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태국 군사쿠테타 (제2편)
2006 Thai coup d'ét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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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촬영] Apichart Weerawong / Associated Press (AP) : 2006년 9월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실각시킨 쿠테타 당시의 모습. 한 외국인 여성이 쿠테타 소식이 1면에 장식된 태국 보수언론 <네이션> 지를 들고 군인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당시 방콕시민들 중에는 군인들에게 꽃과 사탕을 주는 이들도 있었고, 군인들 역시 이와 같이 외국 관광객들의 사진촬영에 응하기도 했다. 바로 이 어이없는 형태의 쿠테타가 바로 현재 태국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레드셔츠(UDD) 시위대의 대규모 투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동시에 2006년 9월 쿠테타가 갖고 있는 이러한 "무혈"의 이미지는, 세계의 수많은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태국의 현 정권과 지식인들조차, 현재 발생한 레드셔츠 시위대의 힘을 초기에 과소평가하는 과정에 일조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정보화와 이동수단이 급격하게 발전한 21세기임에도 불구하고, 태국만큼은 어제와 같이 "변하지 않는 태국"일 것이라 추측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여론은 점차로 태국사태의 위중함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태국의 보수층은 아직도 그러한 기대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들이 레드셔츠 시위 초기에 그 힘을 과소평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과연 레드셔츠들이 내전을 일으킬 정도까지 강력한 세력인지에 대해 또다시 도박같은 저울질을 하고 있는 양상으로 보인다.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우려할만한 "집단적 무지"를 느끼게 된다. [크메르의 세계] |
태국의 정치적 상황
1. 실각한 정권
1.1. 해외의 상황
2006년 9월 쿠테타가 발생하자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총리는 자신의 딸이 유학중인 영국의 런던으로 건너갔다. 이후 가족들이 건너와 합류했다.
손티 분냐랏낀(Sonthi Boonyaratglin) 장국은 앞서 만일 탁신 총리가 태국으로 귀국할 수는 있지만, 사법처리를 받게 될 것이라 경고했다. 손티 장군은 "법률에 따라 기소절차가 진행될 수 있고, 그 유죄 여부는 증거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주60) 하지만 "추밀원"(국왕자문기구) 위원으로 과도 총리를 맡고 있던 수라윳 쭐라논(Surayud Chulanont) [예비역] 장군은 탁신의 귀국을 하나의 "위협"이라 부르면서, 귀국 자체를 반대했다. 수라윳 과도총리는 "내 자신과 몇몇 사람들은 탁신 전 총리 지지자들과 그 반대자들이, 탁신 전 총리의 귀국과 동시에 충돌할 것이란 점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주61)(주62)
쿠테타가 발생한 화요일(9.19) 당시 수라끼얏 사티얀타이(Surakiart Sathirathai) 부총리 역시 탁신 총리와 함께 뉴욕의 유엔총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한 태국 관료에 따르면, 당시 수라끼얏 부총리는 코피 아난(Kofi Annan) 유엔 사무총장 후임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경선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위라삭 푸따꾼(Virasakdi Futrakul) 주미 태국대사는 "AFP통신"에 대해, "[새로운] 태국 정부는 수라끼얏 박사가 유엔 사무총장에 입후보하는 데 적극 지지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변화는 없고, 그는 여전히 경선 후보로서 활동 중"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쿠테타가 일어나 군부정권이 탄생하자, 수라끼얏 전 부총리는 방콕으로 출발했다.(주63)
타농 비다야(Thanong Bidaya) 재무부장관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월드뱅크 및 IMF" 연차총회에 참석중이었다. 솜낏 짜뚜시피탁(Somkid Jatusripitak, สมคิด จาตุศรีพิทักษ์) 상무부장관은 파리에 머물다가, 목요일(9.21)에 방콕으로 귀국했다.(주64) 깐따티 수파몽꼰(Kantathi Suphamongkhon, กันตธีร์ ศุภมงคล) 외무부장관은 시린톤(Sirindhorn) 공주가 주관한 "태국-프랑스 문화교류전"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가, 독일을 경유해 방콕으로 귀국했다. 수다랏 께유라판(Sudarat Keyuraphan, สุดารัตน์ เกยุราพันธ์) 농림부장관은 가족들과 함께 파리로 간 것으로 보고됐다.(주65) 여당인 "타이락타이 당"(TRT) 사무총장이자 전 내무부장관이었던 꽁삭 와따나(Kongsak Wantana) 씨는 독일로 떠났다.(주66)
(주60) Channel New Asia, "Thaksin can return, but may face charges: army chief", 2006-9-20.
