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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연재③
금 강
이 대 영*
▣ 이 행수
선산으로 향하는 이 행수의 얼굴은 대를 이었다는 기쁨으로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큰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 밖으로 나온 손자가 아니던가!
며칠 전에 내린 눈은 여전히 땅에서 날을 세우고 있었다. 매미 소리를 내며 솔숲에서 튀어 나오는 삭풍에 맞서 몸속에서는 솜털이 자주 엉기며 긴장하고 있었다. 섣달 아침은 간간히 찍힌 나무꾼의 발자국을 더 선명하게 만들며 사람들을 집에 꽁꽁 가두어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동장군은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자 하는 이 행수의 충심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사립문을 나서자 동네 우물에는 몇몇 아낙들이 모여 지난 밤의 일들을 이야기 하는 듯싶었다. 그들은 이 행수의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비눗방울 같은 희열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한 손에는 소주병, 그리고 다른 한 손에 북어포를 든 큰아들을 앞세워 마을 뒷산으로 향하는 그를 사람들은 이 행수라 불렀다.
이 행수는 항상 그가 조선을 건국한 이씨 왕조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세종 때의 중군 도총제, 중종 때의 충청·경상 병마절도사를 지낸 그의 조상에 관한 일대기와 무용담은 거나하게 취한 그의 입담 속에 오르내리곤 했다. 일주일에 몇 번씩 듣는 스토리텔링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늘 귀 기울이며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행수는 척박한 중산간 마을에서 만여 평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어 마을 사람치고 그에게 신세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농사철이면 그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지 않는 집이 없었으며, 돈이 궁하면 달려오는 곳이 이 행수의 집이기도 했다. 마을 고양이와 개까지도 이 행수의 집 마당을 놀이터로 사용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의 안방 벽장 속에 있는 치부책에 이름을 안 올린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 행수가 처음부터 부농이었던 것은 아니다. 부여 추동리에서 이렇다 할 가업을 이루지 못한 그의 고조부가 이곳으로 이사를 올 때만 해도 가세가 형편없었다. 토지라곤 달랑 손바닥만한 집터가 전부였다. 그의 조부가 생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먼 인척 중에 이곳에서 꽤 되는 논밭을 일구다가 유구지역으로 이사를 가면서 땅을 소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들을 그의 집 머슴으로 보내 그나마 입을 하나 덜 수 있어 자립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지금 큰아들과 가고 있는 선산도 증조부가 유구에서 삼 년 동안 상머슴으로 일한 새경 대신 받은 땅이었다.
구릉에 오르자 이 행수가 관리하는 산과 작은 밭이 나타났다. 요즘은 동네 아이들이 지게를 지고 시도 때도 없이 오리나무나 소나무 가지들을 쳐대는 통에 하루에도 몇 번씩 둘러보는 산이었다. 황토밭일망정 주로 여름에는 감자를, 가을에는 고구마나 김장배추를 수확하는 20여 평 남짓한 작은 밭이 산자락에 딸려 길쭉하게 누워 있었다. 이 밭은 터앝과 함께 행수 일가에게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겨울에는 밭 옆 둔덕 아래에 참나무를 베어다 쌓아놓고 불을 질러 만든 참숯은 한 겨울 화롯불을 지피는 중요한 재료였다.
이 행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1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초가가 그림처럼 다가왔다. 굵고 반듯한 소나무들도 많건마는 비뚤어지고 못난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얹은 세 칸짜리 초가들이 길을 사이에 두고 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밤새 공복에 시달린 창자들이 누워있을 초가의 풍경은 차라리 겨울이라서 보기 좋았다. 행여 반듯한 기둥을 세웠다가는 인근 산주에게 추궁을 당하거나 양반 행세를 하는 노인들의 구설수에 오를까봐 그들은 사는 것 까지도 스스로 격을 낮추며 생활하고 있었다. 어쩌면 반듯한 사각기둥이나 대들보 깜이라도 손에 얻게 되면 이를 팔아서 외상값을 갚거나 보리쌀이라도 구입하는 것이 나은 절박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 굽은 기둥 밑에서 회사원도 나오고 점원도 나왔으며, 멍석만한 마당에서 육상선수도 나오고 축구선수도 나오는 것이 마냥 신기한 일이기도 했다.
이 행수도 그와 같은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외양간과 창고가 있는 행랑채가 달린 세 칸짜리 집일망정 아이들을 잘 길러 형사나 판검사로 기르고 싶었다. “세상에 형사 놈들보다 독하고 센 놈은 없을거라”는 조부의 마음을 받들고자 첫 아들을 보았으나 울음 한 번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그래서 이 행수는 다른 집 아이들처럼 어둠을 틈타 도장골에 아들의 시신을 묻어 주었다. 도장골을 넘어 오던 날 밤, 여우 소리와 부엉이 소리가 그의 가슴을 퍼렇게 물들이고 있었다. 비록 독 속에 아이를 넣고 새끼줄로 꽁꽁 겉을 동여 메었다고는 하나 굶주린 여우들이 시신을 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질끈 감고 집에 돌아온 그는 담장 곁에서 울어대는 장닭 소리를 한 소절도 놓치지 않고 들으며 새벽을 맞이했다. 그리고는 동이 트자마자 애장터를 다시 찾았다. 부연 안개 사이로 벌겋게 펼쳐진 황토가 눈에 들어오자 그의 무릎이 휘청거렸다. 눈을 부라리며 이 산 저 산으로 달아났을 여우의 행적을 쫒던 그는 이내 우울하게 번지는 안개의 마음을 받아 들였다.
“저승에서나 좋은 부모 만나 잘 살라”며 아내가 입혀 보냈던 배냇저고리가 옹기 덮개에 눌려 떨고 있었다. 아이의 시신은 온데간데없었다. 문득, 모과나무 집 뒷산에 움막을 틀어 살고 있는 문둥이가 떠올랐지만, 어지럽게 널려 있는 쇠갈퀴 모양의 발자국으로 보아 여우의 짓임에 틀림없었다. 지지리도 복 없는 아이라 한탄하며 이 행수는 독을 다시 새끼줄로 대충 묶어 땅에 묻어 두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는 “다행히 무덤이 온전하네!”라며 긴 숨을 삼켰다. 그 때 이불 속에서 엷게 번지던 아내의 주름이 그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그 선한 눈에 홀려 아내의 몸조리가 끝나자마자 서두른 것이 둘째 아이의 임신이었다. 아마도 첫째 아이가 떠나면서 보내 준 선물이라며 이 행수가 아내를 위로하자, 그도 그런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둘째 아이를 낳은 것은 이 행수가 발정 난 암소를 용신골 정산댁 집에 가서 접을 붙이고 돌아 온 직후였다. 정산댁은 이 행수의 논에서 모퉁이 하나만 돌면 바로 보이는 산 밑에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식 없이 홀로 살며 산신당을 모시고 사는 무당이었는데 집 안에 큰 황소를 기르고 있었다. 남편 불알을 보는 대신 황소 불알을 보려고 소를 키우고 있다며 남정네들이 키득거렸지만, 정작 그는 적적한 산 밑에서 황소가 울려주는 워낭 소리에 큰 위안을 삼으며 살고 있었다. 이 행수는 워낙 덩치가 큰 황소라 발정이 처음인 암소가 제대로 견뎌낼 수 있을까 하고 걱정되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힘 좋은 아랫집 남 서방을 대동하고 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 즈음 아내의 산기가 있어 집을 나서는 일이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워낙 암소가 소리를 지르고 외양간 안에서 설쳐대어 차라리 빨리 황소를 보여주는 것이 산모나 태어 날 아기에게도 좋을 듯싶었다. 급한 대로 남 서방댁과 신영골 산파를 불러 출산에 대비하게 하고 암송아지를 외양간에서 끌어냈다. 암소도 서방을 만나러 간다는 것을 아는지 순순히 앞길을 잡아 나갔다. 이 행수의 눈에 뒤뚱뒤뚱 걸어가는 암소의 엉덩이에 붙어 있는 불그스레한 생식기가 눈에 들어왔다. 눈을 떼지 못하던 남 서방도 이 행수를 보며 누런 이를 드러내며 흥분을 참지 못한다.
