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회 《정형시학》 신인상 당선자 발표
<심사평>
제7회 정형시학 신인상 심사평
《정형시학》 신인상이 7회째다. 계간임에도 해마다 한 번 꼴의 신인상이니 낯가림이 심한 편이다. 그래서일까, 당선권에 들기 위한 경쟁은 자못 치열하다 못해 뜨겁다. 그 열기 속에 심사는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호흡을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원고 뭉치가 주어졌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아홉 사람의 마흔여덟 편. 서울에 관측 이래 가장 많은 첫눈이 내린 날이었다. 그런 서설 같은 개성의 출현을 기대하며 응모작들을 읽어갔다.
정형 형식의 체화와 표현의 참신성, 작품의 완성도와 변별력을 따져보고 비겨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심사위원별로 정독이 끝난 뒤 우열을 가리는 선별작업이 뒤따랐다. 적잖은 논의 끝에 구지평의 『너덜겅을 걷다』 외 2편, 윤병석의 『복사꽃 봄날』 외 2편, 이남열의 『쑥부쟁이 내 어머니』 외 2편을 당선작으로 낙점했다. 당선작들은 저마다의 개성이 뚜렷한 가운데, 현실인식과 자연서정으로 대별되는 양상을 보였다. 현실인식이되 공감의 정서를 일깨우고, 자연서정을 추구하되 그것이 인간의 삶과 결부되는 모양새다. 구지평의 작품이 앞쪽이라면, 윤병석·이남열 두 사람의 작품은 뒤쪽이다.
구지평은 당면한 생존의 현장을 직시한다.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를 관통하며 “헬조선”의 “너덜겅을 걷”고, “티슈 인턴”으로 비하되는 푸석한 “영혼”의 자소상을 빚는다. 더러는 비정한 경쟁의 “똬리를 풀고” 화해의 관계를 모색하면서, “세월이 머뭇거리는/ 기억의 한가운데”에서 “습기 없는 늙은 집”의 “허기”를 못내 겨워도 한다. 윤병석과 이남열은 자연의 심상에 인간의 정서를 묶어놓는다. 시의 발화가 강한 서정 친화력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복사꽃”에서 “봄마다 늘 까슬까슬 목에 걸린” “잃었던 인연”을 떠올리거나, “쑥부쟁이”를 통해 “흙먼지 속에서도 내내 서서 손 흔”드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낸다. “회현리 패총”과 “은행나무”, “씀바귀”와 “저녁놀”, “부용화”와 “나비”, “땅끝 마을”과 “바랭이”의 관계가 다 그러하다. 그런 시각이 시조 3장의 행간을 넉넉한 활유의 공간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이제 세상의 빙판길을 걸어온 세 사람의 시인을 맞는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그들이 헤쳐온 돌너덜과 쑥구렁이 그 얼마랴. 하지만 앞으로 걸어갈 시조의 길은 그보다 더한 비탈과 벼랑을 맞닥뜨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건각이기를 바라며, 세 시인의 장도에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 윤금초·유재영·박기섭(글)
*예심 : 조성문·임채성·장은수
<당선작>
너덜겅을 걷다
짧은 자소서에 낭만은 감점 포인트
하얗게 밤새우며 너덜겅을 걷는다만
그래도 고래 한 마리
가슴속에 키운다
사막에서 찾는 막다른 정규직행
쉽게 쓰고 버려지는 삶의 결이 거칠다
힘겹게 채용 사이트에
매달리는 사이보그
영혼이 푸석푸석 서른 살의 스펙 쌓기
진짜인 듯 가짜인 듯 인공지능 이중대
오늘도 헬조선 풍경에
젖어드는 티슈 인턴*
* 인턴 근무 후에 채용되지 못하고 일회용 티슈처럼 그냥 버려지는 인턴사원.
