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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역사 제6장 : 라따나꼬신 왕국
Rattanakosin Kingdom
"라따나꼬신 왕국"(Rattanakosin Kingdom, กรุงรัตนโกสินทร์) 또는 "시암왕국"(Kingdom of Siam)은 태국의 역사에서 4번째로 등장한 왕국이다. 이 왕국은 방콕(Bangkok)을 근거지로 했고, 캄보디아, 라오스, 그리고 일부 말레이계 왕국들도 조공국으로 거느렸다. 이 왕국을 개국한 사람은 "짜끄리 왕조"(Chakri Dynasty, ราชวงศ์จักรี)의 풋타 욧파 쭐라록(Buddha Yodfa Chulaloke, พุทธยอดฟ้าจุฬาโลก: 라마 1세) 국왕이다.

(사진) 짜끄리 왕조의 개조 라마 1세.
라따나꼬신 왕국 시대의 전반부는 국력을 응축해나가면서 버어마, 베트남, 라오스와 갈등을 한 시기이다. 그리고 후반부는 영국과 프랑스 식민주의에 직면했지만, 동남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유럽 식민주의(European colonialism)의 영향권에서 간신히 벗어난 국가로 존립할 수 있었다.
라따나꼬신 왕국은 서구 열강들과 교섭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현대적인 중앙집권적 민족국가(nation state)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주요한 사회 경제적 발전도 이뤄졌다. 즉 외국과의 통상교역 확대, 노예제도(노비제도)의 철폐, 교육제도의 확대를 통해 중산층이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1932년 절대왕정을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혁명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실질적인 정치적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1. 배 경
1767년 약 400년간 동남아시아에서 지배적 세력을 떨쳤던 아유타야 왕국(Ayutthaya kingdom)이 버어마 군대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버어마는 이 침입을 통해 아유타야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점령했지만, 시암(Siam, 태국)은 상당히 빠른 회복을 보여주었다.
버어마에 대항하여 반군 활동을 주도한 이는 화교계 귀족인 딱신(Taksin)으로, 그는 상당한 군사적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딱신은 먼저 동북부 지방의 짠타부리(Chanthaburi)를 장악한 후, 불과 1년 안쪽에 버어마 세력을 물리치고, 바다에서 짜오파야 강(Chao Phraya, 차오프라야 강)을 20 km 정도 거슬러 올라간 강 서안인 톤부리(Thonburi)에 도읍을 두고, 새로운 시암 국가인 톤부리 왕국을 건설했다. 딱신은 1768년 스스로 "딱신 왕"(King Taksin)이라 칭하고 --- 현재 공식칭호는 "딱신 대왕"(Taksin the Great)으로 부름 --- 새로운 왕국의 국왕으로 등극했다.
딱신 왕은 태국 중부의 심장부를 빠른 속도로 재통일하고, 1769년에는 캄보디아 서부지방까지 병합했다. 이후 남쪽으로 진군하여 피낭(Penang, 페낭)과 뜨렝가누(Terengganu, 트렝가누)까지 이르는 말레이반도를 통제하면서 옛 시암 왕국을 재성립시켰다. 딱신 왕은 시암의 근거지를 든든히 하면서도 1774년부터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버어마 세력을 공격하여, 1776년에 치앙마이(Chiang Mai)를 함락시킴으로써 시암왕국(태국)과 란나왕국(Lanna) 사이의 영구적 통합을 이뤘다.
이러한 공격들을 지휘한 장수는 짜오파야(Chaophraya) 품계를 제수받게 되는 텅 두엉(Thong Duang)으로, "파야 짜끄리" 장군으로 불린 훗날의 라마 1세이다. 1778년, 파야 짜끄리 장군은 현재 라오스 지역의 위앙짠(Vientiane, 비엔티안) 및 루앙프라방(Luang Phrabang) 왕국들을 복속시켜, 라오스에 대한 시암의 종주권을 확립시켰다.
딱신 왕은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1779년 도성 안에서 정치적 혼란을 맞이한다. 그는 종교적으로 상당히 심취하여 수련하면서, 자신이 예류자(Sotāpanna, 預流者: [역주] 상좌부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4단계 중 제1단계) 단계를 획득했다며 거의 신적인 단계를 주장하고 고승 대덕들도 물리쳐 멀리 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궁정 관료들, 중국 상인들 및 외교사절들과도 마찰을 빚었다. 외국인들이 보기엔 그의 권좌가 곧 전복될 것처럼 보였다.
