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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온전한 성숙
히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히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히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이번에는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즉 '성숙해지고 온전히 성장하기 위해 나아갈지니라"라는 중대하고 강력한 권면에 특별히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에서 편지를 받는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다시 상기시키는바, 이들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유대교 안에서 자란 유대인이었음에도 2장에 나오듯 복음 설교를 듣고 믿었으며, 한동안은 문제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즈음에 확신을 잃고 불행해졌습니다. 기독신앙을 아주 버리지는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완전한 침체에 빠져 옛 유대교를 그리워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편지를 써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가 하는 중대한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족성과 탁월성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 서신은 신약성경 전체에 나오는 주님의 위격과 사역과 영광에 대한 가장 위대한 강해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특정 구절에서는 그들이 빠진 곤경의 주요 원인 중심 원인이 결국 무엇인지 아주 실제적으로 들추어내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5장 말미부터 이 주제를 꺼내기 시작합니다. 자신은 그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위안을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 있는 아주 깊은 내용을 설명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한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1-14).
그가 말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내게는 너희에게 줄 놀라운 위로와 위안이 있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그것을 받아들일 역량이 없구나." 그래서 이 중대한 호소가 나오는 것입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제가 볼 때 이것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도 필요한 권면입니다. 우리는 혼돈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명백한 특징이 이것입니다. 기준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 교회까지 혼돈에 빠져있습니다. 최근까지도 누구나 동의하는 기준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이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미숙함과 피상성과 무지가 극심한 혼돈의 시대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런 불만이 제기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그때도 지식이 없었고 지금도 지식이 없습니다. 지식이 없으면 기준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평가나 판단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성숙해지기 위해 나아갈지니라.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말지니라"라는 권면 앞에 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라고 했습니다(고전 14:20). 자라야 합니다! 완전해지고 성숙해지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간단하지만 심각한 이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자라고 있습니까? 진보하고 있습니까? 1년 전. 10년 전, 20년 전과 비교해 볼 때 어떻습니까? 과거 어느 때보다 성숙했습니까? 이것은 긴급한 문제인 만큼, 히브리서 기자가 당시에 이렇게 권면한 이유와 현재 우리 모두에게 이 권면이 필요한 이유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그 정의상 마땅히 발전하고 진보해야 합니다. 저는 '생명'이라는 말을 썼는데, 복음은 생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모든 철학이나 가르침, 정치사상, 사회사상 등과 범주를 완전히 달리하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도 가르침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가르침 그 이상입니다. 생명입니다! 성경, 특히 신약성경이 도처에서 상기시키는 사실이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새 생명을 얻습니다.
신약성경이 사용하는 특징적인 용어들을 보면 이 점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그 한 예입니다. 이것은 생명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는 태어난 존재이며,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기계가 아닙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복음과 성경은 자주 '씨'로 지칭됩니다. 주님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씨라고 부르셨습니다. 씨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미동도 없이 정체되어 있는 것, 1년이 지나도록 자라거나 생장하지 않고 똑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씨가 아닙니다. 씨에는 생명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성장하고 생장할 수 있는 모든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난자, 중생한 자, 새로운 피조물, 생명을 가진 자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떤 결핍이나 결함 때문에 전혀 자라지 못한 채 유아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크나큰 비극입니다. 영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벧후 3:18). 성장은 자연이 가진 생명의 특징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가진 생명의 특징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항상 성장과 발전과 진보가 있게 마련이며, 성장의 증거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장에서 상기시키는 사실도 신자는 거듭난 자로서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함께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계속 함께 자라가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13절). 신약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바가 이것입니다. 생명은 발전하고 성숙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인 완전함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 실제적인 질문과 마주해 봅시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처럼 성숙해지는 문제에 관심을 쏟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들에게 성숙해지라고 호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 처음 배우는 기본원리]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자라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가지 대답은 이미 나왔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얻었는데 생명이 자라지 않고 발전하지 않는 것은 용어상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에 덧붙일 대답이 있습니다. 성숙해지지 않고 발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는 것, 교회로 말미암아 [교회를 통해]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역이라고 말하는데(엡 3:9-10), 이것은 엄청난 진술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저와 여러분 같은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지혜와 영광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천사와 천사장을 비롯한 선한 친사들)에게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자라지 못한 채 어린아이 상태에 머무는 것, 빈약한 상태나 영양실조 상태에 머무는 것은 하나님께 불명예가 됩니다. 말하자면 우리 손에 하나님의 명성이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위대함과 영광과 놀라운 방법들을 입증하는 일에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불안해 하는 듯한 인상, 신앙의 주된 결과가 온통 문제와 어려움과 혼란에 빠지는 것인 듯한 인상을 줄 때가 많습니다. 이런 상태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및 구원에 나타난 영광을 훼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새 인류를 만들겠다고 하셨으며, 아담 안에서 실패한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일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단순히 우리 자신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이 달린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회의 일원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세상뿐 아니라 하늘에 있는 권세자들과 통치자들이 여러분을 보면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작품이 아닌가?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만들어 냈다고 주장하시는 그 존재가 아닌가?"라고 묻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1년 전이나 10년 전과 똑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조금도 진보하지 못했다면, 전보다 더 강하고 견고하며 당당하게 삶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예가 달린 일입니다.
