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예전부터 우리에게 “산”은 무엇입니까. 우리 산은 “사람의 산”입니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깃들여 살면서 산은 인간화 되었습니다. 우리에겐 자연의 산, 생태의 산보다는 역사의 산이며 문화의 산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산을 닮고, 산은 사람을 닮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산은 우리에겐 “어머니 산”입니다. 어머니로 상정화되고 어머니로 인격화되었습니다. 어머니 산은 모든 생명을 품어줍니다.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줍니다. 그래서 산은 생명의 모태이자 탯줄입니다. 산은 고향이자 어머니와도 같은 원형질의 그 무엇이 있습니다. 이상향은 산속에 있고 죽어 돌아가는 곳은 산소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고 소중한 신은 산신이었습니다. 불교와 유교도 한반도에 들어와서는 산과 깊은 관계를 맺고 한국적 특징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산의 나라이고 산의 문화였습니다.
한편 전통적으로 수도의 입지를 선정하거나 고을 및 집터를 고르는데 있어 산은 필수적으로 고려하였습니다.
이를 살펴 붑니다.
아주 먼 옛날에 환인의 아들 환웅이 있었는데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탐내거늘,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三位太白(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과연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 있었습니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서 환웅으로 하여금 인간 세상에 내려가 이를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환웅은 무려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神檀樹(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는데 이를 神市(신시)라고 불렀습니다. * <삼국유사> 권1, <기이2>, <고조선>
(탈해는) 토함산에 올라 돌무지를 만들고 7일 동안 머무르면서 성안에 살 만한 곳이 있는지 바라보니, 마치 초승달같이 둥근 언덕이 있어 지세가 오래 살 만한 곳이었다. *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4대 탈해왕>
궁예는 ...... 도참설을 믿어 갑자기 송악을 버리고 철원으로 돌아가 궁전을 지으니.... * <고려사> 권1, <세가> <태조원년>
왕건이 선조인 강충-태조 왕건의 4대조- 때에 풍수에 능한 신라의 監干(감간) 팔원이라는 사람이 부소군-왕경 개성부-에 이르렀는데, 산의 형세가 좋은데도 민둥산임을 보고 강충에게 말하기를, “만약 고을을 부소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위와 돌이 드러나지 않게 한다면, 삼한을 통일할 자가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이에 강충이 고을 사람들과 함께 산의 남쪽에 옮겨 살면서 소나무를 온 산에 심고 송악군이라 했다. * <고려사>, <고려세계>
조선시대에 이르자 산과 관련된 수도 한양의 입지 과정은 고려시대에 비해 훨씬 더 이론적으로 정교해지고 장소에 대한 이해도 실제적으로 심화되었습니다. 나라의 首都(수도)를 정하는 데에는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했습니다. 첫째가 산천의 형세라는 풍수 조건이고, 두 번 쩨는 교통 조건으로서 뱃길의 漕運(조운)과 육상 도로, 그리고 세 번 째는 군사 조건으로 성곽을 축조할 수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한편 고려조에서는 주산인 송악산에 치중했던 것에 비해, 조선조에서는 주산인 白岳(백악) 이외에도 인왕산, 낙산, 남산, 관악산 등 도읍지의 풍수명당이 갖추어야 할 산의 필요조건과 형국을 고려했습니다. 또한 산에 대한 비보의 형태와 기능도 훌씬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흥인지문<동대문> 근처에 인위적으로 造山(조산)을 만들어 한양의 수구가 허한 것을 방비하기도 하였습니다.
고을을 정할 때도 지형적으로 산이 부족하면 인위적으로 산을 만들어 고을의 경관을 보충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한국에는 명산문화가 있어 삼국시대에는 산천을 유람하는 산천숭배사상과 영지관념의 명산문화가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는 풍수사상과 도읍의 지덕 관념에 기초한 지리적 명산문화와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의 영향과 유학자들로 전개된 인문적 명산문화가 있었습니다.
한편 조선조의 고을에는 대부분 鎭山(진산)이 있습니다. 예로서 경북 영주시 순흥 고을의 진산은 비봉산입니다. 봉황이 날아가는 것을 막고 고을 앞 수구부의 허술한 지세를 보완하기 위해 고을 남쪽 5리쯤<석교리 삼포밭들>에 산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삼국시대에는 국가적으로 “진"에 대한 신앙적인 제의가 있었으며, 고려 중엽에는 국도의 주요한 산을 진산이라고 불러 비호할 대상으로 특별히 관리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이러한 추세는 지속되어 15세기 중엽에 고을의 경관 요소로 진산의 배정이 두드러졌으며, 조선 후기에는 진산의 내맥과 위치에 대한 지리적인 인식이 더욱 정교해졌습니다.