딱신 왕은 훗날 라따나꼬신 왕국(Rattanakosin kingdom)을 개창하게 되는 파야 짜끄리 장군에게 군대를 이끌고 캄보디아를 침공케 했다. 그러나 이는 도성 주변에서 발생하는 반란군들로부터 멀어지는 일이었다. 결국 대중적 지지를 받는 반란이 발생했고, 이들은 총사령관인 파야 짜끄리 장군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했다. 전쟁을 위해 캄보디아로 진군했던 파야 짜끄리 장군은 귀국행진을 하며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 직후 딱신 왕은 "비밀리에 처형됐다"고 한다.
파야 짜끄리 장군은 "라마티버티"(Ramathibodi)라는 칭호로 즉위해서 통치했고, 사후에 묘호로서 "풋타엿파 쭐라록"(Buddha Yodfa Chulaloke, พุทธยอดฟ้าจุฬาโลก) 대왕으로 추존됐는데, 일반적으로는 "라마 1세"(Rama I)라고 알려져 있다. 그가 바로 "짜끄리 왕조"(Chakri dynasty, ราชวงศ์จักรี)의 개조이다.
라마 1세가 즉위한 후 가장 먼저 내린 결정 중 하나는 수도를 짜오파야 강 건너편에 있는 방마꼭(Bang Makok : "'올리브 플럼'[olive plum]의 장소"란 의미)으로 옮기는 것이었고, 이곳이 바로 현재의 태국 수도인 방콕이란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새로운 도성은 라따나꼬신 섬 위에 위치했다. 이곳은 강물로 인해 서쪽으로부터의 공격에서 보호됐고,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으로도 여러 운하들이 건설되어 있어 방어에 용이했다. 이로써 시암이 바로 현 태국 왕실의 왕조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고, 현재의 수도에서 역사를 전개하게 되었다.
2. 개 국
라마 1세는 아유타야 왕국 시대의 사회 정치적 시스템을 대부분 복원시켰다. 그는 새로운 법령을 선포하고, 궁중 의례를 복원했으며, 불교 승단에도 규율을 부과했다.
그의 정부는 왕세자를 수장으로 하는 6명의 대신들이 관장했다. 그 중 4개 부처는 특히 영토에 관한 사항을 관할했다. "깔라홈 부"(Kalahom Department, สมุหกลาโหม: 현 국방부의 전신)는 남부지방을 관할했고, "마핫타이 부"(Mahatthai Department, สมุหมหาดไทย: 현 내무부의 전신)는 북부지방과 동부지방, "파캉 부"(Phrakhlang Department)는 도성 인근의 남부지방을, "꼼므앙 부"(Krommueang Department)는 방콕 인근을 관장했다. 나머지 2개 부처는 "토지부"(꼼나, Krom Na)와 "궁내부"(꼼왕, Krom Wang)였다. 군대는 친왕(親王=副王: 우빠랏[Uparat])이었던 라마 1세의 동생이 관장했다.
딱신 왕이 권력을 상실하는 무질서를 틈타, 버어마가 1795년 다시금 침입을 해왔다. 라마 1세는 일단 버어마 세력이 북부지방과 남부지방을 차지하도록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우빠랏이었던 라마 1세의 아우 마하 수라 싱하낫(Maha Sura Singhanat, มหาสุรสิงหนาท: 분마[Bunma]) 장군이 시암의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출정하여, 깐짜나부리(Kanchanaburi) 근처에서 버어마 군과 전투를 벌였다. 비록 란나 지역에 있던 버어마 군대는 1802년이 되어서야 물러나게 할 수 있었지만, 이 전투가 버어마의 대규모 침입으로서는 마지막 사건이었다.
1792년, 시암은 루앙프라방을 점령했고, 현 라오스의 대부분 지역을 시암의 조공국으로 복속시켜 간접 통치했다. 시암은 캄보디아 역시 효과적으로 통치했다. 1809년 라마 1세가 사망할 시점에 이르면, 현대의 태국 영토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군주가 되어 있었다.
2.1. 베트남 침공
1776년, 현 베트남 지역에서는 떠이선(Tây Sơn) 반란군이 지아딘(Gia Dinh: 현 호치민시 바로 북쪽)을 함락시키고, 응우옌 왕족 전원과 지역 백성들 상당수를 처형했다. 응우옌 왕족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응우옌 안(Nguyen Anh: 훗날의 지아 롱 황제)은 가까스로 강을 건너 탈출한 후, 시암의 영토로 도망쳐왔다. 응우옌 안은 망명기간 중에 지아딘을 다시 수복하고 떠이선 반란군을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라마 1세를 설득하여 군사원조와 더불어 소규모 침공군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1784년 응우옌 안과 5만명의 시암 군대, 그리고 300척의 함선들이 캄보디아의 떤레삽(Tonle Sap) 호수를 지나 병합한지 얼마 안 된 안남(Annam)으로 들어갔다. 시암의 군대는 칸토(Can Tho)를 향해 진격코자 했기 때문에, 2만명의 병력은 키엔지앙(Kien Giang)으로 갔고, 나머지 3만명은 찹랍(Chap Lap)에 상륙했다. 이 해 말에 시암의 군대는 과거 캄보디아 영토였던 지아딘을 함락시키고, 떠이선 세력이 베트남 정주민들에 대해 학정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시암 군대의 움직임을 예측했던 떠이선의 응우옌 후에(Nguyen Hue)는 자신의 병력을 은밀하게 이동시켜 미토(My Tho) 근처의 티엔 강(Tien river)과 그 중간에 있는 섬들에 배치했다. 그리고 다른 병력들을 수군과 더불어 강둑에 배치하여 대치토록 했다.
