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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답사 - 연산군 편】
올 한해에는 서울에 있는 조선왕릉을 대부분을 답사하리라는 계획 아래,
그 동안 왕에서 군(君)으로 강등되어
홀로 외로이 있을 연산군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왕조 27대왕 중 40기의 조선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나
생전의 폭정으로 왕에서 군(君)으로 강등된 두분(연산군, 광해군)의 심중은
사후세계에서도 대접받지 못함은
생전의 업이 무척이나 컸음은 부인키 어렵겠다.
☞ 찾아가는 길 : 지하철 4호선 창동역 1번 출구, 내려서 오른쪽 편, 1161번 버스 탑승, 연산군묘 하차
(정의공주 묘역 하차)
사진에서 Pink점이 연산군 묘역이다.
그 주위에는 여러 왕족들의 묘가 다수 있는데 지금은 도로가 개통되어
지기(地氣)가 끊어졌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시루봉과 북한산 끝자락에 위치하여
훌륭한 묘역임은 분명하다.
또한 경복궁에서 10여리 정도여서 당일치기로 성묘를 다녀 올 수 있기에
왕족들의 묘들이 많이 조성되어 있다.
답사에 앞서 위성지도를 우선 펼쳐보는 버릇은 풍수에 관심이 있어서도 그러하겠지만
이제 어느정도 묘역의 터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자의 자궁처럼 주산(主山)을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의 산들이
포근히 묘를 감싸 안는 그런 묘터는 전국어디에서도 이제 보기 힘들어졌다.
연산군의 묘는 최근에 북한산 둘레길(19~20구간)이 묘역 바로 앞으로 조성되어 있어 등산객들의 발길이 많아졌다.
또한 몇년전만 하더라도 개방이 되질 않았으나 현재에는 무료관람 뿐만 아니라 문화해설사의 설명으로
많은 탐방객이 연산군을 뵙는(찾는) 일이 많아졌다는 문화해설사의 안내이다.
연산군 묘는 사위와 딸(공주)과 함께 외롭지 않게 조성되어 있다.
능이 아닌 까닭에 재실은 있으나, 정자각이 따로 있질 않다.
하여 제사는 묘앞 상석위에서 직접 지낸다.
우선 연산군의 묘를 방문하기전에 연산군에 대해서 알아보자.
[ 휘 융(). 성종의 맏아들. 즉위 3년 동안은 별탈 없이 보냈으나,
1498년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金宗直) 등 많은 신진 사류(士類)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1504년에는 생모인 폐비 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鄭氏) ·엄씨(嚴氏)의 모함으로
내쫓겨 사사(賜死)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仁粹大妃)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尹弼商) ·김굉필(金宏弼)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다[甲子士禍].
또 그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
경연(經筵)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해서 언로(言路)를 막는 등
그 비정(秕政)은 극에 달하였다.
급기야 1506(중종 1)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의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어
교동(喬桐:江華)으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그해에 병으로 죽었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그것은 선조 이후 다시 붕당(朋黨) 및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한편으로는 임진 ·병자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
연산군의 묘는 묘만 덩그러이 홀로 외로이 - 성묘도 하지 않는 상태로 있을거라는 -
있을거라는 생각으로 찾아오면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비록 왕에서 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지만, 왕족의 묘이고
군(君)의 묘역이기에 군에 버금가는 묘역으로 조성되어 있다.
사진에서는 맨 뒤쪽 좌측(보는 관객 입장)이 연산군의 묘이다.
따라서 능에 있는 "병풍석, 난간석, 혼유석, 정자각, 석양, 석호,석마, 상계~중계~하계, 사초지"등은
찾아 볼 수 없다.
(아래 사진에서 연산군의 묘와 주변묘들을 살펴보자.)
연산군에 대한 궁금증은 많을 것인바, 문답형식으로 좀더 연산군과 그 시대의 시대상을 알아보자.
Q1) 연산군이 폭군이 된 것도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인데,
자신의 어머니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고 그랬기 때문에 어렸을때부터
어머니 사랑을 못받고 자라서인지 더욱 여자의 몸을 좋아한거 아닌가요?
A1) 그렇게 감상적으로 연산군을 보는사람도 있습니다만 연산군은 그래서
폭군이 됐다기보다는 성격이 괴팍하고 이미 폭군이될 소질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자로 있을때 인성교육이나 모든 왕으로갖춰야할 교육을 요즘으로치면
특별과외를 받고 자란 귀하신몸 입니다. 아래의 그의 성격에 관한일화가 있습니다.
성종이 어느 날 세자(연산군)를 불렀습니다.
부왕의 부름을 받고 온 세자 융이 성종에게 다가가려 할 때 난 데 없이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등을 핥아댔습니다.
그 사슴은 성종이 몹시 아끼던 애완동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융은 사슴이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몹시 화가 나서 융을 꾸짖었습니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그는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죽여버렸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그와 그의 스승들에 관한 것.
융에게는 허침과 조자서 두 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두 스승들의 성격은 사뭇 대조적이었습니다.
조자서는 엄하고 깐깐한 데 비해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융은 자주 수업시간을 비우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깐깐한 조자서는 툭하면 그 사실을 상감에게 고해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허침은 언제나 웃으면서 부드럽게 타이르곤 하였습니다.
어린 세자는 당연히 조자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했지요,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 '조사서는 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라고 낙서를 해놓았습니다.
융의 이 낙서는 단순한 낙서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융은 왕위에 오르자 조자서를 가장 먼저 죽여버렸던 것입니다.
또 여자를 좋아한건 왕이면 모두 여자를 좋아하게 돼있습니다.
왕옆에 항상 자기맘대로 할수있는 예쁜색시가 수두룩한데
안좋아할 왕이 있습니까? 게다가 아버지 성종또한 호색가였구요.
(성종은 총 12명의 부인을 두었지요.)
A1') 연산군의 어머니는 훈구파 세력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당시 연산군의 어머니는 사림 세력이었고,
그래서 사림 세력을 궁에 들여 벼슬을 주었다고 합니다.