우리 관점에서도 살펴봅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완전과 성숙을 향해 나아가라고 호소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갓난아이 어린아이로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연 세계에서도 그렇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린아이가 두려움에 희생되는 것은 무지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상상하면서 온갖 두려움에 빠집니다. 무지하고 미숙한 사람은 그처럼 온갖 미신과 두려움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 당시 이방 세계도 그러했고, 지금 이교가 만연한 곳들도 그러합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무서워하며 두려워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해방되었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또 디모데에게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 1:7). 두려워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상태라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자라라고 그리면 어린아이의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어린아이가 잘못된 가르침에 쉽게 희생되는 것 또한 무지 때문입니다.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 점을 지적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3). 그가 연이어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4). 어린아이는 그럴듯한 사람이 접근하면 휘둘립니다. 제대로 이해하거나 분별하지 못하는 탓에, 자기 기분을 맞추어 주는 친절한 사람이 나타나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무슨 말이든 믿어 버립니다. 그렇게 속아 넘어가며 미혹당하고 현혹됩니다.
영적 어린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별력과 이해력은 가장 늦게 발달하는 특성입니다. 현대에는 이 특성이 크게 부족합니다. 친절한 사람이 아무리 잘 웃으며 기분을 맞추어 주어도 그가 무슨 내용을 가르치는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가 전하는 교리가 무엇이며 대변하는 바가 무엇인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텔레비전 화면의 웃는 얼굴에 쉽게 현혹되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입니다. 그런 자들은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현혹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리를 검증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며,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검증할 수가 없습니다. 검증하고 시험하는 것-차를 시험하거나 포도주를 시험하거나 여러 가지 음식을 시험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이 있는데, 그 일을 하려면 지식이 있어야 하고 기준이 있어야합니다. 진리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은 별로 없이 체험만 있는 사람은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객관적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잘못된 가르침에 희생됩니다.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자라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자기한테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전혀 모릅니다. 이 또한 이해력이 없는 탓입니다. 어린아이는 상상 속의 두려움과 잘못된 가르침에 희생될 뿐 아니라 상황이 악화될 때 기댈 만한 버팀목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어린아이한테는 그런 것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 나이 든 부모나 어른들의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조금만 잘못되어도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절망합니다. 어떤 것에서도 위로나 위안을 찾지 못합니다. 지식과 이해력이 없고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상황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할지 모릅니다. 완전히 낙담해 버립니다. 공포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습니다. 심한 절망감에 빠져 어쩔 줄을 모릅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도 똑같습니다.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만큼 자신을 검증하기에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상황이 악화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것은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평소에는 훌륭한 그리스도인 같았는데 상황이 악화되면 완전히 무너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델 만한 버팀목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어떤 것에서도 위안을 찾지 못합니다. 그대로 상황에 희생되어 버립니다.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비극 아닙니까? 병들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상황이 갑자기 나빠질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실망이 찾아올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죽음이 임박한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믿음 밖에 있는 자들과 똑같은 시련을 겪을 때 다르게 반응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들과 다른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며 이런저런 진리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기독 신앙을 가진 것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이것은 복음에 합당한 삶이라는 기준에 못 미치는 상태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상태입니다.
성숙과 완전으로 나아가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주님이 친히 제시하신 중대한 원리는 "너희는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라는 것입니다(눅 8:18). 많이 가진 자일수록 더 많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하지만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지식이 많을수록 더 많은 지식을 얻습니다. 토대가 되는 지식과 이해가 없으면 더 깊은 진리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항상 더 많이 배우는 법입니다.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은 더 많이 알 수도 없고 지식과 이해가 자라날 수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전적인 주장이 이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신 주님에 대해 알려 줌으로써 너희 처지를 크게 위로하며 위안을 주고 싶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그는 말합니다. "알다시피 처지가 참 딱하게 되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설명함으로 너희를 즉시 바로잡아 줄 수 있는데, 그 토대와 틀이 되는지식을 충분히 알지 못하니 가르칠 수가 없구나."