“그 놈 참 실하게 생겼습니다 그려! 오늘 장땡 잡은 인물은 정산 댁 황소가 틀림없습니다. 어디 저런 물건 달린 과부가 있으면 목숨 걸고라도 보쌈을 해 올 틴디! 히히!”
“이 사람아 어디 크다고 장땡인가? 실한 맛이 있어야지......”
이 행수도 맞장구를 쳤으나 마음은 아내가 출산하는 안방에 가 있었다. 이번엔 튼실한 사내놈을 하나 나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정산 댁은 텃밭을 손보다말고 나와 이 행수를 반갑게 맞아 들였다.
“아줌니! 황소 여물 좀 놔서 멕였는감유? 등치가 너무 커서 잘 될랑가 모르겠네유?”
“워따 걱정도 팔자유, 우리 소가 남 서방 같은 줄 아능게베유∼ 우리 소가 총각딱지 뗀지 얼마나 되는지나 알어유?”
“히히! 나만 닮았다면야 뭔 걱정을 하겄슈∼”
슬슬 눈웃음을 치며 남 서방은 황소를 외양간 밖으로 끌어냈다. 마당으로 나온 황소는 암컷을 보자 코를 실룩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암컷 역시 황소의 기세에 겁을 먹은 듯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 행수가 암소의 코뚜레를 잡고 남 서방이 황소를 몰았다. 그러나 등에 올라 탄 황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암소가 밀려나며 주저앉는 바람에 세 번이나 실패하고 말았다.
“뭐-하구 있대유∼ 잘 좀 해 봐유! 꼭 남 서방처럼 힘으로만 할려고 한다니께...... 기-이술 몰라유, 기-이술?”
“기-이-술? 아 따, 사람하고 짐승하고 어디 기이술이 같데유? 글구 왜 나랑 황소를 자꾸 비교할라구 그런대유...... 좀 기다려 봐유, 자고로 암컷을 좀 달궈놓고 접을 붙이는 것이 순성께!”
남 서방도 힘이 부쳤는지 숨을 고르며 황소의 고삐를 짧게 움켜잡는다. 이 행수는 자신의 암소가 다소 안쓰러웠다. 씩씩거리는 황소의 숨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리며 지나갔다. 이 행수가 자꾸 물러나려 하자, 남 서방이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곤 암소를 외양간으로 데려오라더니 안으로 들어가 이 행수가 건네주는 코뚜레를 한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앞으로 당기며 위로 치켜 올리자 암소의 다리가 들리면서 구유 위로 두 다리가 올려졌다. 암소는 옴짝달싹 못하고 머리만 흔들어댔다. 그제서야 의도를 알아차린 이 행수가 황소를 몰아 일을 성사시켰다. 순간, 황소의 거친 숨소리와 암소의 짧은 울음이 정산 댁의 귓불을 훔치며 달아났다. 구유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행수가 황소의 코뚜레를 이내 낚아채지 않았으면 구유가 무너져 내렸거나 암소의 앞다리가 부러져나갔을 것이었다.
황소를 겨우 진정시켜 외양간으로 밀어 넣고 암소를 마당으로 빼난 다음에야 이 행수는 정산 댁이 가까이 와 있음을 알았다. 그의 손에는 어제 치성 드릴 때 사용한 동동주와 산적이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다. 황소는 무언가 아쉽다는 듯이 연신 머리를 흔들어대며 좌우로 빠른 스텝을 밟고 있었다. 문밖에 있는 늙은 감나무에 암소를 묶어 놓은 남 서방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술자리로 다가왔다. 그러자 정산 댁이 아예 손사래를 치며 우물을 가리켰다. 그러자 이내 남 서방은 우물로 달려가 손을 씻고 돌아와 앉으며 농을 쳤다.
“정산댁! 황소 냄새가 얼마나 좋은디 그걸 아깝게 씻고 오라고 하신디야”
“그런말 마요, 내가 매일 맞는 냄새가 황소 냄샌디 귀하긴 뭐가 귀하다고 그러슈”
“아따, 그 냄쉬하고 이 냄쉬하고 같습디까, 잘 아시문서 그러시네, 히히”
“그나저나 이번에는 한 방에 송아지가 들어섰으면 좋겄는디...... 어디 암소 불쌍해서 다시 접이나 붙일 수 있겄슈?”
“불쌍하긴 뭐가 불쌍타고 자꾸만 그러슈, 암소가 나한티 엄청 고맙다고 하면서 다시 한 번 또 오자고 사정하드만!”
한 없이 길어질 것 같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은 것은 이 행수였다. 남 서방이 석 잔, 그가 두 잔, 정산 댁이 한 잔씩을 마신 후 이 행수는 남 서방을 채근하여 집을 나섰다. 기분이 좋아진 남 서방은 “이따 저녁에 혼자 놀러와도 되느냐”며 농을 치고는 암소를 길로 몰았다. “오려면 혼자 와야지 둘이 오려면 뭣 하러 밤에 오느냐!”는 정산 댁의 맞받음에 그들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큰 길로 빠져 나왔다.
이 행수가 집에 돌아 왔을 때는 이미 아내가 출산을 한 직후였다. 그런데 남 서방댁이나 허 대장댁, 오 씨댁의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되었남?”
“아들이어유, 그리고 아줌니도 무탈해유!”
순간, 이 행수의 가슴에 무언가 찐한 전율이 지나가는 듯 했다.
“그려, 증말 아들이여? 이거 경사 중에 증말 경사일쎄!”
어느덧 외양간에 소를 들여놓고 나온 남 서방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근디 애가 좀 이상해유... ...”
“뭔 소리를 하는 거여? 애가 이상하다니? 별 소리를 다하네!”
남 서방이 아내의 말을 바로 채어 나무라듯 다그친다.
“뭔 놈의 애가 도통 울지를 안는대유? 울긴 울어도 소리가 좀 이상해유......”
“그럼 벙어리라도 태어났다는 거여 뭐여? 이 사람이 재수없게시리......”
