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비공개 입니다
■□ 『한국시학』(2017년 봄, 41호)이 주목하는 이 계절의 시인 / 대담 임애월 편집주간
바다와 나비의 흔적 ‘데칼코마니’
김 광 기 시인
雨水도 지나고 남도의 매화들이 그 향기를 멀리 날려 보내는 겨울의 끝자락쯤
김광기 시인을 만나러 수원으로 향했다.
차창 밖을 지나쳐가는 산빛은 봄을 준비하는 나무들의 피돌기로 참 따스하고 화사해 보인다.
겨울과 봄 사이, 오후의 햇살이 부드러운 수원 광교산 자락에서 반갑게 맞아주시는 김광기 시인님...
여전히 조금은 슬퍼 보이고, 조금은 여유로워 보이는, 그만의 카리스마가 넘친다.
임애월 : 김광기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신데 여전히 핸섬하시네요.
김광기 : 안녕하십니까? 먼 데로 가셔서 그런지 더 반갑습니다.
임애월 : 저도 정말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수원의 주산인 광교산 자락엘 왔네요. 광교산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많고 시인들의 작품 속에도 많이 등장하지요. 이 산에 대한 이야기 좀 들려주실래요?
김광기 : 개인적으로는 어디로 바람을 쐬러 갈까 하고 생각하면 수원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광교산이 아닐까 싶네요.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하고요. 맛집도 많지요? 저도 수원을 찾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함께 광교산으로 많이 왔던 것 같아요. 예전에는 문학 모임도 광교산에서 많이 했지요. 그래서 그런지 광교산을 떠올리면 정이 담뿍 느껴지는 곳입니다. 물론 광교산에 대해 쓴 시도 몇 편 있고요.
병자호란 때 김준용 장군이 광교산에서 대첩을 거둔 국란극복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광교산의 원래 이름은 광악산이었다고 하는데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광교산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광악산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었는데, 이 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산 이름을 친히 ‘광교(光敎)’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지요.
또 80년대 후반 경기도에서 발간한 지명유래집에는 “아주 먼 옛날 수도를 많이 한 도사가 이 산에 머무르면서 제자들을 올바르게 가르쳐 후세에 빛이 되었다고 해서 광교산이라 하였다”고 나와 있기도 하답니다. 광교산에는 창성사(彰聖寺)를 비롯해서 암자가 89개나 있었다고 해서 명산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예로부터 ‘광교적설(光敎積雪)’은 ‘수원8경’ 중 으뜸으로 꼽기도 하지요.
임애월 : 아, 네에... 자주 오던 광교산인데도 이렇게 의미 깊은 유래를 듣고 나니 그런지 오늘따라 더 웅장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김광기 : 늘 글을 쓰고 만지며 살고 있는 것 같아요. 한때는 이렇게 사는 것이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늘 글에 파묻혀 있거나 텍스트에 목줄기가 잡혀 있어서 비현실적으로 사는 것의 연속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어쩌다 외출해서 글밖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정서의 이해가 잘 안 될 때가 많아요.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임애월 : 출판사를 오래 운영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출판사를 시작하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으셨나요?
김광기 :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책을 좋아하면 못 산다고 아버지한테 꾸중도 많이 들었지요. 수업이 끝나면 학교 독서실에서 책을 읽다가 저녁 늦게 집에 가곤해서 혼나는 경우도 많았고요. 왜 그렇게 책 읽는 것이 좋았는지 몰라요. 그러다 보니 항상 책이 주변에 있었고 많이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출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도 같아요.
현실적인 계기로는 공무원을 하다가 갑자기 그만두게 되어 사는 것이 막막했을 때 오직 취직을 목표로 들어간 대학에서 편집 일을 접하게 되었어요. 다행히 장학생으로 들어간 학교에서 궁여지책으로 택한 곳이 대학신문사인 학보사라는 곳이었지요. 학비는 성적장학금으로 해결이 된다고 해도 먹고사는 것이 문제였지요. 그래서 학보사를 택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일하면 원고료와 근로장학금 등을 별도로 받을 수 있는데다가 교직원식당에서 식사를 매일 해결할 수 있었어요. 학교 다니는 동안은 돈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지요. 좋아하는 글도 실컷 쓸 수 있었고요.
임애월 : 결국 글과 책...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나신 듯합니다.
부여 석우리가 고향이신가요?
김광기 : 태어난 곳은 충남 부여에 있는 반산이라는 동네인데 취학 전에 이사 간 동네가 석우리라는 동네니까 그곳이 고향마을이라고 해야겠지요. 반산이라는 동네도 소반뫼라는 지명처럼 산자락에 있는 동네인데, 그곳에서 산을 두어 개 더 넘는 동네가 석우리라는 동네였어요. 지금은 하루에 몇 번 버스가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만 해도 걸어서 산을 서너 개 넘어야 면내로 나올 수 있는 산간벽지였어요. 물론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물도 나오지 않아 등잔불을 켜고 살면서 동네 우물에서 매일 물도 길어다 먹는 곳이었지요. 참 가난하다 가난하다해도 그렇게 가난하고 열악한 생활환경은 못 들어봤던 것 같아요. 학교를 가는 데도 어린 걸음으로 두어 시간을 걸어야 했죠.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길이 끊겨 학교에 갈 수 없어서 지각 결석은 밥 먹듯이 하고요. 그래도 학교성적은 꽤 좋은 편이었어요.(웃음)
임애월 : 요즘은 출신배경을 수저로 표현하기도 하던데 문인들은 거개가 다 흙수저를 가지고 태어났더라고요.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요?(웃음)
발표한 작품 중에서 「주단학」을 읽을 때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어머니’라는... 누구에게나 아픈 그 메시지 때문인가 봅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전 모 회사 화장품 이름인 「주단학」도 지나간 것에 대해 아련한 그리움을 덧칠해 주기도 했어요.
김광기 : 사실 그 생각만 해도 콧등부터 시큰해지는데, 그때는 시골에 살면서도 땅뙈기라고는 텃밭 정도 밖에 없어서 어머니가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선택한 것이 화장품 장사였어요. 화장품 가방을 들고 동네 구석구석을 돌며 방문판매를 하는 것이었지요. 화장품 가방이 참 무거운데, 그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른 산간벽지와 면내까지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하니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으셨을 거예요. 어린 나이었지만 그런 어머니의 고통을 느끼기도 했고 또 가족사적으로 여러 이유가 많아서 그랬는지 또래들보다 사춘기가 빨리 왔어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사춘기는 더욱 심해지고 1학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공부는 뒷전이고 좀 노는 친구들하고 쏘다니기 바빴지요. 이때부터 술 마시고 담배도 피면서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행동하고 다녔어요. 중2에 올라가면서 신장도 훌쩍 커서 170cm 정도가 되었으니 언뜻 보면 청년 같았을 거예요. 그래도 이때 나이가 열다섯이었는데 집에도 잘 안 들어가고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갑갑한 일이었죠. 당시 국어선생님이던 생활지도 선생님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중학교는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지요. 그 선생님이 시조를 쓰고 계셔서 시와 시조에 대한 각별한 애정도 그때부터 생겼던 것 같아요.
임애월 : 일단 범생이(?)는 아니셨네요.(웃음)
아무래도 심신이 너무 조숙해서 질풍노도의 그 시기를 건너오기가 더 힘이 드셨나 봅니다.