1784년 1월 19일 아침, 응우옌 후에는 항복 깃발을 단 소규모 수군 병력을 보내 시암인들에 대한 기만작전을 시작했다. 이미 많은 전투들에서 승리하고 있던 시암의 군대와 수군들은 적군의 항복에 대해 의심치 않았다. 그리하려 시암의 군대는 담판을 지으러 가면서, 속임수에 대해 의심하지 못했다. 응우옌 후에는 이 행렬을 기습하여 비무장한 사자들 및 미처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한 군대를 살육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로 시암의 군대는 거의 전멸을 당했다. 시암의 모든 함선들이 불에 탔고, 단 1천명 정도만 살아서 강을 건넌 후 시암으로 돌아갔다.
3. 평 화
라마 1세의 아들인 풋타릇라 나팔라이(Buddha Loetla Nabhalai, พุทธเลิศหล้านภาลัย: 라마 2세) 왕 치세는 비교적 파란이 없는 시대였다.

(사진) "에메랄드 사원"이란 별칭으로 더 유명한 왓 파깨우. 라따나꼬신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 중 하나이다. ☞ 확대사진 바로가기
라마 1세에게는 42명의 자녀들이 있었고, 그의 아우 마하 수라 싱하낫 역시 43명의 자녀를 두었고, 라마 2세는 73명의 자녀들을 두었기 때문에, 시암 왕국 정부의 거의 모든 부서들을 짜끄리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다. 관료조직과 군대, 승단의 고위 승려와 지방 행정관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인원들로 충당할 왕자들이 넘쳐났다. 이들 대부분은 후궁들의 소생이어서 왕위계승권을 갖고 있지 않았다.
1813년 새롭게 역내의 주요 강대국으로 부상한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종주권을 놓고 대치하게 됨으로써, 새롭게 복원됐던 현상유지 상태는 종말을 고했다.
라마 2세의 치세에 시암은 서구의 영향력을 다시금 감지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1785년 피낭(Penang)을 점령했고, 1819년에는 싱가포르를 세웠다. 이후 네델란드가 영국을 대체했고, 다시 포르투갈이 네델란드를 대체하면서, 차례차례 시암에 대한 경제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왕자들이 교역을 독점하고, 비지니스에도 자의적으로 과세하던 시암의 경제체제에 반감을 보였다. 영국령 인도 정부는 1821년 시암으로 사절단을 보내, 자유무역에 대한 제한 철폐를 요구했다. 이 사건은 시암의 19세기 정치를 지배했던 현안이 가시화된 첫번째 사건이었다.
4. 국력의 강화
1824년 라마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쩨사다버딘타(Jessadabodindra, เจษฏาบดินทร์) 왕자가 평화적으로 왕위를 승계했다. 그는 "파낭 까우 왕"(King Phra Nangklao, พระนั่ง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이란 칭호로 통치를 했고, 현재 "라마 3세"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리고 라마 2세의 작은 아들이었던 몽꿋(Mongkut: 훗날의 라마 4세) 왕자는 승려로서 출가하라는 "제안을 받고" 정치에서 떠났다.
영국은 1825년에 새로운 사절단을 방콕으로 파견했다. 영국은 그때 이미 시암의 서쪽 이웃국가인 남부 버어마를 병합하고, 말라야(Malaya) 지역에 대한 통제력도 확장 중이었다. 라마 3세는 영국의 요구조건 수용을 주저했지만, 그의 참모들은 만일 영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버어마와 같은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리하여 시암은 1826년 서구 열강과 최초의 통상조약인 <시암-영국 우호통상조약>(일명: 버니조약, Burney Treaty)을 맺게 된다. 이 조약에 따라 시암은 균일화된 세금제도를 마련하고, 외국과의 교역에 대한 세율을 낮췄으며, 일부 영역에서는 왕족들의 독점권도 철폐했다. 그 결과 시암의 교역량은 급격히 증대했고, 더 많은 외국인들이 방콕에 정착하면서 서구의 문화적 영향력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왕국은 더욱 부유해졌고 군대는 더욱 좋은 무장력을 지니게 되었다.