남 서방이 이 행수의 눈치를 보며 말을 흘리고 있었다. 이 행수는 본인이 직접 확인해보리라 생각하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화끈한 방 안의 열기가 피부로 전해왔다. 비릿한 냄새가 뜨거운 열기에 못 이겨 방안을 휘젓고 있었다. 아내는 아기와 함께 잠들어 있었다. 이 행수는 우선 아이의 담요를 걷었다. 막 태어 난 생명체가 하얀 배넷저고리를 입고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이 행수는 기저귀를 조심스레 벗겼다. 아내가 한 달 전부터 정성스레 준비했던 무명 기저귀였다. 비록 큰 딸을 양육할 때 사용했던 무명천이었지만 깨끗이 사용하여 새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행수의 눈에 몸에 바싹 달라붙어 붕알인지 짬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사내의 상징물이 분명히 있었다. 삼대독자로서의 외로운 굴레를 벗어던지는 순간이었다. 이 행수의 눈은 더 아래로 내려가 발가락에 머물렀다. 정확하게 열 개의 발가락이 달려 있었다. 손가락도 열 개요, 이목구비도 뚜렷하게 제 위치에 박혀 있었다. 울음이야 나중에 울어도 되는 일이요, 산모나 아이가 건강하다면 무슨 문제인가 싶었다. 안방을 나온 이 행수는 걱정 말라며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사립문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장터로 향하고 있었다. 대를 이은 기쁨을 공수원 육동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기분 좋게 장터로 향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던 이 행수는 벌써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알아 차렸다. 까막까치의 소리를 품은 바람이 귓불을 스치며 지나간다. 이 행수는 옆에 서 있는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자신을 닮은 잘 생긴 얼굴이었다. 나이가 어느덧 스물세 살, 아직도 미소년의 티가 남아 있는 해맑은 얼굴이었지만, 이제는 어엿한 한 가장이요,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배넷저고리를 입을 때까지 울음을 터뜨리지 못한 아들은 결국 지금까지도 언어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행수는 아들이 건장하게 성장해 준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비록 셋째 아들도 큰 놈을 닮아 울음을 터뜨리지 못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둘째 아이는 말문이 열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나마 조상의 은덕이라며 자위하고 있었다.
물끄러미 눈바람에 묻힌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를 최촉하기라도 하듯 큰 아들이 헛기침을 하자 이 행수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문득, 이 행수의 뇌리에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살아 있다면 이 행수보다 더 기뻐하고 몇 번이나 아들의 귓불을 쓰다듬으며 손자의 탄생을 기뻐했을 아내였다.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이 산등선으로 향했다. 내칭이로 넘어가는 우측 산 7부 능선에 그의 아내가 공수원 육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행수에게 아내는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무덤과도 같은 존재였다. 아내의 가슴에는 아직까지 제거하지 못한 전쟁의 파편들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이 행수에게 다시 6.25전란의 충격이 오롯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진저리나는 사건들이 왜 하필 이 기분 좋은 날에 떠올랐는지 모른다.
▣ 전쟁, 그리고 생명
그 해는 유난히 고구마순도 잘 자라고 오이순도 지지대를 타고 하늘로 기어올랐다. 더욱이, 평년에는 잘 피지도 않던 감자꽃이 흰색을 드러내며 고린내를 피워 올렸다. 이 행수 부인은 고린내 속에서도 감자꽃을 잘라내야 알이 실하다며 길가로 흰 대궁을 소복하게 솎아 던졌다. 그래도 감자꽃은 연일 아침이면 모습을 드러냈다가 땅거미가 지면 수줍게 사라지곤 했다.
이 행수가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삼팔선이 무너진 지 이틀 후였다. 용신동에 사는 박 서방 아들이 미아리 근처에서 살다가 피난 짐을 꾸려 시골로 귀향하며 퍼뜨린 소문이었다. 그러나 이 행수는 피식 웃었다. 남한은 미국이 지켜주고 북한은 중국이 조종하는데 전쟁은 무슨 전쟁이냐는 생각이었다. 설령 전쟁이 나더라도 방첩대가 조기에 수습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공주에 나가는 남 서방의 손에 고장 난 트랜지스터라디오와 수리비를 들려 보냈다. 그리고 점심나절에 박 서방 아들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6월 27일에 호남지역에서 공비토벌을 하던 국군 5사단과 전방에서 후퇴해 온 7사단 병력이 정릉, 미아리, 청량리를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북한군 전차에 의해 무참히 뚫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무로 만든 바리케이드에 돌덩이 몇 개 던져놓은 것이 무슨 방어선이냐며 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군이 북한군 전차에 쏘아대는 포들이 형편없어 그들을 막아 낼 방법이 없을 거라며 탄식까지 해댔다. 이 행수는 이놈이 서울물을 먹더니 제법 입담이 늘었다고 생각하며 반신반의 끝에 어찌 그리 사정을 잘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박 서방 아들은 7사단에서 병장으로 제대한 지 5개월도 안되었는데 서울에서 후퇴하는 졸병을 만났다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독안동이나 내칭이골로 피난하는 곳이 좋으며 혹여 금광굴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순간, 이 행수는 도장골에 있는 금광굴을 떠올렸다. 왜정 때, 일본인 금광업자가 채굴했던 곳으로 통로도 넓을 뿐 아니라 손전등을 들고 이십여 미터를 들어가야 끝을 볼 수 있는 굴이었다. 더구나 식수로도 사용할 수 있는 맑은 물이 가운데로 흐르고 있어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동리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집에서 이십여 분 거리라는 점도 은신처로는 적절할 듯싶었다. 박 서방 큰 아들은 금방이라도 적군이 공주에 도달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시야에서 멀어졌다.
이 행수는 저녁이 되기 전에 우선 큰 딸 옥분이를 시켜 감자밭에 손을 댔다. 씨알이 자리 잡으려는데 무슨 짓이냐며 잔소리를 퍼붓는 아내를 무시하고 우선 세 고랑을 후비게 했다. 감자는 꼭 어린아이 불알만씩 하여 뽀얗기가 그지없었다. 이 행수는 비료포대와 몇 장의 가마니, 식량, 이불, 땔감, 솥단지 등을 챙겨 도장골로 향했다. 보리를 수확한 자갈밭들에는 서리방콩들이 푸른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습기 가득한 동굴에는 여전히 차디찬 물줄기가 고랑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박쥐가 사는 동굴이라 머뭇거리는 세 아들을 몰아 20여 미터 가량 들어가자 반원형의 측면 공간이 나왔다. 광부들이 점심시간에 밥을 먹던 휴게공간이었다.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그곳에 내려놓고 일행이 집에 돌아올 때는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사립문은 여전히 삐딱하게 누워 어설프게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이 마당에 들어섰을 때, 안채 마루 주변에는 이미 마을사람 네댓 명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디 다녀오시느냐며 남 서방과 허 대장이 연이어 물었다. 이 행수가 답변이 없자 아들들을 바라보았으나 아들들은 하나 둘 그 자리를 떴다. 이 행수의 철저한 사전교육에 의한 행동이었다. 이 행수는 별일은 없을 거라며 그들을 안심시킨 뒤 돌려보내는 데에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이 행수의 피난길에 동행할 것을 확약 받은 뒤에야 불안한 걸음으로 돌아갔다. 라디오에서는 국군이 서울 사수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곧 평양으로 진격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외침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 시각에 북한군은 미아리에 설치된 장애물을 제거하고 길음교를 통과하여 서울 도심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이 행수가 전쟁발발 소식을 접한 이튿날 새벽에 북한군은 이미 서울로 진입했고 오전 2시 30분에 한강다리는 폭음과 잔해로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이승만 대통령 또한 임진란 때의 선조와 다름없었다. 국군 제6사단 7연대가 춘천전투에서 북한군 2사단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그는 한강이 폭파되기도 전에 대전으로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선조가 도성을 빠져 나가자 성난 민심으로 장예원과 고궁이 불타올랐지만, 수도 서울은 북한군에 의해 불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대한민국 국군은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이미 해주를 탈환했습니다."
