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 /이규환이 감독한 〈임자 없는 ...
영화가 한국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1919년이다. 이것은 한국에 '활동사진'으로 불린 영화가 소개된 지 20여 년이 지난 후였다. 신파극단 신극좌를 이끌었던
김도산이 만든
〈의리적 구투 義理的仇鬪〉는 연극 장면 가운데 필요한 대목을 영사 화면으로 만들어 공연중에 비추는 활동사진 연쇄극(連鎖劇)이었다. 연쇄극은 한국 영화가 태동하는 과정에서 생긴 과도적 형식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국 영화시대의 개막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뒤 늑막염으로 죽은 김도산의 일파가 1923년 1월 23일 본격적인 활동사진의 틀을 갖춘 활극 〈국경 國境〉을 만들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출연진은 박일순을 비롯한 신극좌 배우 20여 명으로 5만 원(圓)이라는 거액의 제작비가 들었다. 지금까지 한국 최초의 극영화로 알려진 윤백남 감독의
〈월하(月下)의 맹세〉는 〈국경〉이 상영된 그해 4월 9일 경성 호텔에서 신문통신기자를 비롯한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개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저축을 장려할 목적으로 만든 이 계몽극에는 한국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가 등장했다.
그러나 한국 영화는 귀재
나운규의 출연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1926년 박승필이 주도한 단성사에서 개봉된
〈아리랑〉은 일제하의 민중들에게 조국의 의미를 깨우치게 한 민족영화로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의 탁월한 영화적 재능은 제작·각본·감독·주연을 겸한 〈사랑을 찾아서〉(1928)·〈벙어리 삼룡〉(1929) 등에서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잇달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착취적인 취득방식의 모순을 해결한다는 명분아래 계급의식의 고취를 내세운
카프그룹, 곧 경향파(傾向派)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유랑 流浪〉(1928)·〈혼가 昏街〉(1929) 및 〈화륜 火輪〉(1931)을 만든
김유영이다. 이 작품의 공통점은 악덕 지주와 농민의 대립, 도시노동자의 쟁의였다. 한편 관객의 외면으로 흥행에 실패한 경향파의 몰락과 함께 주목받기 시작한 사람이
이규환이다. 나운규에 이어 민중 애환적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그의 데뷔작 〈임자 없는 나룻배〉(1932)는 〈아리랑〉과 더불어 무성영화의 전성기를 장식하는 대표작 중 하나이다.
극심한 침체와 혼미 속에서 한국 영화는 비로소 숙원이던 발성영화시대를 맞이했다. 1935년 10월 4일 개봉된 이명우(감독)·이필우(녹음) 형제가 만든
〈춘향전〉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세계영화계에 토키 영화인 〈재즈 싱어〉가 나온지 8년 만에 이루어진 개가였다. 이를 계기로 홍개명의 〈아리랑 고개〉(1935)·〈장화홍련전〉(1936), 안석영의 〈심청〉(1937), 나운규의 〈오몽녀 五夢女〉(1937), 이규환의 〈나그네〉(1937) 등 발성영화가 발표되어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내선일체를 들고 나온 조선총독부의 압력은 끝내 자유로웠던 영화제작을 허가제로 바꾸는 한편, 일제의 선전 문화영화 의무상영 규정과 함께 서구영화 수입허가제인
조선영화령을 제정했다. 이와 아울러 어용영화의 제작 환경을 조성하여 황국신민화 운동과 자원병 제도를 찬양한 서광제의 〈군용열차〉(1938), 방한준의 〈승리의 뜰〉(1940), 안석영의 〈지원병〉(1941)과 같은 친일적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무렵 데뷔와 함께 히트를 기록한 최인규의 〈국경〉(1939)은 다음해 〈수업료〉를 낳는 발판을 마련했다. 1940년대 한국인의 비참한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호평을 받은 이 영화에는 복혜숙·김신재·문예봉 등이 출연했다.