훈구 세력은 연산군의 어머니를 모함해 사약을 내렸고
[그때 사약은 지금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것처럼 마시면 바로 죽는
그런 것이 아니라 마시면 귀, 코, 입, 심지어 눈에서까지 피가 나와
아주 고통스러워 하다가 죽는 그런 사약이었다고 합니다.]
연산군의 어머니는 흰 조각천에 피를 토하고
'이것을 내 아들에게 주고 어미의 고통을 알려달라'며 자신의 친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연산군의 어머니의 어머니, 즉 외할머니는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그 피 묻은 조각천을 주었다 합니다.
연산군은 이 조각천을 보고 큰 패닉에 빠지게 됩니다.
어머니에 대해 물으면 '알려고 하지 마라.'며 대답을 거부하던 선왕과 중신들에게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선왕과 중신들이 있었던 궁이 짜증나고 따분한 공간으로 느껴졌지요.
그는 어릴 때 다 받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궁으로 여자를 불렀습니다.
Q2) 그리고 또 다른 이유중에 하나는 왕이 되면
여기저기 적이 많아서 일부러 폭군짓을 했다고도 하던데
사실은 연산군이 그림도 무척 잘그리고 똑똑하기도 그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A2) 성격이 그러니 신하들이 "전하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또는 "전례에 어긋나는일이 옵니다 전하""이것은 이렇게 해야하옵니다
전하" 이렇게 간섭을 하니 슬기로운 왕 같으면
이를 잘 처리 하겠지만 워낙 포악한 성격의 연산군은 화딱지가 나는겁니다.
그래서 "내가왕이냐 신하냐" 이러면서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 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버렸습니다.
이러면서 귀찮게 하는 신하는 닥치는대로 처벌을 하고 죽이게 되는겁니다.
A2') 연산군은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알기 전 까지는
본래 효자였고 총명하고 합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합니다.
[그러나 무도했다고 하죠.;;]
어머니가 당파 싸움에 의해 죽게 된 것을 알게 된 연산군은
폭군으로 변모해 어머니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며
선비들을 학살하는 '무오사화'를 일으킵니다.
Q3)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폐비 윤씨였나요?)가 죽임을 당할때
직접 눈으로 보았나요 아니면 혈흔을 보고 알았나요?
A3) 죽을때는 못봤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성종또한 그말을 연산군에게 비밀로 붙치라고 명령 하였습니다.
후에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후 친모 윤씨의 어머니 즉 연산군의 외할머니가
피에 물든 금삼을 연산군에게 바쳐서 알게되어 사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박종화선생의 금삼의피는 이사건을 다룬 소설 입니다.
A3')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연산군은 세자로 책봉될 때까지
자기 어머니가 왜 죽었는 것도 몰랐습니다.
[어쩌면 중신, 혹은 선왕이 죽지않고 폐비가 되어 쫒겨났다고 말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Q4) 그리고 많은 검색에서 연산군은 정말 이유없이 아무나 마구
죽여버리는 완전폭군이라고들 하시는데요. 제가 말한 연산군의 이 이면이 틀린건가요?
A4) 연산군은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어김없이 표출 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략 즉위 3~4년 부터임.)
12년 집권기 중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많은 사람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습니다.
게다가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고 자신의 사냥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하는 등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위 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런 폭정의 결과로 그는 국민적 저항을 받는 희대의 폭군으로 인식되었고
마침내 박원종의 반란으로 폐출되기에 이릅니다.
그에 관해서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1736~1806)이 지은 조선시대 야사총서인
"연려실기술"에는 그가 밤에 자다말고 미친듯이 소리지르며
궁궐의 후원을 뛰어다니느 것을 적고
또 평소에도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어 "왕이 미쳤다"고 적었습니다.
연산군은 미친것 입니다.
A4') 마구 죽이긴 했지만 이유없이 죽이진 않았습니다.
단지 그 이유가 어이없고 황당한 것이죠.
예를 들면, 아버지의 애완동물인 사슴이 자신을 핥았다고 죽여버린다던가...
화제를 왕이 아닌 일반인으로 돌려, 제 어미가 연산군의 어머님처럼 그렇게 돌아가셨다면
과연 일반인은 그 심정이 어떻했을까요?
연산군 어머님(제헌왕후=폐비윤씨)의 묘역입니다. 회묘(회릉에서 회묘로 강등됨.)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197-26번지에 있습니다.
[ 참고로 연산군의 부친은 성종으로 선릉(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능이 있습니다. ]
[폐비 윤씨]
윤씨(연산군 어머니), 폐서인이 된 후에 대한 실록이나 야사의 기록
사실상 조선왕조실록에는 폐비의 당위성이나 그녀가 내칠 수 밖에
없는 식의 기술만 있었고, 또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왕권에 대한 거역이기 때문에 다른 기술은 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차피 결론은 정해 놓고 그 과정을 맞추었을 뿐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폐비윤씨가 정희왕후가 세조의 승하후와 성종의 즉위 후
대리청정을 했던것 처럼 자신도 원자가 나중에 보위에 오르면
임금을 끼고 조정을 다스릴꿈을 가지고 있고 성종에게 "내가 살아서 꼭 해야할 일이
있으니, 지금은 죽을수 없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종은 혹시 수라상에 폐비가 독을 넣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폐비윤씨가 지나가는 곳에는 왕에게 올릴 반찬을 두지 않도록 금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종은 여기에 덧붙여 폐비윤씨가 자신을 향해서
"나중에 너의 발자취를 없애 버리겠다"
심지어 초상때 치는 휘장을 가르키며"당신의 집은 저기이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성종의 이말이 어느정도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씨를 내쫓은뒤에도 성종은 꿈에서 폐비윤씨를 만나는
가위에 눌리곤 하였다고 합니다.
윤씨가 내쳐진 그해 10월에 폐비윤씨의 집에 도둑이 들어서
윤씨의 물건을 훔쳐가는 일이 발생했는데,
대신들은 이웃 주민들을 수사하고 폐비윤씨의 집 담장을 높이
쌓자고 건의 하였으나 성종의 대답은 냉소적이어서
자신이 방비하지 않아서 도둑을 맞은것 뿐이고
그것 때문에 죄없는 이웃을 괴롭혀서야 되겠냐고 말했는데,
도둑맞았다고 담을 쌓아주자고 하면 도성안의 도둑맞은 집은 모두
국가에서 담을 쌓아주어햐 하느냐는 말도 했다는 것입니다.