여기에서 조선시대 영남지역의 진산을 보면 경북 순흥 비봉산, 청송 방광산, 대구 연귀산, 밀양 화악산, 동래 윤산, 영천 모자산, 현풍 비슬산, 진주 비목산, 상주 천봉산, 창원 첨산, 함양 백암산, 문경 주흘산, 함안 여항산, 거창 건흥산 등이 보입니다.
또한 한국의 산에는 용산이 많습니다.
삼국시대부터 농경의 발달로 天父地母(천부지모) 사상이 형성되고 지모중심적인 농경의례가 정착됩니다. 산에서 흘러 내리는 물이 중요하므로 물의 신인 龍神(용신)이 나타나고 龍山(용산)이 등장합니다. 이는 용이 엎드려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伏龍山(복룡산), 누워 있는 모습이라고 臥龍山(와룡산), 하늘에서 하강하는 모습 같다고 天龍山(천룡산), 신비한 기운을 품고 있다고 瑞龍山(서룡산), 너그럽고 덕스럽다고 德龍山(복룡산), 대룡산, 계룡산, 교룡산, 귀룡산, 용문산, 용수산 등으로 이름지어져 불리기도 합니다.
한편 조선시대는 고려와는 달리 유교사상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유학의 자연관은 자연환경과 관계 맺는 문화생태적인 연결고리로 기능하여 문화 경관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조선은 중국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정통적. 원리적으로 성리학을 실천하려는 태도를 고수했습니다. 유교사상은 본래 자연풍토에 순응하고자 하는 순자연적인 환경사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교에서의 水景觀(수경관)은 쉼 없이 자기를 쇄신하고 근본을 성찰하게 하는 견본과도 같은 것이였습니다. 공자는 시냇가에서 물을 보고 “흐르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는구나”라고 했다거나 “仁者樂山 知者樂水(인자요산 지자요수,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라고 하여 산수를 도덕적으로 환유하고 사람의 성정과 결부시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유학자들에게는 산수는 자신을 성찰하는 경관텍스트로 인식되었습니다. 산수에 대한 도학적 인식과 태도는 자연지리적 환경을 자아의 정립과 인격의 수양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유학자들의 명산유람의 성행으로 특정의 명산경관에 대한 인간화된 장소이미지가 구축되기도 하였습니다. 즉 지리산과 南冥 曺植(남명 조식, 1501~1572), 속리산과 大谷 成運(대곡 성운, 1497~1579), 운문산과 三足堂 金大有(삼족당 김대유, 1479~1551), 덕유산과 葛川 林薰(갈천 임훈, 1500~1584), 청량산과 退溪 李滉(퇴계 이황, 1501~1570) 등이 그 사례입니다.
이에 조선시대 유명한 유학자 退溪 李滉(퇴계 이황, 1501~1570)의 시 한수를 올립니다.
讀書遊山似(독서유산사) 독서는 산 유람과 같네
讀書人說遊山似(독서인설유산사) 사림들이 독서를 산 유람과 같다지만,
今見遊山似讀書(금견유산사독서) 지금 보니 산 유람이 독서와 같구나
工力盡時元自下(공력진시원자하) 공력이 다했을 때는 원래 스스로 내려오고,
淺深得處摠由渠(천심득처총유거) 얕고 깊음을 얻는 자리는 모두 자기에게 말미암는 것
坐見雲起因知妙(좌견운기인지묘) 앉아 피어오르는 구름 보니 묘함을 알고,
行到源頭始覺初(행도원두시각초) 가다 골짜기 끝에 이르니 비로소 처음을 깨닫네
絶頂高尋勉公等(절정고심면공등) 그대들이여 절정의 높은 곳을 힘써 찾게나,
老衰中輟愧深余(노쇄중철괴심여) 노쇠하여 도중에 그친 내가 심히 부끄럽구나.
조선시대에 있어 유학자들에게 산수는 도덕적 거울의 경관 텍스트였고, 유람의 과정은 景觀 讀解(경관독해)로서 讀書(독서)와 같았습니다. 이시에서 退溪 李滉(퇴계 이황, 1501~1570)은 명산유람의 궁극적 목적이 독서와 같이 성품의 궁리를 위한 학습으로 여겼음을 잘 드러내 줍니다.
전날에 이어 모가술고개에 다시 도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