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친정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살며 탤런트 활동은 계속했다. 난리굿을 치르면서도 나는 밖에 나가 내색도 않고 더욱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일을 했다. 속은 이미 썩어가고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말이 별거지 함께 사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자식을 떼어놓은 어미의 마음은 길에서 애들만 봐도 마음이 저며왔다. 자다가도 불현듯 보고싶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혼자 울기도 많이 했다.
이 별거는 냉각기간을 갖고 잘 연구해보자고 한 조치였는데 잘돼 보자고 한 결정은 파경으로 치달아 가기만 했다. '사업 치우고 취직하면 같이 산다' '나는 죽어도 취직은 못한다'는 식으로 의견대립을 보이며 6개월째로 접어들었다
나와 그 사람은 더이상 결합할 수 없다는 데로 의견이 모아져 이혼을 하기로 했다. 6개월 기한부 별거를 하면서 미리 준비돼 있던 이혼 서류를 들고 6개월 되기 이틀을 남기고 서울 가정법원에 갔다.
서소문에서 만나 법원에 들어간 우리 두사람은 나올때 너무도 덤덤하게 그리고 일면 착잡한 심정을 가누며 발걸음을 옮겼다. 가정법원에는 웬 이혼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은지 놀라웠다. 세상에 나만 이혼하러 다니는 줄 알았는데 싸움질도 하고 살벌하게 인상까지 쓰며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법원의 이혼판결이 나오고 호적정리가 되는 기간은 오래 걸렸다. 나는 이혼이란 격랑의 파도를 헤치고 마음의 평온을 찾기 위해 더욱 일에 매달렸다.
81년 한해는 더욱 연기생활에 집착했고 82년 한해도 CF모델 영화등에서 뛰며 내몸을 혹사했다. 범구는 내가 데려왔고 친정 어머니가 돌봐주었다. 나는 내 마음의 평온을 찾아갈 무렵인 83년 5월께 그사람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간혹 아이 때문에 전화는 있었어도 나는 직접통화를 피했다.
그날 전화는 내 평온해가던 마음을 또다시 뒤짚는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 "한번만나 얘기를 좀 합시다"라는 얘기를 듣고 나는 여의도 윤중제방 길에서 만났다. 가로수로 심어진 벚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던 그날 나는 그사람의 "다시 한번 결합해 살아봅시다"라는 말에 온통 내마음은 술렁였고 결합을 위한 제안까지 했다.
"나는 평범한 여자로 돌아가겠다.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라. 드라마는 한프로만 하겠으며 가정위주로 살아가겠다. 탤런트 생활은 명맥만 유지하겠다"고 제의했다.
나는 그 당시 결합이라는 상황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애와 떨어져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심적 부담이 되었고 애 때문에 겪는 마음의 고통은 재결합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사람과 나는 아들과 함께 당산동 현대 아파트를 전세 내어 이사를 했다. 그사람은 현대아파트로 이사해오며 동교동에서 운영하던 레스토랑을 치우고 회사에 취직을 했다.
나는 그때 생활이 최고로 열심히 산것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철도 든 것 같았다. 헤어짐이 있어야 그리움도 솟는다는 말처럼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다. 자식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일종의 사명감도 크게 작용했기 대문에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나 이런 안도의 마음가짐이 제자리를 잡아갈 무렵인 83년 10월부터 문제가 서서히 생기기 시작했다. 83년 6월에 두번째 혼인신고를 한지 4개월만에 일은 크게 터지고 말았다.
그사람은 나와 이혼한뒤 지금은 결혼해 살고 있는 여자와 교제중이었다. 이 여자와의 교제는 끝맺지 않고 재결합한 것을 나로서는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범구아빠-. 다시 생각해봐.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돼"라며 나는 매달렸다. "내가 무엇을 못해주었길래 그러냐"고 묻자 그는 "나는 네 앞에서 주눅들고 그 여자앞에 가면 군림할 수 있다"며 그 여자와의 결별은 계속 원치 않고 있었다.
그해 10월 중순 어느날 나는 그 사람에게 "나가 살아라"고 한뒤 11월 두번째 이혼을 하고 말았다.
나는 자식도 생각해야 되고 그동안 겪은 심적 갈등도 겪어온터라 그여자를 만났다. 안정을 바라던 나였던지라 그 여자에게 사정도 했다. 그러나 그여자나 그사람은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며 발뺌을 해 나의 분노를 들쑤셔놓기까지 했다.