(주61) The Nation, "Warning from Surayud: Thaksin's return 'a threat'", 2006-9-28.
(주62) The Bangkok Post, "Surayud leads nominees for PM", 2006-9-27.
(주63) Channel New Asia, Ex-Thai number two remains in race for Annan's post despite coup: envoy", 2006-9-21.
(주64) The Nation, "Thanong Bidaya stays in Singapore", 2006-9-20.
(주65) CNN, "Thailand's king gives blessing to coup", 2006-9-20.
(주66) The Nation, "Govt heavies flee after many held", 2006-9-20. |
1.2. 군사정권에 의해 체포 혹은 구금을 당한 경우
쿠테타가 발생한 직후, 찻차이 완나사띳(Chitchai Wannasathit, ชิดชัย วรรณสถิตย์, 曹壁光) 안보담당 부총리는 육군본부에서 체포됐다. 육군대변인 아짠 띱롯(Acar Tiproj) 대령은, 그가 수요일(9.20)에 방콕 외곽의 한 게스트하우스에 구금되어 있다고 했다.(주67) 탐마락 이사랑꾼 나 아유타야(Thammarak Isarangkura na Ayuthaya, ธรรมรักษ์ อิศรางกูร ณ อยุธยา) 국방부장관은 행방불명이 되었다.(인용각주 필요) 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폼민 릇수리뎃(Prommin Lertsuridej, พรหมินทร์ เลิศสุริย์เดช) 전 총리실 사무총장과 솜차이 웡사왓(Somchai Wongsawat, สมชาย วงศ์สวัสดิ์: 탁신 총리의 매제) 노동부 상임사무총장은 육군본부 2층에 구금됐다.(주66) 폼민 사무총장은 후에 칫차이 완나사띳 부총리와 동일한 게스트하우스에 구금된 것으로 보고됐다.(주67)
용윳 띠야빠이랏(Yongyuth Tiyapairat) 천연자원환경부 장관과 네윈 칫촙(Newin Chidchob, เนวิน ชิดชอบ) 농림부 차관은 목요일(9.21) 정오까지 군사정권에 위치를 보고하도록 명령받았다. 하지만 군사정권은 그들이 출두하지 않을 경우 어떠한 처벌을 받을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당시 두 사람은 런던에 있었다.(주68) 군 병력들이 치앙라이(Chiang Rai) 도의 매짠(Mae Chan, แม่จัน) 군에 있는 용윳 장관의 자택을 수색했고(수요일 오전 10:35), 이후 야간에는 방콕의 자택도 수색했지만, 그를 찾아낼 수 없었다.(주69) 두 사람은 목요일에 육군본부에 출두했고, 이후 구속상태가 되었다.(주70)(주71)
찻차이 완나사띳 안보담당 부총리, 네윈 칫촙 농림부 차관, 용윳 띠야빠이랏 천연자원환경부 장관, 폼민 릇수리뎃 사무총장은 "과도헌법"이 선포된 후 석방됐다.(주72) 하지만 탐마락 이사랑꾼 나 아유타야 국방부 장관의 행방은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
(주67) Channel New Asia, "Four officials close to ousted Thai PM now detained", 2006-9-22.
