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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시케의 눈동자
강 영 은*
천 개의 달로 떠 있었지만 사내의 얼굴은 보지 못했네 달빛을 뒤집어 쓴 가면은 동공을 능멸했네
등잔의 기름이 사내의 어깨에 떨어질 때 사내를 적신 건 뜨겁고 어두운 우물, 바닥에 닿지 못해 조금씩
여위거나 둥글어가는 그녀의 눈자위였네
사내란 육체를 가진 신, 혹은 나무와 숲과 침대를 지닌 악마의 아름다운 얼굴만 보았으므로 천공을 지닌 그녀의 눈동자는 죽음의 잠에 빠지려 하네
잠의 궤적이 심장을 역으로 겨냥했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을 때 눈처럼 흰 비둘기가 남아 있었다면 잘못 쏜 화살에 맞은 새처럼 그녀는, 우리는, 죽음을 곧장 통과시켰을까 절망이 희망에 속고 있는 동안 검은 구름에 가려진 푸른 눈동자를 사람들은 그믐달이라 해석하네 보름달로 부푸는 사랑은 미답의 우주, 아이들이 자라나 어른이 되어도 달빛은 늙지 않을 것이네
가여운 프시케, 천 번째 달로 떠 있어도 사내의 얼굴은 보지 못 하네 신화(神話)는 여전히 진행 중이네
파벽의 사원
ㅡ에르덴조
차가운 돌바닥에 피를 찍어 서간체의 문장을 쓰는 저녁입니다.
모서리가 부서진 벽의 흥망성쇠에 대해 돌가루가 묻어나는
손바닥만 읽어주십시오.
소멸된 제국의 동글고 기다란 모서리를 읽을 때마다
세습의 붓대로 바람의 갈기를 그려내는 무성한 풀들과
부서져 내린 돌조각이 빛내고 있을
폐허란, 어제의 삶은 전개 되지 않고 죽음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
돌로 된 연꽃이 초원에 피는 동안
돌이 된 남자는 온 몸에 못을 박고 돌이 된 여자는 뼈 마디마디가
불에 던져져 검은 벽으로 서 있을지 모르지만
지워지지 않는 칸의 문장 속에서 울음을 꺼내는 것은
묵언의 입술을 깨트려 쪼개진 심장 같은 파편을 보여주는 일,
돌 하나를 흔들면 돌 뿌리를 붙들고 있는
또 다른 돌이 무너져 내리고
어디 먼 데 돌산이 따라 울 것만 같아
멀리 갔다 돌아오는 발목을 캄캄한 어둠에 내준
당신의 내면은 안녕하신지,
모나거나 못날수록 더 세게 두들겨 맞은
어제의 풍경만 읽어주십시오.
양떼구름을 몰고 가는 서녘이 붉게 빛나고 심장이 뜨거워질 때
나는 내 어머니가 손수 자른 배꼽을 열고
단전 깊숙이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를 첨부 하겠습니다.
정(鋌)이며 쇠망치가 몸속을 파고들 때
비로소 소리를 내며 우는 돌,
돌에게도 울고 싶은 입이 있다는 것을
귀만 있고 입이 없는 허공은 압니다.
허공 깊숙이 박혀 있는 별들도 알고 보면
커다란 돌덩이에서 떨어져 나온 파벽들입니다.
금강석 브로치를 옷깃에서 떼어내듯 누군가 그 속에서
별빛을 꺼냈습니다.
눈에 닿지 않는 육각형의 별빛처럼
부서진 모서리를 기웃거리는 문장 속으로
별의 눈물, 유성우가 쏟아집니다
* 제주 출생. 200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녹색 비단구렁이』외
암 호
구 순 희*
처음 본 그의 손끝에는
굳은살 하나 없는 더듬이가 있다
방금 피아노 건반을 빠져나온 듯한
가늘고 긴 손가락
모래바람 이는 사막의
구릉을 넘어가는 중인지
가끔씩 손끝이 찔리는지
움찔하다가
발기 직전의 꽃
가만, 그가 열고 가는 꽃의 심지를
꾹 눌러 보았다
그의 손가락은 꽃의 중심에 있고
몰래 짚은 내 손가락은
겨우 꽃잎만 살짝 건드렸을 뿐
한아름 다발로 받는다 해도
무슨 꽃이 어떻게 피었는지
알 수가 없다
눈뜨고도 해독할 수 없는 문자를
그는 눈감고도 훤히 아는지
입술 끝에 웃음꽃이 일순
피었다 사라진다.