(사진) 방콕의 라차담는 깡 거리에 설치된 라마 3세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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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암은 1827년 라오스에서 일어난 아노우웡(Anouvong: 란상왕국의 마지막 왕)왕의 반란을 제압한 후 위왕짠을 파괴하고, 그 주민들에 대해서는 라오스로부터 보다 안정된 지역인 이산(Isan, 이싼) 지방으로 대규모 강제이주를 시켰다. 또한 새로운 소요를 방지하기 위해 라오스를 여러 개의 작은 행정단위로 분할시켰다.
1842–1845년 사이, 시암은 베트남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캄보디아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시켰다. 이 시기 방콕에 대한 라마 3세의 최대 치적은 왓포(Wat Pho) 사원군의 조성이었다. 그는 과거의 사원을 확장시키면서 새로운 건물들을 창건했다.
라마 3세는 영국인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를 얻고 있던 자신의 아우 몽꿋 왕자를 자신의 후계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승려 신분이었던 몽꿋 왕자는 공개적으로 이러한 역할을 하기 어려웠다. 몽꿋 왕자는 오랜 기간 승려로서 지내면서, 그러한 지위를 프랑스와 미국의 선교사들과 영국의 상인들로부터 서구식 문물을 공부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시암에서 최초로 그러한 학습을 한 인물 중 한사람이 되었다. 그는 영어와 라틴어를 학습하고, 과학과 수학도 연구했다. 서양 선교사들은 그를 기독교로 개종시키고자 했지만, 몽꿋 왕자는 신심 두터운 불교도이자 시암 민족주의자였다. 1851년 라마 3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승계한 몽꿋(라마 4세) 왕은 자신의 서구적 지식들을 시암을 근대화시키고 국력을 강화시키는 데 사용코자 했다.
1940년대가 되자 서구 열강들 앞에서 시암의 독립성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이 보다 분명해졌다. 그리고 그 점은 1939-1942년 사이 영국이 중국과 "제1차 아편전쟁"(중영전쟁)을 치르면서 보다 드라마틱하게 가시화됐다. 1850년 영국과 미국은 방콕으로 사절단을 보내 모든 종류의 통상 제한들을 철폐하고, 서양식 정부조직의 수립, 그리고 자국민들에 대해 시암의 법률 적용으로부터 면책특권을 요구했다. 라마 3세의 정부는 이러한 요구들을 거부함으로써 그 후임자에 대해 위험한 상황을 남겨주었다. 라마 3세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버어마나 베트남과 전쟁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로지 서양과만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다. |
라따나꼬신 왕국은은 개국 이래로 중국 상인들의 역할이 증대되는 것을 보면서 발전했다. 화교(중국계) 상인들은 딱신 왕 이전 시대부터 들어왔다. 또한 상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 농민들 역시 행운을 찾아 끊임없이 새로운 왕국으로 흘러들어 왔다. 라따나꼬신의 통치자들 역시 중국인들이 가진 경제적 부흥의 자원들 때문에 화교들을 환영했다. 화교계 상인들 중 일부는 궁정관료가 되기도 했고, 일부는 매우 중요한 직책으로도 승진했다. 문학과 같은 중국 문화 역시 수용되고 보급되었다. 화교계 궁중 귀족들은 중국의 여러 문헌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중국과 시암의 관계는 공고한 것이었다. 라마 1세는 중국 황실에서 자신에 대한 승인을 거부할까 염려하여, 화교였던 딱신 왕과 자신의 혈연적 관계를 주장하기도 했다. 시암과 중국의 외교관계는 라마 4세의 치세까지 조공 사절단을 통해 보증되었다. 따라서 라따나꼬신 왕국에서 중국은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5. 계 몽
1851년 몽꿋 왕자가 라마 4세로서 등극했다. 식민화를 통한 강제적 근대화를 달가와하지 않았던 시암으로서는, 라마 4세의 등극이 그러한 길로부터 국가를 구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라마 4세는 이론적으로는 절대군주였지만, 그의 권력은 제한적이었다. 그는 27년간 승려 생활을 했기 때문에 세력 강한 왕자들 사이에서 기반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또한 자신의 바램들을 실행할 근대 국가적 장치들도 갖고 있지 않았다.