라디오 방송은 쉬지 않고 헛발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새벽, 부인 프란체스카와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전차를 대동한 북한군은 남침 3일 만에 서울 시내를 행군하며 승전의 기쁨에 취해 있었다. 국군은 서둘러 29일 병력을 양화대교에서 신사동 지역에 이르는 방어선을 3개 사단으로 재편성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당시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한강변을 시찰한 후 미 지상군 투입 없이는 한국을 구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30일, 미 국방성에 도착한 그는 2천2백 명 정도의 연대 급 병력을 투입하자고 건의하는 한편, 빠른 시일 내에 반격을 하기 위해 일본 주둔군 2개 사단 병력을 추가 투입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여 백악관의 허락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한국을 돕기 위해 선정된 최초의 파병부대는 당시 34세의 스미스(Charles Bradford Smith) 중령이 이끄는 규슈 주둔 미 제24보병사단 21연대 1대대 병력이었다. 스미스 중령은 연대장 스테판스(Richard W. Stephens) 대령으로부터 미군 전투병들을 한국으로 인솔할 것과, 스미스 대대 소속 2개 중대를 75마일 떨어진 이다쯔게(板付, いたづけ) 공군기지로 이동시켜 즉시 한국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받았다. 스미스 중령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가야 하는가?”라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하소연 할 곳은 없었다. “미국인으로 태어나 일본에서 군복을 입고 생활하다가 서른 네 살의 나이로 한국에 가서 죽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으로 그는 몸서리를 쳤다. 어제 비상이 걸린 이후 잠을 이루지 못했던 스미스 중령은 6월 30일 초저녁에 신경을 달래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렵게 이룬 잠자리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부인 베티 에번스 여사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그는 몽롱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연대장으로부터의 긴급호출 전화 때문이었다. 연대장 스테판스(Richard W. Stephens) 대령은 "뚜껑이 날아갔다. 옷을 챙겨 입고 지휘부로 출두하라."는 짤막한 음성을 남기고는 돌연 전화를 끊어버렸다. 스미스 중령은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저녁 9시였다.
연대본부에 도착한 스미스 중령은 어수선한 부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트럭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으며 단독무장에 야간인식표를 어깨에 두른 병사들이 경계근무 초소에 투입되어 있었다. 스테판스 대령은 집무실에서 한국의 지도를 펴놓고 참모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악수를 건네며 축하한다는 뜸금 없는 소리를 했다. 스미스 중령은 멀뚱히 서서 쓴 미소를 날렸다. 스미스 중령은 스테판스 대령으로부터 중대한 명령사항을 하달 받았다. 최초의 미군 전투병들을 한국으로 인솔할 것과, 스미스 대대의 2개 중대를 75마일 떨어진 이다쯔게 공군기지로 이동시켜 즉시 한국으로 비행하라는 것이었다. 이후의 행동 사항은 윌리엄 딘(William Dean) 사단장이 공항에서 추가 지시를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스미스 중령은 그에게 질문을 해도 좋으냐고 물었다. 그는 손을 약간 들어 보이며 허락의 표시를 했다. 스미스의 의문은 자신이 인솔하는 대대병력의 규모로 한국전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생각이었다. 스미스가 부족한 병력과 빈약한 장비를 우려하자, 연대장은 부족한 소대원들을 3대대에서 차출해 해결하라는 손쉬운 답변을 했다. 스미스 중령은 문을 나서며 나직이 투덜거렸다. “이 소수의 병력으로 전차로 중무장한 인민군 1개 사단을 상대하라니...... 나 보고 총알받이가 되라는 말인가!”
스미스 중령은 새벽 3시에 기상해서 2개 중대 병력 440명과 함께 트럭에 올라 이다쯔게 공군기지로 향했다. 병사들에게는 1인당 실탄 120발의 30구경 탄약과 씨레이션 이틀 분량이 지급되었다. 병사들은 대부분 전투경험이 전무한 20살 내외의 어린 동생들이었다. 검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병사들의 사기는 괜찮아 보였다. “인민군은 미군이 참전했다는 사실만 알면 즉시 도망갈 것”이라는 그들의 긍정적인 믿음은 군장의 무게감을 덜어주고 있었다.
공군기지에는 6대의 부산행 C-54 수송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과의 원치 않는 인연을 맺어주는 도구였다. 전장 30.9m의 수송기는 마치 대원들을 매장시키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장례식장의 긴 관처럼 느껴졌다. 몸체에 열 한 개의 창문을 매달고 있는 수송기는 발진을 재촉하는 프로펠러가 뿌연 안개를 날리고 있었다. 스미스 중령은 이미 전선에서 사망한 혼령들의 유골이 이곳까지 날아와 비행장을 막아서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을 이루지 못한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살쾡이 눈빛으로 변해가고 있는 대원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흐른 지 오래였다. 병사들은 탑승명령에 따라 분대 단위로 비행기에 오르고 있었다.
스미스 부대를 태운 수송기가 착륙할 부산의 날씨는 오리무중이었다. 기내에서 바라 본 부산의 전경은 희미한 불빛들만 어둠 속에 명멸할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행장을 두어 번 회항하던 수송기는 기상악화로 착륙이 불가하다는 멘트를 남기고는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잠시 긴장했던 대원들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이 다시 머리를 의자 깊숙이 밀어 넣기 시작했다. 일본으로 수송기가 회항하는 동안 스미스 중령은 한국전쟁이 끝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임무가 끝나는 즉시 본토로의 복귀를 사단 인사과에 청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이 공군기지에 착륙하여 군용으로 지급된 씨레이션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다시 이륙명령이 하달되었다. 공항에 발도 디뎌보지 못하고 두 번째로 한국전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부산의 날씨는 새벽에 비해 약간 호전된 듯했다. 오전 11시경, 그들이 수영비행장에 내렸을 때, 전황은 한 치도 그들에게 여유를 주지 않는 듯 했다. 처치(John H. Church) 장군이 보낸 수송차량은 그들을 곧장 부산역으로 실어 날랐다. 역내를 빠져나오자 MP들은 그들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기차에 오르도록 내몰았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대구역을 지날 때쯤에서야 병사들은 피곤한 눈을 붙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안내방송을 통해 대전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았다. 대전이 한반도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병사들은 이미 정신 줄을 놓고 있었다. 병사들은 기내에서 약속이나 한 듯 두 눈을 꾸벅이거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기 몸을 의자에 말아 넣고 있었다. 병사들의 다리에 쥐가 나고 무릎에 통증이 오를 즈음 기차가 대전역에 도착했다. 역사에는 완장을 두른 MP들의 호루라기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병사들은 시가지를 둘러 볼 여유도 없이 출구를 나서자마자 전방의 부대행렬을 이어갔다. 그들은 승차와 하차를 몇 번째 반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스미스 중령의 눈에 은행인 듯한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과 안경점을 비롯하여 잡다한 간판들을 이고 지고 있는 단층건물들이 거리로 몸통을 들이밀고 있었다.