주머니의 집
지퍼 하나로 열리고 닫히는 집이 있습니다
채우려 해도 늘 비기만 하는 주머니에
변함없이 풍족하올 죄많은 손만 집어넣습니다
손끝에 달린 전등으로 삶의 막간까지 비춰 봅니다
어두운 실내 더듬던 더듬이는 그만 길 잃습니다
웃음이 사라진 빈집엔 푸석한 먼지가 주인입니다
행여나 지푸라기라도 건질까 허우적거리지만
상처만 입고 헛수고한 손을 빼내 거풍시킵니다
지상엔 주머니보다 큰 집들이 왔다갔다 합니다
몇 채씩 사들인 집이 집안 가득 찹니다
집 밖으로 나갈 땐 집을 통째로 들고 다닙니다
색색의 집은 옷 색깔까지 바꿔 주는 카멜레온입니다
요즘엔 부쩍 가방만 사들입니다
모두 눈물 주머니에다
상처난 지퍼가 달렸습니다
몇 번씩은 이런 테마가 있습니다
충동을 충동질하며 생을 소비했습니다
지갑에서부터 핸드백, 여행용 가방까지
생은 지퍼 하나로 열리고 닫힐 뿐입니다.
한 뼘
김 경 선*
한 뼘만 뻗어!
그는 늘 말했다
곧 닿을 거라는 그 한 뼘
오래된 한 뼘
간신히 팔을 뻗으면
이봐, 방향이 틀렸잖아
한 뼘이라는
한 뼘에게 속고 속는다
그의 한 뼘과 나의 한 뼘 어쩌면,
평생 닿지 못할 거리인지도 모른다
한 뼘만,
한 뼘만,
간절히 두 팔을 휘저어보지만
아무것도 잡을 수 없다
그리운 것들은 떠나가고
소망하는 것들은 번번이 놓치고 만다
너무 먼 한 뼘
나는 한 뼘 밖에 서 있다
절망보다 한 수 위인 그,
완벽한 사기꾼이다
다가가면 그는
한 뼘 더 물러선다
단작스러운 그의 놀이에 중독된 것처럼
나는 늘 그에게로 치우친다
TV 위에 놓여진 좁은 화분 속에서
시끄러운 잡음과 전자파에 시달리면서도
한 뼘, 한 뼘
팔을 뻗어가던 선인장이 시들시들하다
자꾸 뿌리 쪽으로 몸을 기댄다
사회에서 한 뼘 멀어진 나,
소파에 뒹굴뒹굴 몸을 굴린다
TV는 채널을 찾지 못하고
초점 잃은 눈동자는 정보지 구인란 쪽으로 쏠린다
새들의 본적
새들의 자유는 과장되었다
평생 허공을 날다가
죽어서 귀가 열리는 새들
죽음으로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자유로운 날개는 속박이었다
허공의 길,
한 번도 그 길을 벗어난 적이 없는
새들의 무덤은 하늘이다
그 아래 우리의 무덤이 있다
땅에 닿지 못하는
새들의 자유는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바람을 등에 업고 바람이 되어 살다가
비로소 허공이 된
새를 받아 안은 하늘무덤을 바라본다
그들의 마지막 유언도
그들을 따라 날아갈 날개도 나에겐 없다
무덤의 문고리를 잡아당기던
한 무리의 새 떼가
서쪽하늘로 사라진다
항아리를 깨고 싶다
김 광 기*
둥그런 산등성이 밑에서 항아리 굽는 것을 본다.
집안 구석구석까지 들쭉날쭉한 항아리들 가득하다.
어떤 것은 어른 덩치도 감쪽같이 숨길만하다.
땟국에 절어 지난한 세월을 말해주는 놈도 있다.
여기저기 항아리마다 고여 있는 냄새를 맡는다.
오래된 숙주 같은 항아리는 가슴을 뛰게 한다.
