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의 지명과 역사적 발자취
해운대 신시가지 발굴 당시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이로 봐서 기장에서도 구석기, 신석기 유물이 출토될 여지는 충분하다. 물론 그렇지 않다 해도 현 이 지역엔 청강리, 좌천리, 고촌리 고분군이 있다. 단, 도굴과 파괴로 정확한 규명이 어려워 안타까움을 더한다. 그래도 당장은 이 고분군에 근거해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삼한시대(BC108~ AD42) 기장, 장안, 철마 등지에 일정 규모 집단이 존재한 것만은 확실하다. 물론 이 집단은 변한(弁韓) 12국 중의 독립된 소국(小國)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신라 22대 지증왕 6년(AD505년) 당시, 한 곳은 거칠산국, 한 곳은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으로 된다. 그리고 신문왕 때(AD685년) 삽양주에, 그 후 경덕왕16년AD757) 한자식 개칭으로, 거칠산국은 동래, 갑화양곡현은 기장이 된다.
기장현은 고려 초 군현제의 개편 과정에서 양주(梁州)에 속하였다. 양주에 소속되는 시기는 태조 23년쯤으로 추정하는데, 양주가 삽량주에서 경덕왕 16년 량주(良州), 고려 태조 24년에 오늘날의 양주(梁州)로 변화된 바로 그 시점이다.
한편 고려 중후기 이후 주현으로 승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인로(李仁老)의 아들인 이세황(李世黃)이 쓴 ≪파한집≫의 발문에, '지난번에 사고로 동각(東閣)에서 쫓겨나고 품계가 깎이어 기장현에 좌천되었다'라는 기록과, 공민왕 즉위년에 한대순(韓大淳)이 기장현감으로 좌천되었다는 기록이 근거다. 고려말 공양왕 3년에는 기장군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기장은 군현체제를 개편하는 와중에서도 지방관이 파견되는 지역으로 존재하였는데, 고려후기 기장군에서, 조선초 기장현으로 격이 한 단계로 낮아진다. 그런데 중종 14년(1519)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경상도가 낙동강 기준 좌, 우도로 양분될 당시 기장은 동래와 함께 경상 좌도에 소속되었다. 이때 기장은 왜구의 노략질로 많은 피해를 입었고, 임진왜란 시 기장현은 읍성이 쉽게 함락되자, 이를 이유로 선조 32년(1599) 기장현은 폐지되어 동래에 일부 이관되고, 북부지역은 울산으로 편입되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나 곧장, 광해군 9년(1617) 부활되었다. 한편 18세기 기장현은 면리제에 입각한 행정체계로,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두모포진이 설치되기도 하였고, 세조대에는 각도의 내륙에 거진을 설치하고 인근 지역을 익에 분속시키는 가운데 기장을 동래진에 분속시켜 중익을 동래로 하고, 좌익은 기장, 우익은 울산으로 삼는 체제의 일원이 된 바 있다. 한편 1896년 도제개편시 ≪慶尙南道 機張郡邑誌(1899)≫ 읍내면 동면 남면 상서면 하서면 상북면 중북면 하북면 등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일제시인 1913년 조선총독부령에 의거, 1914년 3월 경상남도 도령 1호에 따라 동래군에 속하게 된다. 해방 후 동래의 영역으로 존속하다가, 1973년 동래군이 폐지되자 양산군 관할이 되었다. 이후 1980년에 기장면이 기장읍으로, 1986년에는 양산군 동 부출장소가 설치된다. 그 후 복군되어 부산광역시 기장군으로 되었다. 따라서 갑화양곡현 252년, 기장 1240여년의 역사를 갖는다. 기장은 천혜의 해안선과 풍부한 녹지를 갖춘 청정지역으로 동해의 입구에서 부산, 울산, 경주, 포항으로 연결되는 관광벨트는 미래를 기약하는 자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