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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지역 봉수대 현황(增補文獻備考에 의함, 조선)
성황당 구 봉수대(城隍堂 舊 烽燧臺, 일명 : 쌍계동 봉수대)
위 치 : 영천시 쌍계동
크 기 : 연대 둘레 100m, 높이 1.2m
재 료 : 토석(土石)혼용
시 대 : 조선 / ★ 영천향토사연구회 표석 설치 : 1993. 12. 12
남쪽으로는 (영계)방산(임포동)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성산(청통 신덕) 봉수에 응했다.
후에 금호읍 신 봉수대로 옮겨지지만 이전에 따른 문헌상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 표석(영천향토사연구회) ▲ 출토 유물
189. 烽火山 (쌍계동, 금호읍 원제리, 淺野力,關見仁六 조사)
[1942년 조선 보물고적조사 자료]
성황당 신 봉수대(城隍堂 新 烽燧臺)
위 치 : 영천시 금호읍 원제리
크 기 : 연대둘레 100m, 높이 1.0m
재 료 : 토석(土石)혼용
시 대 : 조선 / ★ 영천향토사연구회 표석 설치 : 1999. 6. 7
남쪽으로는 (영계)방산(임포동)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성산(청통 신덕) 봉수에 응했다 한다.
▲ 표석(영천향토사연구회)
186. 唐山峰 (금호면 원제리, 淺野力,關見仁六 조사)
방산 봉수대(方山烽燧臺, 일명. 영계방산永溪方山 봉수대)
위 치 : 영천군 북안면 임포리 산 19-1
크 기 : 둘레 11m, 높이 1.5m, 외곽석축(방호벽) 300m 및 관리집터
재 료 : 토석(土石)혼용
시 대 : 조선 / ★ 영천향토사연구회 표석 설치 : 1994. 3. 14
남쪽으로는 경주 주사봉(오봉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성황당 봉수에 응했다 한다.
성산봉수대(城山 烽燧臺, 일명 : 신덕 봉수대)
위 치 : 영천시 청통면 신덕리
크 기 : 연대 둘레 100m, 높이 2.0m, 참호형태의 관리집터
재 료 : 토석(土石)혼용
시 대 : 조선 / ★ 영천향토사연구회 표석 설치 : 1994. 11. 23
남쪽으로는 성황당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구토현(청통 계지리) 봉수에 응했다.
188. 烽燧峴 1,2 (청통면 신덕동, 원촌동 淺野力, 藤田良人 조사)
구토현봉수대(仇吐峴烽燧臺, 일명 : 계지동 봉수대)
위 치 : 영천시 청통면 계지리
크 기 : 연대 둘레 70m, 높이 1.0m, 관리집터
재 료 : 토석(土石)혼용
시 대 : 조선 / ★ 영천향토사연구회 표석 설치 : 1994. 12. 12
남쪽으로는 성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여음동(신녕 부산리) 봉수에 응했다.
▲표석(영천향토사연구회)
196. 助也山(청통면 계지동, 淺野力,關見仁六 조사)
여음동봉수대(餘音洞烽燧臺, 일명 : 여질동산餘叱洞山, 부산동 봉수대)
위 치 : 영천시 신녕면 부산리
크 기 : 연대 둘레 234m, 높이 3.6m, 외곽석축과 관리집터가 있음
재 료 : 토석(土石)혼용
시 대 : 조선 / ★ 영천향토사연구회 표석 설치 : 1994. 1. 9
남쪽으로는 구토현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토을산(군위군 의흥면) 봉수에 응했다.
190. 烽火峴(신녕면 부산동, 淺野力,關見仁六 조사)
소산봉수대(所山烽燧臺, 일명 : 소산蘇山 봉수대)
위 치 : 영천시 고경면 파계리 무학산내
크 기 : 연대 둘레 150m, 높이 1.0m, 외곽석축과 관리집터가 있음
재 료 : 토석(土石)혼용
시 대 : 조선 / ★ 영천향토사연구회 표석 설치 : 1995. 1. 8
문헌상 동쪽으로는 응하는 봉수대는 알 수 없으며 서쪽으로는 성황당(쌍계동) 봉수에 응했다.
영천 성황당봉수대(쌍계동봉수대) 해맞이 행사
▷ 주최·주관 : 영천청년상우협의회 / 쌍계동청년회 / 영천향토사연구회
영남일보 [이몽일의 영남 신풍수기행 . 34] 永川市基
영천시기(市基)는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풍수적으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터다. 산수(山水) 취합(聚合) 측면에서 일찍부터 이수삼산(二水三山) 의 고장으로 일컬어져 온 것은 물론 주산(主山)의 생김새가 나는 봉황을 닮은, 이른바 비봉형(飛鳳形)의 지세로 인식되어 주변의 지명(地名)들이 온통 봉황과 연관돼 지어졌을 정도다.