부지불식간 들고 있던 항아리 뚜껑을 떨어트린다.
화들짝 놀란 욕망이 살아난다. 이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좀 더 과격하고 좀 더 폭력적으로
항아리를 깨고 싶었다. 돌팔매질로 몸통을 맞히거나,
반짝반짝 빛나는 정갈한 곡선을 충동적으로
깨트려 보는 것 아니다. 용솟음치는 기운을 분출시켜
어릴 적부터 나를 감싸고 있는 항아리, 옹관 같은
항아리의 몸통을 박살내고 싶은 것이다. 잠잠히
제 몸의 울음을 우는 항아리의 깊은숨에 잠긴다.
때론 알 수 없는 그 막막한 숨결에 취한다.
몸을 뒤채며 웅얼웅얼 몽환적인 옹알이를 하다가
나를 잉태한 것이 항아리였다는 소리를 듣는다.
지하 이발관
이십 리 길이 넘는 면내에 있던 이발관,
꼭 같은 이발관이 시장 골목길 지하에 있다.
퀴퀴한 냄새, 내 유년의 구석에서 피는 곰팡내와
알싸한 비누냄새에 현기증이 난다.
뿌연 거울이 비추고 있는 허름한 의자와
절단된 공간을 툭 툭 치며 돌고 있는 시계바늘,
늙은 이발사는 째깍 째깍 모데라토 가위질을 하고 있다.
평생을 가위질하며 지낸 장인의 몸짓이다.
겁 없이 물 밖을 꿈꾸는 지느러미 같은 머리뭉치가
그의 손아귀에서 움씰거리다가 잘리고 있다.
기다리는 손님이 있든 없든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한 올 한 올 신중하게 째깍 째깍,
물비늘처럼 일어선 머리카락을 자른다.
마무리 끝에 옷을 털던 그가 비눗물 거품을 내고 있다.
어깨에 올려놓은 신문지 조각이 떨리고 있다.
그의 칼질은 망설임이 없다. 사각사각 소리 들린다.
오돌토돌 돋아 있던 기억들까지 빈틈없이 잘린다.
잘린 꿈과 자유, 시퍼런 기억들이 물에 씻긴다.
지하에선 젖은 것들이 잘 마르지 않는다.
사각비누로 감은 머릿결, 빳빳하게 일어선다.
* 충남 부여 출생, 아주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 수료, 1995년 시집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로 작품 활동 시작,
≪월간 문학≫, ≪다층≫, ≪현대시학≫, ≪열린시학≫ 등으로 작품 활동, 수원예술대상(문학부문, 98년) 수상, 시집 호두
껍질(’02), 데칼코마니(’08) 외, 저서 논리, 논술(’07) 등, 아주대 등 출강, keeps@naver.com
오후의 깊이
김 병 호*
공일의 한낮, 텅 빈 초등학교 운동장 한복판에 사내가 서 있다. 살을 맞고 비틀거리는 포유류 같기도 하고, 자전을 잃고 다그릉거리는 행성 같기도 한데, 발이 타버린 새들이 맞는 낭패에 가장 가깝다. 가만히 헤아려보니 지난겨울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었다던 풍문의 403호 사내다.
사내와 한 몸으로 붙어 인사를 하던 쌍둥이 계집아이들은 벚꽃이 다 져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한여름의 햇살보다 봄 햇살이 뜨겁고 단단했을 뿐이다. 사내는 다섯 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 걸음을 멈춘다. 어제 지나간 새의 그림자가 자갈처럼 단단히 사내를 묶는다. 사내는 아득한 벼랑 사이에 걸쳐져 있다. 얼음을 깎아 만든 사금파리 바람과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텅 빈 길이 사내의 전생이다. 지붕과 풍경들 위에, 지나온 오후의 허기 위에 사내의 시든 숨을 풀어놓자 지워진 이름과 붉은 마음이 뭉게구름으로 피어오른다. 멀리 마른 천둥이 뼈아프게 운다. 간결하고 아름다운 궤도를 지닌 낮별의 첫 화음이다. 사내는 연신 숨을 고르며 제 몸이 아닌 몸을 밀어본다. 자전의 힘은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이다. 사내의 걸음에 맞춰 새 별자리도 천천히 움직인다.