나는 이런일이 생기기에 앞서 83년 7월 어느날 휴가를 내어 세식구가 동해안으로 피서를 떠난 적이 있었다. 2박 3일간의 여정이었는데 그는 간혹 백사장에 나가 멍하니 먼바다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런 모습을 볼때 이제 그여자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마음 달래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사람은 그때 나와 그 여자를 저울대에 올려놓고 요리 조리 계산을 했었던 것이다.
오고가면서 우리는 별다른 대화도 없었다. 애정이 샘솟는 것도 아니고 다만 아이 문제라는 공동 관심사가 즉각즉각 반응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피서를 다녀온 뒤에도 그사람의 마음은 딴곳에 가 있었고 몸만 붙들어 매놓은 형상이 되고 말았다.
나는 사흘뒤 그사람에게 "그 여자를 만날 테면 얘기해달라. 자존심은 상하게 하지 말아달라"며 투정 아닌 애걸조로 얘기를 했다. 대답은 묵묵부답이었다.
그토록 안되면서 왜 재결합을 했는지 나자신까지 미워지며 분통이 터졌다. 그래도 나는 '저러다 마음잡겠지-'라며 한수접고 기다림의 마음을 갖기로 했다.
그러나 이런 나의 고쳐먹은 마음을 뒤집고 파국의 지경으로 몰고 가게 할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큰 이모가 그사람과 그여자가 동행하는 것을 목격한 소식을 전해왔기 때문이었다.
"이것아-. 너는 속도 없냐. 어쩌려고 재결합하고 웃기는 짓거리를 했니-. 내가 오늘 같이가는 걸 봤단말이다."
이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자식을 봐서라도 열심히 살자고 했고 그나마 가정을 새로 꾸며 이제는 안정권에 들었다 싶었는데 또다시 엇갈린 얘기가 들리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그동안 그가 귀가하길 기다리는 아내의 위치를 되찾았다. 3층에 있는 베란다에서 동틀때까지 담요 쓰고 앉아있기도 했다. 그는 간혹 외박도하며 속을 썩였다.
나는 약 일주일이 지날즈음 도저히 그의 외박과 기대감의 허물어짐을 느끼고 그사람에게 따지고 들었다.
"나는 기다리고 양보할 수 있는 여자이다. 나는 애엄마인데 어떻게 할것이냐. 당신의 아내로 살고싶은 여자다"라며 정신차려줄 것을 간청했다. 이날 이 얘기를 들으면서도 별다른 말이 없던 그는 그날 나가 외박을 하고 이튿날 일찍 귀가했다.
TV출연을 하고 귀가한 나는 그에게 "어쩐일이냐"고 묻자 그는 "몸이 아파서 일찍 돌아왔다"고 잘라 말했다.
나는 그날 확답을 얻기 위해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어떻게 할 셈이냐" 고 첫마디를 털어놓았을 때 나는 그에게서 "내가 잘못했다"는 한마디를 기다리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사람은 가까스로 말문을 열더니 "앞으로 5년뒤에는 애도 크고 애 때문에 어쨌다 저쨌다 하는 얘기는 그때 가면 없어지게 된다. 너와 내가 같이 살아가는 인생인데 네 앞에 오면 주눅들고 편치 않다"며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말끝을 가로채며 "내가 언제 주눅들게 했느냐. 이제까지 해달라는 대로 해주었고 편케 해줬잖느냐"며 따져 물었으며 또한 차례 난리굿이 펼쳐졌다.
밤새 고민한뒤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 때문에 헤어졌다는 누명은 쓰기 싫어 이모, 이모부, 친정어머니와 함께 자리를 하고 매듭을 짓기로 작정했다.
다음날 자리를 함께한 이모는 올 때까지 왔다는 생각으로 끝장 내라고 했고 친정어머니는 자식 때문에 산다는 내 얘기에 긍정적인 의사를 표현했다. 이 자리에서 이모부는 "이봐 자네 어쩔텐가. 살아보려나 헤어지려나"라고 그사람에게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 답을 기다렸다.