궁궐 밖으로 내쳐진 폐비 윤씨의 존재는 차츰 성종뿐 아니라
대비들에게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연산군이 성장해 어미의 존재를 알 경우,
자신들에게 들이닥칠 폐비 윤씨의 보복이 두렵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였습니다.
윤씨가 폐비된 지 3년 뒤 결국 성종은 정희왕후와
인수대비의 동의를 얻어 사약을 내렸습니다.
『기묘록』에는 폐비윤씨가 사사된 결정적인 이유를,
인수대비가 내시 안중경을 시켜 폐비를 살펴본 후 왕에게
거짓으로 다음과 같이 고하게 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매일 같이 머리 곱게 빗고 화장하여 조금도 후회하는 빛이 없었습니다.
내수사에서 보낸 음식도 독약이 든 것이라 하며 먹지 않고
후일 원자가 자라면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 실록에는
왕비의 죄목만이 빼곡히 나열되어 있습니다.
인수대비가 언문으로 내린 폐비의 사사 이유 8가지 중 하나는
“(윤씨가) 종에게 죄가 있으면 ‘지금은 비록 너에게 죄 줄 수가 없더라도
장차 너를 족멸시킬 것’이라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마음으로 원자를 가르친다고 하면 옳겠는가.
부왕이 위에 있으면서 모름지기 이와 같은 사람을 단절시켜야만
원자를 보양할 수 있을 것이다”였습니다.
결국 폐비윤씨는 1482년 8월에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이듬해인 1483년 2월 연산군이 세자에 책봉됐다.
그 어미의 희생으로 아들이 보위를 보장받은 셈입니다.
『기묘록』은 폐비 윤씨의 죽음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폐비 윤씨가 피가 뚝뚝 묻은 수건을 어머니 신씨에게 건네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거든 이것으로 나의 원통함을 말해주오”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며, 이 수건은 훗날 연산군을
분노의 화신으로 만들었다는 일명 '금삼의 피'입니다.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그 길로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소용과 엄소용을 찾아가 밧줄로 묶어 패죽이고,
할머니 인수대비마저 머리로 치받아 죽음으로 몰고 갔는데,
조선의 민중들은 ‘정신을 놓아버린’ 폭군으로 인해
가장 고통스러운 치세를 맛보아야 했지만,
어린 시절 세종을 능가하는 성군이 될 것으로 촉망받던 연산군은
어머니가 남긴 원망의 씨앗과, 아버지의 배신, 할머니의 무정함이 남긴
분노의 굴레에 갇혀 조선왕조 사상 최악의 군주로 남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은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숭하고, 그녀의 묘를 현재의 회기동으로 이전해
회릉으로 승격시켰으며, 또 인근에 연화사를 중창해
어머니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습니다.
원각사를 기생들의 연회장소로 만들기까지 했던 연산군이 불심으로 연화사를
중창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서도, 다만 살아생전 불심이 돈독했던 어머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아들의 공양이 그것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산군이 폐위된 후 그녀는 다시 폐비 윤씨로 돌아갔고,
회릉은 회묘로 강봉되었습니다.
폐비 윤씨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질투에 미친 여자’,
‘아들을 망친 사악한 어머니’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성종이 조선의 태평시대를 가져온 성군이라는 평가를 받을수록,
그녀는 버림받아 마땅한 여자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실제로 금삼의 피를 남겼는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단언할 수 없으며, 또 한 여자로서 그녀의 삶을 바라본다면
반드시 경멸돼야 할 대상으로만 평가하기에는 왠지 가혹한 감이 없지 않으며,
그녀가 사랑한 것이 한 남자였지 일국의 왕이 아니었다면,
자신을 배신한 남자에게 분노를 토해낸 일상적 사건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이 그토록 큰 죄가 된 것은 그가 사랑했던 남자가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제헌왕후)에 대해 좀 더 질의 응답으로 알아 봅니다.
1. 폐비윤씨가 성종이랑 12살 차이가 나던데, 성종이 자을산군으로 있을때 부터 윤소화(폐비윤씨)를 좋아했던게 사실 인
가요??
-일단 알려진 바로는 성종과는 12살 차이가 나고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와는 8살 차이가 났다고 합니다.
음, 어렸을때부터 좋아하게된건 아니구요. 윤씨가 궁에 무수리로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때 보고 좋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요;)
2. 제가 '왕과 나'랑 최근 재방송하는 '왕과 비'를 동시에 보는데, 비슷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차이가있던데,
폐비윤씨의 진짜 성격은 어땠나요? 제 생각이지만 폐비되긴 했어도 일단 왕비자리에 오를려면 인품이나 여러가지 조건
이 왕비가 될 만해서 된거아닌가요? 게다가 성군이었던 성종의 왕비니까............
-윤씨의 원래 성격은 검소하고 뭐 그랬답니다(어이..). 왕비가 되고 하기전에는 정말 자질은 충분했으나, 배경이 그렇게 좋지많은 않았죠. 윤씨는 왕비가 되고 성종이 자신을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자 투기심이 생겼다고합니다. (꽤 심했다고 합니다.)
3. 어을우동이 성종과 관련됬는지는 일단 극이나 소설에서만 다루어지니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폐비윤씨가 투기심을 갖게된 진짜 이유는 뭔가요?
-어을우동이 실존하는 인물일지 아닐지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투기심이 생긴 이유는 성종의 바람기 때문입니다.
성종은 조선 왕들중 가장 후궁이 많았던 왕입니다. 공식 후궁만으로도 10여명이라고 하고, 비공식적인 후궁도 있다고 합니다.
윤씨는 성종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후궁들만을 찾아가니 불안하기도 하고 질투심도 생기고 그런거지요.