화사花蛇
마주친 눈빛이 수읽기를 하고 있다
독 오른 송곳니 공수겸장 생각하고
혈기를 끌어 모으며 머리를 바짝 쳐든다
이른 새벽안개 속에 모란꽃 어깨 짚고
조갈증에 목 축이던 화사 몸뚱어리
죄 없이 허물에 갇힌 절벽에서 일어선다
시퍼렇게 날이 선 두 고수의 필살기
솔밭에 부는 광풍 가지가 부러질라
시간도 숨을 죽인 채 눈동자를 박고 있다
찰나의 정적, 입 다물고 조용히 살자
천지가 나와 함께 생겨난 것이거늘*
스르르 똬리를 풀고 모란꽃에 스며든다
* 天地與我竝生 而萬物與我爲一 旣已爲一矣 且得有言乎 :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서.
흑백사진
지붕에 내린 달빛
한 번씩 몸을 뒤집고
디딤돌 빈 마당
허기진 발자국들
돌담엔 몸 뒤척이는
담쟁이 마른 넝쿨
습기 없는 늙은 집
골다공증 앓는다
까치발 딛는 어둠이
골목을 맴도는데
세월이 머뭇거리는
기억의 한가운데
<당선소감문>
가끔 그 향기 나에게 전해주게
어둠속 말라가던 꽃대가 흔들린다
돌 하나 묵직하게 가부좌 튼 가슴 속
아침이 흔들어대는 투명한 의식 한 줄
눈 오는 풍경처럼 머릿속 어지러운데
배후가 허물어지는 부끄러운 고백들
모난 돌 탁마하라고 쥐어주신 정丁 하나
지난달 30년 지기 사진작가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오늘!
생각이 많이 난다
친구야 잘 가시게
그렇게 좋아하던 야생화들
실컷 어루만지며
가끔 그 향기 나에게 전해주게
자넨 듯
그 향기에 내 소식 전할 테니
늘 용기를 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이승하 교수님, 유재영 시조시인님, 엉성하게 미숙한 저를 새로운 고난의 길로 이끌어 주신 심사위원님들, 몇 년을 함께하는 문인협회 교육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매서운 채찍을 들어줄 집안 식구들 사랑합니다.
구지평
본명 구본식.
경북 예천 출생.
2012년 《서라벌문예》 신인상.
한국문인협회·서산문인협회 회원.
시집 『돌아보면 다 사람이다』 (2014), 『벽-세상의 벽을 허무는 생명의 시』 (2018).
<당선작>
복사꽃 봄날
누구는 알러지를 일으킨다 하지만
나만 향해 미소 짓는 복사꽃을 보게 되면
되찾은 인연을 따라 웃음만 짓게 된다.
많은 꽃이 분분할 때
홀로 분홍을 피워두고
다른 꽃에 억눌릴 때
향기로 절 알리는
꽃들의 아우성에도
태연자약한 복사꽃.
각박한 일상들과 잃었던 인연으로
화려함과 고귀함을 맘껏 펴지 못하여
봄마다 늘 까슬까슬 목에 걸린 사랑꽃.
회현리패총 은행나무에 기대어
쉼 없이 자리다툼 하고 있는 세상사에
묵묵히 아래에서 버티고 버티다가
긴 세월 그리움으로 쌓여가는 조개들
유리너머 쌓인 세월 헤아리는 그대와
조개들이 대화하는 돌담길을 따라서
묵묵히 고개를 떨군 은행나무 그림자
이제는 돌아와 어깨 내민 햇살처럼
꼬여진 일상사를 털지 못해 막막한
너와 나,
노란 손 모아 기도하며 쌓인다
낙동강 씀바귀
바다를 좋아해서 바다로만 흐르다가
해 저무는 낙동강변 토기처럼 앉아서
세상의 모든 거짓을 씻어 내는 씀바귀
쓰디 쓴 하루일이 강에 걸려 헐떡이면
술 취한 나비처럼 밀물에 앉았다가
놀래서 허공을 딛고
넘어가는 저녁놀.
<당선소감문>
신열을 앓듯이 정형시를 부단히 쓸 터
북서풍이 불어와 단풍나무가 달아오르면 신열을 앓듯이 시를 쓰게 되는 것이 시를 쓰는 사람들의 숙명인 것처럼 이번 가을도 메모해 두었던 시들을 하나하나 제목까지 붙이며 파일로 저장해 둔 폴더가 두둑해집니다.
특이한 것은 예년과 달리 자유시가 아닌 시조들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운문을 접한 것은 동시였으나, 더 많은 애착이 갔던 것은 고시조였습니다.