8·15해방으로 우리 민족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극적인 회생을 맞게 되었다. 또한 일제의 엄격한 통제하에서 제한된 소재가 개방되고, 교화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영화가 대중을 위한 오락기능으로 회복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항일(抗日)영화의 대두였다. 해방기를 연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를 대표작으로 윤봉춘의 〈3·1혁명기〉(1947), 이규환의 〈민족의 새벽〉(1947), 전창근의 〈해방된 내 고향〉(1947), 최인규의 〈독립전야〉(1949) 등이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특히 한 독립투사(전창근 분)의 지하운동을 그린
〈자유만세〉는 자유를 갈구하는 민족의 절규와 연대적 공감으로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정부수립과 함께 해방의 들뜬 분위기가 안정되면서 이규환의 〈갈매기〉(1948), 윤용규의 〈마음의 고향〉(1949), 최인규의 〈파시 波市〉(1949) 등 향토적 정서와 생활의 리얼리티, 사랑의 모럴을 추구한 예술성향의 작품들이 선보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조미령의 데뷔 작품
〈갈매기〉는 대학을 나온 처녀가 동해안의 어느 소년원에 자원하여 교도관으로 봉사하며 문제아들을 감화시켜 나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고,
〈마음의 고향〉은 절에 몸을 의탁한 사춘기 고아 소년이 젊은 미망인을 알게 되면서 어머니의 환상을 찾아 하산하는 내용을 담았으며, 흑산도에서 촬영한
〈파시〉는 어촌사람들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중에도 인간의 심성을 모성적 시각에서 아름답게 포착한 〈마음의 고향〉과 다큐멘터리 터치의 〈파시〉는 해방기에 제작된 작품 가운데 가장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이 시기의 영화는 제작기재 빈약과 시설 미비, 기술부족 등으로 당초 기대한 만큼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10㎜ 무성(無聲)으로 머물고 만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동시녹음 음악영화인 유동일의 〈푸른 언덕〉(1949)과 홍성기의 〈여성일기〉(1949) 같은 최초의 컬러 영화가 시도되었다.
열강의 이해관계가 빚어낸 조국의 분단은 남한과 북한 사이에 사상적 대립을 심화시켰다. 이런 가운데 몰아친 여수반란사건, 제주도 4·3사태등 역사의 소용돌이는 필연적으로 반공영화를 낳았다. 이 시기에 나온 한형모의
〈성벽을 뚫고〉(1949)는 첫 반공영화라는 데에 큰 뜻이 있다. 대학 동기생인 처남·매부 간에 빚어지는 이념적 대립과 갈등을 그린 이 작품은 카메라 구도가 뛰어났다. 또한 6·25전쟁은 영화계에도 적지 않은 인적 손실을 가져왔다. 이명우·박기채·최인규 감독과 강홍식 등의 배우들이 월북했거나 납치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이때 두드러진 현상은
기록영화의 발전이다. 전쟁 이전의 작품이 극장 흥행용인데 비해 전쟁 이후의 작품은 종군 다큐멘터리, 또는 홍보용 문화영화라는 점이 색다르다. 북한의 남침으로 〈아름다웠던 서울〉(윤봉춘 감독) 1편을 내놓고 남하한 영화인들은 피난지 부산·대구·진해 등지에서 16㎜ 종군 다큐멘터리 및 군사영화를 제작했다. 윤봉춘의 〈서부전선〉(1950), 전창근의 〈낙동강〉(1952), 신경균의 〈진격만리〉(1953), 임운학의 〈총검은 살아 있다〉(1953) 등이 바로 그것이다. 대구에 자리잡은 공군의 지원 아래 최초의 항공전투영화 〈출격명령〉(1954)을 홍성기가 만든 것도 이때였다. 이와 같이 전시에 종군하여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카메라맨은 국방부 제작 〈정의의 진격〉(1951) 등을 촬영한 김학성과, 해군의 기록영화를 담당한 이필우 등이다.
이처럼 혼란스러웠던 전시에 신인감독
신상옥은 최은희·황남을 기용해 처녀작
〈악야 惡夜〉(1952)를 발표해 기대를 모았다. 전쟁을 겪은 양공주의 치열한 삶과 애환을 그린 이 작품은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사회의 단면을 부각시켰다. 1953년 휴전의 성립과 함께 단행된 화폐개혁은 극심한 자금난을 가져와 영화제작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공군조종사의 영웅적인 활약상과 사랑을 담은 홍성기의 〈출격명령〉(1954)이 인기를 끌었고, 키스 장면이 처음 나온 이향·윤인자가 주연한 한형모의 〈운명의 손〉이 수도극장(지금의 스카라 극장)에서 개봉되어 히트한 것은 이듬해인 1954년이었다.
