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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만갑(宋萬甲, 1866년 ~ 1939년)은 조선 말, 일제 강점기의 명창이다. 전남 구례읍 봉북리 출신. 동편제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여기에 서편제를 가미하여 새로운 소리제를 창조하였다.
가왕(歌王)으로 불리던 증조부 송흥록, 할아버지 송광록, 아버지 송우룡 등 3대조가 모두 동편제를 업으로 삼아 온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그 영향으로 7세부터 소리 공부를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소리를 가르치는 스승 역할을 했는데, 특히 아버지는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때 매질을 하는 등 엄격한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13세 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재롱으로 불러본 것이 청중을 감동시켜서 명창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으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불렀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활발하고 발랄한 소리를 좋아하여 자기 가문의 고매한 판소리에서 이탈하였다.[1]
판소리에서 동편제에만 구애받지 않고 경기도 향토음악제인 경제(京制)를 많이 활용하였다. 이것이 가문에서 문제가 되어 할명(割名)을 당하였다. 조선성악연구회를 창립하였다. 서울로 올라와서 원각사 간부를 맡았으며, 이때 고종 앞에서 어전 광대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으며 감찰직을 제수받았다. 원각사가 폐쇄된 뒤에는 궁내부 별순검 직무를 3개월간 수행하기도 했다. 충정공 민영환과 함께 중국과 미국 등지를 다닌 적도 있다.
소리로만 부르던 《춘향가》 《심청가》를 창극화하여 공연하였으며, 이동백·정정렬 등과 함께 1923년 '조선성악연구회'를 설립하여 제자 양성에 힘썼다. 대표적인 제자들로 장판개, 박중근, 김정문, 박봉래, 박록주 등이 있다. 유성기 음반 87면에 다수의 판소리들을 녹음하였다.
'청중과 교감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청중이 원하는 방식으로 소리를 불렀다. 이 때문에 집안 및 선후배, 동료들 사이에서 지탄을 받기도 했으나, 대중들에게는 매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정창업 소리에 감복하여 동편제의 판소리에 서편제의 발랄하고 구성진 요소를 가미하여 독특한 자기 스타일을 개척하였다. 따라서 많은 대중에게 갈채를 받은 반면 자기 가문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고 박기홍·전도성과 같은 전통적인 동편제 명창들에게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박타령〉이 특출했다.[1]
그의 소리는 정교하지만, 동시에 아니리가 부족했다는 평가가 있다.
태어난 때 | 1865(고종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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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때 | 1939 |
소속 국가 | 한국 |
직업 | 명창 |
조선 고종 때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판소리명창.
우룡(雨龍)의 아들이고 광록(光祿)의 손자이다. 4세부터 할아버지 광록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13세 때 '아기명창'이란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16세 때 광록을 따라 전주대사습에 구경을 가서 명창들의 소리가 끝난 후 단가를 불렀는데 8명창들보다 관객을 압도하여 인정받게 되었다. 박만순으로부터 소리를 배우고 전라남도 구례에 있는 천은사에서 독공했는데 소리가 폭포를 뚫고 나오는 득음의 경지에 이르자 세상으로 나왔다. 어느날 서편제(西便制)의 명창 정창업의 소리를 듣고 서편제를 자기 가문의 동편제에 도입시켰는데 송씨 일가의 법통을 그르쳤다 하여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또다른 동편제 명창으로부터는 '소리를 통속화시켰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그는 송씨 일가의 소리 법제를 벗어나 스스로 독특한 소리를 얻어 명성을 얻었다. 이에 전라감사 이재각에게서 참봉의 벼슬을 얻었고 어전광대가 되어 고종으로부터 사헌부 정6품 벼슬인 감찰을 제수받아 '송감찰'이라고 불렸다. 1902년 원각사 시절에 김창환과 함께 창극운동을 전개했다. 원각사가 해산된 후 궁내부 별순검(別巡檢)의 직책을 잠시 맡았다가 광무대 개관 이후 이동백·김창룡·장판개 등과 전속으로 있었으며 판소리와 창극공연을 했다. 1930년 조선음률협회와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를 만들어 후배양성과 창극발전에 힘을 쏟았다. 그의 소리는 둥글고 맑으며 곡조의 변화는 적고 아니리가 별로 없다. '십장가'·'이별가'·'남산촌한량' 등이 음반으로 남아 있다. 판소리 5마당에 모두 능했으나 특히 〈심청가〉·〈흥보가〉에 뛰어났고 〈적벽가〉 중 '화용도'를 잘 불렀다. 그의 더늠은 〈춘향가〉의 '농부가'에 전한다.