그러다 투기심이 심해지자 용안에 상처까지 냈다고는 하나(다른 설로는 성종이 안아주려 하였는데 그것을 뿌리치다가 그랬다고도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에는 기록되어있지 않다고 하는군요.
4. 성종이 윤비를 왕비로 즉위시킬때, 사랑해서 인수대비나 조정의 반대에도 즉위시킬수 있었던걸로 아는데, 나중에 폐비
가 될수밖에 없었던건, 윤비가 어릴 적 좋아했던 여자+ 원자를 낳은 사람일 뿐이라 매력이 없어진 이유도 있는건가요?
-음.. 즉위시킬때는 성종과 정희대비(조선 7대 왕 세조의 아내)가 나서면서 윤씨를 즉위시키자고 하였다고 합니다.
폐비 시킨 이유는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말이 있더군요.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내서 그렇다는둥 뭐 말은 많습니다(많던가.) 그리고, 성종이 윤씨에게서 마음이 떠난것은 훨씬 전이었습니다; 후궁들이 많으니 그렇지요.
5. 성종이 남긴 책이나 그 당시 성종이 윤비를 어떤식으로 표현했나요?
-음.. 글쎄요. 그것은 확답은 못해드리겠습니다만 처음에는 좋게 봤지요. 당연하게; 그러나 마음이 떠난 후 투기심이 많은 여자라고 하더라고 알고있습니다;
6. 폐비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게되는데 관여한 사람이나 이유는 뭔가요?
-소혜왕후(성종의 모후. 인수대비)와 정소용과 엄소용 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마음에 들지 않은것도 있겠지만; 후에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윤씨가 권력을 다시 잡게될까봐 였다고 합니다.
7. 폐비윤씨가 적삼에 핏자국을 남기고 원자(연산군)에게 보여주란 식으로 말했다던데, 사실인가요??
-음. 그것에 대해서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였을때 그 피가 입고있던 치마에 묻었다고도 하고, 일부러 남기고 나중에 융(연산군)에게 보여주라고 하였다고도 합니다.
8. 연산군이 폐륜아가 되기때문에 아직까지도 폐비윤씨가 제헌왕후가 아닌 폐비로 표기 되는건가요??
- 예. 그렇습니다.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인해 폐위당해서 윤씨에게 내려졌던 관작이 모두 박탈되었다고 합니다.
(저희가 제헌왕후라 부르는 이유는 그냥 이라는 이유도 있답니다...)
9. 윤비가 폐위되고 죽게되기까지 정말 진실은 뭐죠??
-확실한 답은 없습니다. 폐비되었던 이유는 용안에 상처를 내서 라던지 칠거지악중 하나인 투기를 어겨서 그랬다는지 말은 있습니다. 윤씨가 죽은것은 말그대로 '모함'이었으리라 봅니다. 여러 의견들을 봐도 그렇구요.
10. 인수대비는 왜 아들을 과잉보호하며 며느리에게 그런건가요?
+폐비윤씨의 초상화같은것도 올려주실수 있음 올려주세요ㅠㅠ
-폐비윤씨의 초상화 같은것은 없을듯 싶습니다만. 소혜왕후(인수대비)는 윤씨의 배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권력욕이 강했던 소혜왕후(인수대비)에게는 몰락한 양반가문의 딸이 못마땅 했을겁니다.
게다가 소혜왕후(인수대비)는 윤씨의 집안에 값비싸고 많은 혼수품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윤씨의 집안에선 별 볼일없는 혼수품을 가져와서 더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윤씨의 투기심도 한몫 하겠지요.)
11. 성종도 폐비를 사랑했을텐데 왜 그런 사람에게 사약까지내리게 된거가요?
-사랑한건 '잠깐'이었습니다. 폐비를 시킬때는 반대를 했었다고는 하나(반대의 이유가 원자의 모후라는 이유였다고 기억합니다;) 사약을 내릴때는 반대가 없었다고도 하고, 있었다고도 합니다. (역사는 불분명한것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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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조선 27대왕 중 가장 시를 잘 짓고, 즐긴이가 연산군이라하며
연산군 일기에 전해 오고 있습니다. (주로 7언 절귀) 함께 감상해 볼까요?
(아래 시들을 보노라면 조선의 폭군과는 어울리지 않은
시작에 출중함이 있어 보입니다. )
[연산군의 시]
연산군이 시집을 엮긴했지만 지금까지 전해지진 못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신에 연산군일기에 연산군이 지은 시가 120여편이 있다고 하네요.
(연산군은 1494년 12월에 왕에 즉위하여, 1506년 9월에 중종반정으로 물러납니다.
1498년 7월에 무오사화, 1504년 2월에 갑자사화가 일어납니다.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시를 감상해 봅시다.)
