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또 흡혈귀가 나타났다. 터미네이터가 사는 곳이다.
왜~앵 소리에 잠을 깨니 새벽 4시였다. 아내가 전등을 켰는데 눈이 부셨다.
"여보! 또 나타났어요. 좀 잡아 주세요!" 아내의 구조신호였다. 전날 잡지 못한 놈을 포함해서 다음날 두 세 마리가 다시 등장하니 며칠째 악순환이다. 우리집 안방이 피(血)를 ‘무한 리필’하는 맛집으로 흡혈귀들 사이에 소문이 크게 난 거 같다. 이 놈들은 홀로 오지 않는데 백 퍼센트 소탕하는 확률이 매우 낮아 아내의 불신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오늘도 새벽 잠을 깨웠지만, 늘 내게 의지하는 것 같아 그래도 기분은 좋다.
“응~ 알았어! 처치해 볼게.”나는 비몽사몽간 짜증은 났지만, 오늘도 흡혈귀를 소탕하는 멋진 터미네이터가 되라! 고 내게 다시 기회를 준 것에 고마워했다.
결혼하고 나서 아내가 내게 맡긴 최초의 터미네이터 역할은 벽에 못을 박는 일이었다. 신혼시절, 콘크리트 벽에 못 박는 일을 아내가 부탁했는데 망치질이 서툴러 이리저리 못이 튀는 걸 보면서,
“자기야! 못이 눈으로 튀겠다. 위험해! 큰 아들이라 동생들만 시켰지요? 말 안해도 다 알아요. 히히히”웃음거리가 된 때가 있었다. 아내가 이때 던진 한마디는 처음으로 내 가슴에 ‘못을 박는 소리’ 였다. 망치를 넘겨 받은 아내는 단번에 못을 박았다. 이 순간에 일어난 일이 유쾌한 일은 아니어서 약간 자존심이 상했던 일종의‘무능한’ 터미네이터였던 것이다.
밤을 괴롭히는 이 조그만 족속들에 대해 아내는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무서워했다.
징그럽고 날카로운 이빨로 아내를 물면, 바로 부풀어 올라 가려워 약을 바르면서 긁어왔다. 간혹 쳐다봐주기 힘들 정도로 아내는 괴상한 표정을 짓곤 했다.
재미난 일이 벌어지곤 했다. 놈은 나를 거의 물지 않지만 어쩌다 물어도 가렵지가 않는 것이다. 나는 정말 특이 체질이다. 내 부모님도 그랬나? 의문을 품어 보았다. 내 몸에 촉수를 들이대고 찌른 흡혈귀 놈의 얼굴이 오히려 부풀어 올랐을 거 같다. 거의 아내한테만 놈들이 달려드는 것에
“내 피는 달고, 당신 피는 쓴 맛이 나는 가 봐요.”라고 아내는 괴상한 말을 던진 적도 있다.
오래 전 여름 밤, 내 얼굴 주위를 한 놈이 왜앵 소리내며 빙빙 돌았다. 아내 피를 마시고 배를 채운 놈은 어딘가에서 소화시키는 중임이 분명했다. 딴 놈이 나를 탐낸 것 같았다.
문득 컴컴한 방안에서 눈을 뜨고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불을 끈 채 어둠 속에서 손바닥으로 한방 날리기로 한 것이었다. 의지대로 쏠 수 있으니 ‘패트리어트 미사일’인 셈이다. 나는 유효기간이 없고 매우 가벼운 ‘손’이라는 미사일을 수시로 날리는 ‘터미네이터’가 되는 것이다.
이 놈들의 사이즈나 체격을 봐선 내 손바닥은 위험하고도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공포의 무기인 셈이다. 내 볼에 앉으면 뺨을 때리고 귀 언저리에 앉으면 귀싸대기를 날리는 '미사일'이다.
한없이 성가시고 귀찮은 이 동물이 만약 내 얼굴과 귀에 앉으면 '파괴율'을 높이는 손쉬운 방법이라는 발상을 했다. 침실 전투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빛나는 지혜였다. 이건 내 자신에게 하는 최초의 자화자찬이었다.
그 소리에 맞추어 내 짐작대로 얼굴과 귀쪽을 향해 싸대기를 날렸다. 손바닥과 얼굴 주위를 비벼도 감촉이 없다. 어둠 속이었지만 얼굴이나 손바닥에 핏자국이 없는 듯했다. 실패다. 잠시 후 다시 왜~앵 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발을 발사했다. 실패다. 나 자신만 아팠다. 얼굴 뺨을 향해 두번, 귓퉁이 쪽으로 한번 정도 더 때렸다. 귀 근처서 윙윙거렸지만 어둠속 내 어림짐작으로 유도되는 ‘손바닥 미사일’은 속도가 느렸던지 아니면 위치가 빗나갔던지 둘 중의 하나였다. 어떻든 재빨리 날아가는 그 놈을 격추하기엔 무용지물이었다.
귓방망이와 따귀를 스스로 때리게 만든 그 놈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지만, 이 놈 또한 내 미사일을 요리저리 피해 다니며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자기얼굴을 스스로 때리게 하는 동물이었다. 하지만 살생과 도망이라는 두단어의 충돌앞에서 느끼는 감정이 특별했다. 게다가 슬그머니 화도 났지만,
‘냉정하자. 즐거운 마음으로 잡아야지’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서 전등불을 켰다. 여느 때면 우리 둘을 괴롭힌 그 놈이 괘씸하게 생각되었을텐데...‘웃으며 놈을 잡자!’라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무기를 만들러 거실로 갔다. 맨발에 팬티차림이었다. 우리를 괴롭힐 때 그 족속들에게 이미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신문지를 두 번 접어 길쭉하게 만들었다. 전투에 동원돼 무기로 변신한 그 신문지가 고마울 뿐이었다.