김광기 : 네, 그렇기도 했겠죠. 어쨌든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저도 정신이 없을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살았어요. 그러면서도 책은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고교 과정은 자연스럽게 독학으로 마무리하게 되었고요. 그리고 어느 날 보니까 시 비슷한 것을 쓰고 있더라고요. 나도 내가 시를 쓰는 줄을 몰랐어요. 책과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항상 끼적거리고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저보고 시를 잘 쓴다고 하더라고요. 저에게는 메모에 불과한 것을 사람들이 시라고 말하니까 좀 면구스럽기도 했지요. 언감생심 시인이 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었고요.
임애월 : 문단활동은 80년대부터 하셨다고 들었는데, 95년에 출간한 시집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를 등단으로 잡는 연유는 무엇인지요?
김광기 : 문학은 자연스럽게 제 삶에 배어들었다고 봐야 하는데, 83년도일 거예요. 대학신문에 첫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어요. 당시만 해도 출판물이 귀하던 시절이라 대학학보를 학생들은 물론 지역에서 활동하는 인근 지역사람들까지 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작품이 회자되고 말이 말을 타고 말 소문이 나니까 주위에서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더라고요. 그렇게 돼서 자연스럽게 동인활동을 하게 되었지요. 그것이 아래에 있는 「탈 이야기」예요.
늴리리 가락에 비틀비틀/ 쿵다당 장구 소리에 소매 날리는/ 휴식 없는 슬픈 놀음의/ 짚신의 후예
바가지 뒤집어쓰고/ 자신 짓는 몸놀림/ 배꼽을 내놓고는/ 멋쩍은 부끄러움
손뼉치고 바닥 뒹구는/ 의미 없는 환희 속에/ 너라고 불리는 우리는/ 힘겨운 춤놀이를 재촉한다
돌아보고 기웃거려도/ 나는 보이지 않고/ 얼룩달룩한 탈바가지만이/ 웃음을 판다
하늘에선 오염된 비가 내리고/ 지하에선 더러운 폐수가 흐르고/ 탈의 촉감을 거부하는 우리의 살갗엔/ 뜨거운 눈물이 땀 되어 얼룩진다
-「탈 이야기」 전문
당시는 전두환 정부 시절이라 언론의 탄압이 심했던 시절이었지요. 대학에서 발행하는 신문도 중앙관서의 문공부 심의를 받아야 매호 발행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사상이 불순하다는 생각이 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삼청교육대 같은 곳으로 가게 되는 현실이었지요. 그런 시기에 이런 시를 학보에 싣게 되어서 사실 많이 긴장했는데 아무 일도 생기지 않더라고요. 아마도 시골 변두리에 있는 변변찮은 학교라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해요. 어쨌든 이후에도 가끔씩 동인 시모음지 등에 작품을 내면서 지역에서 생활하는 동인들과 함께 문학 활동이란 것을 하게 되었지요.
임애월 : 그때가 문학모임에서 처음 활동하던 시기 같은데 동인들 이야기나 당시 상황들도 좀 더 얘기해 주세요. 이 근방 지역이라 그런지 좀 더 상세히 알고 싶네요.
김광기 : 네, 그때는 지역에서 주로 시화전을 많이 하곤 했는데 그때 제가 있던 지역이 화성군 오산읍이어서 <화성문학>이란 명칭으로 사람들이 자주 만나곤 했지요. 시를 쓰는 사람들이 몇 명 되지 않았지만 저를 빼고는 다들 시를 잘 쓰는 친구들이었어요. 지금은 작고하고 없는 이규황이 한남대를 다니며 학교동아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17세에 <휴전 이후>라는 시집을 내서 지역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 최병기가 열심히 시작활동을 하고 있었고, 지금은 오산고 영어교사로 있는데 당시에는 고려대 영문과에 다니던 이성희, 그리고 제가 같은 그룹으로 자주 만나서 문학을 이야기하곤 했지요. 개인적으로도 이 시절이 열정적으로는 참 치열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읽고 열심히 썼던 것 같아요.
그렇게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소위 중앙으로 진출할 기회는 생기지 않으니 문학 활동을 한다는 것이 무료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나고 보니까 기회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잡는 것이었는데... 주변에 아는 선배라고는 하나도 없이 또래들끼리 치열하기만 해서 기회를 못 잡은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어쨌든 그 시기에 생업 쪽으로는 계획했던 대로 뜻을 다 이루어서 항상 바쁜 날들이었지요. 그래서 친구들에게 시를 그만 쓰고 일이나 열심히 해야겠다고 말했더니 그동안 열심히 해온 것이 아깝지 않느냐고 하면서 시집이나 하나 묶어 버리면서 그만 쓰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권유를 하더라고요.
임애월 : 그래서 마무리 차원에서 첫시집을 내놓으신 거군요.
김광기 : 그렇죠. 그동안 써놓은 시는 많으니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시집을 하나 묶기로 했지요. 그리고 누구도 시집을 내주지 않으니까 시집을 하나 내기 위해서 친구들끼리 지역에 출판사를 하나 차렸어요. 시집을 내고 출판사는 결국 문을 닫게 되었지만 그렇게 첫시집을 내게 되었죠. 그 시집을 내고는 생각했던 대로 시를 그만 쓰려고 했는데 친구들 덕분에 시집이 이곳저곳에 배포가 되면서 그동안 잘 몰랐던 문예지와 지역저널지 이곳저곳에서 원고청탁이 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참 신기했어요. 기분도 참 좋았고요. 뭐가 뭔지 모르면서 원고도 달라는 대로 다주고 이곳저곳에 많이 돌아다녀도 보았지요. 그 연장선상이 <월간문학>이라는 잡지였어요. 그리고 그 시절 <다층> 동인들과도 만나게 되었지요. 그러니 첫시집이 실질적으로 문단에 나가게 된 계기가 된 거죠. 이렇게 문단에 처음 나간 초기에는 동인활동 시점을 문단데뷔로 잡아서 이력에 써보기도 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등단은 시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문학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통상적으로 남들처럼 제대로 된 등단절차를 거치지 못했으니 첫시집을 등단지로 잡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하고요.
임애월 : 첫 번째 쓴 시 「탈 이야기」가 범상치 않습니다.
당시는 서슬 퍼런 5공 시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힘없는 백성들은 현실이 무섭거나 부끄러워서 탈이나 쓰고 ‘춤놀이’나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는 얘기겠지요. 그리고 그런 눈물과 땀이 있는 한 미래는 당당하고 꿋꿋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거겠지요.
첫 시집의 작품들도 이 작품과 비슷한 분위기인가요? 첫시집을 시작으로 작품집을 상재하거나 작품발표 활동을 한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 좀 더해 주시지요.
김광기 : 비슷하다고 봐야겠지요.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다보니 서정적인 작품보다는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게 된 것 같아요. 첫시집 맨 앞에 나와 있는 「공장」이라는 작품을 등단작품으로 잡는데, 이 시도 85년도에 엔지니어로 입사한 회사의 공장에 다니면서 쓴 시이고 고된 삶의 현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거든요.