♣ 1496년 11월 23일 (21세), 많은 근심
기침은 심하고 근심은 많으니 지친 마음 그치지 않아
이리저리 뒤척이며 밤새 잠을 못 이루네
간관들은 종묘사직 중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소장이란 소장마다 경연에만 나오라네
♣ 1499년 3월 3일 (24세), 어찌 이 날
어찌 이 날
술 내리기를 사양하리
잔뜩 취해 오거든
나를 위로하여라
♣ 1499년 12월 1일 (24세),기쁜 마음
기한제 끝났으나센 바람 불어오네
하늘이 정성에 감동하여 곧 보답하시리
내 술과 안주로 기쁜 마음 표하노니
얼근하게 취하거든 내 시에 화답하오
♣ ♣ 1499년 12월 31일 (24세), 어진 정승들이여
길은 멀고 땅은 미끄러워 다니기 어려운데
충성심 가시지 않아 대궐에 나왔구려
비노니 어진 정승들이여 나의 잘못을 살펴주고
복령과 대춘처럼 오래오래 사시오
♣ 1500년 3월 3일 (25세), 삼짇날 승정원에
삼짇날 봄바람 부는 서울 거리에
새 날고 물고기 놀며 온갖 꽃 향기롭네
난정의 놀이를 뉘라서 좋다는고
은대에서 어사주로 취함만 하리
♣ [연산군일기 1500년 6월 22일] 25세
고요한 은대에 낮이 더디기만 한데
승지들은 무더위로 졸고만 있네
연꽃을 꺽어 은근히 주리니
붉은 소주 가득한 잔 마다치 말게
♣ [연산군일기 1500년 6월 27일] 25세
대궐 안 찌는 듯 더워 흐르는 땀 장물 같고
불같은 해 타는 구름에 낮이 더욱 지겹구나
향기로운 한잔 술 마실 수가 있으니
오히려 더운 곳이 서늘해지네
♣ 1500년 8월 1일 (25세), 밝은 달 깊은 시름
비 개고 구름 갇혀 밤 기운이 맑으니
달 밝은 윤각에 꿈 이루기 어렵구나
해마다 좋은 때를 구경할 수 없으니
어옹의 한 평생을 지남만도 못하네
♣ 1500년 10월 25일 (25세),노을
바람 맑은 동해에는
푸른 노을 자욱하고
비 어두운 서산에는
해가 침침하네
♣ ♣ [연산군일기] 1500년 12월 26일] 25세
세상사 개인사 근심치 말고
모름지기 인간사 꿈속 일로 날리세
♣ 1501년 1월 22일 (26세), 사계화 한 분으로
이슬에 젖은 붉은 꽃이 푸른 잎 속에 짙고
누각에 향기 풍겨 훈풍에 취하네
구경만 하라고 은대에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적적할 때 보고 천지조화를 생각하라는 뜻이지
♣ 1501년 4월 22일 (26세), 철쭉꽃 향기
은대에 일은 없고해는 길기도 한데
다들 책상 앞에서반은 벽에 기대어 있구나
취한 뒤 졸음 오면마음이 고달프니
어찌 선온과 함께 꽃향기 감상을 사양하리오
♣ 1501년 5월 10일 (26세), 술과 작약
꽃을 주고 술을 줌은
가까이 있는 까닭인데
즐거움 속에도 근심이 있음을
뉘라서 알겠는가
♣ [연산군일기 1502년 9월 5일] 27세
어제 효사묘로 나아가 어머님을 뵙고
술잔 올리며 눈물로 자리를 흠뻑 적셨네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건만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
♣ [연산군일기 1503년 10월 14일] 28세
들국화 시들었는데 집국화는 난만하고
붉은 매화 떨어지자 흰 매화 한창이네
사물을 감상하며 하늘 이치 안다지만
임금의 도는 우선 화목한 정치에 있네
♣ [연산군일기 1504년 10월 15일] 29세
간신이 악의를 품고도 충성한 양하여
임금을 경멸하여 손아귀에서 희롱하려 하도다
조정에서는 폐단을 한탄하나 배격될까 두려워
다투어 서로 구제하는 못된 버릇 일으키네
♣ [연산군일기 1504년 12월 16일] 29세
비단 소매엔 향기가 없고 거울엔 먼지 끼니
한 가지의 꽂이 여위어 봄 모양이 아니네
십 년 동안 군왕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니
비로소 아름다움으로 잘못 살았음을 알겠노라
♣ [연산군일기 1505년 1월 19일] 30세
풍속이 바뀌고 고쳐져 참으로 밝은 때로세
봄빛이 화창해 감싼 경치가 기이하구나
이로부터 태평세월 조야가 엄숙하니
술 옆에 차고 꽃가지 꺾음이 제일 좋으리
♣ [연산군일기 1505년 4월 3일] 30세
백성에게 잔학한 자로 짐과 비교할 자 없는데
내시가 위를 범할 줄 어찌 생각조차 했으리요
부끄럽다 못 해 통분하기 그지없다는 온갖 생각을
바닷물에 씻고자 하여도 그 한을 풀지 못하리
♣ [연산군일기 1505년 8월 13일] 30세
특별히 정자에서 구경하기 허락하니
싸늘함이 비를 타고 맑은 가을 재촉하네
온화 위엄 양립해야 참 왕도일세
충성 다해 은혜 갚을 신하 누구뇨
♣ [연산군일기 1505년 8월 17일] 30세
태평한 때 가을 관광 꺼리지 마오
국화 떨기 금빛 품고 향기 아직 안 토했네
푸른 술 향기로워 궁온에 띄우니
서리 내린 후 온 가지가 누렇다 할 것 없네
조야가 편안하여 태평한 이때
잔치를 허했으니 취할 만하오
언제나 용렬한 짐 덕이 없어 부끄러운데
오늘은 인재들 많아 되레 즐거워라
큰 은혜 깊이 느껴 즐기기를 꺼려 마소
낮닭이 한창 조니 해가 어찌 기우랴
대궐 술 다시 받기 사양치 마오
호방한 임금 나라 편케 하도록 힘쓰면 되네
♣ [연산군일기 1505년 8월 27일] 30세
조정에서 존호를 받으니 부끄럽고 황망할 뿐
돕는 힘 버리지 않으면 국세는 날로 퍼지리
성대한 오늘 잔치 보기 드문 경사이니
즐거이 취하기를 달빛 볼 때까지 하여라
♣ [연산군일기 1505년 9월 16일] 30세
너무 애달파 눈물 거두기 어렵고
슬픔이 깊으니 잠조차 오지 않네
마음이 어지러워 애끓는 듯하니
이로 해서 생명이 상할 줄 깨닫네
♣ [연산군일기 1506년 2월 25일] 31세
가벼이 대답함은 서로 깊게 믿음을 알고
사사로이 말함은 두터이 친하기 때문일세
호기를 내는 것은 천성을 따른 것이고
미친 짓 하는 것은 천진난만함에서 오니
군신이 해학하며 노는 것을 말하지 말라
나무라고 비웃음은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이니
덧없는 인생을 뉘라 애석해하지 않으리
봄을 핑계하여 취하는 것을 어찌 마다하랴
♣ [연산군일기 1506년 3월 8일] 31세