(주68) The Nation, Yongyuth and Newin ordered to report themselves to ARC, 2006-9-20.
(주69) The Nation, Soldiers raid Yongyuth's houses, 2006-9-21.
(주70) The Nation, Urgent: Newin reports to ARC, 2006-9-21.
(주71) The Nation, Urgent: Yongyuth reports to ARC, 2006-9-21.
(주72) The Nation, Four key men under Thaksin freed : Sonthi, 2006-10-3. |
1.3. 국내의 상황
짜뚜론 차이셍(Chaturon Chaisang), 품탐 웨차야차이(Phumtham Wechayachai, ภูมิธรรม เวชยชัย),
수라난드 웻차치와(Suranand Vejjajiva) 등 몇몇 여당 당료들도 여전히 태국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지만, 군사정권이 이들을 구금하지는 않았다. 집권 "락타이 당"(TRT: 태국을 사랑하는 태국 당) 소속 위라 무시까뽕(Veera Musikapong) 의원 역시 자유로운 상태에 있었다.
여당 부총재였던 수리야 쯩룽리엉낏(Suriya Jungrungreangkit, สุริยะ จึงรุ่งเรืองกิจ) 산업부 장관과 전 사회개발인도주의보호부 장관이었던 와따나 므앙숙(Watana Muangsook) 씨 역시 국내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지만, 그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주73)
1.4. 공무원과 그 가족
군사정권은 정부 부처에서 탁신 정권이 임명한 이들을 물러나게 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탁신 전 총리의 "군사예비사관학교"(Armed Forces Academies Preparatory School) 동기생 출신들도 물러나게 했다. 이로 인해 여러 군 장교들이 한직으로 물러났다. 군사정권은 또한 경찰에 대해서도 만일 현 보직에 남아있을 경우 국가안보에 위험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이라 하여, 18명의 경찰 간부들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군과 경찰에서 당시 물러난 사람들에 전체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CDR이 공직에서 숙청한 인물 명단"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2007년 2월 초에는 "2007년 방콕 폭발사건"과 관련하여 꼬윗 와따나(Kowit Wattana, โกวิท วัฒนะ) 경찰청장도 사임했다. 그리고 이러한 숙청을 통한 재편은 2007년 4월 인사이동을 통해 완결되었다. 이때 탁신 정권에 충성하는 성향의 인물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새로운 정권이 신뢰할만한 인사들로 교체되었다.(주74)(주75)
군사정권은 9월 20일 헌법의 폐기를 선언하고, "헌법재판소" 및 여타 독립기관들도 자동으로 해산된다고 확인했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명령을 통해 자루완 멘타까(Jaruvan Maintaka, จารุวรรณ เมณฑกา: 여) 감사원장만은 그 신분이 계속 유지된다고 했다. 동 명령에 의해 "국가 감사위원회"(State Audit Commission)도 해산됐다. 군사정권이 정부 고위인사들을 소환했을 때 자루완 감사원장도 모습을 보였다.(주76)
(사진) 자루완 멘타까 현 태국 감사원장. 탁신 정권 당시 그녀는 자신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2005년 사임을 요청받았고, 그러한 절차는 상원의 동의절차까지도 통과된 상태였다. 하지만 갑작스레 푸미폰 국왕이 개입하여 그녀의 직위는 유지됐고, 상원은 국왕에 대한 예의상 더 이상의 재심절차를 포기했다. 그녀는 자신의 친아들을 비서관으로 임명하고 국비를 탕진하는 외유를 시킨 혐의로 사회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 인물이다. 군사정권 하에서 바로 그녀가 탁신 전 총리의 부정부패 혐의를 밝혀내는 데 선봉에 서게 된다. 하지만 재산몰수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갖고 조사에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1건의 모호한 사안을 제외하고는, 실제적으로 밝혀낸 것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리하여 금년 2월의 탁신 전 총리 재산몰수 사건 역시, 향후 법리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
탁신 총리의 측근이었던 수라싯 살카뽕(Surasit Sangkhapong) 정부 복권발행사업소장은 자루완 감사원장이 불법행위를 조사할 수 있도록 했다.(주77) 탁신 총리의 처남인 프리야우판 다마퐁(Priewphan Damapong) 경찰 부청장은 군사정권의 명령에 따라 경찰청장에게 자신의 위치를 보고했다.(주78)
탁신 총리의 부인과 아들은 계엄령 선포를 앞두고 태국을 떠나 싱가포르로 간 것으로 보고됐지만,(주66) 이후 태국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주79)(주80)(주81) 이들은 일가의 재산을 관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주79) 탁신 총리 부인인 퍼짜만 친나왓(Pojaman Shinawatra)은 9월 25일(월) 오전 1시 30분에 방콕을 떠나 남편이 있는 런던을 향했다.(주82)
(주74) Bangkok Post, Sonthi loyalists put in key military positions, 2007-3-22.