두 번째는 전국을 정신없이 쏘다니면서 쓴 작품들을 모은 <곱사춤>이라는 시집이 있는데, 여기까지가 저는 아마추어리즘에 치중한 작품집이라고 봐요. 그리고 90년대 말쯤에 제주대 윤석산 교수님을 만나 계간문예 <다층> 발간초기부터 편집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시작(詩作)에 관한 합평과 다각적인 문단활동(계간문예 <다층> 편집동인과 <한국문학도서관> 사무국장)으로 바쁘게 지냈죠. 이 시기를 거쳐 전국 주요잡지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2002년도 <다층시인선>으로 작품집을 낸 것이 <호두껍질>이고요. 시집을 내고 <현대시학>을 발간하시던 정진규 선생님을 만나 현대시학 동인(현대시학회)으로 참여하며 <현대시학>지 등에 작품 발표를 하게 되었고, 2000년대 중반쯤에는 <열린시학>을 발간하는 이지엽 시인을 만나 <열린시학> 기획심의위원 등을 지내며 2008년도에 <열린시학 기획시선>으로 <데칼코마니> 시집을 내게 되었죠. 그러다가 2010년대 초반 문우로 지내던 문정영 시인이 발간하는 계간 <시산맥>에 편집위원 등으로 참여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2015년에 <시산맥시인선>으로 <시계 이빨>을 내게 된 거죠.
임애월 : 네, 요즘 여러 문예지에 평론도 쓰시고 정말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계신데, 그 동안 선생님의 문학 활동에 영향을 많이 끼친 문인은 어떤 분들이신가요?
김광기 : 사실 문단 활동이라는 것이 어느 시기에 누구를 만나 어떤 동인 활동을 하느냐에 따라 개인 작품 활동의 기반이 형성되는 것 같아요. 모임을 중심으로 만나서 활동하는 것이 협회활동이라고 한다면 문학지를 중심으로 사람을 만나서 활동하는 것을 동인활동이라 할 수 있겠죠. 그래서 문단에서는 우선 누구를 만나서 어떤 문예지에서 활동하는 기반이 형성되느냐가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 전에 말씀드렸고 개별적으로는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들이나 뜻을 함께하는 선배 동료들이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저에게도 그렇게 지대한 영향을 준 분들이 있었다는 것이 참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학교나 문단에서 조삼연, 홍종만, 홍신선, 문효치, 정진규, 조창환 선생님 같은 분들이 기초적인 길을 잡아주시고 김왕노 시인처럼 개별적으로 진로를 살펴주거나 직설적인 조언까지 서슴지 않는 박현솔 시인 같은 사람들의 보살핌이 제가 추구하는 요즘의 문학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물론 20여년이 넘게 지내면서 지금까지 <한국시학>에 참여하게 해주고 계신 임병호 선생님도 빼놓을 수 없는 분이고요.
이 외에도 참 많은 분들이 제 문학의식의 숙성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렵지만 요즘에는 계간 <한국시학>을 중심으로 만나는 분들, 계간 <시산맥> 그리고 웹진 <시인광장>과 이번 봄에 창간되는 계간 <포에트리 슬램>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만나는 편집진들, 이런 분들과 문학적 사업은 물론 문학의 위의와 문학의 본질을 함께 논의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임애월 : 문단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계신 지금이 혹시 선생님의 전성기일까요? 제가 너무 오버했나요?(웃음)
김광기 : 글쎄요. 시인에게 있어서의 전성기는 치열하게 쓰고, 치열하게 쓰기 위해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시절이 전성기가 아닐까 싶네요. 전 문학을 한다고 생각했던 30여년을 변함없이 열심히는 했던 것 같아요. 하나의 과제를 풀기 위해 10년 이상을 공부해 본 경험도 있고요. 예를 들면 20여 년 전에 어떤 선배가 제 작품을 보고 좀 아쉽다는 평가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무엇이 아쉽냐고 따져 물었죠. 그랬더니 그 선배가 우물쭈물하더니 저를 피하더라고요. 기분이 매우 안 좋아서 그 선배가 동인으로 있던 문예지를 정기구독해서 그 잡지에 실리는 작품들을 분석하며 공부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대학원에 들어가 문예창작에 관한 공부도 심도 있게 하려고 했고요. 그러고 나서 한 십년 정도 지나니까 그 선배가 말한 의미를 좀 알겠더라고요. 그 선배에게 불손하게 굴었던 잠깐의 시간도 참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언제 만나면 꼭 사과라도 하고 싶은데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마 그 선배는 당시의 일들을 기억도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어쨌든 문단의 등단 시기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인 자신에게는 언제나 지금이 전성기라고 생각하고 치열하게 학습하고 사유하고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드리고 보니까 구양수가 말한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다작(多作)하고 상통하는 말이네요.
임애월 : 외모만 보면 풍족한 가정에서 걱정 없이 자라셨을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는 제가 아는 분 중에서 인생스토리가 굉장히 복잡(?)하신 분이시거든요. 예를 들면 중2 때 가출을 했다거나...... 살면서 거쳐지나온 직업의 종류가 수십 가지였다든가 하는...... 어떤 면에서 보면 참 자유로우면서도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아픈 데를 제가 건드렸나요?
김광기 : 앞에서 말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희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소년시절을 보낸 것 같아요. 자라면서 세 끼를 모두 찾아먹어 본 기억이 없을 정도이고 두 끼 정도도 한 끼는 구황작물로 대체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며 살았지만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아버지에게 꿈을 빼앗긴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같아요.
임애월 : 선생님의 작품에서 아버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읽었던 기억이 얼핏 납니다. 나이 들면 다 이해되고 용서가 된다는데, 특히 그 대상이 가족이라면 더욱 관대해지는데 아직도 용서가 안 되는 부분이 있나 봅니다.
김광기 : 이제 아버지 욕은 그만하고 살아야 하는데... 어쨌든 그 먼 등하굣길을 다니면서도 요즘으로 치면 1등급이 잘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학교성적은 꽤 좋은 편이었어요. 그런데 아버지에게 늘 듣는 이야기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만 하면 공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말뿐이었지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눈에 띄기 싫어서 밤이 될 때까지 학교 독서실에 있다가 집에 갔는지도 몰라요. 집에도 잘 계시지도 않았지만 아버지가 집에 계신 날이면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였어요. 들어가지 말아야 할 중학교를 어머니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간신히 들어가게 되니까 아버지의 구박은 더 심해졌지요. 그래서 아버지로부터의 탈출이 아마도 제 인생의 첫 목표였나 봐요.
임애월 : 에고... 어린 나이에 아버지한테서 받은 상처가 정말 크셨나 봅니다.
김광기 : 아직도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은 잘 먹지 않고 아버지가 했던 말들을 반대로 수행하며 사는 것이 많아요. 계획 없이 어쩌다 하나 얻은 딸자식 말고는 제가 삼대독자인데도 자식 낳는 것도 거부할 정도였으니까요. 이제 내일 모레면 저도 60이 넘어 가는데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니 살면 살수록 아버지는 같은 남자로서도 이해가 잘 안 되는 인물이었어요.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게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반항적으로만 살다가 세월이 지나고 보니 저도 가정을 잘 돌보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오래 전부터 얼굴도 못 보는 자식한테는 유사한 평가를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참 아이러니하죠? 또 본의 아니게 자유롭게 살다보니까 직업도 다양하게 갖게 되었어요. 돌아다니면서도 돈은 필요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다음 돌아다닐 여비 정도를 한곳에서 벌게 되는 거죠. 돈이 모이면 다시 떠돌아다니고... 그렇다보니 직업도 다양하게 되고... 제가 생각해도 제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요.
이런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살려고 했는데 공개적으로 다 떠벌리는 꼴이 됐네요.
임애월 :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눈빛은 슬픈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십니다. 그게 뭔 말이냐고요,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정말 궁금한 게 있거든요. 박사과정을 다 수료하셨는데 학위는 왜 안 받으셨을까요?