병사들은 야전삽과 판초우의, M1 카빈소총을 기본 장비로 한 완전군장에 실탄까지 착용하여 걷는 것조차도 불편했다. 20여 미터를 걸어 병사들은 군용 트럭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그들은 강렬한 햇빛을 받으며 실려 가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인격과 육체는 국가로 환수되어 있었다. 자신의 의식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생명은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었다. 그러기에 병사들은 탄창 속에 있는 총알들을 믿으며 손에서 카빈소총을 놓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돼지불알처럼 매달려 행보를 거추장스럽게 하는 수류탄을 애물단지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슴에 달린 수류탄마저도 두어 개 더 달았으면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수류탄 한 발이 자신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다는 절박감이 그들 사이에서 서서히 일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침반 시계를 가진 누군가의 입에서 북쪽을 향해 가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의 지형을 전혀 모르는 그들에게 이제 죽음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타이어는 이따금 자갈들을 튕겨 올렸다. 병사들은 엉덩이에 파란 멍이 드는 것도 모른 채 피난민들의 행렬을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있었다. 바리바리 짐 보따리를 싸서 이고 진 어른들과 그 뒤를 따르는 아이들이 길게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미군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이도 있었고 환성을 지르는 이도 있었지만 병사들은 전방에서 들려오는 포격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스미스부대는 7월 5일이 되어서야 오산 북방 4㎞ 지점인 죽미령에 방어진지를 편성할 수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새벽 3시경이었다. 죽미령 인근의 지형에 미숙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과도 합동작전이 이루어지지 않아 진지를 구축한 후 번복되는 명령으로 몇 번이나 이동을 했다. 특히 1920년대에 일본이 제작한 지도도 방어진지를 구축하는데 애를 먹였다. 이에 병사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어라고 파 놓은 참호를 버리고 다른 진지로 이동하다보니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뻐근한 팔다리에 짜증이 날대로 나 있었다. 만약 딘(Willim Deen) 소장이 오후에 방문하여 일일이 병사들을 독려하지 않았다면 병사들의 사기는 땅으로 곤두박질쳐 있을 것이다.
스미스 중령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남쪽 서정리에 진지를 구축한 한국군 17연대에 연합작전을 시도할 것을 주문했으나 거절당해 결국 최전선에서 적을 방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마도 호주 무스탕기의 오폭으로 평택역이 박살나고 한국군 200여 명이 살상되었던 것이 주된 원인이 아닌가 싶었다. 한국군 제 17연대장 백인엽 대령이 부상으로 후송되고, 1사단 13연대 김익령 대령이 부상을 당하는 등 그 피해가 막심했으니 한국군의 미군에 대한 불신이 이는 것도 당연했다. 결국 스미스부대 6km 후방에 2개 대대 1,412명으로 구성된 제 17연대가 배치되고, 평택에서 미 24사단 34연대가 전투력을 보강하며 에비부대로 자리하는 전선이 되었다.
스미스 중령은 우선, 전차진입로를 봉쇄하고 작전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죽미령은 반월봉(117m)을 중심으로 서쪽 무명고지(90m), 동쪽 무명고지(92m)로 지형을 형성하고 있었다. 서쪽의 무명고지와 반월봉 사이로 경부 국도가 지나고, 동쪽 무명고지 우측으로 경부선 철도가 지나고 있었다. 스미스 중령은 적의 예상 침투로를 가상하여 좌우측 능선에 75mm 무반동총 1정을 보유한 1개 중대를 배치하여 각각 진지를 구축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4.2인치 박격포는 좌측에 배치한 중대 후방 365m 지점에 위치시켰다. T-34 북한군 전차를 무반동총이 1차로 저지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진지 구축이 끝나갈 무렵 52포병 대대장 밀러 페리 중령으로부터 보병진지 후방 1,830m 지점에 5문의 포를 배치했다는 무전연락이 왔다. 페리 중령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묵직했다. 2개 중대 보병을 이끌고 지도를 뒤져가며 이곳저곳 능선을 넘나드는 스미스 중령에 비해 페리 중령은 상관이나 다름없었다. 페리 중령은 1문의 포에 6발의 대전차포탄을 주며 보병과 포대진지 중간 언덕에 배치시켰다. T-34 북한군 전차 한 대에 두 발씩만 쏘아 전차 세 대만 정지시켜도 진입로가 막힐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때 5문의 포로 쑥대밭을 만들고 스미스 부대가 노획물을 수거하도록 한 후, 유유히 후방으로 빠지면 되는 간단한 전투로 생각되었다.
빗줄기는 새벽에 비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참호 위에 꺾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판초우의를 덮고 병사들은 패잔병처럼 쭈그리고 있었다. 스미스 중령은 중대장에게 보병장교 17명의 위치를 파악하게 하고 경계를 철저히 할 것을 주문했다. 특히 중대장에게 75mm 무반동총의 위치와 적 출현 시의 행동요령을 사수에게 숙지시킬 것을 주문했다.
스미스 중령은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새벽부터 전열을 정비하느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임을 알았다. 일부 병사들은 눈치껏 초콜릿이나 밀빵을 먹으며 참호 속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무전병과 함께 물만 몇 번 마신 상태였다. 먹어야 싸울 수 있는 법이다. 스미스 중령은 전 부대원들에게 아침식사를 시작 할 것을 명령했다. 해리 무전병은 전투식량(MRE)을 펼쳤다. 일명 '씨레이션(C-Ration)'이었다. 레이션(Ration)이란 배급식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리법은 A, B, C 세 단계로 구분했는데 A는 조리용, B는 반 조리용, C는 비 조리용으로 전투식량은 비조리용이므로 씨레이션이라 명명된 것이다. 스미스 중령은 해리 무전병이 발열 팩에 물을 붓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저지에서 농장을 하시는 아버지를 돕다가 축산분뇨에 이골이 나 모든 것을 때려 치고 입대한 철부지 친구였다. 아주 까만 피부는 아니었지만 갈색 피부에 진한 눈빛을 지니고 있어 전령으로 추천을 받은 병사였다. 참호 여기저기서 다소 어수선한 잡음이 들렸다. 역시 먹을거리 앞에서 움직이는 동물들은 부산해지기 마련이었다. 스미스 중령은 허리가 접혀 나뒹굴고 있는 씨레이션 봉지에서 ‘US’ 라는 글씨를 발견했다. US 소속인 자신이 왜 이곳 한국 전쟁에 파병되어 전투식량이나 축내며 기다리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농장에서 가축들과 함께 푸른 초원을 달릴 저 젊은 미국 청년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미스 중령은 우선 밀빵 한 개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까칠한 감촉이 마른 입안으로 번져 나가 이내 뱉어 내고 말았다. 티슈를 꺼내 입을 닦은 후 밀(Meal)에 수저를 가져갔다. 쇠고기와 야채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멀리 이국땅이기는 하나 역시 본토 냄새가 났다. 고향의 냄새를 맡은 병사들은 잠시 전쟁을 잊은 듯 눈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보병장교 17명, 보병 389명, 포병장교 9명, 포병 125명 총 540명의 미군들이 죽미령 고개에서 조찬을 즐기고 있었다. 동작 빠른 병사들은 여유 있게 커피를 즐기고도 있었다. 식사를 끝낸 스미스 중령은 액세서리 팩 속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살폈다. 휴지, 성냥, 깡통따개, 사탕과 껌, 담배, 커피 같은 기호식품들이 들어 있었다. 전령이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껌을 씹었다. 달콤한 향내가 입속으로 번졌다. 껌이 이렇게 달콤했는가 싶었다. 그때 무전기에서 ‘브라보, 브라보!’ 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휘본부로부터 적군이 수원 시가지에 접어들었다는 송신이었다. 스미스 중령은 시계를 보았다.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 부대원에 전투준비 명령을 하달하고 망원경으로 진입로를 살폈다. 비단 뱀처럼 길게 뻗은 신작로에는 전선대만 뻘쯤하게 서 있을 뿐, 별 다른 이동물이 포착되지 않았다. 피난민들도 이미 이곳을 빠져 나갔는지 사위가 조용하기만 했다.