우선 넓은 천장에는 그 놈이 보이지 않았다. 날씬하고 아주 조그만 이 놈에게는 천정의 벽지 무늬가 보호색이 되어 눈이 혼란스러웠다. 각양각색의 벽과 천정에서 놈을 찾는 것은 사하라 사막에서 전갈을 찾는 것처럼 막막했다. 동시에 자신감도 사라졌다.
어두운 침대 밑을 신문지 말이로 휘휘 저어봤다. 어둠침침한 옷장 위 저 안쪽도 신문지로 흔들어 바람을 일으켰다. 감시 레이더로 변한 내 눈은 재빨리 이곳 저곳을 주시해야했다.
불켠 지 몇 분만에 눈을 뜬 아내는 누운 채로 소탕 작전에 참여했다.
“저기 앉은 거 아네요”창문과 벽 사이를 가리켰다. 가까이 가보니 아니었다. 며칠전 그놈의 몸체가 핏자국을 내며 죽은 흔적이었다. 그때 드디어 천정의 전등 옆에 달라 붙은 놈을 발견했다.
‘넌 내 손아귀에 있다’라는 생각에 기분이 야릇했다. 그놈 쪽으로 향하고 쳐다보니, 거꾸로 붙은 것이 박쥐로 연상되기도 했다. 이것이 내 눈을 노려 볼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들었다. 침대 위로 올라가, 천정을 향해 ‘신문지’로 때리려는 순간, 다시 반대쪽 옷장과 벽 사이로 도망갔다. 여름철에도 '스키'를 타듯 미끄러지듯 잽싸게 그 비좁은 공간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이 놈 봐라! 나를 비웃네. 바람의 미세한 파동을 느끼는 초음파 감지기를 가진 것이 분명했다.
의자를 갖다 놓아도 손이 거기까지 못미친다. 절망감이 왔다. 이놈은 갖가지 기술로 무장했으니 신문지 하나로 의욕만 앞세운 내가 놓치는 건 뻔한 일이다. 나중에 알아 차린 낌새는 신문지로 잡는 건 백전백패라는 것이었다. 신문지의 휘발성 잉크 냄새를 몇미터 전에서 맡고 달아나는 것 같다. 겁 많은 놈이라면 심장이 두근거릴지도 몰라, 한편 측은하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오늘밤 내게는 수면 방해꾼이 될테니 마음 약해지지말자. 먼지 쌓인 그곳으로 신문지를 던져 쫓아낼까? 그 경우 먼지를 마셔야 하기 때문에 망설였다.천적인 잠자리를 풀어 놓을 수도 없고. 얼마 전 아내 친구가 준 피톤치드 원액에 물을 타 두었던 분무기로 뿌렸다. (우리집에는 에프킬러 같은 건 없다. 유해성 논란이 있는 반환경제품은 안 쓴다.)
방에 딸린 화장실 안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열어 놓았기 때문에 이곳으로 피난을 갔다면 ‘독안에 든 모기’이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다시 곳곳을 쳐다봐도 안 보인다. 피톤치드에 죽었나? 피톤치드가 이놈에게 독성이 있나?
찝찝해 하는 얼굴표정의 아내에게
“ 여보! 못찾겠어. 그냥 잡시다”라고 힘없이 말했다. 그 놈도 더 이상 달려 들지 않았다. 이것으로 아내와 합동으로 펼친 모기의 소탕작전은 씁쓸하고 허무하게 종료되었다. 곧 있으면 날이 밝아 올 시간이다.
‘두고보자. 흡혈귀야! 내일 밤엔 꼭 유능한 터미네이터가 되겠다.’
침묵으로 쏘아 올린 이 결의가 '헛소리' 가 될지도 모르겠다.
첫댓글 안홍진님의 수필, 글쓰기의 한계는 어디가지인지 모르겠네요.
때로는 소화안된 설사처럼 문단을 마구 쏟아내기도 하고. 어떤때는 농익은 과일처럼
충만한 의미들을 너무 내 비치게도 하고, 이세상 세태만상을 괴물 처럼 의인화하기도 해서혼란
스럽기도 했고, 이제는 익살넘치는 해학수필까지. 그왕성한 필력과 다채로운 표현술에 찬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번 '우리집 흡혈귀와 터미네이터' 그 비유와 묘사가 너무 익살스러워서 해학수필의 백미를 보는 것 같습니다. 부럽습니다.
이제야 앞으로 정제되고 비유로 빛을 발하는 안홍진님의 글을 많이 대하게 될것같아 기쁩니다. 여태까지 내가 눈이 어두워 그 진면목을
보지못한 것 같아 무안하기도 합니다.
존경하는 대선배님, 아직도 설익고 배워 가는 수필에 과분한 격려와 칭찬을 주신 것 같습니다.
박무형 선생님의 한없이 길고 긴 한폭의 그림같은 평판화 수필을
선물로 받으니 더욱 정진하고 노력해야 겠다는 다짐을 갖습니다..
선배님 의 댓글이야말로 해학과 위트와 유머가 듬뿍 담겨서 저도 기분좋게 읽으며 웃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언제나 조언과 어드바이스를 많이 주십시오..
제겐 글쓰기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겠습니다.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