소리가 전승되면서 전승 계보에 따라 음악적 특성에 차이가 생기게 되었는데,이를 [제]라고 한다. 판소리의 전승은 도제형식으로 대부분 직계, 친인척등 혈연을 중심으로 가문내에서 이루어져 왔으나 신재효 선생을 획으로하여 후대로 내려올수록 동,서편 창법을 넘나들며 여러 스승에게 배워 편제의 정통성과 장점(예를 들어 특정 스승의 더늠)을 계승,혼합하여 그 시대적 사조와 상황에 부합되는 판소리로 이행하는 계기가 되었다.제에는 동편제,서편제,중고제가 있는데 지금은 중고제는 적통을 이어가는이가 없기에 동편제와 서편제만이 전해진다. 동편제는 조선 후기 판소리의 명창인 송흥록은 우리 나라 판소리의 중시조이다. 그의 손자 송만갑을 인맥으로 이어지는 창법을 동편제(東便制)라 하는데, 그것은 송흥록이 섬진강의 동쪽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반면서편제는 섬진강 서쪽에 거주하고 있던 박유전의 창법을 서편제(西便制)라 했다.일반적으로 동편제 소리는 산천 초목이 벌렁벌렁 떠는 듯한 호령조가 많으며, 입을 열어 처음 내는 소리가 진중하고, 소리의 끝마침 역시 절도가 있다. 그래서 동편제 명창들은 영웅호걸들의 파란만장을 담은 적벽가에 능하다. 반면, 서편제는 음정의 높고 낮음을 주장하여 부드럽고, 소리의 끝마침이 꼬리가 달린 듯 자르르르 붙어다닌다. 부드럽고 기교가 뛰어난 여성적인 소리이므로 서편제 명창들은 슬픈 소리가 많은 심청가에 능하다. 영화 ‘서편제’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서편제에 깃든 슬픈 정서 때문이다.
송만갑의 동편제 소리
조선후기의 판소리 명창 가문인 증조부 송홍록 과 아버지 송우룡 (본명은 우용)가문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소리꾼이 될 수 있었다.증조부 송홍록은 '네가 크면 반드시 내 뜻을 받들어 후세에 전하라' 고 당부하여, 송만갑은 그렇게 살다가 갔다. 가문에서 이어오던 송만갑의 동편제 소리의 맥을 더욱 진수성찬으로 만든 위인이라고 할 수 있다송만갑이 한 유명한 말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전방보는 사람이 어찌 모본단만 가지고 장사를 하겠느냐?'이 말은 옷감가게에 온 사람이 비단을 원하면 비단을 팔고, 무명을 원하면 무명을 팔듯이 청중이 원하는 소리를 자유롭게 불러 들려 주어야한다는 공감대 형성으로 청중의 눈높이를 갈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만갑은 타고난 천성적인 목청에다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소리 역량과 창법을 구사하면서 청중을 사로 잡았다 한다.송만갑이 말을 할 때는 쉰 목소리인데, 소리를 시작하기만하면 고음의매력적인 철성에, 세성을 쓰지 않은 통성으로 칼빈총을 쏘는 것처럼 카랑카랑한 발성이 대단하였다 한다.시대의 최고 명창 송만갑이 잘 불렀다는 소리는 적벽가 중에 '새타령'. 춘향가 중 '십장가' 대목에서 새소리 묘사나 춘향이 매를 맞으면서 부르짖는 표현과 소리는 신비에 가까운 놀라운 배음에 매료된 청중들의 환호성이 쇄도하였다 한다.고종으로부터 명예직이 아닌 실직 감찰직을 제수받아 함경도에서 근무한 적도 있고, 갑신정병의 주역인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을 따라서 중국,상해와 북경, 미국 등지를 다녔는 것으로 보아 송만갑은 명창과 더불어 특별한 대우를 받은 명망높은 훌륭한 명인이었다 전해진다.
첫댓글 대중과 함께 공감을 형성하신 명창이시군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