김광기 : 그러게요. 변변찮은 대학이지만 대학과정도 사실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무슨 일이든 하면 열심히 했고 대학원 박사과정도 수료생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성적이 좋았어요. 그래서 수료 후에 몇 년은 기다려야 할 수 있는 학부강의도 바로 나가게도 되었는데, 학위를 받기 위한 전초과정인 전공시험과 외국어시험도 그렇게 힘들게 패스하고 논문만 쓰면 되었는데...
임애월 : 논문 쓰기가 번거로워서 그러셨을까요...?
김광기 : 논문을 써야할 시기에 논문 쓰는 방법을 개인 저서로까지 발간할 정도였기 때문에 꼭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십여 년 전에 글쓰기 저서를 내서 조창환 교수님께 한 부 드렸더니, 쓱 보시면서 “이런 거 쓸 시간에 논문이나 쓰지...” 하시면서 혀를 끌끌 차시더라고요. 저를 참 많이 믿어주셔서 한 번도 논문은 왜 안 쓰느냐고 재촉하지 않으셨던 분이거든요. 그런데, 쓰기가 싫은 거예요. 석사과정 때도 다른 주제로 공부를 다 해놓고 마지막에 제가 스스로 주제를 바꿔서 평론 비슷한 논문 하나를 써 놓고 학위를 받았거든요. 석사 때에도 그것을 논문이라고 패스해 주신 지도교수이셨던 홍신선 선생님께는 너무 죄송하면서도 고맙기만 하지만 장학금으로 박사과정을 마치게 해주고 이후까지 잘 챙겨주신 지도교수로 계셨던 조창환 선생님께는 그 죄송함을 무어라 말할 수 없어요. 동기 중에서도 유일하게 저만 논문을 못 쓴 것이 돼버렸거든요.
임애월 : 저런, 좀 아깝네요, 혹시 아쉽지는 않으신지요?
김광기 : 십 수 년 전에 수료했지만 아직도 학위를 받고 싶지는 않아요. 굳이 다른 말로 하자면 논문을 위한 논문은 쓰고 싶지 않아요. 제가 진정으로 쓰고 싶은 주제에 대한 연구는 이미 충분히 되어 있어요. 거기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논문을 더 추가한다는 것이 참 싫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작품을 쓰는 입장이라서 그런지 작품 자체를 분석하는 작업이 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학계에 있으면서 한 개의 초석이라도 될 요량이라면 모르겠는데 오직 학위를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싫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또 하나 이유가 있어요. 저는 원래 태생적으로 교만한 사람이었어요. 요즘도 좀 그런 면이 있지만 이런 교만이라는 병을 고치려고 평생을 노력해 왔어요. 교만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평가해 왔고 아직도 돌아가신 지 한참이나 되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지 몰라요. 일례에 불과하지만 제 교만은 살아가는 데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결국은 제 장애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죽을 때까지라도 교만만큼은 반드시 고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박사학위라는 것이 저한테는 그런 장애를 키우는 요소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그렇게 아쉽지가 않아요. 그거 없이도 강의도 많이 했고 평론도 많이 썼는데, 평론을 발표할 때도 박사라는 직위가 붙지 않는 것이 좀 위안이 되기도 하고, 사실 어떨 땐 학위를 받아서 나도 한 번 붙여볼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요.(웃음)
임애월 : 스스로를 교만하다고 하시는 분은 처음이네요. 사실 진짜 교만한 분들은 본인이 겸손하다고 착각들을 하시거든요.(웃음)
시집 <데칼코마니>에서 첫 번째 나오는 시 「데칼코마니」를, 행 배열을 역순으로 하여 「리-데칼코마니」 라는 제목으로 맨 마지막에 등장시키는데요, 전에 다른 시인들이 시도했었는지 모르지만 참 독특한 발상이었어요. 그 두 편을 읽어볼게요.
그 이후의 세계를 열망한다.
합체가 되어야 열리는
문이 되거나,
내 영혼을 맑게 씻어내는
나비가 되거나
한 점의 코드,
상징이 되어 있는 그대
화인처럼 굳어
오른 편에서
점점 깊어지는 빛깔이 된다.
- 「데칼코마니」
점점 깊어지는 빛깔이 된다.
오른 편에서
화인처럼 굳어
상징이 되어 있는 그대
한 점의 코드,
나비가 되거나
내 영혼을 낡게 씻어내는
문이 되거나,
합체가 되어야 열리는
그 이후의 세계를 열망한다.
- 「리-데칼코마니」
윤의섭 시인은 ‘한 점의 코드’로 연결되는 현실과 이상의 두 세계가 서로 통섭, 교접하며 ‘그 이후의 세계’로 나아가기를 ‘열망하’는 시인의 꿈을 그려놓았다고 했는데요. 저는 이 시들을 읽을 때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 ‘오른 편’이라는 시어였어요. 여기서 ‘오른 편’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김광기 : 데칼코마니는 한쪽으로는 성립이 안 되는 구조지요. 오른쪽이 있으면 반드시 왼쪽이 있어야 데칼코마니가 되는 거겠죠. 저는 늘 오른쪽은 현실의 세계이고 왼쪽은 영의 세계라고 생각을 해왔어요. 아마도 그 생각의 기원은 왼쪽으로 꼬는 새끼줄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형성되었을 것 같아요. 애기를 낳을 때 금줄로 막아놓는 새끼줄이 왼쪽으로 꼰 새끼줄이죠. 영 혹은 혼의 세계에서 오는 나쁜 기운을 막자는 것이겠지요. 도깨비를 만나도 왼다리로 걸면 넘길 수 있다는 말이 있어요. 이 외에도 왼쪽을 꺼리는 사례는 많아요. 그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내가 알 수 없는 영의 세계는 왼쪽에 있다는 생각이 굳어졌던 것 같아요. 반대로 오른쪽은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겠지요. 왼쪽과 오른쪽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도 하고요.
임애월 : 아하, 그렇군요.
저는 ‘오른 편’이 혹시 그른 편(나쁜 편)의 반대인 ‘옳은 편’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혼자 하며 이 시를 읽었거든요.
‘합체’를 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데칼코마니 같은 선생님의 꿈(?)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도 엿보고 싶어집니다.
김광기 : 전 꿈이 없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저는 꿈을 어렸을 때부터 꾸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평생을 아무 생각 없이 살았어요. 목표 같은 것도 없어서 항상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얻으면서 살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데칼코마니 같은 꿈은 삶 이후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겠지요. 그 이후의 세계가 참 궁금하기는 해요.
임애월 : 꿈이 없다는 말씀이 참 슬프게 들립니다. 그래서 눈빛에서도 슬픔이 엿보이시나 봐요... 삶 그 이후의 세계, 그 낯선 세계가 저도 궁금합니다.
「개」라는 시를 인터넷상에서 읽은 기억이 나요. 그 여운이 오래 남아 있었거든요. 특히 ‘나로 하여 죽어간 것들’이라는 구절에서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게 돼요. 내가 살기 위해서 나도 모르게 얼마나 많은 것들이 희생되었을까. 그 죄업으로 이렇게 ‘개 같이’ 헐떡거리며 살아야 하는 나날들이 정말 형벌인 거 같기도 하고요.
내일 입을 바지를 오늘 밤에 빨고 있다.
쥐어짜다가 조금이라도 빨리 말릴 요량으로
바지주머니 네 개를 다 뽑아놓는다.