"헤어지겠습니다." 나는 또 한차례 끓어오르는 분노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면서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야-. 으흐" 설움도 복받쳤지만 배신감에 더욱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듯 했다. 나는 그사람에게 법적 해결을 위해서는 당분간 떨어져 있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그는 말없이 집을 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며칠뒤 만나 다음날 법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한집에서 만나 법원으로 출발하면서도 따로 떨어져서 갔다. 우리는 법원에서 두번째 이혼도장을 찍고 법원문을 나섰다.
"이제 부터는 열심히 잘살아요"
하늘도 땅도 노랗게만 보였다. 내가 조금만 더참았으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반문도 해봤다. 그러나 한번도 아닌 두차례나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구를 탓할 것인가.
이때는 배신감도 증오심도 손톱만치의 미련도 없어져 버린 뒤였다.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때 내 생활은 불투명하기만 했다. 미국에 가있는 친구는 미국으로 와 함께 살자고 권유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권유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나는 무대를 떠나서는 살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금 나는 그때 생각을 하면 서로가 가해자였으며 똑같은 피해자였다고 생각된다. 시간이 흐르며 갈등은 다 삭아졌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끊어지지 않은 그 무엇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사랑은 받지 못한 여자다. 남자를 편케해주고 사랑을 유도해야 되는데 받기만 원했던 것 같다.
두번째 이혼한뒤 3개월 쯤엔가로 기억된다. 그사람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얘야-. 걔에게 그 여자가 결혼해달라고 하는 모양인데 네가 다시 생각해볼수 없겠니. 조강지처로서 대우도 있으니 다시 생각해 보는게 어떻겠니-." 나는 "조강지처가 뭔데요"라며 단호히 잘라 말했다. 그때는 왜 그토록 말속에 뼈가 박혀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전화를 끊고나서 후회도 했지만 세월이 약이 될것이란 평범한 진리를 믿기로 했다.
지금도 나는 남자를 고르라면 못 고를 것 같다. 아마 남자와 다시 산다면 가장 평범한 사람하고나 살것이다.
평범한 가운데에서도 능력과 멋을 갖추면 금상첨화겠지만 입에 맞는 떡이 어디 쉬울까. 결혼=안정이라는 등식은 이제 원치도 않고 있으며 생각의 여유도 없다.
간혹 주위사람들은 나에게 재혼의 권유를 해온다. 그것도 이눈치 저눈치 살피고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나는 이런 눈치를 채고 "얘기해봐. 봐서 괜찮으면 당장 보따리 싸들고 쫓아 갈테니까"라고 부드럽게 분위기를 만든다.
얘기를 듣다보면 딸린 자식 있고 넘치고 처지고 도대체가 들쭉날쭉이다. 나는 조건에 이르러"에이, 에이"하면 대개는 "이봐 다른 여자들은 너만 못해 남편 받들고 살아가는 줄 아니. 생각해서 추천했더니-. 너 그러다 백발노인 돼서 가봐라"하며 악담인지도 모를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는게 아닌가.
사실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그렇게 흔할까. 이렇듯 좋은 자리 내차지가 될 것인가.
참 세상은 고르지도 못하다는 게 내 경험에 비추어 느낄수 있다.
나는 얼마전(87년12월) 맞선을 본적이 있다. 참으로 쑥스러웠지만 처녀때 기분은 그대로 였다. 술렁이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자리를 같이 했지만 나는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이유는 만약에 잘못된다면 이란 가설을 세워놓고 보니 용기는 고사하고 모든게 귀찮아지며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그만큼 지쳐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나는 간혹 스스로 반문하며 내가 왜 이렇게 악착같이 돈벌며 살아가는가에 의문점을 던진다. 팔자나 한번 고쳐볼까 하는 생각도 가끔은 갖기도 한다. 이 팔자타령은 곧 혼자사는 게 최상의 팔자로 귀결짓지만 허전할 때에는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범구는 벌써부터 핵가족 주장을 하고 나서니 나는 별수 없이 혼자 살아가야만 될것 같다. 멀지않아 며느리도 맞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니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나이 50살이면 아들 범구는 30살이 될테니 어미노릇도 그때가면 끝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경제적인 안정도 되찾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식 커가는 모습을 보며 살아가는 중년의 여인이 되었다. 아귀다툼 같은 세월도 있었고 돌이켜 보면 살아온 것도 살아가는 것도 허무한 것임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