(주75) Bangkok Post, Mid-year reshuffle completes the Thaksin purge, 2007-3-22.
(주76) The Nation, ARC issues order to maintain Jaruvan's status, 2006-9-20.
(주77) The Nation, GLO chief resigns, 2006-9-29.
(주78) The Nation, Priewphan reports to police chief, 2006-9-20.
(주79) The Nation, Please leave my family alone, pleads Thaksin, 2006-9-22.
(주80) The Bangkok Post, Bangkokpost.net, Thaksin's wife, children still in Thailand.
(주81) The Nation, Nationmultimedia.com, Perfect plot ousts great manipulator.
(주82) The Nation, Nationmultimedia.com, Pojaman leaves for London. |
2. 민주개혁평의회 : CDR
2.1. CDR 개요
국사정권은 일련의 발표들을 통해 상황을 장악했다. 초기에 언론들에 대해 요청한 군사정권 지도부의 정식명칭은 "입헌군주제 하의 민주개혁평의회"(Council for Democratic Reform under the Constitutional Monarchy: CDRM)라는 긴 명칭이었다. 군사정권은 만일 자신들이 "입헌군주제 하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을 모른다면, 이는 상황을 오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주83) 군사정권은 이후 태국어 명칭은 놔둔 상태에서 영어 표기만 "민주개혁평의회"(Council for Democratic Reform: CDR)로 바꿨는데, 이는 이 쿠테타에 대한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국왕의 역할에 대해 의혹이 발생할 소지를 없애려는 의도였다.(주16)
군사정권은 11번째 성명서를 통해 그 지도부의 윤곽을 발표했다. 이 지도부는 태국의 군대와 경찰 내의 모든 단위들의 수장이 거의 망라된 것이었다.(주84)
- CDR 의장 : 손티 분냐랏낀(Sonthi Boonyaratglin) 육군참모총장.
- CDR 제1부의장 : 사티라판 께야논(Sathiraphan Keyanon, สถิรพันธุ์ เกยานนท์) 해군참모총장.
- CDR 제2부의장 : 찰릿 푹파숙(Chalit Pookpasuk, ชลิต พุกผาสุข) 공군참모총장.
- CDR 제3부의장 : 꼬윗 와타나(Kowit Wattana) 경찰청장.
- CDR 사무총장 : 위나이 팟티야꾼(Winai Phatthiyakul, วินัย ภัททิยกุล) 국가안보위원회(National Security Council) 사무총장.