아침녘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린 아내에게, 먼저 전화를 해야겠다.
꽃나무가 잊어버린 일
다 늦은 저녁, 아이와 산책을 나섭니다
보도블록 위로 핏자국이 나뒹굽니다
아이는 사방치기하듯 자국을 밟습니다
이리저리 생을 옮기는 나비 같습니다
마른 꽃잎 한 장, 아이를 들어올립니다
그저 지나는 일은 어떠하냐고
神들이 몇 장의 바람을 헤아리는 동안
번지고 스민 날들이 잠시 슬퍼져
나는 그만, 아이의 손을
놓쳐버렸습니다
지나는 일이 가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달 안을 걷다,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별, 받습니다
박 라 연*
蘭은 추위를 받아야 꽃망울이 맺히고 별은 영하 90도서
드디어 빛났죠
나는 病을 받아야 부지할 수 있는 목숨이어서 별, 받으며
얼어보려고
중국 고원 靑海성까지 왔는데 빗줄기 사이사이에 도란도란
제 속내를 떨구는
초원장막호텔 공안요원들의 정담을 대신 받네요 뼈처럼
단단해진 情에
말이 붙어 있어서 雨中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걸까요?
아무리 춥고 곤궁해도
그게 설움인 것도 모르고 눈동자들이 수십 소쿠리의 별을
구워낼 것 같아요
사는 이야기를 장작처럼 잘 말려 활활 타오르게 하는
그녀들의 담소가
내 안의 당신들을 뱉어내게 했죠 먼지와 탐욕, 부풀린 말
따위를
뱉어낸 자리에 초원 위에 뜨는 별을 담아갈 수 있을까요?
그늘도 그림자도
별이 될 것 같은 여기서 내 안의 당신들을 다 떠나보내고
싶죠 거대한 가스와 먼지가 살을 섞어 별을 낳는다면
그 별, 받을 수 있다면
<제5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수상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 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 더욱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전남 보성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국문과, 수원대 국문학 석사, 원광대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 우주 돌아가셨다 외 3권, 2010년 박두진 문학상 수상.
구루가면
송 은 영*
주인 없는 개들은 모두 잡혀가고
백 년 전부터 엄마를 찾고 있지만
안개 자욱한 새벽거리 저편으로 사라집니다
당신은 너무 먼 곳에 있는데
공중전화 부스는 제멋대로 재잘거립니다
먹힌다는 것 죽는다는 것
운명처럼 당연하게 따라와 사람들을 놀래킵니다
나는 단 하나의 가면으로
무심코 이곳에 머물 뿐
겁주거나 괴이한 분장을 즐기는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엄마를 일찍 포기한
지린내 나는 성범죄자들이
시시한 양심을 버리기 위해
두 발을 묶는 긴 고무줄에
외마디 비명을 챙겨
번지점프대로 오릅니다
태양신의 기운을 받은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저마다 상처 입은 가면이
내 얼굴을 스쳐갑니다
가면은 어디에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만능열쇠이니까요
*구루가면: 아프리카 구루족이 19세기에 사용한 가면
어떤 기다림
그는
사무실 앞에서
시청에서
병원에서
플랫폼에서 무작정 기다린다
느린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기 위해
목적지까지
서서 기다리고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그는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고
떠나버린 여자를
기다리다
곡식을 거두는 농부처럼
기다림을 수확한다
* 경북 포항 출생. 2007년 ≪시와 상상≫으로 등단
넌 출
안 성 덕*
기를 쓰고 기어오르다 헛짚어 자꾸만 미끄러지는 넌출
사다리 대주듯 은근쩍 어깨 빌려주는 돌담
열 길도 넘을 성싶은 시푸른 하늘에 놀라
오줌 지리듯 도르르 허공을 움켜쥐는 넌출
가만히 눈 가려주는 감나무 그늘
엉금엉금 저 담장 끝까지 어찌 기어가나
골똘한 궁리가 뭉쳐 매달린 호박덩이
그 호박 똬리 틀어 괴어주며 가을을 몰고 오는 강쇠바람
오지게 여물어라, 어물쩍 쳐드는 고개 다독이며
따갑게 순 한 번 집어 주며 버티는 팔월 땡볕
엉덩이 쳐주듯 시든 호박잎 툭 건드려주는 소나기
모두가 넌출 넌출
밥 한 번 먹자는 말
밥은 먹고 다니냐?