(사진) 서양식 관복을 입은 몽꿋 국왕(라마 4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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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4세가 최초로 실행한 개혁조치는 현대적 행정조직 체계를 갖추고, 빚을 지고 노비가 된 사람들과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이였지만, 이 정책들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라마 4세는 시암에 대한 서구의 압력이 증대되는 것을 도리어 환영했다. 이러한 일은 1855년 홍콩 총독이었던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이 방콕을 방문하면서 가시화되었다. 이들은 무력 위협을 등에 업고서, 즉각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라마 4세는 이러한 요구에 쾌히 승락을 하고, <바우링 조약>(Bowring Treaty)이라 불린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수입관세를 3%로 제한했으며, 왕족의 교역 독점권을 폐지하고, 영국 국민들에 대해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어 여타 서구 열강들도 동일한 요구를 했고, 유사한 양허권들을 획득했다.
라마 4세는 얼마 안있어 시암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영국은 상업적 이익에 관심이 있었지만, 프랑스는 식민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프랑스는 1859년 사이공(현 호치민시)을 차지했고, 1867년에는 베트남 남부와 캄보디아 동부에 "프랑스 보호령"(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을 설치했다. 라마 4세는 영국이 요구하는 경제적 양허권들을 부여함으로써, 영국이 프랑스 세력을 막아주길 바랬다. 하지만 다음 국왕의 치세가 되면, 그러한 생각이 하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았음이 밝혀진다. 그러나 영국이 시암을 영국령 버어마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의 유용한 완충국가로 보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6. 개혁자
1868년 라마 4세가 사망하자, 당시 15세였던 쭐라롱꼰(Chulalongkorn) 왕자가 "라마 5세"로서 등극했는데, 오늘날 "라마대왕"(Rama the Great)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라마 5세는 완전하게 서구식 교육을 받은 최초의 시암 국왕이었다. 쭐라롱꼰 왕자를 교육시켰던 사람은 영국인 여성 가정교사인 안나 레오노웬스(Anna Leonowens)로, 영화 <왕과 나>(The King and I)는 바로 시암 역사에서 나타난 그녀의 일화를 각색한 것이다.

(사진) 18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서 만남을 가진 시암의 쭐라롱꼰 국왕(좌측)과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이 2세(Nicholas II: 우측)의 모습.
라마 5세 치세의 초창기는 솜뎃 짜오파야(Chaophraya)였던 보수적인 섭정 시 수리야웡(Si Suriyawongse, ศรีสุริยวงศ์)이 주도했다. 하지만 1873년이 되어 라마 5세가 성년이 되자,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추밀원"(Privy Council)과 "내각평의회"(Council of State), 공식화된 궁중 규범체계와 대장성(재무부)를 신설했다. 라마 5세는 노비(노예)를 점진적으로 철폐할 것이며, 채무에 종속되는 일도 제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처음에는 왕자들과 여타 보수층들이 왕의 이러한 개혁조치에 성공적 저항을 했다. 하지만 보다 젊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왕자들로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이러한 저항은 감소해갔다.
라마 5세는 항상 대안은 외국식 통치밖에 없다고 주장하곤 했다. 그는 자신의 아우들을 강력한 정치적 동맹자들로 등용했다. 짜끄라팟(Chakkraphat, จักรพรรดิ) 왕자를 재무대신에 임명하고, 담롱(Damrong, ดำรง) 왕자에게는 내무와 교육에 관한 조직을 하도록 맡겼다. 그리고 매제이자 이복동생이었던 테와웡(Devavongse, เทวะวงศ์) 왕자에게 38년간 외무대신을 맡기기도 했다.
1887년 테와웡 왕자는 정부조직 체계를 견학하기 위해 유럽을 방문했다. 라마 5세는 테와웡 왕자의 권고에 따라 내각 정부, 감사원, 교육부를 설치했다. 또한 치앙마이에 부여되어 있던 준-자치권은 철폐되었고, 군대도 현대식으로 재조직되었다.
1893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당국은 긴장을 촉발시키기 위해 시암 국경에서 소규모 국경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는 전함을 방콕에 파견하고, 메콩 강 동쪽의 라오스 영토에 대한 종주권 이양을 요구했다. 라마 5세는 영국에 도움을 청했지만, 영국의 대신은 견딜 수 있는 한 견뎌보라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결국 시암은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프랑스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이 취한 유일한 조치는 시암의 나머지 영토에 대해서는 프랑스가 더 이상 손대지 않는다는 합의를 이끌어낸 것 뿐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영국의 움직임에 대한 보상으로, 시암은 혈연적으로 태국민족(타이족)과 동일하게 따이 민족군(Tai)에 속하는 샨족(Shan) 거주지역인 버어마 북동부 지방에 대한 종주권마저 영국에 넘겨줘야만 했다.

(지도)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시암이 상실한 종주권 보유 영토 및 상실한 년도가 표기된 지도.