- CDR 선임자문 : 르엉롯 마하사라논(Ruangroj Mahasaranon, เรืองโรจน์ มหาศรานนท์) 합참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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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20일 군사정권은 손티 분냐랏낀 장군이 총리 권한을 갖고 있다면서, 총리를 임명했다는 설을 부인했다.(주85)
쿠테타 발발 일주일 뒤 손티 장군의 사관학교 동기생인 분상 나임빠딧(Boonsrang Naimpradit) 합참부의장이 르엉롯 합참의장을 대체하여 합참의장으로 승진했다. 위나이 CDR 사무총장도 국방담당 상임서기(Permanent Secretary for Defence)로 승진했다.(주86)
(사진) 쿠테타 당시 제1군구(수도권) 사령관을 맡고 있었던 아누퐁 파오찐다 장군. 쿠테타 지도자 손티 장군과는 사관학교 동기생으로, 현재 육군참모총장을 맡고 있는 군부의 수장이다. 금년(2010년) 9월에 퇴임이 예정되어 있다.
손티 장군은 자신의 동기생이자 쿠테타 참가 동지들인 제1군구 사령관 아누퐁 파오찐다(Anupong Paochinda) 중장과 제3군구 사령관 사팡 깔라야나밋(Saprang Kalayanamitr) 중장을 육군참모차장들로 승진시켰다.(주87)(주88)
당시 손티 분냐랏낀 장군은 "로이터통신"과의 회견에서, "우리가 정권을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우리는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정부의 도구일뿐"이라 말했다.(주89)
CDR은 제16차 발표 성명서를 통해 스스로에게 의회의 권한을 부여했다.(주90) 9월 22일, CDR은 꼬윗 경찰청장에게 경찰업무에 관한 전권을 위임하고, 그로 하여금 "2004년 국가경찰법"(2004 National Police Bill) 개정작업을 할 수 있도록, 새롭게 설치되는 "국가경찰위원회"(National Police Commission) 의장직에도 임명했다.(주91)
(주83) The Nation, Call us in full – CDRM.
(주84) The Bangkok Post, Top generals all in, 2006-9-20.
(주85) The Bangkok Post, Developments in the military coup d'etat today, 2006-9-20.
(주86) The Nation, Ousted PM's allies receives lenient punishment, 2006-9-29.
(주87) The Bangkok Post, Thaksin's cronies get shown door, 2006-9-24.
(주88) The Nation, Annual military reshuffle announced, 2006-9-29.
(주89) BBC News Thaksin military allies sidelined.
(주90) The Nation, Nationalmultimedia.com, CDRM gives parliament role to itself.
(주91) The Bangkok Post, "Coup leader gets full police powers", 2006-10-22. |
2.2. 자문위원회의 임명
군사정권은 58명의 저명한 민간인들에 대해 CDR 자문위원으로 일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임명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고, 몇몇 사람들은 일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쭐라롱꼰 대학" 정치학부의 차이왓 사타아난(Chaiwat Satha-anand) 교수는 "난 이미 쿠테타가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자문위원으로 일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했다.(주92) 또한 사회통합분과에 소속될 것을 명받았던 사회운동가 빠팁 응송탄 하따(Prateep Ungsongtham Hata, ประทีป อึ้งทรงธรรม ฮาตะ) 씨 역시 CDR의 임명을 사양했다. 그녀는 자신이 민주주의 대변가의 한 사람으로서 비헌법적 수단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CDR에서, 자문위원으로 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반-탁신 성향의 단체 옐로우셔츠(PAD)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삐봅 동차이(Pibhob Dhongchai) 씨는, 자신이 이미 "국가경제사회자문위원회"(National Economic and Social Advisory Council) 위원이어서, 이미 정부에 대해 자문을 할 수 있는 챈널을 가진만큼 CDR 자문기구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주93) 역시 반-탁신 성향의 경제학자 파숙 파숙 퐁파이찟(Pasuk Pongpaichit, ผาสุก พงษ์ไพจิตร) 씨 역시 임명을 고사했다. 그녀는 일본으로 떠나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주94)
하지만 일부 인사들은 자신들에 대한 임명을 환영했다. 이러한 인물들에는 "탐마삿 대학"(Thammasat University) 정치학부 학장 나카린 멕따이랏(Nakharin Mektrairat) 교수와 "수코타이 탐마티랏 개방대학"(Sukhothai Thammathirat University) 정치학부 학장 타위 수라릿티꾼(Thawee Suraritthikul) 교수와 같은 이들이 포함된다.(주95)
어찌하여 임명받은 사람들이 통보를 받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CDR 대변인 빨랑운 까한(Palangoon Klaharn) 중장은, "[통보가] 반드시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일부 사안들은 화급을 다투기도 했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다. 우리가 그 분들의 명성을 침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분들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 답했다.(주96)
(주92) The Bangkok Post, CDR advisers not told of appointments, 2006-9-26.