환도(還都)와 함께 정상을 회복하기 시작한 영화계는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몇 가지 발전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우선 1955년 6월에 있은 '국산영화에 대한 면세 조치'를 들 수 있다. 이렇게 전향적인 변화 속에서 국도극장에서 개봉된 이규환 감독, 조미령·이민 주연의
〈춘향전〉(1955)이 10만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잇따라 민족정서와 양반의 이기주의를 해학적으로 묘사한 이병일의 풍자극 〈시집가는 날〉(1956), 전창근의 정통사극 〈단종애사 端宗哀史〉(1956), 김성민의 〈망나니 비사(悲史)〉(1956), 그리고 극한 상황에 처한 빨치산들의 반목과 휴머니티를 부각한 문제작 〈피아골〉(1955)과 벙어리 처녀의 애절한 사랑을 담은 〈백치 아다다〉(1957)가 이강천에 의해 만들어져 논쟁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피아골〉은 빨치산의 집합지인 지리산을 무대로 사상투쟁을 전개하는 그들의 이념적 갈등과 좌절에 초점을 맞춘 사실묘사가 돋보였다. 〈춘향전〉의 흥행성공은 곧 신상옥의 〈젊은 그들〉(1955)·〈꿈〉(1955)·〈무영탑〉, 전창근의 〈단종애사〉 등과 같은 시대극의 붐을 일으켰다.
유현목은 이 시기에 등장해 가장 주목받은 영화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출세작 〈교차로〉(1956)·〈잃어버린 청춘〉(1957) 등은 6·25전쟁 후 어두운 사회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한 주제의식이 돋보였다. 이러한 그의 영상적 집착력은 뒷날 대표작이 된 〈오발탄〉(1961)에 이르러 한층 강렬한 메시지로 발산되었다. 문정숙·최무룡이 공연한 〈교차로〉에서 보인 대립적인
몽타주는 〈잃어버린 청춘〉에 이르러 더욱 뚜렷한 절망의 이미지로 발전했다. 〈주검의 상자〉(1955)를 선보인
김기영 감독은 〈초설 初雪〉(1957)·〈10대의 반항〉(1958) 등을 통해 전쟁으로 상처 입은 인간들의 모습과, 현실에 적응하는 생존의 본능을 묘사했다.
140여 편의 영화가 쏟아져 나왔으나 질적으로 빈약했던 1957년에 〈황혼열차〉를 통해
김지미 같은 신인배우가 배출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이무렵 한가지 두드러진 경향은 〈자유부인〉·〈별아 내 가슴에〉·〈장마루촌의 이발사〉 등의 히트작들이 말해주듯이 멜로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는 점이다. 〈자유부인〉에서는 자유풍조가 만연시킨 전쟁 후의 애정편력과 가정윤리관을, 〈장마루촌의 이발사〉에서는 좌절을 딛고 일어선 참전용사의 의지를 다루었다. 한편 〈눈 내리는 밤〉(1957)·〈두 남매〉·〈눈물〉·〈자장가〉 등 전옥(全玉) 시리즈에 속하는 통속 신파극이 만들어져 대조를 이루었다.
당시에는 체계를 갖춘 스튜디오가 없었다. 고작 만리동의 목재상 창고, 청량리의 염색공장 창고를 이용한 정도였다. 아시아 재단이 기증한 4만 달러 상당의 촬영·현상 기재를 정동 스튜디오로 옮겨 영화제작에 개방한 것은 1950년대말이다. 여기에서 나온 첫 작품이 김소동의 〈돈〉(1958)이었으며, 시네마스코프 시대가 열린 것도 이때였다. 대지 8만 2,645㎡, 건물 156㎡ 규모의 안양촬영소가 1957년 6월에 준공되었고, 아리플렉스 대신 미첼카메라를 동원해 비로소 이강천이 〈생명〉(1958)을 완성시켰다.
영화 <오발탄> /유현목이 감독한 〈오발탄〉(1961)의 한 ...