하지만 프랑스는 계속해서 시암에 압박을 가해오면서, 1906-1907년 사이에 또다른 긴장을 조성했다. 이때 시암은 루앙 프라방(Luang Prabang) 건너편의 메콩강 서안 및 라오스 남부의 참빠삭(Champasak) 주변 지역, 그리고 캄보디아 서부까지도 프랑스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영국이 개입해서 프랑스의 더 이상의 괴롭힘을 막아주었다. 하지만 영국은 그에 대한 댓가로서, 1909년 <영국-시암 조약>(Anglo-Siamese Treaty)을 체결하여 꺼다(Kedah, 케다), 켈란탄(Kelantan), 페를리스(Perlis), 뜨렝가누(Terengganu, 트렝가누)에 대한 종주권을 영국에 넘겨주어야 했다.
이 당시 "상실한 영토들"은 시암의 영향력 언저리에 있긴 했지만, 단 한번도 확실하게 시암의 통제권 하에 들어온 곳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곳들에 대한 종주권 선언을 포기한 일은 국왕 및 국가에는 실질적으로 굴욕적 사태였다. [역사학자 데이빗 우얏(David K. Wyatt)은 이 시기의 쭐라롱꼰 국왕에 대해, 1893년의 긴장고조 이후 "심신을 손상당했다"(broken in spirit and health)고 묘사하기도 했다.] 이때의 영토 상실로 더 이상 "위대한 시암"(Great Siam)은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국왕이 단지 핵심적인 "태국민족의 땅들"(타이 랜즈, Thai lands)만 통치하게 됨으로써, 국명이 변화하는 데도 그 기반을 제공했다. 이러한 위기들은 20세기 초반에 출현한 강력한 민족주의 정권들이, 태국 스스로 서구 및 주변 국가들에 대해 스스로를 천명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를 펼치는 데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한편 근대화 및 중앙집권화된 민족국가로 변모하는 역학관계를 바탕으로 하면서, 절대왕정을 향한 개혁과 변화는 지속적이고 신속하게 진행됐다. 이 과정은 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라마 5세의 아들들 치세에서 더욱 확대되었다. 철도와 전화는 이전에 원거리에 위치하여 준 자치권을 누리던 지방들까지 통합시키는 데 공헌했다. 통화는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현대적 조세제도를 실시하여 과거의 자의적 강제징수와 부역 징발을 대체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훈련된 공무원들의 부족현상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학교들이 설립되어 시암인 졸업생들이 배출될 때까지, 많은 외국인들을 고용해야만 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할 무렵에, 시암은 최소한 준-현대적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식민통치를 피해나가고 있었다.
7. 왕국에서 근대국가로의 이행
라마 5세의 개혁조치 중 하나는 서구식 왕위계승법을 도입한 일이다. 따라서 1910년 그가 사망했을 때, 왕위는 평화적으로 그의 아들인 워치라웃(Vajiravudh) 왕자에게 계승됐는데, 그는 "라마 6세"라는 칭호를 갖고 통치했다. 라마 6세는 영국의 샌드허스트(Sandhurst) 육군사관학교와 옥스포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에드워드 시대 스타일로 영국화된 신사이기도 했다. 실제로 서구화된 왕실 및 상류층 관료들과 그밖의 사람들 사이에 엄청나게 벌어진 간극은 시암의 큰 문제점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서구식 교육제도를 --- 잠재적 갈등의 씨앗이기도 한 --- 일반 관료조직과 군대로 확산시키는 데, 또다시 20년이 소요됐다.

(사진) 라마 6세의 모습.
라마 6세의 치세에서 몇몇 정치적 개혁이 이뤄졌지만, 국왕은 여전히 절대군주였고, 스스로 내각의 수반이면서 모든 정부 부처들의 수장 역시 자신의 친인척들로 임명해서 보좌를 받았다.
라마 5세의 아들이자 영국에서 교육을 받은 워치라웃 국왕은 "새로운" 국가의 나머지 부분들이 더 이상 정부 부문에서만 발굴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서구적 민주주의를 신봉하지도 않았다. 그는 대신 인도를 통치하는 데 성공한 영국 군주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영국의 국왕은 대중들에게 보다 많이 공개되며 더 많은 왕실의례들을 집전하곤 했다.
하지만 라마 6세는 자신의 부왕이 기획했던 근대화 계획들 역시 추진해나갔다. 독점은 철폐시켰고, 초등교육을 의무화시켰다. 또한 1916년 "쭐라롱꼰 대학"(Chulalongkorn University)의 설립을 시작으로 고등교육 제도도 도입했다. "쭐라롱꼰 대학"은 새로운 시암의 지식인들을 배출하는 모태가 되었다.