이를테면 성서로움을 가져다 줄 봉황이 날아가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 여, 봉이 대나무 열매를 좋아하는 점을 고려하여 수구(水口)에 위치한 산 이름을 죽방산(竹坊山)이라 명명했을 뿐만 아니라 까치가 울면 봉이 그것 을 잡으려고 날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남쪽 정면으로 바라보이 는 산을 작산(鵲山)이라 이름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산이 곳곳에 솟아 있고, 또한 군데군데에 두물머리(혹 은 合水머리)가 이루어져 있어 삶터가 그만큼 산재(散在)한 탓인지 몰라도 예전의 그런 풍수설과는 사뭇 다른 市基에 대한 새로운 풍수 해석들이 많 이 제시되고 있다.
분분한 의견도 무척 흥미롭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내용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알아보는 것은 곧 현재 우리네 삶터 풍수의 허와 실을 진단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듯 싶다.
먼저 市基 풍수 정체성(正體性)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사신사론(四神砂論)부터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옛 영천읍성 터의 종산(宗 山)이자 진산(鎭山)은 북의 보현산(혹은 母子山)이고, 그 내맥을 이어받은 주산은 마현산(馬峴山)이며, 명당수인 남천(南川) 너머로 나지막이 병풍을 두르고 있는 듯한 작산은 안산(案山)이다. 그 경우, 읍성의 남문과 북문이 있었던 창구동(倉邱洞)의 남북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해서 볼 때 그 남쪽 끝에서 왼쪽으로 약간 비틀어 위치한 조양각(朝陽閣 혹은 瑞世樓)터는 봉 황의 머리에 해당하며, 좌측의 문내동(門內洞) 언덕은 봉황의 왼쪽 날개이 자 좌청룡, 그리고 우측의 교촌동(校村洞) 뒷산에서 과전동(果田洞)으로 이어진 지맥은 오른쪽 날개이자 우백호에 각각 해당한다.
또한 동쪽 멀리에서 운주산(雲住山)과 도덕산, 그리고 시치재를 지나 남 쪽으로 계속 내리뻗은 지맥은 외청룡이고, 팔공산 지맥이 市基의 오른쪽 북천 너머로 연이어 솟구쳐 놓은 사모산(思母山), 봉화산(烽火山), 죽방산 (혹은 遊鳳山) 줄기는 외백호이며, 작산 너머 멀리 남쪽으로 더없이 아름 답게 바라보이는 금오산, 예양산, 채약산 연봉들은 조산(朝山)이 된다.
그런데 그같은 옛 읍성터를 중심으로 한 풍수 해석과는 사뭇 다른 새로 운 市基 해석이 나와 우리들의 주목을 끈다. 즉 보현산의 주맥은 동쪽으로 운주산을 지난 후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천장산(天掌山)과 운산(雲山)으로 이어지는데, 자호천(紫湖川)과 고경천 (古鏡川혹은古村川)이 두물머리를 이루는 운산 아래의 터가 곧 혈처(穴處)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바라봤을 때, 왼쪽의 금강산에서 작산으로 이어진 줄기는 좌청룡이 되고, 오른쪽의 마현산 줄기는 우백호가 되며, 멀 리 맞은편에 있는 유봉산은 안산이 된다고 한다. 아마도 보현산에서 마현 산으로 이어진 지맥 가운데 외미고개 구간이 일제시대때 크게 훼손되고, 또한 운산 아래의 터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는 조망도 나름대로 전후좌우의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같은 새로운 市基 풍수설이 생겨난 듯하다. 필자는 그런 새로운 해석을 결코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삶터에 대한 풍수적인 개념 설정은 어디까지나 공간적으로 상대성을 띤 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거니와, 무엇보다도 그런 식의 자의(自意)적인 해 석이 때로는 사람들이 각자의 삶터를 가꾸고 지켜나가는 데 큰 버팀목 역 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영천시기의 이수삼산에 대한 논란만 해도 그렇다. 서거정(徐居正)이 말 했다는 이수삼산중에 이수는 남천과 북천(北川)으로 귀결된 듯한데, 삼산 은 아직까지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모양이다. 하기야 이백(李白)이 '등 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라는 시(詩)에서, "봉황대 위에서 봉황이 노닐 다가(鳳凰臺上鳳凰遊)/ 봉황이 떠난 텅 빈 주위에는 강물만 흐른다(鳳去臺 空江自流)/ 삼산은 반쯤 푸른 하늘 저쪽에 떨어지고(三山半落靑天外)/ 두 물길을 갈라 놓은 가운데에는 백로주가 있네(二水分中白鷺洲)"라고 읊었던것처럼, 서거정이 봉황대에 해당하는 조양각에 올라 영천의 이수삼산을 얘 기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이수삼산에 대한 사람 들의 관념적인 유희다. 