그리고 나도 한번 써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한 것도 수업시간에 배운 고시조의 율격에 맞춰 써봤던 시조였습니다.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고시조의 율격에 맞게 쓰고는 뿌듯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갑니다.
나의 앞에 펼쳐질 길이 어떨지 몰라도 첫 시조를 쓰고 기뻤던 감정을 현대시조를 쓰면서 오래도록 느끼고 싶습니다.
신열에 감기약 기운까지 겹쳐서 오전 내내 드러누워 있었는데, 《정형시학》에서 제7회 신인작품공모에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응모한 지 오래되어 뭔 소리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으나 메일을 열어보고 응모했던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홀로 시조를 쓰다 보니 제대로 쓰고는 있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여기저기 응모를 했었는데, 아직도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셨다니 황송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앞으로 더욱 매진하라는 격려로 알고 부족한 저의 작품을 뽑아주신 《정형시학》과 심사위원님들께 드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부단히 쓰겠습니다.
윤병석
1964년 부산 출생.
1982년 부산대학교 燈시문학동인회 활동.
2018년 중앙시조백일장 9월 장원.
<당선작>
쑥부쟁이 내 어머니
논틀밭틀 월남치마 온갖 시름 밤이 깊도록
치성으로 올린 바람 천불천탑 쌓았으리.
스치는 서리이슬마다
그분 앞태 얼비칩니다.
소리 다 들릴 듯이 날아가는 가을구름
고갯마루 그 너머로 남보랏빛 한창이다.
누군가 떠나나 보다
옷고름 짓무릅니다.
노을이 번져오는 동구 밖 정자나무 아래
흙먼지 속에서도 내내 서서 손 흔들고
이제야 두 손 모으고
어머니라 불러봅니다.
부용화 낯빛
지극정성 심어놓은 꽃 붉은 꽃이 핀다.
수수밭 이는 바람 자식의 등 다독이는가?
춤 훨훨
찾아온 나비
두 팔 벌려 맞이한다.
지난날 곁을 떠나 이 땅에 되돌아왔나?
먹장하늘 짙어가는 소낙비 몰고 와도
초록의
큰 나무 그늘
품에 안긴 한여름.
해남 가는 길
천 리길도 한걸음부터 사자봉 땅끝에 선다.
다도해 품안에 두고 바랭이 그 풀처럼
황톳빛 굳은살 박인
순한 마을 모여 산다.
고천암 갈밭 나는 해질녘에 가창오리
능소화꽃 피듯 지듯 수십 만 떼춤 추고
울돌목 소용돌이친다.
들녘 강은 젖줄이다.
<당선소감문>
서툴고 보잘것없지만 들꽃 향기처럼
새로운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렵니다.
어느덧 세월은 말도 없이 흐르고 흘렀습니다.
평생을 몸담아왔던 이 직장을 떠나면 무엇을 할까?
새로운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시작해야 하는 순간에 다다랐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서툴고 보잘것없지만 들꽃 향기처럼 살아보려 합니다.
그렇게 설렘으로 치장했던 가을도 스산한 낙엽을 남기고 떠나가고 있습니다.
나의 제2의 인생, 새봄을 맞이하기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들길을 향해 걸어가렵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선택하여 주신 분들, 곁에서 항상 격려 해주시던 문우 선배님들께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내 오광숙과 가족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합장으로 대신합니다.
이남열
전남 해남 출생.
성화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졸업.
해남군재향군인회 사무국장 재임.
첫댓글 신인상 당선하신 3분 선생님들,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열린시조학회 회원이 되신 걸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쁜 조카분께서 대리 수상을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리고 직접 뵙고 인사 드릴 날을 기다립니다.
건필 기원합니다.
@윤 정 김사합니다. 선생님도 바쁜 연말일정 중에도 건강하시고 건필하십시오.
@윤병석 선생님,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열린 시조>에 좋은 시조를 소개할 수 있습니다.
틈 나시는 대로 올려주셔도 좋겠어요.
축하드립니다 건필하세요
뜨겁게 쓴 작품들 , 고마운 맘으로 잘 감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