색이란 하루아침의 일 공덕은 만고에 남으니
미녀 데리고 즐겨 놀 생각일랑 하지 마오
♣ [연산군일기 1506년 3월 19일] 31세
동산에 가득한 봄빛은 햇빛이 찬란한데
꽃바람이 새로 단장한 옷자락을 나부끼고
짙은 녹색 연분홍 화려하기도 하네
그 누가 청광을 위해 이슬향기 가져왔나
♣ [연산군일기 1506년 3월 20일] 31세
대궐 안에서 꽃과 달의 시구를 누가 가르쳤던가
두고 읊으매 생각이 간절하여 정분만 더하네
다시 보매 밝은 햇살이 도리를 감쌌구나
내가 바로 삼한 제일의 호걸임을 문득 알았네
♣ [연산군일기 1506년 3월 29일] 31세
특히 어질고 뛰어난 이를 뽑아 서호로 보낸 뜻은
참으로 충성한 자 구함이지 속이는 자 구함이 아니오
바람은 아지랑이 빛을 끌어 푸른 물결에 더하고
경지는 화창한 빛으로 옮겨져 맛 좋은 술병 띄웠네
길을 막아 있는 화류는 아리따움을 다투고
정자에 가득한 여인은 날씬함을 겨루누나
뉘 알리요 넓은 은혜와 정성으로 내린 술이
취중에도 나라 보전에 더 힘쓰란 것인 줄
♣ [연산군일기 1506년 6월 1일] 31세
국가에 소홀하고 군왕을 속인 죄를 어찌 용서할까
몸을 아끼고 명예를 구함은 간흉들의 짓이로다
누가 능히 단심의 정성을 가져다 바쳐
큰 은혜 갚으며 태평세월 즐기게 하려는가
♣ [연산군일기 1506년 7월 1일] 31세
고요한 밤 대궐 뜰 오동잎에 비소리만 싸늘한데
귀뚜라미 귀뚤귀뚤 이내 수심 일으키네
한가로이 거문고에 새 곡조를 올려보니
한없는 가을 시름 흥과 함께 굴러가네
♣ [연산군일기 1506년 7월 14일] 31세
영화는 초방 벼슬 은혜로 시작하여
소임이 승지니 총애가 번성하다 하겠네
순수한 뜻 돌려 도우려는 생각 싫어하지 마오
그르치면 면하기 어려워 그땐 패망하리
♣ [연산군일기 1506년 7월 28일] 31세
주름진 얼굴 구부러진 허리에 쑥대머리를 홑뜨리고
찬마루에 구부려 자며 옛날 놀던 일 생각하네
남들이 비웃으며 주렴 제치고 보는 줄 알지 못하고
누가 짐의 호기 당하리 웃음 치며 과시하네
♣ [연산군일기 1506년 7월 30일] 31세
푸른 이슬은 밤에 맺혀 비단치마 적시고
가을바람은 소슬하여 앳된 간장을 녹이누나
난간에 기대 기러기 소리 들으니 달빛은 차갑고
눈물 가득한 눈시울엔 슬픈 마음 메어지네
능을 볼때는 동양식과 서양식이 서로 다르다.
동양식은 능의 주인 입장에서 보며, 서양식은 보는 사람이 기준이 된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우측(보는 사람쪽에서는 좌측이 됨), 즉 왕(남자)이 묻힌다.
위 사진에서, 오른쪽 능(묻힌이 기준)이 연산군의 묘이며,
왼쪽능은 연산군의 부인 신씨의 묘이다.
이제,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에 대해 살펴보자.
[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는 1472년 성종 4년 신승선과 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신승선 부인 이씨의 아버지가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이었습니다.
(즉, 거창군부인 외할아버지가 임영대군, 외증조할아버지는 세종대왕)
이렇듯 짱짱한 가문의 여식인 신씨는 연산군의 세자시절에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되었다가
연산군 즉위 후 왕비에 책봉되었습니다.
1506년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출 되자 그녀 또한 거창군부인으로 강등되었고,
대궐에서 내쫒겨 정청궁에 머물다가 중종 1년 폐비의 신분으로
성종대왕의 후궁들과 함께 거처하는 것은 법에 어긋난다 하여,
신승선의 집을 수리해서 거처하게 했습니다.
비록 연산군이 폐출되었다고는 하지만 중종과 신하들이
폐비 신씨는 스스로에게 허물이 없으니 도성안에 거처해도 문제없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죠.
신승선의 집에 거처하던 폐비 신씨는 중종 32년인 1537년 사망하여,
나라에서는 복상과 장례를 후하게 치뤄줬다고 합니다.
폐비 신씨의 아버지 신승선은 1436년 생으로 돈녕부승, 병조참지, 병조참판 등을 지내다가
예종 대에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3등, 성종 즉위 후
헌신한 공으로 좌리공신 3등이 되었습니다.
딸이 세자빈이 되자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등으로 성장한 후
딸이 왕비가 되자 거창부원군에 책봉되지만 중종반정으로 몰락합니다.
폐비 신씨의 오빠들로 신수근, 신수겸, 신수영 3형제가 있었는데요,
장남 신수근은 중종의 1비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로 2대에 걸쳐
국구가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중종반정으로 역적으로 몰려 몰락했습니다.
차남 신수겸은 동생이 왕비였던 덕에 승승장구하여 형조판서 까지 지냈지만
중종반정으로 몰락했구요, 막내 신수영 또한 도승지, 호조참판,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지만
역시 중종반정으로 몰락했습니다.
연산군의 묘지는 연산군이 중종 1년 강화도 교동에서
역질로 병사했기 때문에 그곳에 안장되었다가
중종 8년 폐비 신씨의 상언을 받아들여 연산군 묘를
강화도 교동에서 양주군 해동명 원당리 (지금 위치) 로 이장했습니다. ]
연산군의 묘에는 왕릉에 볼 수 없는 묘비(燕山君之墓)와 향로석(중앙)이 보인다.
능에서 볼 수 있는 혼유석 대신에 상석 (이곳에 상을 차려 놓고 재례를 지낸다.)이 설치되어 있고,
석양, 석호, 석마는 보이질 않는다.
연산군이 폐비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연산군 즉위 직후 성종의 묘지문 제작 과정에서입니다..