4·19혁명이 몰고온 자유물결은 1960년대의 한국 영화를 풍요롭게 하는 지렛대로 작용했다. 정부 당국에 의해 이루어져 왔던 검열기구가 민간 중심의 영화윤리위원회로 이관되어 이성구의 〈젊은 표정〉(1960), 김기영의 〈하녀 下女〉(1960), 강대진의 〈마부 馬夫〉(1960)와 같은 가작이 손상 없이 나오는 등 가시적인 효과로 나타났다.
〈젊은 표정〉이 젊은 날의 꿈과 좌절을 밀도 있게 표출시켜 눈길을 끌은 작품이었다면,
〈하녀〉는 인간의 마성(魔性)을 감독 특유의 가학적인 터치로 끌어내 차별화했으며,
〈마부〉는 평범한 서민의 삶을 긍정적인 휴머니즘으로 승화하여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그러나 1년 뒤에 불어닥친
5·16 군사정변은 영화에도 적지 않은 제약을 가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현목의
〈오발탄〉(1961)이다. 하루가 지겨운 소시민(김진규 분)의 찌든 삶과,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늙은 어머니의 발작적 갈망을 특유의 리얼리즘적인 시각으로 드러내보인 이 문제작은 내용이 어둡다는 이유로 상영이 중단되는 사태에 직면했다. 또한 군사정부는 얼마 후 〈7인의 여포로〉(1965)를 감독한 이만희를 반공법 위반혐의로 기소하는 전례를 남겼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도 한국 영화계는 어느 때보다 질적으로 풍성한 문예영화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신상옥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를 필두로 김기영의 〈고려장〉(1963), 이봉래의 〈성난 코스모스〉(1963), 유현목의 〈잉여인간〉(1964), 박상호의 〈비무장지대〉(1965), 김수용의 〈갯마을〉(1965), 이만희의 〈만추 晩秋〉(1966), 이성구의 〈장군의 수염〉(1968), 최하린의 〈독짓는 늙은이〉(1969) 등으로 이어지면서 의욕적인 예술정신의 결실을 맺었다. 특히
신상옥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통해 탐미주의를,
김기영은 〈고려장〉을 통해 인간을 성악(性惡)의 시각으로 파악하는 새디즘을,
이만희와
김수용은 절제된 영상미와 시적(詩的) 감수성을 각각 특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한편 1960년 추석 대목을 노려 두 라이벌인 홍성기의 〈춘향전〉(김지미 주연)과 신상옥의 〈성춘향〉(최은희 주연)이 치열한 경쟁을 벌여 〈성춘향〉이 72일간의 상영으로 40여 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관객동원면에서 우세했다.
영화 <씨받이> /임권택이 감독한 〈씨받이〉(1986)의 한 ...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성장을 위축시킨 석유파동은 영화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 않아도 텔레비전의 공세에 위축된 한국 영화는 제작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궁색하게 나온 것이 저질영화라는 낙인이 찍힌 〈염통에 털난 사나이〉(1970)식의 넌센스 코미디와 용팔이 시리즈 및 8도(八道) 시리즈였다. 그런데 불황 속에 히트작이 나온다는 통념을 확인시켜주듯이 적시에 터져 나온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1974)과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1975)는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성(性)의 남녀공유를 들고 나온 이화(장미희 분)의 의식에 초점을 맡춘
〈겨울여자〉는 58만 5,700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영화는 또 한번의 전환기를 맞았다. 1982년 6월부터 전면적으로 실시된 야간통행금지 해소와 교복 및 두발자유화는 소재의 개방을 촉진시키는 한편, 심야극장 개설을 가져왔다. 그러한 사회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정인엽의 〈애마부인〉(1982)으로 대표되는 에로티시즘 영화가 성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회고발적인 리얼리즘 추구와 해외영화제의 진출이다.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화려하게 감독으로 데뷔한
배창호는 그동안 금기시되어온 리얼리즘의 벽에 도전하는 집념을 보였고, 1960년대 액션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등장한
임권택은 〈만다라〉(1981)를 통해,
이두용은 〈피막〉(1979)·〈물레야 물레야〉(1983)를 통해 해외에서 이목을 끌었다. 이장호·배창호의 작품들도 이에 못지 않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이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 수상한 것과 1987년 임권택의
〈씨받이〉(1986)로
강수연이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최우수여우주연상을 탄 것이다. 또한 한국 영화의 활성화에 기여한 배우
안성기의 성과도 무시할 수 없다.
첫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