한여름에 헐떡거리다가 죽은 개 혓바닥들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헐떡거리며 죽은 개
바지를 입고 돌아다녔다.
하나도 아닌 네 개의 혀를 할딱거리며
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서 기르던 개, 성견이 되기도 전에 잡아 잡수시는
아버지를 향한 원혼들이
바지에 달라붙어 그렇게 낑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밥상에서 몇 점을 얻어먹은 죄 때문에
누구를 원망도 못하고
개 같이 뛰면서
개 같은 삶을 살면서
그들의 영혼들을 위무하고 있던 것이었다.
어디 개뿐이랴.
나로 하여 죽어간 것들의 혼을,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혼을 담았던 육신을 씹었던 죄업으로
지글지글 타는 아스팔트에
늙고 쉰 소리를 내뱉으며
허연 혓바닥을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 「개」 전문
김광기 :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다닐 시절이었어요. 집에서 개를 키웠었는데, 아마 아버지는 그런 개들을 한 마리씩 부담 없이 식용으로 키웠나 봐요. 나는 그런 개들하고 항상 친하게 지냈죠. 밥을 주기도 하고 시간이 나면 개를 데리고 동네를 함께 뛰어다니며 놀곤 했죠. 그러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개 목줄이 풀어져 있고 부엌에서는 개가 삶아지고 있는 거예요. 그때의 멍한 충격은 아무리 여려 번 뒤풀이돼도 만성이 안 되더라고요. 항상 배곯던 시절이라 저녁밥상에 있는 고깃국이 식욕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도저히 먹을 수는 없었죠. 그렇게 며칠을 참다가 배고픔이 슬픔보다 더 크게 느껴질 시기가 되면 아무 생각 없이 국 한 그릇을 후다닥 먹게 돼요. 그러고 난 다음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스스로에 대한 배신감이 커지게 되더라고요. 그런 일이 잦아서 그랬는지 살다보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먹어야하는 먹거리들의 본성을 가끔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또 현대인은 다른 종족을 다양하게 요리를 해먹은 죄업으로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나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요. 어떤 때는 식물에게도 혼이 있다고 믿게도 돼요. 가능하면 적게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네요.
임애월 : 생존의 끈을 차마 놓을 수 없는 본능이 모든 선택에서 우선시 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다음의 작품도 앞의 시와 연결 지어서 읽게 됩니다.
나는 그를 살해했던 일과 그를
살해하고 싶었던 일을 잊고 있다.
내가 그를 살해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 「감자에 싹이 나서」 부분
감자밭에서 ‘누군가의 머리’처럼 불거져 나오고 있는 감자를 캐며 시인 자신이 진짜로 캐내고 있는 것은 어둠 속에 오래 묻어두고 싶었던 존재의 아픔 같은 것일까요?
김광기 : 잘 보셨네요. 시골에서 감자를 캐다보면 큰 씨알이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는 것을 보게 돼요. 사실 감자를 심을 때는 씨알을 네 토막 정도로 내서 시커먼 재 같은 거름을 듬뿍 묻혀 땅 속에 박아 놓거든요. 잿물을 뒤집어 쓴 조각난 감자 조각에서 탐스런 감자가 주렁주렁 열릴까 싶은데 땅속에서 그렇게 크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한 생명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런 느낌을 물심일여로 반영해서 형상이 아닌 정신적인 문제로 전환을 하려 한 작품이죠. 그리고 그 시기에 비슷한 꿈을 꾸기도 했어요. 구황작물로 감자를 지겹게 먹어서 그런가 봐요. 가끔 꿈에 나타나요.
임애월 : 윤의섭 시인은 김광기 시인의 어조는 투박해 보이지만 단단하고, 잿빛을 띠면서도 속으로 빛날 줄 아는 진주처럼 은은하다고 했는데, 제게는 波高 높은 먼 심해 속 조류 아래 산호초 숲처럼 참 신비로워 보입니다.
선생님의 작품 속에 ‘바다’와 ‘나비’라는 시어가 자주 등장하던데, 물론 작품마다 그 의미가 다르게 작동이 되겠지만요. 친숙하지만은 않은 선생님의 작품 속 수사법에서 오독을 피하려면 주로 어떤 코드로 읽어야 하는지 살짝 알려주세요.
김광기 : 저한테 바다는 이상적 세계의 실체인 것 같아요. 표면적으로 보이는 바다도 그렇지만 심해의 그 부피에서 오는 신비함은 내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로 느껴지게 되죠. 또 육지 생물의 근원이 바다에서 온 것이라고 하죠? 그래서 그런지 바다는 어머니의 양수 같은 막연한 그리움의 공간으로 다가오기도 하고요. 저는 바닷가에서 멍하게 바다를 보는 것을 좋아해요. 그러고 있으면 평소에 무의미하게 스쳤던 많은 사유가 의미를 가지고 다시 생성되는 것 같아요.
나비는 프시케의 의미를 가지고 있죠? 프시케는 그리스어로 영혼 또는 나비라고 한다고 하니까 나비를 살아있는 인간 영혼의 물성으로 느낄 때가 있어요. 그런 의미를 작품에 가끔씩 반영을 해요. 또 나비를 많이 좋아하던 선배가 있었어요. 김강태 시인이라는 분인데, 50이 좀 넘어서 돌아가셨어요. 그분을 생각하면서 쓴 몇 편의 시에서 나비가 등장하기도 하죠.
임애월 : 저도 가끔은 나비처럼 가벼워져서 향기로운 들꽃 속에 숨어들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요 몇 개월 동안 탄핵정국으로 인해 국내 정치계가 불안하게 요동치고 있지요. 혹자는 ‘국가’라는 개념을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라고 하던데, 국가라는 이름으로 동서고금 여러 나라들이 저질러온 다양한 행태들을 볼 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네요. 요즘 들어서 국가와 폭력의 함수관계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국가는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그 힘을 공공선을 위해 써야지, 요즘처럼 특정한 소수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김광기 : 대통령을 탄핵하는 요즘 정국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극적인 정국이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우리가 탄핵하는 현실이 좀 씁쓸하기도 해요. 그래서 처음 뽑을 때 제대로 검증하는 선거제도가 참 중요한데, 개인적으로도 기류에 휩쓸리지 말고 각각의 후보를 잘 판단해서 한 표를 행사했으면 좋겠어요.
또 국가라는 주체가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로 인식되는 것은 국가라는 주체에 권력이 있기 때문이겠죠. 정부나 국가에 권력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고요. 그것은 내적인 문제가 아니라 외적인 문제로 대응하는 힘이 부족한 국가가 될 테니까요. 또 전체를 이끌어가는 힘은 사실 권력에서 나온다고 할 수도 있고요. 권력이 강하면 상대적으로 폭력적인 부분이 드러날 테고, 약하면 무능한 정부가 될 테니 무능한 국가와 폭력적인 국가 사이의 조정점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저는 이제 구세대가 되었나 봐요. 개인적으로 한참 왕성한 시기를 3공 5공으로 분류되는 정부 시대를 한 20년 넘게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 그 시기와 요즘의 정국 형태를 가끔 비교하게 돼요. 그러면 요즘은 참 살만한 시대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기성세대가 흔히 할 수 있는 판단의 오류가 저에게도 잠재되어 있는 거죠. 그래서 다시 고쳐 생각하게 되는데, 정치만큼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싶어요. 국가의 복합적인 문제를 잘 구분하고 세분하여 각각의 요소에 맞게 잘 판단해서 좋은 결과가 나와가 하는 것이 정치라고 보니까요. 우리나라의 국민의식은 참 높은 수준이니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도 정치를 하는 입장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하물며 집정자가 국가나 지방 정부의 권력을 개인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대다수의 국민들이 그렇게 흥분하고 있는 거겠죠. 또 실질적으로 대통령이 부재한 현실 속에서도 큰 흔들림 없이 대행체제로 잘 가고 있는 우리의 정부 형태가 참 많이 발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기도 해요.