약 30분이나 지났을까? 그의 망원경에 적군의 이동이 포착되었다. 그의 미간이 가늘게 떨렸다. 마른 침이 이미 꿀꺽 넘어가고 있었다. 혹여 무전병이 그 소리를 듣지 않았나싶어 얼핏 그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차를 선두로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보병 행렬이 그 뒤를 잇고 있었다. 빗줄기로 가시거리가 짧아 정확한 적의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스미스 중령은 밀러 중령에게 적군이 포격거리에 진입하고 있음을 알렸다. 밀러 중령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포대의 실력을 한번 보여주겠노라며 무전기로 허풍을 떨었다.
8시경, 좌우로 4대씩 8대의 전차가 1개조로 편성되어 진지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북한 제 4사단 예하 107전차 연대의 전차들이었다. 20여 분이 흐른 후 북한군은 죽미령 1.8km 부근까지 진격해 왔다. 그들이 사거리에 들어오자 전방관측 장교가 포병진지에 사격지원을 요청했다. 오전 8시 12분, 두 문의 105mm포가 고폭탄을 발사했다. 포사격이 시작되자 병사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자신들이 전쟁에 임하고 있으며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그들을 엄습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참호에 턱을 박은 채 전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에 주목하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치고 있었다.
포는 사거리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연이어 전차를 명중시켰다. 진지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포를 얻어맞은 북한군 전차는 꿈쩍도 안했다. 스미스 중령은 초조해지고 있었다. 밀러 중령을 호출하여 뭐하는 것이냐며 호통을 쳐댔으나 그는 별다른 반응 없이 포만 쏘아댔다. 다가오는 적은 스미스 중령 스스로가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적 전차가 640m 지점에 이르자 그는 75mm 무반동총 사수에게 사격명령을 내렸다. 1차 방어선에서 전차를 방어하지 못한다면 전황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무반동총 사수는 정확하게 두 발을 선두에서 치고 나오는 전차에 명중시켰다. 그러나 포탄 세례를 받은 T-34 전차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전차는 급경사를 이룬 도로를 따라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전차병들이 포와 기관총을 진지에 난사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적은 이미 보병진지 10여 미터 지점까지 근접해 있었다. 다급해진 스미스 중령은 2.36인치 바주카포 사수에게 포탄을 있는 대로 쏟아 부으라고 고함을 질렀다. 바주카포 팀이 전차의 후미를 공격했지만 역시 끄떡도 하지 않았다. 스미스 중령과 병사들은 낙망할 수밖에 없었다.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보병과 포대진지 중간에 위치한 105mm포뿐이었다. 전차가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을 때, 105mm 대전차의 포신에서 불을 뿜었다. 캐터필러가 끊어진 T-34 전차 한 대가 멈추어서고 이어서 명중된 전차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참호 곳곳에서 탄성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연기가 나던 전차는 삽시간에 불이 붙어 화염에 휩싸였다. 안에 있던 세 명의 전차병이 황급히 헤치를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기관총 진지에서 일제히 사격이 시작되었다. 두 명의 북한군이 빗줄기 속에서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마지막에 탈출한 북한군 병사는 전차를 엄호물로 기관총 진지를 향해 사격을 가해왔다. 그러자 소대별로 배치되었던 기관총 진지로부터 집중 사격이 가해지고 전차바퀴에 몸을 숨겼던 북한군이 나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스미스 부대의 최초의 전과였다. 그러나 세 번째 전차부터는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총 33대의 보병전차가 스미스부대를 비웃으며 방어망을 뚫고 지나갔다. 85mm 전차포와 기관총을 난사하며 일제히 도로를 따라 전진하는 적군이 두려워 포수와 탄약수 등 상당수의 병력들도 도망치고 없었다.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스미스 중령은 시계를 들여다봤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북한군 전차병 3명을 사살했음을 지휘부에 보고했지만 밀러 중령과 기관총부사수가 사망했다는 비보도 전해야 했다. 한국참전 최초의 미군 희생자였다. 페리 중령과 스코트 중위가 직접 사수로 나서 적 전차 1대를 파괴시키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북한군 제105기갑사단 제107전차연대는 비록 전차 7대가 파괴되는 손실이 있었지만 죽미령 3km를 3시간 만에 통과하여 오산을 향해 진격할 수 있었다. 사단으로부터 “전차부대는 보병의 진로만 개척하고 곧장 진격하라”는 명령이 사전에 없었더라면 죽미령 고지 세 개는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전쟁 발기 초기에 공산군 전차는 포격보다는 수 천 명의 보병이 남쪽으로 공결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나가고 있었다.
죽미령 진지에는 불안한 정적이 흘렀다. 미군들 사이에서는 아마도 북한군은 미군이 참전한 것을 모르고 전진한 것 같다며, 그리고 북한군 전차지휘부가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며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 스미스 중령은 포대 전령으로부터 밀러 중령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믿어지지 않았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무전을 주고받던 동료의 죽음은 그에게 한없는 허탈감을 주고 있었다. 그는 지휘부로부터 진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죽으라는 소리냐!”고 반문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 그는 바로 참호와 방공호를 둘러보았다. 참호 마다 병사들은 무언가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방금 전에 일어난 꿈같은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했다. 담배를 피우거나 전투 전에 먹다 남은 씨레이션을 뒤적이는 병사도 있었다. 전령이 메고 있는 무전기 속에서는 이따금씩 북한말과 서울말이 혼선되어 시끄럽게 직직거리고 있었다. 스미스 중령은 전차가 지나간 다음에 바로 보병행렬이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 2전차부대를 대동한 것인지 단순한 보병행렬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휘부에서는 북한군 연대병력이 오산을 향하고 있다고 전할 뿐, 정확한 정보나 추가 병력지원은 언급하지 않았다. 참으로 답답한 전투였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스미스 중령은 수원 방향에서 여러 대의 트럭과 보병이 섞여 다가오는 북한군의 행렬을 발견했다. 비는 쉬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3대의 전차를 앞세운 10km의 긴 보병 행렬은 한 시간 후쯤이면 눈앞에 도달할 듯싶었다. 그들은 최정예부대인 북한군 제 4사단 5연대 병력이었다. 이들이 가시권에 들어 왔을 때, 좌우진지에 포진된 병사들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길게 끝없이 이어지는 대열에 이미 기가 죽은 듯했다. 북한군 호송트럭이 900미터에 접근하자 스미스 중령은 중화기 사수들에게 사격명령을 하달했다. 박격포와 Cal 50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소리만으로도 적을 제압하는 포사격과 사정거리 2.4Km에 분당 1500발의 연사력을 자랑하는 기관총의 위력은 미군의 사기를 북돋우기에 충분했다. 적의 트럭에 화염이 번지고 적군 병사가 여기저기서 땅 위로 튀어 올랐다. 북한군 병사들은 명령을 하달 받은 듯 일제히 트럭에서 뛰어 내려 산개하며 대응사격을 가해왔다. 아군 진지 이곳저곳에서도 비명이 들려왔다. 적 탱크 3대가 보병 진지 200m 지점까지 맹렬하게 진격하더니 스미스 진지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시계는 1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적이 반월봉을 공격하고 주력부대가 우회기동하며 압박을 가하자 부대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개미떼처럼 밀려오는 적은 후방 포대의 지원사격으로 쑥대밭이 되어도 끊임없이 불나비처럼 달려들었다. 