(주93) The Nation, Three refuse to join CDR reconciliation committee, 2006-10-1.
(주94) INN News, 'ผาสุก' ปัดร่วมคณะที่ปรึกษาศก.คปค., 2006-9-27. (태국어)
(주95) The Bangkok Post, New advisers to CDR urge 'reluctant' to give it a try, 2006-9-28.
(주96) The Bangkok Post, Some advisers surprised by appointments, 2006-9-26. |
2.3. 실각한 정권에 대한 수사
군사정권은 대상자가 탁신 정권의 인사들 및 그 누가 되었든 상관없이, 세금포탈을 비롯한 모든 행위를 수사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받은 위원회를 설치했다. 남 임옘(Nam Yimyaem)이 이끄는 이 위원회는 부정부패와 관련하여 탁신 정권 인사들 및 그 가족들의 자산을 동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고, 탁신 정권에 부정적 태도를 갖고 있던 몇몇 인사들로 구성됐다. 여기에는 깨우산 아티폿(Kaewsan Atibhoti, แก้วสรร อติโพธิ), 자루완 멘타까 감사원장, 반쯧 싱카넷(Banjerd Singkaneti, บรรเจิด สิงคะเนติ) 탐마삿대학 교수, 까나롱 찬띡(Klanarong Chantik), 삭 꼰생루웡(Sak Korsaengruang)과 같은 이들이 포함되었다.
또한 별도로 발령된 포고령 제31호는, "국가부패방지위원회"(National Counter Corruption Commission: NCCC)라 이름붙인 이 위원회에 대해, 마감시한까지 재산을 신고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로 신고한 공직자들의 재산을 동결할 수 있도록 했다. 또다른 포고령 제27호는 정당해산 명령을 받은 정당의 당직자들에 대해, 새로운 정당에서 당직을 맡을 수 없게 하고 5년간 피선거권도 박탈할 수 있도록 했다.(주97)(주98)
2.4. 과도헌법
2006년 9월 27일 "과도헌법"(interim constitution) 초안이 공개됐고, 그에 대한 반응은 복합적이었다.(주99)(주100) 전체 입법의원을 임명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점에서, 이 헌법은 1991년, 1976년, 1959년 헌법과 구조적으로 유사했다. 이 헌법이 선포되면 CDR은 자동적으로 "국가안보평의회"(Council for National Security: CNS)로 전환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후 CNS는 모든 행정 실무기구들의 수장과 입법의원 전체, 그리고 이후의 영구적 헌법 초안을 작성할 위원들을 임명할 수 있었다.(주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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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06년 쿠테타 주도세력의 한 순간의 영광이 현 태국사태를 맞이하여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합니다. 여러 사정으로 고려하면 푸미폰 국왕의 암묵적 허락이 없이는 이렇게 쉽게 쿠테타에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이듭니다.
이 게시물은 총 4편의 시리즈물입니다. 바로 다음에 게시될 제3편에서 푸미폰 국왕의 역할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일단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경우, 그 정보제작 과정이 복수의 인원이 참가하여.. 비교적 무정파적 논점을 특징으로 하고 가능한한 팩트들을 중심으로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푸미폰 국왕의 역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최소가 "암묵적 묵인"이고.. 최대는 "배후에서 사주했거나 조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4편은 국내 및 국제사회의 반응인데... <이코노미스트> 지는 이미 당시에.. 이 사건이 향후 태국사회에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