방콕은 새로운 시암 국가의 수도로서 더욱 더 변모해나갔다. 라마 6세의 정부는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몇몇 "전국적인" 개발사업들을 진행시켰다. 방콕에서부터 국가예산으로 건설된 도로와 교량, 철도, 병원, 학교들이 퍼져나가며 확장됐다. 새롭게 재조직된 행정구역인 "몬톤"(Monthon: 원)에는 새로운 직책인 총독들(Viceroys: 우빠랏[upparat])을 파견하여, 국왕의 대리인으로서 지방 행정을 관할토록 했다.
이와 더불어, 라마 6세는 "야생 호랑이 군단"(Wild Tiger Corps, Kong Sua Paa)이란 민병대를 조직했는데, 여기에는 "좋은 자질을 가진" 시암인들을 참여시켜 국가 통합에 앞장설 수 있도록 했다. 라마 6세는 특히 이 운동을 육성시키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러한 일을 왕 자신과 충성스런 국민들 사이의 유대관계를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 자발적인 군사조직은 국왕과 국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각오를 하고 있었고, 국왕의 뜻을 받들기도 했다. "호랑이 군단"은 최초에 국왕의 측근들이 참여했고, 아마도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워치라웃 국왕의 호감을 사고자 하여 참여했을 법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열기가 불타 올랐다. 바로 이 무렵인 1911년, 한 독일인 관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들은 다소간 군대식 스타일을 풍기는 검은 제복을 입은 자발적 조직이다. 하지만 무기는 소지하지 않았다. "영국 스카우트"(British Scouts: 보이스카웃과 걸스카웃의 전신)가 "호랑이 군단"의 전범이 되었음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조직은 전국적으로 가장 오지인 지역까지도 지부를 갖고 있다. 이들에게서 조용하고 무기력한 시암인이란 이미지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
워치라웃 국왕의 정부는 자신의 부왕 시대 정부와 형식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라마 6세는 치세 초기에는 부왕 시절의 팀들을 그대로 활용했고, 정부의 일상적 업무에서 갑작스런 단절 같은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일상적 업무들이 경험많고 능력있는 공무원들의 손에서 처리되었다. 그들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실시, 천연두에 대한 무료 백신 보급, 철도의 지속적인 건설 등 국가적 개발계획의 발전적 단계들에 많은 공로들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고위직의 경우, 그들이 사망하거나 사직 혹은 은퇴를 하게 되면, 점진적으로 국왕의 측근들이 임명됐다. 그리하여 1915년 무렵에는 내각의 절반 정도가 새로운 인물들로 채워졌다.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담롱 왕자가 사라지고 "짜오파야였던 요마럿"(Chao Phraya Yomarat)이 등장한 일이었다. 담롱 왕자는 공식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내무부장관 직을 사임했지만, 실제 이유는 국왕과 의견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진) 1906년 완공된 아난따 사마콘 왕관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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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라웃(Vajiravudh: 라마 6세) 국왕은 1917년 7월 22일 "동맹국"(Central Powers: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제국, 불가리아 간의 이중 동맹)에 선전포고를 선언하고, "3국 협상"(Entente Powers: "연합국"[Allied Powers]이라고도 부르며 프랑스, 러시아, 영국 동맹을 말함) 측에 서서 "유럽의 서부전선"(Western Front)에 파병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시암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파리평화회의"(Versailles Peace Conference, 베르사이유 조약 협상)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외무부장관이었던 테와웡 왕자는 이 회담을 19세기에 체결된 조약들에 대해 재고하고 시암의 주권을 원상회복시키는 기회로 활용코자 했다. 미국은 1920년에 시암의 요구를 수락했지만, 프랑스와 영국은 1925년에 가서야 수락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의 성과로 인해 라마 6세의 인기는 올라갔지만, 얼마 안 있어 다른 문제들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면서 곧 상쇄되고 말았다. 그러한 문제들 중에는 라마 6세의 사치와 낭비벽도 포함됐는데, 특히 1919년 시암이 전후 불황 속으로 급속히 빨려들어 가면서 이 문제는 더욱 더 두드러졌다. 또한 그는 아들이 없었다. 그리고 명백하게 여성보다는 남성들을 더 좋아했다. 이 문제는 시암인들의 관점에서 크게 염려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후계자가 없다는 것은 군주로서의 안정성을 해치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1925년 라마 6세는 불과 44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이미 국운은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아우였던 빠차티뽁(Prajadhipok: 라마 7세) 왕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8. 절대왕정의 종식
빠차티뽁 국왕은 자신의 직무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없었던 상태에서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그가 선호한 방식은 생생한 정보를 듣고, 타인들과 교류하며, 기꺼이 배우고자 했지만, 흐릿하면서도 여전히 잠재적인 왕관의 마술 같은 것이었다.