한 덩이 찬밥처럼 던지는 그 말
부뚜막에 걸쳐
맨밥 한 술 우겨 넣은 듯
울컥 목이 메네
허기진 마음 금세 고봉으로 피어오르네
밥은?
건성 건네는 한 마디에
생일상이나 받은 듯
안 먹어도 배가 부르네
보글보글, 얼큰한 찌개국물 떠 넣은 듯
뱃속 훈훈해지네
젓가락 두 짝 키 맞추듯
건네는 그 말이
굴풋한 빈손에 숟가락을 쥐어주네
밥 한 번 먹자는 말 채 끝나기도 전에
뼛속까지 든든해지네
뚝배기 찌개국물 함께 떠먹으며
말도 섞고 마음도 섞자는 그 말
찬밥 같은 내 몸에
다습게 피를 돌리네
* 전북 정읍 출생, 2008년 ≪시와 정신≫ 신인상, 2009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november222@hanmail.net
물의 독서
이 종 섶*
풀을 읽고 나무를 읽는 물은 접근하는 모든 것들을 읽어버린다 실물보다 아름다운 물의 접사, 물가엔 물이 반한 마음들로 가득하다 먼 산봉우리도 가까이 잡아당긴 물이 세밀하게 그려놓은 수묵화 한 폭, 누구도 물의 솜씨를 따라갈 수 없다 새들의 비행과 구름의 산책을 바라보면 새들이 하늘로 날아가고 구름이 땅으로 내려온다 해와 달과 별들을 관측하는 물이 들려주는 또 하나의 창세기, 우주는 물속으로 돌아가 안식을 누린다
물그림자가 늘어서있는 물의 거리에는 사람을 읽은 흔적도 보인다 그러나 사람이 돌아가면 기록한 이야기에서 사람을 빼버리는 물의 독후감, 사람은 스스로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으나 물의 자서전에서는 언제나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했다 바람을 분석하고 계절을 파악할 때도 마찬가지, 사물이든 사람이든 움직이는 것들이 가까이 오면 물은 변함없는 애정으로 그것들을 맞이해준다 그러나 떠나는 순간 바로 지워버리는 물의 페이지, 물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
삽
오래 쓰면 쓸수록 뾰족한 그곳이 둥그런 엉덩이처럼 변해가는 삽, 처음부터 찌르기 위해 만들어진 삽날은 흙을 갈아엎고 퍼 나르는 동안 닳고 닳아 유순하게 변화되기까지 수없는 세월을 홀로 울며 견뎌야 했다
조금씩 추해지는 표정을 감추려고 찬물로 세수하는 것도 잠시뿐, 쓰레받기로나 쓰이는 늘그막이 되어서야 위협적인 꼭지 부드럽게 깎여 거름더미라도 한 짐 푸짐하게 퍼주고 싶은 착하디착한 곡선으로 변한 것이다
땅을 파면 팔수록 산봉우리 닮아가고 모래를 뜨면 뜰수록 물의 흐름 배워가는 삽 한 자루의 성실한 노동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고 싶은 날, 평생 맞서기만 하던 땅위에 서서 일방적으로 저지른 잘못을 사과라도 하듯 자근자근 눌러보는 삽날의 애교
나의 노년도 저랬으면 좋겠다 싶어 몇 군데 짚이는 곳을 슬며시 만져보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 남을 찌르며 살아야했던 아픔을 언제까지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괴로운 밤 땅을 파기 위해 삽질을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땅을 파야했던 삽 한 자루의 수행이 떠오른
땅은 삽날을 갈아내기 위한 숫돌이었을까 강할수록 부드러운 숫돌을 사용해야 한다며 꼬리뼈의 흔적조차 완전히 없애버린 그곳을 내놓고 다니는 짐승 한 마리, 모든 것을 달관한 자세하나 얻기 위해 날카로운 송곳니도 사나운 포효도 다 버렸다
* 경남 하동 출생,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8년 수주문학상 우수상, 2009년 시흥문학상 대상 수상.
