에서야 성공을 하였다.
그 이듬해인 1950년 11월3일, 일본 전국의 의사 500여명의 모임에서 발표를 했고, 세계의 의사들이 견학하러 오는 등 세계에 알려져 우지교수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서 그의 장래는 매우 밝게 보장되었다.
내 소견으로는 더 높은 승진과 성공을 위하여 더 열심히 열정을 쏟을 듯도 한데, ’우지‘는 동경대 의대에 사표를 내고 아마도 일본에는 ’마을의사’제도가 있었는지 ‘마을 의사’를 자청하여 시골 사아다마현 오미야시로 낙향하였다. 후일담으로 우지는 가족이나 환자에게도 자기가 내시경 개발자임을 밝혀본 일이 없다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20 여 년간 노숙자나 독거노인 등 가난한 서민을 돌보다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고 선우경식원장과 같이 성자와 같이 산 무욕(無欲)의 의사는 고작 60으로 생을 마감하여야 하였는지 안타깝다.
오늘(2007.9.1) Daum의 기사를 보면 이번에 서울대를 정년퇴임하는 정옥자 교수는 그 퇴임사에서 편하고 쉽게 살려는 ‘대학의 속류화’를 우려하면서 또 대학은 정치와는 거리를 두되 날카로운 비판의식은 살아 있어야 하는데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이 비판의식의 실종도 걱정하며 우려의 말을 남겼다.
정교수는 "강남에서 엄마의 치맛바람으로 과외 받고 대학 들어가 봐야 쓸모없다, 지방에서 어려운 환경을 뚫고 들어온 학생들 중에 상당한 인재들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쓴 소리를 곱씹으며. 우리 젊은이와는 달리 아무 명예도 실익도 없는 낙향의 길을 택한 ‘우지’교수의 용기는 젊은이다운 패기(覇氣)와 때 묻지 않는 양심에서 울어난 듯하여 나에겐 오랜만에 신선한 감동을 주고 있다.
1949년은 일본이 전쟁에 폐망한 후 얼마 안 된 시점이어서 모든 생활용품이 귀했고, 식량도 귀하던 시절이다. 사람은 이런 어려운 때에 그 환경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욕도 생기고 탐구심도 생기며 성취를 위해 집중하여 몰입하려는 성실한 열정도 생기나 보다. 그러기에 내시경 개발을 위한 3인의 모임도 호응 협력이 쉬었으며 협력도도 높아 짧은 시간 안에 내시경의 개발이 완성된 듯 하다.
따라서 길게 보면 배불렀을 때의 성취도 보단 배고팠을 때의 성취도가 더 높다는 걸 확인하면서도 엇나가는 현실이 왠지 씁쓸하다.
오히려 물자가 풍족한 요즘이야말로 어려운 일보다 손쉽게 돈 버는 요행에 매달리려 하며 대박 꿈이나 꾸고 돈벼락을 맞으라는 등 인간의 본성에 거스르는 덕담들이 당연시되고 있다. 돈 벌이가 지고(至高)한 덕목인양 상생(相生)보다 상쟁(相爭)을 부추기는 듯 한 매쓰컴들. 한 때 우리가 “일본을 경제 동물이라” 비웃었던 그 때의 우리는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이 시류(時流)를 걱정하는 매쓰컴은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 중에도 우리의 먹을거리를 연구하는 과학자에겐 이 불로소득의 대박 바람에 오염되어 연구의욕을 잃지 않도록 특단의 사기앙양대책이 강구되어야 할 것 같다 .
그리고 앞으로도 개천 사람들의 꿈이나마 깨지지 않게 “아직도 용은 개천에서도 날수 있다”는 꿈만이라도 버리게 하지 말았으면 하고 염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