라마 7세는 자신의 전임자와 달리 각 부처들에서 올라온 문건들부터 백성들이 올린 상소문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제출되는 공문서라면 사실상 거의 모두를 열심히 읽어보는 스타일의 국왕이었다. 불과 반년이 지나자 워치라웃 국왕 시절의 대신들 12명 중 단 3명만이 유임되고 나머지는 모두 왕족들로 교체됐다. 이러한 조치는 한편으로는 유능하고 경험있는 이들을 다시 등용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왕 중심의 과두독재 체제로 회귀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라마 7세는 라마 6세 시절과 단절하겠다는 점을 보이고 싶어 했고, 최고 요직의 사람들에 대한 선택을 보면 쭐라롱꼰 국왕 시대의 정부 형태 복원에 그 방향이 맞춰진 것처럼 보였다.

(사진) 라마 7세의 모습.
빠차티뽁 국왕이 자신의 형(라마 6세)으로부터 물려받은 최초의 유산은 라마 6세 시대에 만성적으로 변한 여러 문제들이었다. 특히 가장 시급한 현안은 경제였다. 국가 재정은 거의 혼돈에 빠져 재정적자 상태는 과중했고, 왕실 재정에서 발생한 부채는 회계원들이 보기엔 거의 악몽과도 같아서 도저히 상환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깊은 불황의 늪에 빠진 세계적 상황도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빠차티뽁 왕자가 국왕으로서 사실상 처음으로 취한 행동은 군주와 정부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제도적 개혁조치 한 가지를 수반했는데, 그것은 바로 "국가 최고평의회"(Supreme Council of State)를 구성한 것이었다. 이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자문기구)에는 쭐라롱꼰 국왕의 오른팔로서 오랜 기간 내무부장관을 역임했던 담롱 왕자를 비롯하여, 왕족들 중 경륜과 능력이 뛰어난 위원들이 임명됐다. 결국 이들 왕자들이 점진적으로 주요한 대신급(장관급) 직책들에 대한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위원들 중 상당수는 이전 국왕의 시대에 잘못된 점들을 시정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성을 갖고 인정받기는 힘든 생각이었다.
비록 불필요한 공무원들을 구조조정히고 남아있는 이들에 대한 봉급삭감을 통해 값비싼 댓가를 치르긴 했지만, 라마 7세는 일단 이 위원회의 보좌를 받으면서 간신히 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분명 관료사회에 불만을 남겼고, 이것이 바로 1932년 발생한 쿠테타가 촉발되는 데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후 빠차티뽁 국왕은 미래의 시암 정치로 관심을 돌렸다. 영국의 사례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평민들도 국사를 논할 수 있도록 의회를 구성하길 원했다. 그리하여 헌법 초안 작업을 명했지만, 아마도 국민들이 아직 민주주의에 대한 준비가 덜 되어 있다고 생각한 보좌진들이 매우 영리한 방식으로 처리를 했을 터인데, 결국 국왕의 의사는 거부되고 말았다.
9. 혁 명
1932년 시암이 깊은 불황의 늪에 빠지자, "최고위원회"는 군사비를 포함하여 정부지출을 삭감하는 결정을 내렸다. 국왕은 이러한 정책이 특히 군부를 비롯하여 불만들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예견했다. 그리하여 공무원들을 대면하여 이러한 조치가 어찌하여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라마 7세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과인은 재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다만 과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 중 최선책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만일 무언가 잘못이 있다면, 과인이 시암의 국민들에게 사죄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
이전의 어떤 왕들도 이와 같은 어법으로 연설한 적이 없었다. 빠차티뽁 국왕이 분명히 의도한 바는 솔직하게 호소하여 이해와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와는 다르게 해석했다. 즉 그들은 이러한 모습이 국왕이 나약해졌음을 의미하며, 오류에 빠지기 쉬운 독재군주를 영속화시켜주는 체제는 이제 종언을 고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진) 1932년 혁명 당일, 로얄플라자에 모여있던 군인들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심각한 정치적 소요가 수도를 위협했고, 국왕은 4월에 이르러 자신의 권력을 총리와 함께 분점할 헌법의 도입에 동의했다. 하지만 군부의 급진파들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1932년 6월 24일, 국왕이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을 때, "발기인회"(카나랏타톤, Khana Ratsadon, คณะราษฎร)라 불리는 49명의 장교들로 구성된 반군 지도부가 "방콕 수비대"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하여 150년간 이어져온 시암의 절대왕정이 종식되었다.
참고문헌
Greene, Stephen Lyon Wakeman. Absolute Dreams. Thai Government Under Rama VI, 1910-1925. Bangkok: White Lotus, 1999
Wyatt, David, Thailand: A Short History, Yale University Press, 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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