바벨제국 쇠망사
정 한 용*
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이걸 크로마뇽인들은 뭐라 말했을까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샌 긴 밤이여,
이걸 수메르인들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한때 지구에 짧게 살다간 바벨족은 팔천 개도 넘는 언어를 썼다. 대부분 언제 시작됐고 언제 사라졌는지 알지 못한다.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20세기 이후 제국주의가 팽창하면서, 거대 언어 몇 개만 남고, 나머지 99%가 급속히 사라졌다.
라틴어는 14세기 이후 글자로만 남았다
르로이센어는 17세기에, 코이코이어는 19세기에 죽었다
호마어는 1975년, 야마니어는 1978년, 아이누어는 1980년에 죽었다
우비크어는 1984년, 카라와어는 2016년, 바스크어는 2050년에 죽었다
이 목록은 끝이 없다
아시아 전체에서 1,900여개의 언어가 죽었다
아프리카에서 1,800여개, 태평양 지역에서는 1,200여개가 죽었다
아메리카 남북 대륙에서 1,000여개, 호주에서만 260여개가 죽었다
그리고 소수언어가 사라지자 거대언어들도 시들시들해졌다
이 엄청난 언어의 공동묘지에는 아직도 비문들이 남아 있다
[한국어] 당신을 사랑해요 - 2310년 멸종
[일본어] 아이시떼루 - 2397년 멸종
[터키어] 세니 세비요룸 - 2488년 멸종
[독일어] 이히 리베 디히 - 2643년 멸종
[아프리칸스어] 에크 이스 리프 비어 요우 - 2703년 멸종
[슬라브어] 야 바스 류블류 - 2770년 멸종
[아랍어] 오히부카 - 2862년 멸종
[서반어] 떼 아모 - 2977년 멸종
[중국어] 워 아이 니 - 3086년 멸종
[영어] 아이 러브 유 - 3114년 멸종
바벨족은 ‘사랑’이란 단어를 무수히 남발했다. 하지만 쓰임이 제멋대로여서, 그것으로는 바벨족의 절멸 원인을 밝힐 수 없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살인을 추억하다
1932년 12월 13일, 난징의 남동쪽 싱 루 카오 5번가
삼십여 명의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문을 열어준 주인을 죽였다.
왜 죽이느냐 소리치는 안주인에게도 총을 쏘았다.
이 집에 세 들어 살던 샤는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 애원했다, 군인들은 샤를 죽였다.
그리고 샤의 부인을 강간한 다음 대검으로 찌른 뒤
성기에 향수병을 꽂아 넣었다.
곁에서 울던 아기도 덤으로 찔러 죽였다.
군인들은 옆방에서 샤의 부모와 네 딸을 찾아냈다.
두 노인을 우선 총으로 쏘았다.
이어 열여섯 열넷, 두 딸을 강간한 후 잔혹하게 죽였다.
담요 밑에 숨어 있던 여덟 살 딸은 대검에 찔렸다.
막내딸은 담요 밑에서 겨우
죽음을 면하는 대신 뇌손상을 입었다.
집을 나서기 전 군인들은
깔끔하게 마지막을 장식하는 기념으로
떨고 있던 안집 두 아이를 데려왔다.
큰 아이는 대검으로 찌르고, 작은 아이는 목을 잘랐다.
이 집의 유일한 생존자인 여덟 살, 네 살 두 아이
엄마 시체 곁에서 쌀 부스러기를 먹으며 보름을 버텼다.
국제위원회에서 이 집을 찾았을 때
탁자 위에는 강간당한 채 죽어 있는 어린 소녀와
아직 덜 마른 피가 흥건했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거기에는 없었다
* 충북 충주 출생. 1980년 ≪중알일보≫ 신춘문예(평론)와 1985년 ≪시운동≫(시)로 등단. 시집 흰 꽃, 나나 이야기
외. 평론집 울림과 들림 외.
세한도, 봄꿈
박 성 현*
당신의 몸에 바람이 파고든 흔적이 있다.