임애월 : 누가 그러더라고요. 개혁을 외치던 사람들도 50이 넘으면 보수성향이 짙어진대요.
굳이 지켜낼 게 없는데도 말입니다. 뇌세포들이 점점 단순해져서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 거부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웃음)
많은 시인들이 작품을 통해 작금의 정치상황을 비판하고 있는데 다음의 시에 등장하는 ‘황사’처럼 나쁜 정치는 선량한 다수의 눈앞을 뿌옇게 가리고 ‘목구멍에 탁탁 걸리는’ 그 무엇이 되기도 하지요.
오후의 중턱에 붉은 해가 걸렸다.
사막을 건너 여기까지 끈질기게 날아와서
이렇게 뿌연 황색먼지를 날리는 것을 보면
대륙의 바람이란 게 참 무섭기도 하다.
저것들이 떼거지로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하늘을 짓이기면서 시야마저 가린다.
남쪽 어디인가에서는 동색의 식견으로
싹쓸이를 해버린다는 얘기도 있다.
오늘처럼 안개까지 끼여 황갈색 먼지가
움직이지도 않는 날에는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닌 내 눈앞의 지경이 된다.
다수결의 힘, 붉은 햇무리처럼 조용히
정국 경색의 무리를 짓는 그들은
국민이 선출한 힘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법이 되고 우리 하늘의 붉은 해가 된다.
그리고 오후 중턱에 뜨기만 하는 날에도
오늘처럼 목구멍이 탁탁 걸리게 된다.
- 「붉은 햇무리」
김광기 : 이 시는 다수의 힘을 두려워하는 의식이 다분한데 발상은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영토분쟁을 밀어붙이는 힘을 보고 갖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다수결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 힘인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더라고요. 현대 정치에서는 다수결로 정부 형태나 정책을 결정하고 있는데 다수결이 절대로 나의 의사를 모두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쓴 것이지요. 다수결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의 방식이고, 그 다수결의 바탕에는 개개의 도덕과 철학이 바탕을 이루고 있어야한다는 생각이에요. 하물며 집정자는 말해서 뭐하겠어요. 그래서 정부각료를 임명할 때 이런 부분을 검증하는 절차가 있는 거겠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국민 심판이라고 봅니다. 절대 자신의 한 표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신중하게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국민의 의식은 거기에서 결정되는 거겠죠.
임애월 : 다수결이 절대적으로 옳은 건 분명 아니지요. 다수결 때문에 희생된 예들이 얼마든지 있지만 그래도 어떤 선택을 할 때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 거라고 생각을 하고 싶은 거죠.
시집 <시계 이빨>에서는 ‘자본주의 이빨’처럼 이빨로 상징되는 詩句들이 더러 보이는데요. 우리네 삶은 ‘레미제라블을 니미제라블로 읽’을 만큼, 물신만을 숭배하는 ‘강성의 이빨’들에게 씹히지 않기 위해 곡예를 하고 있는 현실의 욕된 시간들이지만 ‘나무들의 푸르른 생존의지’로 그것들을 싱싱하게 덮어나갈 수도 있다고 보시는지요?
들쭉날쭉한 도시의 빌딩들
치열한 먹이사슬의 전투 속에서
날카롭게 크는 이빨들이다.
하루가 다르게 가지 번식하는 식성은
잇몸의 아래를 뚫고서도 건재함을 자랑한다.
편향으로 뻗은 이빨들의 기능성 또한
상대성 이론을 무색하게 한지 오래이다.
강력한 소화액까지 분출되는 공격력은
작은 이빨의 뿌리까지도 녹인다.
무위, 무소유의 이념으로 무장한 잇몸들이
강성의 이빨들에게 경배를 올린다.
사소한 공격성만으로 주변을 넓히고 있던 몸신들,
무장해제의 명을 받으면
바닥까지 깨물리는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잇몸이 자라 언젠가는 이빨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강력한 이빨들이 꾸며놓은
자본주의의 허구일 뿐이다.
고차원 자성섭생의 원리로 움직이는
이빨들의 먹이가 될 뿐이다.
- 「자본주의의 이빨」
김광기 : 자본주의에서의 자본은 으뜸인 권력이라고 봐야겠지요. 권력이 있는 자본은 인간의 이성마저도 지배하려고 합니다. 도덕적으로 궁극적 이성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무위, 무소유의 이념들이 자본의 먹이가 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돈의 가치만으로 상황을 판단하려는 질 나쁜 자본주들이나 사업자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아요. 그렇게 판단되는 자본이나 사업원리에 기생하려는 이성만 살아남는 경우가 많고요. 우리의 현실에서 남아있는 이성적 영역마저도 위태롭다는 시각입니다. 다른 시에서 추구하는 것이지만 ‘나무들의 푸르른 생존의지’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의 보루와 비견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임애월 : 자본주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안성맞춤인 구조를 갖고 있지만 다른 한끝을 보면 그 포악한 ‘강성의 이빨’에 희생되어 ‘바닥까지 깨물리는 먹이’들이 공존하죠... 이 시대 우리들의 삶에서 자본이 절대 권력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만들어 내는 그 시스템을 어느 정도는 수정해야 하는 시점에 온 것 같습니다만...
김광기 : 그렇죠. 자본이 편향적으로 비대하게 강해지는 사회는 절대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자본에 무조건적으로 의지하는 세력들이 많다고 봐야겠지요. 지난 얘기지만 대학에서 시간강사 신분으로 강의를 하던 시절에 강사료로 받는 수입이 한 100만 원 정도 밖에 되지를 않았어요. 그때 주위에서 가장 많이 듣던 소리가 ‘그 돈으로 먹고 살겠느냐’는 소리였지요. 그리고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수입으로만 비교해서 측은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시각에서만 보면 돈을 벌려고 시를 쓰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현실에서 시인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긴 저도 일반적으로 밖에 나가서 문단 이외의 사람들을 만나면 시를 쓴다고 말하지 않아요. 시를 쓴다고 하면 일단 무능하고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이 일쑤니까요.
우리 성장 시절에는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대학을 성적이 좋은 사람들이 지망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요즘에는 실용적으로 쓰이는 공대를 중심으로 평가가 이루어져요. 실질적으로 생산성 위주의 사회가 되었다는 거지요. 정신적인 측면을 지탱시키기 힘든 시대인 것 같아요. 하지만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절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잖아요? 물리적인 행복도 궁극적으로 정신적인 만족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정신적인 측면을 소홀히 하게 되면 머지않아 영혼 없는 인간이 되어 문질과 문명을 관리할 명분과 기운도 없어지게 되고요. 또 그렇게 삶이 유지된다고 해도 그런 삶을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는 없겠죠. 흔히 돈의 노예가 된다고 하죠. 인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문학과 예술이 대중들에게도 중요하게 인식되는 시스템을 빨리 만들어한다고 봅니다.