좌우측 무명고지 중대장들로부터 철수요청이 수도 없이 무전병을 괴롭혔으나 스미스 중령은 진지 사수를 고수했다. 3시간가량 흘렀을까? 소대 및 중대장들로부터 탄약이 떨어지고 있다는 무전이 들어왔다.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스미스 중령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후 2시 30분이었다. 그는 우측 무병고지 병력의 철수를 명령했다. 북한군 16연대와 18연대 보병들이 우회하여 부대 후방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였다. 포병과의 연락도 두절된 상태였다. 여전히 격렬한 총격전은 지속되고 있었다. 스미스 중령은 반월봉에 남아 있는 병력에게도 철수명령을 하달했다. 문제는 적과 교전하고 있는 2소대가 문제였다. 2소대장은 기관총 부사수들이 모두 사망하자 사수의 옆에 붙어 이를 도와주며 지휘를 하느라 무전기를 받을 틈이 없었다. 뒤늦게 철수 소식을 접한 2소대장은 허겁지겁 소대원들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워낙 최 일선에서 접전했던 소대라 중상자가 많았음에도 이들을 두고 철수 할 수밖에 없었다. 전우를 부르는 외침과 총성이 섞여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철수하는 소대원들을 엄호하는데 기관총보다 좋은 것이 없었다. 소대장은 소대원들이 반월봉 너머로 이동한 것을 확인 한 후에야 사수와 함께 본대에 합류했다. 무려 6시간 15분의 전투를 치룬 후, 스미스 중령은 페리 중령이 이끌던 제52 야전포병대대와 합류하여 죽미령을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가 잔류병을 이끌고 안성을 경유하여 천안에 도착한 것은 7월 6일이었다. 반월봉에서 철수명령을 듣지 못하다 뒤늦게 빠져나온 병사들은 오산 또는 천안으로 찾아들어 얼빠진 얼굴을 보여주었다. 이 날 전투로 540명의 미군 중 약 150여 명이 전사했고, 포병 장교 5명과 병사 26명이 실종되었으며, 많은 중화기가 유실되었다. 북한군 제 4사단 역시 전사자 42명과, 부상자 85명, 전차 4대의 손실의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북한군이 미군의 전투 식량과 기타 노획품에 정신이 팔려 곧장 추격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북한병사 중, 태어나서 처음으로 껌을 씹어 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도, 이 행수의 눈에 마른 껌이 포착되었다. 다소 후텁지근한 날씨라 문을 연 틈을 타고 불어 온 바람이 등잔불의 심지를 돋워 방벽에 붙여 둔 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거무퇴퇴 해서 쇠똥을 떼어 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지만 이 행수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필시 옥분의 짓임에 틀림없었다. 밀 수확 철에는 옥분의 입이 한 시도 쉬는 날이 없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밀 알갱이를 씹어 껌을 곧잘 만들어 먹곤 했다. 동생들에게 부탁해서 야산에 있는 멍개나무 열매를 구해 껍질을 벗겨 그 안에 있는 얇은 막을 섞어 쫀득한 껌을 만들어내곤 했다. 이 행수가 “점잖지 못하게 계집애가 하루 종일 입을 놀리고 다닌다.”고 역성을 내도 성격 좋은 딸은 배시시 웃으면 그만이었다. 또 그런 큰 딸의 모습을 이 행수는 좋아했다.
이 행수는 벽에 붙어 있는 껌딱지를 떼어 내려다 그만 두었다. 전쟁 통에 그가 할 일은 가족을 온전하게 하는 일 뿐임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검고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송진껌임에 틀림없었다. 인민군이 밀고 내려오면 저것마저도 마음 놓고 씹을 수 없으려니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껌딱지 같은 젓을 가슴에 달고 있는 마누라야 별일이 있겠는가마는, 한참 봉긋하게 솟아오르고 있는 과년한 딸을 온전히 보존해 줄 수 있을 지도 걱정이 되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지식인과 군인, 경찰, 공무원은 일차 숙청대상자라는데 비록 학교 문턱에는 가지 못했어도 한자를 깨우친 자신이 무사할 지도 걱정되었다. 더구나 반장 일을 맡고 있어 이 지역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우선하여 호출당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앞세워 짐 보따리를 이고 지고 부산으로 향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부산에 친척이나 면식이 있는 사람도 전무했거니와 적군이 과연 이곳 마을까지 올 수 있을 것인가에도 의문이 갔다. 연일 라디오에서는 국군의 승전 소식과 적을 방어하고 북진을 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보도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내일은 독안동이나 내칭이골을 한번 둘러봐야겠다고 이 행수는 생각했다. 도장골은 마을에서 너무 가까워 노출될 위험이 있어 차선의 은신처를 마련해야 할 것만 같았다. 다행히 내칭이골은 마을이라기보다는 세 가구가 산등성이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살고 있어 북한군이 소지한 지도에도 없는 공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전략적 요충지라고도 할 수 없는 버려진 땅이나 매한가지였다. 더욱이 그곳에는 8촌 동생이 살고 있어 숙식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기에 여차하면 그곳으로 피신하리라 생각했다.
이 행수는 잠을 이룰 수 없어 밖으로 나왔다. 빛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칠흑의 어둠이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 피난민과 포성
텃밭에 심은 고추는 장맛비를 머금으며 무성하게 자라났다. 붉게 피어 영근 실한 고추 뒤에는 수줍은 하얀 꽃들이 벌들의 앙탈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행여 탄저병이 번질까 노심초사 했지만 다행히 신음소리를 내는 고추 포기는 보이지 않았다.
이 행수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한 고랑 씩을 잡아 가며, 채 이슬이 마르기도 전에 고추를 따게 했다. 본인은 고추 행간 사이를 돌면서 고춧대 지지목과 줄들을 살펴나갔다. 작년부터 면사무소의 권유로 설치한 고추 지지대는 강풍에도 고추포기가 쓰러지지 않는 대견함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땅에 바싹 달라붙어 거칠게 번져나가는 비듬나물과 갈퀴덩굴, 닭의장풀, 쇠무릎 등을 캐내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터졌다는 소문을 들어서인지 누구하나 불평하거나 투덜대지 않고 조용히 고랑을 밟아 나갔다. 새벽부터 크지는 않지만 쉼 없이 들려오는 포성이 어린 것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이틀 전부터 유구, 마곡사, 신풍을 거쳐 우성으로 밀려드는 북한 피난민들의 행렬 소식은 어린 것들의 마음을 더욱 졸이게 하고 있었다. 이 행수는 아이들과의 고추밭 일도 오래 할 수 없었다. 피난민 행렬이 공수원을 통과하고 있다는 아랫집 정 서방의 설레발은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공수원 육동 주민들을 모두 대로변으로 모여들게 했다. 이 행수 또한 아내와 함께 마을 초입을 벗어나 장터로 향했다. 저 앞으로 남 서방과 장 서방 내외가 서둘러 가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나마 박 씨 집 모퉁이 사이로 뜨문뜨문 이어지는 피난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신풍에서 길을 잘못 들어 산길을 타고 정산으로 넘어 온 피난민들이 안심리, 공수원을 거쳐 느린 걸음으로 공주 금강교로 향하고 있었다. 피난민들의 행색은 가관이었다. 도망가는 처지에 간편한 복장으로 걸으면 될 것을, 이고 진 사람들의 모습은 죽음 직전까지 자신이 소유한 물건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인간의 집념이 강하게 배어 있었다. 옅은 황토색으로 물든 헐렁한 여름옷을 걸친 피난민들이 지친 숨을 헐떡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강화도와 인천 주민들이었으며 그나마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공무원이나 군경 가족들이었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달구지를 끌고 먼 길을 여기까지 온,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촌부들의 모습이었다. 포탄 한방, 아니면 실탄 한방이면 바로 멈춰서야 할 달구지 위에는 옷과 이불은 물론, 쌀과 솥단지 등 온갖 살림들이 가득 실려 있었으며, 아이들은 그 위에서 눈을 뒤룩거리거나 더위에 무너져 시들거리고 있었다. 달구지꾼은 몸을 이용해 하나라도 더 가져가려는 듯 머리에는 모자, 등에는 수건, 허리에는 광목 끈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달구지 위에 몸을 파묻고 있는 아이들은 한결같이 보따리를 하나씩 안고 있었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부모들의 머리에서 나온 방탄의 방법이었다.