연산군은 성종 7년 11월에 태어났으나,
성종 8년 왕비 윤씨가 비상을 소지했던 일로 성종의 폐비 교지가 내려진이후에
궁 밖 봉보부인의 집에서 위탁양육되기 시작했고,
이때, 폐비가 취소되었음에도, 아이를 왕비에게 돌려주지 않아,
결국 한돌도 되기 전에 어머니의 손을 떠나야 했었습니다.
이후 중전 윤씨의 궁중내 입지가 점점 약화되었고, 결국 2년뒤에 폐출되었습니다.
이후 성종 13년 사사될때까지는 아예 어머니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으며,
사사된 이후에는 성종이 윤씨에 대해 함구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폐비되어 사사되었다는 사실은 이때까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실록 기록에는 연산군 1년 성종의 묘지문 제작 과정에서 윤기무란 이름이 나오게 되자,
이에 대해 하문하였다가, 자신의 생모 윤씨가 정현왕후 이전의 왕비였으며,
폐비되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수라를 들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이 폐비를 복위시키는 문제를 거론하엿을때,
제일 먼저 반대한 이가 바로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인 윤호였습니다.
연산군 2년 폐비의 복위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을때 사림들이 일제히 반대하였고,
결국 왕실 정통성이 문제가 되었던 무오사화에서 사림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의 성종의 신료들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연산군 8년,
임사홍을 비롯한 일부 세력이 권력을 잡기위해 성종이 내렸던 함구령을 깨고,
윤씨의 어머니였던 신씨가 가지고 있던 윤씨의 피가 묻은 금삼을 왕에게 내어놓고,
윤씨가 훈구세력을 등에엎은 궁중세력에 의해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사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른바 역사가 말하는 '폭군 연산'이 되 버린 것이죠.
(물론, 외조모 신씨나 자신의 외숙들에 대해서도 이미 이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
연산군에 대해 잘 아시는 한 답사객이 연산군과 신씨 묘에 대해 에를 올리고 있다.
시 잘짓기로 유명한 연산군은 승지 '강혼'으로 하여금 시를 하사하기도 하였는데...
☞승지란? : [조선시대의 승지는 승정원에 배속되있는 관리입니다.
승정원은 왕의 직속기관으로써 정3품 당상관이지만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 이유는 왕의 교지나 문서를 전달하는 역활을 했기 때문에 근처에서 왕을 모시었고 그에 따라서 왕의 총애도 두터웠습니다.
승지는 정3품이므로 그럭저럭 높은 관직입니다.
정3품이란 상하가 있는데요, 당상관과 당하관이 그것입니다.
승지가 될려면 정3품 당상관인데 문신계로 따지면 통정대부 이상이되야 합니다. ]
[ 시인 연산군(燕山君)과 승지 강혼(姜渾) ]
연산군은 우리 나라 역사에 있어서 폭군의 대명사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시인으로서의 자질 또한 컸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다.
중종반정으로 그의 시집이 불태워졌기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연산군일기」에는 그가 지은 120여 수의 시가 남아 있기도 하다.
현존하는 그의 시는 거의 병적인 광태를 보인 집권 후반기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이를 국문학 쪽에서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 알 수 없지만,
시인으로서의 소양은 잘 갖추어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감수성과 문장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시를 이렇듯 많이 남기고 있는 것에서
연산군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놀랍기까지 하다.
그는 시를 지어 신하들에게 자주 내려주곤 했는데,
이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런 사람이 왜 그토록 광폭한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하는
안타까움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연산군일기」에서 최초로 보이는 어제시(御製詩)는 그의 재위기간이 6년이나 지난 때였다.
"승정원이 비록 좋은 곳이기는 하지만 명절을 만나도 놀거나 구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분(盆) 하나를 주어 너희들이 구경하게 하는 것이다"
라는 말과 함께 사계화(四季花)와 어제시 한 수를 승정원에 하사했다는 것이다.
이슬 젖은 아리따운 붉은 꽃 푸른 잎 속에 만발하여
향기 풍기는 누각은 남풍에 취하네
구경만 하라고 은대(銀臺, 승정원)에 주는 것이 아니라
심심할 때 보며 천지의 조화를 생각케 하는 것이네
이런 사실을 놓고 본다면,
연산군이 폭군이 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는 꽃 피고 새가 울며 눈이 오는 낭만을 즐기어,
때마다 어제시를 가까이 있는 승지나 사관들에게 하사했고,
신하들도 시로 화답하는 아름다운 장면들을 연출하곤 했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사관들을 아끼는 신하들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집권 말기에 갈수록 사관들을 더없이 징그러운 송충이 보듯 한 것이다.
폭정의 도가 더해갈수록 역사를 두려워하는 마음도 비례하여 커져 갔던 것이다.
집권 후반에 갈수록 도를 더해가는 타락과 패륜은 그의 시에서도 잘 나타난다.
☞ 눈썹은 봄 버들인 양 곱고
얼굴은 이슬 머금은 꽃송이처럼 아름답네
붉은 입술 속의 흰 이를 드러내어
능히 탕부들의 간장을 끊는구나.
☞ 품물은 적을지라도 성질은 한결같은데
인정의 번복은 헤아리기가 어렵도다
윤필상·이세좌는 탐간 죄로 죽었으니
해를 사랑해 따르는 해바라기 부끄러우리.
☞ 영화는 초방 벼슬은 은혜로 시작하여
소임이 승지니 총애가 번성하다 하겠네
순수한 뜻 돌려 도우려는 생각 싫어하지 마오
그르치면 면하기 어려워 그땐 패망하리.
☞ 복숭아나무 가꿔 열매 둘이 열렸는데
하룻밤 광풍에 모두 떨어졌네
가꾼 은근한 공 허사로 돌아가니
무슨 일로 하늘은 아다지 무정한지.
☞ 효(孝)와 의(義)를 다 가져야 선왕의 규범에 맞고
사(邪)에 끌려 교(巧)를 부리면 세상이 흠으로 친다
만약 오늘의 조의에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서릿발 같은 칼날 아래 죽음을 면치 못하리.