그 흔적의 깊이와 완력은 당신 속으로 내려앉았던 돌 하나의 무게, 그러니까 잔설이 멈춘 순간이다.
붓이 까마득한 벽에 닿았을 때 시간의 연골이 바쁘게 빠져나갔다.
속이 패이고 거죽만 남은 목어가 간신히 지느러미에 묻은 흙을 털었던 것인데
지천에 널린 반백의 입술들이 쏟아낸 것은 말이 아니라 울음들이 뒤엉킨 소리였다.
단단한 것들이 피고 지는 몸에 다시 꽃잎이 터지고 허공은 그만큼 밀려났으며, 또한 살과 뼈의 경계는 분명해졌다.
바람 한 무리가 새의 겨드랑이를 흔들거나 낙타 위에 앉아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니까 멸(滅)이 통(通)의 관자놀이를 때리고서야 당신은 봄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 <유심> 2010.11‧12
봉화 가는 길
1
빈 항아리에 바람이 스친 것처럼 그 표정이 밝았다
둥근 벽을 퉁기며 진동하는 바람은 그 근원을 모른다
또한 끝을 알 수 없으니 헛꽃에 불과할 뿐이다
동치미를 한 입에 마신 탓에 이가 시렸다
박 씨는 나무못을 깎으면서 날카로운 쪽을 창으로 겨누었다
창밖의 겨울 속에 두 개의 달이 떠 있다
언 흙 위에 서리가 내려 박히는
그리하여 속으로만 불이 번져 뜨겁게 타들어가는 겨울
각각의 달빛은 두 개의 그림자에서 다시 솟아올랐다
박 씨는 가물어가는 목에 탁주 한 사발을 퍼붓고
나무못을 거두어 품에 넣는다
빈 항아리에 다시 바람이 찼다
2
소한이 지나고 큰 눈이 내렸다
사위는 백색으로 들끓고 있었다
날이 저물자 아랫동네 정 영감이 불쑥 문을 열었다
겨울에 죽은 자들은 이 산을 넘지 못한다
비린 청어구이와 탁주를 나눠 먹는 동안 박 씨는 정 영감을 어림잡았다
부처님이 계시는 절이나, 사람을 뉘는 관이나 찬바람 막기는 마찬가지네
박 씨는 모든 집이 관이고, 또 모든 관이 집이라고 말한다
오동나무 결을 고른다
톱이 닿는 자리마다 오동나무는 살을 선뜻 내 준다
허연 톱밥이 발등에 쏟아진다
폭이 넓어 완만하게 쓰러진 것은 아래에 단단히 두고
경사가 급한 것은 결을 따라 세운다
오동나무에 쇠를 박아서는 안 되네
죽은 기운이 산 기운을 파고들 때 나무 등골에 붙은 숨은 멎는 것이네
정 영감은 탁주 몇 사발에 취한 듯 몸을 불끈거렸다
박 씨는 혀를 끌끌 찼다. 암만 숨이 거둬진 몸이라도
마음이 남아 있는 한 사람이네. 정 영감은 누울 자리를 보다가
문득 붉은 이를 보이며 환히 웃기 시작했다
3
오동나무는 단단하게 아물었다
오를 때마다 어깨가 이울었지만, 산을 넘어야 자리가 있다
무순이 가지런히 솟아 있는 밭이랑에 날벌레가 분주했다
산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지만, 길은 더디게 났다
얼큰 취기가 오른 사람들이 서둘러 발을 디뎠다
마음이 먼저 산을 넘었으므로
비탈길은 어지러웠다
사람들은 가쁜 숨을 쉬었다
산은 사람들의 이마 위로 높은 바람을 흘려보냈다
오늘 안으로는 길을 낼 수 있을까
이가 닳은 괭이를 만지듯 천천히 오동나무 이음매를 살폈다
늦은 봄이 얇고 긴 숨을 내쉬었다
상여를 멘 사람들이 발을 옮기다말고 산등성에서 멈췄다
갑자기 청어구이가 먹고 싶었으나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 문학세계사, 2010.
* 서울 출생, 2009년 ≪중알일보≫ 제10회 중앙신인문학상 시 부문 수상,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서울교대 강사, ainmar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