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공을 펼쳐 적의 선박을 격침
울산의병장 유정 과 이언춘의 군은 선조 25년 12월에 願遠寺에 있다가 26년 1월 10일에는 무룡산으로 진을 옮겨왔다.
이 때 義將 윤홍명도 모여 들었고, 문수산에 주둔하던 서몽호군도 무룡산으로 移陳하여 기박산성의 이경연 군과 남북이 합세하여 3천이 대군을 이루게 되었다.
이 때 軍을 分隊하기를 서몽호, 서인충, 유정, 박손, 박문, 유백춘의 각 將 200은 要害處에 둔치며, 이경연, 박봉수, 박학남, 심환, 이봉춘, 장희춘 등 각 將 200은 危險處를 막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서생포왜군의 북상에 대비하는 것이었으나, 병영성이나 읍성에는 좌병사 박진의 대군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조 26년 1월 26일에는 유정의 군사와 이언춘의 군이 연합하여 언양으로 나아갔다가 28일에 적선이 태화강구에 돌입 한다는 기별을 듣자 바로 회군하였다.
이리하여 2월 2일에 激義將 이여량, 이응춘, 최봉천, 윤홍명, 장희춘, 박손, 박문, 이장수, 이삼한, 김응하, 박인국, 김광복, 김응탁, 김득복, 유백춘, 유영춘, 김합, 이눌 등이 울산도호부 內 鶴城館에 모여들어 대비책을 의론하였다.
물론 이 때 의병장 유정과 이언춘도 회합하였다.
이 때를 대비하여 이유춘, 이봉춘, 이눌 등은 이미 선단 10여척을 만들어 놓았으며, 또 삽 수백자루를 마련하여 태화강의 물가 모래속에 묻어 두고, 다시 산초나무 5천여주를 실어오고, 많은 숯을 모래속에 묻어 두며, 짚이나 땔나무 4백여바리를 무룡산 기슭에 쌓아놓고 火攻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장희춘 이여량 이눌 등의 조언에 따라 윤홍명, 이룬이 학성단에 나아가 바람을 비는 제를 올렸다.
이튼날 3일에는 동틀무렵에 왜선이 강중에 떠있고 왜병 수천이 사장에서 형세를 크게 떨치고 있어 두려워 제군들이 나아가지 못하였다.
4일에 와서야 이여랑 김응하의 보병으로 하여금 염포에 잠복하여 허수아비 수백을 물가에 세워놓고, 서인충, 이응벽, 이태립, 김응택, 이삼한 등의 수군은 태화강 상류를 수라하며, 김합 이우춘은 연암에 옮겨 둔치는 등 공격군의 배치가 완료 되었다.
그런데 이 때 하늘을 쳐다보니 바람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6일의 황혼에 한조각 검은 구름이 홀연 강중에 일어나더니 밤 10시초에 광연 대풍이 동북에서 게세게 불어닥쳐 기대가다 불어졌다.
이에 윤홍명 이응춘으로 하여금 용건자 수백으로 묻어두었던 삽을 끄내어 모래를 날리며 짚과 땔나무 숯 등을 태우며 마구 던져 거센 火攻을 시작하니 적은 눈을 뜰 수 없고 호흡마져 어려운 대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또 연암에 있던 군사와 江上의 수라 병들이 일시에 협격하자 견디지 못한 왜군은 몸을 강중에 던져 익사하느자 많았다.
또 염포의 우리 복병들도 허수아비에 불을 부쳐 강중으로 던지며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이에 놀란 왜병들이 물에 빠져 죽은자 수천에 달했으며 우리 군세는 크게 떨치었다
이 태화강구의 전투는 울산 경주 양읍의 의병들이 연합작전을 펼친 것인데 지리에 밝은 우리 군들이 야간 화공을 하여 거둔 승리라 할 수 있다.
<자료출처> 울산임란사 -울산문화원 편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