어느덧 도로변에는 피난민들을 위해 큰 물독과 바가지가 놓이고, 옥수수와 감자가 아이들의 손에 건네지기도 했다. 피난민들은 이미 북한군이 죽미령을 뚫고 내려와 천안으로 밀고 내려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우선 대전을 거쳐 무주, 진안, 장성으로 향하든지, 아니면 금강교를 지나 논산을 거쳐 전주로 일단 가보자는 마음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피난민의 일부는 북한군의 공습으로 도로변에서 죽었다고 한다. 가족을 잃은 다수의 사람들은 피난할 의미가 없어져 예산과 유구일대에 남기도 했다고 했다.
그날 장터 식당에서 반장회의가 열린다는 통보를 받았다. 달력은 7월 6일 목요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경북도경에서 발급한 달력이었다. 조카사위가 그곳에 근무하고 있어 얻은 거라며 이웃집 양씨 어르신이 특별히 챙겨 준 달력이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이장일이나 반장일은 그만 접어야겠다며 이 행수에게 반장 감투를 넘겨주며 준 선물이었다. 한 때는 강 씨와 양 씨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이장 선거에 나서 주먹다짐까지 했었지만 이제는 두 사람 모두 허연 백발이 되어 지팡이에 의존하는 형편이 되었다. 달력에는 월마다 표어가 양 옆으로 가로로 놓여 있고, 그에 걸맞은 화보가 그려져 있었다. 7월의 달력 화보에는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소방차가 대로를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소방은 1초를 다툰다. 교통에 협력, 힘쓰자 자주독립. 잊지 말자 불조심”이라는 표어가 씌어 있었다. 눈여겨보지 않았던 표어를 본 이 행수는 달력의 첫 장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용맹한 호랑이 아래에 “남북통일은 우리의 힘으로”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긴 우린데, 그게 누구냐가 문제이지......”
이 행수는 웅얼거리며 8월의 달력을 넘겨보았다. 고막을 찢는 포성과 아우성이 행간 사이로 가득 차 있었다.
장터, 벌뜸, 반곡, 새말, 용신동, 범덕골의 6동 반장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여 들었다. 예전 같으면 밭일이다, 논일이다 하며 늦게 나타나곤 하던 반장들도 이 날은 일찌감치 참석했다. 장터 이장 이일품, 벌뜸 반장 오세풍, 반곡 반장 이봉창, 용신동 반장 이범인, 범덕골 반장 김팔씽 등 햇볕에 그을린 칙칙한 얼굴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박 씨 아저씨는 여름햇살이 넉넉히 남아 있는데도 가게 문을 걸어 잠갔다. 방안에서 우성면사무소 산림계 소속의 강서기와 ‘공주시국대책위원회’ 소속의 임원이 나와 반장들을 일일이 맞이했다. 강서기는 반장들에게 간단히 안부를 묻고는 공주에서 온 사람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그는 자신을 시국대책위원회 소속임을 밝히며 공주의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미 공주읍내에는 피난민행렬로 난리판이며 공주군청과 읍사무소에는 각지에서 몰려 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고 했다. 이들을 위해 시국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숙소와 식량을 보급하고 있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심지어 식산은행과 금융조합 공주지점에서 연대보증 형식으로 막대한 현금과 식량까지도 차입해 제공하는 유지들도 있다며 이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뒤이어 강 서기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이미 공주읍내는 미군사령관의 명령으로 야간 통행 금지령이 시행되고 있으며, 위반자는 무조건 총살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소리를 전했다. 순간 범덕골 김팔씽이의 이마에 잔주름이 번져나갔다. 팔형제 중에 일곱 째 아들로 일씽이부터 팔씽이까지 공주군 내에서 각자 일가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대가족의 일원이었다. 강 서기는 이 시각부터 자정 이후에 마실을 다니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가족들을 건사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면사무소에서 필요 시 이장을 통해 반장들에게 협조를 요청할테니 적극 협조해줄 것을 당부했다.
다른 때 같으면 회의가 끝난 후 술잔을 기울이며 농사일이나 마을일에 대해 잡담을 나누다 자정이 넘어서야 헤어졌을 것이지만, 이 날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가 몸조심하라는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이 행수는 공수원 삼거리에서 오세풍과 이봉창과 헤어져 이범인과 동행했다. 이범인은 용신동 정산댁집 우측에 사는 인물로 이 행수에게 미아리가 무너졌음을 알려준 이가 그의 아들이었다. 이 행수는 문득 그의 아들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젊고 군대경험이 있는 친구라 피난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을 성 싶어서였다.
“자네 아들은 뭐라고 하던가?”
이 행수는 개울을 조심히 건너자마자 이범인에게 물었다.
“그놈이 며칠 전부터 집 뒤에 있는 대숲에 먹을 것이란 것은 모두 쑤셔 박아놓아 요즘 곳간이 텅 비었네 그려!”
젊은 놈이라 영리하다는 생각과 함께 뒤이어 물었다.
“그래 자네 피난은 어떻게 할 셈인가?”
“이 나이에 갈 곳이 어디있는감....... 대구나 부산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구, 죽으나 사나 이곳에서 버팅겨야지......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지 않던감!”
체념한 듯 투덜거리는 그의 목덜미를 더운 바람이 훅하고 스쳐갔다.
“그래도 대책은 세워야하지 않겠는감?”
“아들녀석은 인민군이 도착하면 젊은 놈들부터 잡아 갈꺼라면서 독안이 어딘가에 숨을 곳을 맹근지 오래되었네. 설마 지애비 지애미 나두고 혼자 도망치기야 하겠나!”
이 행수는 도장골이 아닌 독안이로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워낙 거리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이동 시간을 고려하여 마음을 접었다.
동리 입구에서 이범인을 떠나보내면서 이 행수는 마치 오랜 벗을 멀리 떠나보내는 느낌을 받았다. 뒤늦게 보금자리로 향해 날아가는 두루미 한 무리가 그의 머리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잿빛 두루미였다. 그때, 멀리서부터 포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이 행수의 입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어이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 충남 공주 출생, 문학박사, 한밭대 문학창작과정 지도교수, 저서 『한국전후 실존주의 소설연구』,
『유폐된 자아의 소설연구』 등, 소설 『사마산』, 『빈터』 외 다수, youngdaele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