갓난아이 상태에 있으면 복음의 가장 영광스러운 사실들을 놓치게 됩니다. 가장 놀라운 위로를 놓치고 연약한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세상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적인 의미에서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많이 알면 알수록 강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서신에서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든 이 점을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 3장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기도하는데(16절), 무엇을 위해 강건하게 해달라고 합니까?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알기 위해서입니다(18절).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케 하려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욱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면 강건해져야 합니다(엡 3:19.20). 자신이 비참하고 불행한 상태에 있으며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상태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강해집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많이 알수록 하나님의 방법을 더 이해할수록 강해집니다.
떡갈나무 묘목과 다 자란 떡갈나무가 다른 것과 같습니다. 묘목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그것이 발달하지 못한 탓에 강풍과 태풍과 폭풍 앞에 버티지 못하고 넘어집니다. 그런 묘목 상태에 머물지 말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자라고 발전하고 성숙하라고 말합니다. 무슨 일이 닥쳐도 버틸 수 있도록 힘을 키우라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시 104:16). 신약성경도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엡 3:17).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라고 말합니다(유 20절). 뿌리가 박혀야 합니다! 터가 굳어져야 합니다!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도 굳게 세워야 합니다! 성숙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자리까지 나아가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설득합니다(엡 3:18).
완전과 성숙으로 나아가야 하는 마지막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믿음 밖에 있는 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현재의 모든 혼란과 혼돈을 볼 때,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이야말로 장차 복음 전파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주일에 교회를 가거나 여러 집회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신자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삶을 살면 그들도 관심을 보일 것입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어떻게 나아가야 합니까? 그는 당연히 이 질문에도 대답하는데, 첫 번째 대답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여기에서 "초보"란 무엇일까요? 기본원리, 기초적 가르침, 토대가 되는 진리와 원리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신들의 신분과 기독 신앙의 토대 및 기초를 확실히 알지 못한 탓에 곤경에 빠졌습니다. 구원의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옛 유대교를 그리워하며 돌아보았다는 것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운 가르침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번제를 비롯한 제사를 통해, 자기 행위와 신앙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곤경에 빠진 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편지를 써서 이 문제를 아주 분명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그는 말합니다. "또 너희한테 젖을 먹여야만 하겠구나. 이를테면 너희는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구원의 방법 자체를 잘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 특정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 점을 설명해 줍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이것은 전도할 때 전하는 내용입니다. 요컨대 "너희는 이미 교회요 그리스도인들이기에 계속 젖만 먹일 것이 아니라 위로와 위안과 힘으로 가득한 단단한 음식을 먹이고 싶은데, 또 젖을 먹여야 할 형편이 되었구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너희가 정말 그리스도인인지부터 확인해야겠구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이어 성경에서 가장 두려운 말을 합니다.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이 말의 의미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속죄의 죽음과 의롭게 하시는 부활을 부인하는 자, 그를 전적으로 완전히 의지하지 않는 자는 곧 잃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그를 드러내놓고 욕되게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동이나 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 전체를 부인하며, 그렇게 부인하길 즐기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자 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을 이 문제에 직면시킵니다. "이것을 완전히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별로 확신은 없다'고 하면 안 된다. 그가 연이어 하는 말의 요지는 "아직도 구원의 방법을 확실히 모르겠느냐? 너희 모든 행실은 '죽은 행실'임을 모르겠느냐? 그 행실이 얼마나 선한 것이냐는 중요치 않다. 너희가 신문 부고에 어떤 인물로 실리느냐도 중요치 않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 죽은 행실이요 무가치한 행실일 뿐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에 불과하다(사 64:6). 이것을 명확히 모르겠느냐? 내가 가서 다시 알려 주어야겠느냐?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제로는 불의하고 경건치 못한 죄인을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게 할 수 없다고 다시 알려주어야겠느냐? 왜 예표들로 돌아가려 하느냐? 예표들이 가리키던 본체가 이미 온 것을 모르느냐? 유일한 구원의 방법을 아직도 분명히 모르느냐? 그러면 자랄 수 없고 발전할 수 없다. 이 부분을 전적으로 명확히 알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가르쳐 줄 수가 없다."