연산군의 시는 주로 7언 절구(絶句)다. 또 가까이 있던 승지 강혼에게 시를 자주 내렸다.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강혼도 이에 화답하는 시를 종종 올렸다.
그런데 수많은 어제시를 내려 신하와 화답한 것이 많았으련만,
유독 시구 하나가 사관들의 눈에 거슬리게 했던 모양이다.
즉, 연산군이 강혼에게 시 한 수를 내리자 강혼이 즉시 화답하는 시를 올렸고,
이에 연산군이 강혼 화답시의 문구를 따서 재차 화답시를 하사했다.
구슬 같은 화월 시구를 잊기가 어렵노니
생가를 들을 적엔 이내 마음 경에게로
고요한 주루에 야경이 맑기도 한데
호탕한 이내 심정 어느 누가 위로할까
연산군이 재차 내린 화답시를 받아들고 감격한 강혼은 "전일 화답해 올린 시에
'화월로 임금 마음 비치고 싶네(願將花月照宸懷)' 라고 한 구절을
성상께서 심중에 유념하고 계시니, 감격스러운 마음 한이 없습니다." 라고 아부한 것이다.
이에 평소 강혼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관은 사초에다 평을 하여 휘갈기기 시작했다.
"사신은 논한다. '강혼은 젊어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글짓기를 잘했으며,
성격이 명랑하고 몸가짐이 구차하지 아니하여, 평소에 사림(士林)의 중시하는 바 되었었다.
왕이 그의 글 잘함을 알고 발탁하여 승지를 삼았는데,
무릇 명하는 일이 모두 뜻에 맞추었다.
이러므로 총애가 더욱 높아져 김감(金勘)과 대등했고, 반년이 채 못되어 1품에 올랐다.
왕이 여색에 빠지면서는 모든 음탕한 글과 여총(女寵)에 관한 것을
반드시 강혼에게 짓게 하므로,
강혼은 고금의 일을 인용하고 심력을 다해 왕의 비위를 맞추는 데 전력하니,
사람들이 조롱하여 강총(江摠)의 압객(狎客, 주인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손님)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내용은 앞의 어제시에 따라 나오는 강혼의 기사 다음에 사론(史論)으로 실은 것이다.
따라서 누가 작성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사초 내용을 실록 편찬 당시 그대로 옮겨놓았음을 알 수 있다.
아부 잘하는 강혼을 중국 진나라의 강총에 비유했던 것이다.
강총은 중국 진나라의 신하로 벼슬이 복야 상서령에 올랐던 인물이다.
문장과 시문을 잘하며, 특히 오언·칠언시에 능했다.
그는 정무는 돌보지 않은 채 후원(後苑)에서 후주(後主)를 모시고
여색에 빠져 색정시를 지어 바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연산군 시절의 강혼 역시 당시 사관의 눈에는 중국의 강총과 같은 인물로 보인 것이다.
그후 강혼은 중종 반정공신의 반열에 올라 도승지·대제학·판서를 거치면서 변신에 성공했지만,
항상 젊은 간관의 탄핵 표적이 되는 수모를 겪어야 하는 신세가 되기도 한다.
그는 또 춘추관의 겸지춘추관사를 역임하기도 했지만,
후배 사관들은 그를 추호도 용서하지 않았다.
「연산군일기」뿐만 아니라 「중종실록」에서도 그에 대한 비판적인 사론은 여전했다.
그 중에서 간단한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신은 논한다. 강혼은 글줄이나 아름답게 꾸며가지고 폐주(廢主, 연산군)의
총애를 받다가 한때의 기롱을 받았다.
그 소행이 이 지경이었으니 다른 것은 볼 것이 없다."
그는 한때 중종의 배려로 고향인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갔다 오기도 했으나,
그에 대한 탄핵은 끊일 줄 몰랐다.
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에 제수되자 사직을 청했지만,
그 순간도 대간들의 탄핵이 두려워 사직을 청했다고 사관들은 기록하고 있다.
신용개가 그 시대의 문사들 중에서 남곤과 강혼을 자기 앞에 세우는 것은
이해할 수 있을지라도 그밖에 누구도 자기 앞에 설 수 는 없을 것이라 자부했듯이,
남곤과 강혼은 당대의 대문장가였다.
그러나 둘 다 사림에게 추앙받지 못한 결과를 낳았음이 안타깝다.
사진 앞쪽의 2좌는 각각 연산군 사위 구문경의 묘(좌)와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우)의 묘이다.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 묘 앞의 문인석의 코는 6.25때 남북한군의 교전때
총에 맞아 떨어져간 것으로 6.25때는 이 지역이 북한군의 서울로의 남하 저지선이었기에
주요 교전지역 이었음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연산군 묘역 바로 앞에는 서울시 지정 보호수 1호인 수령 880년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 은행나무는 공교롭게도 수컷이며, 중앙의 아래로 벋은 가지는 남근(男根)과 같아
임신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나무를 갉아 먹어 길이가 짧아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눈에 척 봐도 남근(男根)의 가지가 효험이 있어 보인다?
경험해 보질 않은 나로서는 모른 일이다. 다만, 첫 인상의 느낌으로는
남근(男根)과 너무 유사하다.
인간의 관념상 우선 믿고 들어가면- 설령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라 해도 -
긍정의 것이 되는 것이 보통일지니....
연산군의 재실. 재실은 제사 음식 준비장소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먼 지방에서
올라온 손님들이 하루 묵었다 가는 곳이다.
연산군 묘역 앞의 원당샘. 샘뒤로 나 있는 길이 북한산 순례길 (19~20구간) 이다.
더우시면 목이라도 축이고 가세요.
연산군 묘역에서 동쪽으로 150m 떨어진 세종대왕 둘째딸 정의공주 부부의 묘.
이 지역은 시루봉과 북한산 자락의 끝부분에 위치하여 묘역으로 길지(吉地)이기에
다수의 왕족묘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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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 한해 한국사와 세계사 공부에 치중하고 있는데,관심 분야라 재밌게 읽었습니다.
주로 교육방송 강의를 다운받아 듣는데 급수에도 도전해볼까????하고 있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