임애월 : 네, 인문학 중심 사회...... 당연히 대환영입니다. 물질의 노예 말고 다함께 사람답게 사는 게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표일 테니까요.
상처 나고 훼손된 영혼을 치유하는 곳이 고향, 혹은 유년의 시간이라는 생각입니다. 비록 그때 그곳, 그 시간들이 아리고 추웠더라도 우리들의 기억 속에 형상화된 그것들은 늘 따뜻한 빛으로 채색되어 있거든요. 선생님의 작품 「魂衣再生」에서도 보수가 필요한 부분을 위해 ‘아주 작은 질량쯤 되는 영혼’을 그곳에서 사려고 한다고 하셨는데 首丘初心처럼 고향은 우리들에게 절대적인 생존의 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김광기 : 그렇겠지요. 시에서 말하는 ‘혼의(魂衣)’는 영혼을 싸고 있는 옷을 말한 것이지요. 살다보니 그것이 많은 부분 해져서 보수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지요. 훼손된 영혼을 치유하려고 가는 곳이 고향과 같은 곳인데 그곳도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기도 하고요. 평생을 고통스럽게 이뤄놓은 것들을 어떤 때는 좋게 평가받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렇게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도 싶었고요. 좀 전에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이 물질적인 것으로만 평가되고 정신적인 측면이 홀대받고 있다는 것이 내재되어 있기도 합니다.
임애월 : <존재와 시간의 메타포>, <전략적 글쓰기와 논술> 등 논술 관련 교재들도 집필하셨고 아주대학교 등에서 강의도 오래 하셨잖아요? 그래서 말입니다, 요즘 일부 문인들이 쓴 글들을 읽어보면 어떤 때는 참 부끄럽다는 생각마저 들거든요. 생뚱맞기는 합니다만, 글쓰기의 기본에 대해 조금만 들려주시지요.
김광기 : 참 어려운 말씀을 하시네요. 제가 생각할 때는 글쓰기 기본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인으로서의 기본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 아는 얘기겠지만 서양에서는 시를 쓰고 있기 때문에 시인이 된다고 하고 동양에서는 시인이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다고 하지요. 시 예술문화도 각기 그렇게 전승되어온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서양에서 전승하는 문화의 형태로 시인이 된 사람이기는 하지만 동양의 전승문화 쪽에 더 주목하고 싶어요. 먼저 시인의 자질을 갖추고 스승이 충분히 학습을 시킨 뒤에 문단에 내어놓는 방식으로 시인이 되어서 시를 쓰면 문제가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지요. 그렇게 스승이 제자를 문단에 내어놓는 글을 발문이라고 하지요? 그 발문을 받고 문단에 나오게 되는 것을 등단이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요즘에는 등단절차가 다양해서 시인도 많은 우리나라를 시인공화국이라고도 한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시인이 되어 있으니 참으로 시인이 되기는 쉬운데 정작 시를 잘 쓰기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사실 시를 잘 써보고 싶어서 국문학이나 문예창작 공부를 정규 학위과정만도 십 몇 년 한 것 같아요. 그 외 몇 십 년을 개별적으로 꾸준히 학습해오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도 시를 잘 쓸 수가 없어요. 학습해서 시를 잘 쓴다는 것이 요원한 것 같기도 하고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학습을 안 한다는 것은 시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해야겠지요. 학습을 한다는 것은 생각을 키우는 일이 될 테고 옅은 생각만으로 글을 쓸 수는 없을 테니까요.
임애월 : ‘시인이 되기는 쉬운데 정작 시를 잘 쓰기는 참 어려운 것 같다’는 그 말씀에 백번 천번 공감합니다.
동면에 들었던 산이 기지개를 켜면서 깨어나고 이제 곧 꽃 피는 봄이 오겠지요.
봄의 시 한편 들려주세요.
김광기 : 생각해보니 어떤 계절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시는 없는 것 같아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는 말과 통하는 시인데 봄이라는 계절이 배경이 된 것 같아요. 「꽃차를 마시다」라는 시입니다. 우리 부부와 금산에 있는 친구 임영봉 시인 부부가 금산 좀 아랫동네에 있는 보광사라는 절에 가서 그 산사의 주지스님이 내어준 꽃차를 마시던 것이 새록새록 생각나서 쓴 시거든요. 그 스님이 차에 대해 참 각별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친구 부부도 순수하게 살고 있지만 그 주지스님이 참 순수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마 그때가 봄날이었을 겁니다. ‘봄’이라는 말이 ‘보다’라는 말과 통하는 것 같죠?
피어나는 새싹들, 꽃들이 세상을 보는 계절인 것 같기도 하지만 봄은 사람이 더 보고 싶은 계절인 것 같아요.
꽃의 절정을 꺾어 말리고 덖고 우려
입이 데일까 싶어 입안이 뜨거울까 싶어
혹시는 꽃의 화기에 몸이 데지는 않을까 싶어
후후 불면서 차를 마신다.
꽃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마시고 있다.
가끔씩 꽃차의 효능에 대해 듣고 있을 때는
채 발화하지 못한 일그러진 꽃의 형상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형상 너머의 것을 보는 듯
더 아름답게 환생한 꽃을 내어놓듯
제 몸을 우려 내어준 꽃에 경배하듯
이렇게 귀한 시간에 그렇게 구하기 어렵다는 차를 대접하며
당신은 누누이 꽃차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당신의 환한 모습이 꽃차보다
그 이전의 꽃보다 더 아름다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따라주는 대로 얼른 꽃차를 비우지만
당신은 고상하고 품위 있게 차를 마시고 있다.
꽃차의 의미보다 솔솔 피우는 꽃차향보다
차를 마시고 있는 그 모습에 취한다.
꽃을 거두면서 꽃잎을 말리고 덖고
오늘 이 시간을 위해 하나하나 담아두면서
무수히 꽃과 마음을 나누었을
당신의 지난 시간은 더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어떤 꽃의 소멸은
이 시간의 기슭에서 만난
우리 만남을 더 삶답게 우려내고 있다.
임애월 :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마시고 있다’... 참 좋습니다.
계절의 변화는 늘 신비로운 현상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꽁꽁 얼었던 땅속에서 여린 새싹이 돋아나고 바람꽃, 복수초들이 천진스럽게 피어나는 봄에는 자연에 대해 경외심이 절로 생겨납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좋은 장소에서 좋은 시간 기꺼이 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멋진 작품들 기다리겠습니다.
김광기 : 아직 부족한 게 많은데 <한국시학>의 좋은 코너에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한국시학>의 생성과 성장과정을 바로 곁에서 하나하나 지켜본 저로서는 <한국시학>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고 할 수 있어요. 모쪼록 어려운 현실에서도 <한국시학>의 위상이 굳건하게 자리매김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매우 큽니다. 더불어 발행인이신 임병호 선생님과 임애월 편집주간님의 건승 건필을 기원합니다.
<좌로부터 최대희 시인, 임애월 시인, 김광기, 임병호 시인>
- ‘들쭉날쭉한 도시의 빌딩들/치열한 먹이사슬의 전투 속에서/날카롭게 크는 이빨들이다’...
김광기 시인의 작품 속 구절처럼 치열한 삶의 한끝을 지나는 오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시인의 지나온 이야기들을 들으며 우리는 또 다른 시간을 건너간다.