서거정이 삼산으로 과연 사모산, 봉화산, 유봉산을 지칭했는가 아니면 마현산, 작산, 유봉산을 가리켰는가, 그것도 아니면 보 현산, 운주산, 팔공산을 일컬었는가를 두고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한마디로 부질없는 생각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영천시 기를 이수삼산으로 상징화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이제는 그런 역사적인 고증 보다는 오히려 근(近)삼산이든 원(遠)삼산이든 간에 가능한한 이수삼산이 되는 장소를 여러 군데에 설정하여 그런 자연환경을 제대로 보전해 나감과 동시에 정신적으로 좀 더 풍요로운 삶터를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풍수에서는 이수삼산의 터라 하면 으레 더없는 길지로 받아들인 다. 아름답게 솟은 세 개의 산(혹은 산봉우리)과 두 줄기의 맑은 강물이 일궈놓은 빼어난 풍광도 풍광이지만 그 말이 곧 명당을 상징하게 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수와 삼산이라는 말에 함축돼 있는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풍수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산 사이에는 반드시 하나의 물줄기가 있고(兩山之間必有一水), 두 물줄기 사이에는 반드시 하 나의 산이 있다(兩水之間必有一山)고 본다. 이 때 두 물줄기 사이에 놓여 있는 땅은 기계수즉지(氣界水則止)의 원리로 보자면 그야말로 지기가 조금 도 누설되지 않는 천혜의 터다.
게다가 그런 터 주위로 완성.안정.조화를 상징하는 3이라는 숫자가 들어간 삼산이 아름답게 솟아있다면 그 터는 자 연히 더없는 길지가 될 수밖에 없다. 영천시기는 크게 봐서 북쪽의 마현산 줄기 구릉지대와 남쪽의 작산 줄기 주변 평야지대로 시가지가 양분돼 발달 해 있는데, 공교롭게도 마현산은 고현천(古賢川)과 남천에 둘러싸여 있고, 작산은 남천과 북안천(北安川)에 둘러싸여 있다. 산과 물이 마치 풍수원리 에 부응이라도 하듯 그토록 절묘하게 배합해 있으니, 영천시기의 그 어떤 곳도 모두 두 개 물줄기가 합류하는 안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어디까지나 대체적인 윤곽에 따른 것일 뿐, 비록 이 수삼산의 땅일지라도 산업화의 물결은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주산인 마현산에 올라 주변 산천경개를 살피다가 문득 요동치는 듯한 생동 감이 느껴지는 주릉에 매료되어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갑자기 코 끝에 악 취가 진동한다. 다가가 보니 대형 쓰레기 매립장이 조성돼 있다. 아! 이제 는 정녕 이수삼산도 필요없다는 뜻인가.
설사 이수삼산이라는 명기(明基) 로서의 옛 명성을 잊었다 할지라도 하필이면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 안 에 쓰레기 매립장을 만들게 뭐란 말인가. 더구나 주릉의 반대쪽 사면은 영 천지구 전적비와 충혼탑이 있어서 순국선열들의 영혼이 고이 잠들어 있는 성소(聖所)나 다름없는 곳인데 어찌 그토록 상극(相剋)을 이루는 개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산책나온 한 시민이, 그곳 의 매립 시한이 다 되면 그 다음에는 시의 동남쪽에 위치한 완산공원 지역 내에 매립장이 들어설 것이라고 귀띔해 주지만, 이미 만사가 싫어진 필자 의 마음은 조양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를 갖고 찾아간 조양 각 역시 주변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엉망이돼 있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일 제시대때 조양각 경내에 건립된 일본식 군수관사(官舍)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남천 바로 건너편에 세워지고 있는 고층아파트는 조 양각의 품격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었다. 원래는 판국을 멀리 내다볼 수 있다는 뜻으로 명원루(明遠樓)라 이름하던 누각을 한때 소실된 후 중건 하면서, 아침 햇살 부채처럼 펼쳐지는 오동나무에 봉황이 앉아 화창히 운 다고 하여 조양각으로 고쳐 부르다가, 봉황이 나타나는 태평한 세월을 기 원하는 의미에서 서세루라는 이름을 덧붙였다지만, 이제는 앞쪽으로 보이 는 경치도 제대로 조망할 수 없을 뿐더러 그 터에 봉황이 깃들이는 꿈조차 꿀 수 없게 되었다.
무엇이 이 땅 위의 삶터 정신을 그같이 황폐하게 만들 고 있는가. 자연을 우습게 생각하는 인간들이 만드는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일까. 온갖 상념이 서세루 현판 글씨만큼이나 선명하게 떠오른다.
풍수학자. 지리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