이것은 오늘날도 큰 문제거리입니다. 기본원리를 놓고 늘 논쟁을 벌이는 기독교 모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기본원리에 대해서는 이미 동의가 이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위격과 그 안에 있는 유일한 구원의 방법, 회개하고 새로 태어나 그의 보배로운피로 구원받는 방법을 명확히 알지 못하는 한, 기독교회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것이 기초입니다. 이것부터 전적으로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저의 목회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했듯이, 사람들이 저를 찾아와 단순히 어떤 죄에 빠졌다는 이유로 자기가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경우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자기 신분의 토대 자체를 의심합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대신, 자기 행위에 따라 스스로 의롭다 하려는 태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든 자기를 의지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까? 자기를 의지하는 자는 여전히 영적 갓난아이인 탓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혼동을 겪는 것이며 어려움이 생길 때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이 기본원리부터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아는 데서 멈추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 다수가 겪는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방법을 아주 명확히 알며,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보배로운 피만 의지합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장하거나 발전한 증거가 없습니다. 이해도 깊어지지 못했습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진보의 표시가 없습니다. 기본원리에 멈추어 있습니다. 기본원리는 알지만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더 깊어지거나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이해와 지식이 성장하거나 성숙한 증거가 없습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사실로서, 이것으로 자신을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임을 분명히 안다면, 그에 더하여 발전하고 있으며 성숙해지고 있는지, 1년 전이나 10년 전보다 더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기본원리를 명확히 알아야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면 안 됩니다.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하
며 진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그다음 단계로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알려 줍니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단단한 음식"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실제로 신약 서신서들의 가르침 - 강력한 서신서들의 교리와 주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두 번째 서신에서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언급하며 거의 하소연하듯 말합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탓에 성경을 왜곡하다가 멸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숙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자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 바울의 편지에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그런 구절들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 그런 데까지 신경 쓸 수가 없어요 그러기엔 너무 바빠요"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태도는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영적 유아인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곤경에 빠지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 잘 모르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며, 기독교라고 말하면 다 기독교인 줄 아는 것 또한 놀란 일이 아닙니다. 자라려면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더 많은 노래와 오락을 요구합니다. 매사에 현대의 유행을 따르길 바랍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는 단순한 오락이 아닌 단단한 음식입니다. 계속 응석을 받아 주고 음식을 떠먹여 주며 즐겁게 해주길 바라는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면 안 됩니다. 기꺼이 지성을 사용하고 정신을 무장하며 강건해져서 장차 올 구원을 끝까지 소망해야 합니다.
이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끈기 있게 성경의 어려운 구절들을 연구하는 일에 정진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단단한 음식"-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중대한 목적, 주님에 대해 풍성히 알려 주는 중대한 교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단단한 음식을 주신 것에 감사하십시오 부요한 은혜를 주신 것에 감사하십시오 무슨 일이 닥치든 버틸 수 있도록 우리 영혼을 세워 주고 강건케 할 양식을 주신 것에 감사하십시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지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활용해야 합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6:11-12에서 다시 말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부지런해야 합니다! 정진해야 합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날 도덕적 상태를 보며 근심이 됩니까? 무언가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듭니까? 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와 여러분 같은 개인들뿐입니다. 교회가 이런 저런 성명을 내기는 하지만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에는 부흥과 각성이 필요한데, 우리 각 사람이 부지런히 힘쓰지 않으면 부흥과 각성은 오지 않습니다. 세상과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을 늘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 자기를 점검하는 시간을 늘리십시오.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참과 거짓을 분별할 줄 알았습니다. 이단과 진리를 구별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날 문제는 선악의 차이를 분별치 못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연단된 지각이 없기에 지식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이 일에 헌신합시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사용합시다. 직장이나 일터에서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어떻게 쓰는지 생각해 보고 그와 똑같이 부지런하게 이 일을 하십시오 이에 관한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며, 질문하십시오 필요한 영적 지식을 얻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십시오
사도 바울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똑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 1:9-10). 그렇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교회의 상대 및 세상과 사회의 무서운 상대를 보며 탄식하는 자들에게 요청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우리 주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갑시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됩시다. 이해하는 일에서 어른이 됩시다. 지각을 사용함으로 함께 온전한 성숙을 향해 나아갑시다.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영원한 상대를 향해 나아갑시다. 하나님, 그렇게 되게 해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