꿈을 꾸는 것조차 사치일 수밖에 없었던, 유년기의 그의 가난과 불안과 미움 등이 어딘가에 숨어 아무도 모르게 그를 대신하여 은밀한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광교산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에서도 이제 봄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듯하다. -
■□ 시인의 자선시
에피스테메, 텍스트 미학 외 4편
김 광 기
숨구멍을 열고 오밀조밀 몰려있는 개미집 같고
곧은 씨알들이 촘촘히 박힌 해바라기 같기도 하지만
선험의 숨결이 응축된 기표와 기의의 횡단들,
무수한 기운들이 스멀스멀 피어나 세상으로 퍼진다.
소리로 키워내는 순간 의미는 분해되는 듯하지만
가슴에 다시 고여서 탄력을 갖는 패러다임,
읽을 때마다 의미는 달라진다. 뜻은 그대로이더라도
좌표는 달라진다. 삶의 경륜으로 읽히는 텍스트,
벽에 꽂힌 무수한 텍스트들, 갖가지의 무늬로 아침을 밝히고
때로는 깨알처럼 때로는 고딕폰트 문양 같은 높이로
시작을 알린다. 다시 텍스트만 있는 것 같다.
이제는 횡렬에 따르지 않고 아래를 내려 밟는다.
그렇게 오르려고만 했던 계단을 내려가기만 할 때
중심을 지탱하던 관절의 삐걱거림을 느끼며
노쇠한 무릎 때문에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들다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지나온 삶이 아니면
도저히 따라 읽을 수 없는 시간에 한 걸음씩 내려가는
텍스트 계단, 무수히 밟히는 시니피앙 시니피에들.
불멸의 꽃
시드는 태양빛을 내가 먼저 게우고 있다.
짙은 안개 속처럼 희미한 시간의 늪,
빛은 아직 투사되고 있지만 온기는
사라지고 편안하던 숨도 가빠온다.
마지막 시간의 틈을 메우는 데에 온 신경이 쏠려 있다.
모두 제(除)하고 다음 세상의 문을 열어야 한다.
선인들은 나무들이 시간을 정해 놓고
꽃을 피우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어느 시간의 꿀이 가장 단 것인지
격풍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도 꿈속의 유언 같은 말을 전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불멸의 꽃을 통째로 가로채려 했다.
열매가 열리는 시간을 재면서
고치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시간의 크레바스 속으로 몸이 떨어지고
꽃은 제 잎을 오므려 나를 흡수한 것이다.
아마도 정신 줄부터 먼저 놓았을 것이다.
생존과 먹이의 등식이 수레바퀴처럼 시간을 밀듯
빛이 바닥으로 깔리며 문이 닫히고 있다.
바다비
비가 내리고 거센 빗줄기가 사정없이 바다에 투신하고
그렇게 격정적으로 몸을 섞을 줄 알았는데
뿌연 안개만 피어오르고 있다.
대개는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쳐서 흙속을 비집다가
더러는 물길을 만나 아래로 더 아래로 흐르고
햇빛에 살이 깎이고 거친 흙을 만나서는 몸을 덜어내기도 하다가
어떤 한 같은 앙금들이 겨우겨우 바다로 가는 게
인연의 원리 같은 물의 흐름이고 보면
얼마나 기쁜 투신인가, 바다비
그런데도 무심한 바다는 출렁출렁 이불만 덮는 듯하고
빗줄기는 투정부리듯 뱃전만 두들기고 있다.
이렇게 되면 내 주위는 송두리째 비에 젖어
안개에 싸이고 슬픔이 가득할 것 같지만
그것도 이제는 사치인 것인지
차디찬 냉기를 마시며 쪽배 같은 가슴만 적시고 있다.
덤덤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저 바다 같다.
시간이 가다보니 비도 과거가 되고 살다보니 그렇게 격했던 슬픔이
잠시 스쳐가는 바다비 같기도 하고
그래도 여전히 너 없는 이곳을 채우는 비는 내리고
바다처럼 비처럼 너와 나는 저만치에 있고,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네가 떠난다고 하면 보낼 수밖에 없었고
네가 사정없이 비처럼 내리겠다고 하면
그냥 몽땅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 넓은 천지 한가운데서 작은 우산 하나 받쳐 들고
대책 없이 비를 맞거나 바다를 보거나 할 수밖에,
세월이 지난다고 누군가 비를 알려주거나 바다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다만 비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는 지금 같은 시간만 있다.
지하 이발관
이십 리 길이 넘는 면내에 있던 이발관,
꼭 같은 이발관이 시장 골목길 지하에 있다.
퀴퀴한 냄새, 내 유년의 구석에서 피는 곰팡내와
알싸한 비누냄새에 현기증이 난다.
뿌연 거울이 비추고 있는 허름한 의자와
절단된 공간을 툭 툭 치며 돌고 있는 시계바늘,
늙은 이발사는 째깍 째깍 모데라토 가위질을 하고 있다.
평생을 가위질하며 지낸 장인의 몸짓이다.
겁 없이 물 밖을 꿈꾸는 지느러미 같은 머리뭉치가
그의 손아귀에서 움씰거리다가 잘리고 있다.
기다리는 손님이 있든 없든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한 올 한 올 신중하게 째깍 째깍,
물비늘처럼 일어선 머리카락을 자른다.
마무리 끝에 옷을 털던 그가 비눗물 거품을 내고 있다.
어깨에 올려놓은 신문지 조각이 떨리고 있다.
그의 칼질은 망설임이 없다. 사각사각 소리 들린다.
오돌토돌 돋아 있던 기억들까지 빈틈없이 잘린다.
잘린 꿈과 자유, 시퍼런 기억들이 물에 씻긴다.
지하에선 젖은 것들이 잘 마르지 않는다.
사각비누로 감은 머릿결, 빳빳하게 일어선다.
고양이의 푸른 눈빛처럼
한 밤중의 고층빌딩에 불빛 하나 있다.
북적대던 인파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시커먼 몸체에서
촛불 같은 불빛 하나 반짝거리고 있다.
요즘의 어둠은 어둠 같지 않게 건물의 윤곽을 밝힌다.
검은빛이 광을 내며 어둠이 어둠을 지킨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새까만 어둠이다.
원형을 잘 보존해놓은 공룡의 뼈 같은 빌딩,
마치 한낮의 유언이라도 흐르듯
캄캄한 냉기가 감돌고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떠난 곳은 더욱 스산하다.
언제 사람들이 북적거렸을까 싶은 곳에서
고양이 눈빛처럼 깜빡이는 불빛 하나 비추고 있다.
빌딩의 혈관을 적혈구처럼 흐르던 사람들,
그들이 남기고 갔음직한 사람들 몇은 보이지 않는다.
식은 핏물 같은 서늘한 어둠에 불빛 하나 켜 놓고
시커먼 그림자를 감춘 채
빌딩 구석에서 가르릉 가르릉 소리를 내고 있다.
김광기 시인 약력
1959년 충남 부여 출생. 동국대 문예대학원 문창과 석사, 아주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85년 <화성문학> 동인으로 참여. 1995년 시집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를 내고《월간 문학》과《다층》으로 작품 활동 시작. 1998년 <수원예술대상>, 2011년 <한국시학상> 수상. 시집 <호두껍질>, <데칼코마니>, <시계 이빨> 외, 시론집 <존재와 시간의 메타포>, 학습서 <글쓰기 전략과 논술> 외. 계간《시산맥》편집위원, 웹진《시인광장》편집위원, 도서출판 <문학과 사람> 편집발행, 학점은행제 <한국보육교사교육원> 운영교수.
|
출처: 비공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