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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간 ‘자율’ 학습이 한창인 우리 학교 건물 3층 복도에서 야자감독을 하며 이 글을 쓴다.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학교대사전>의 지은이들이 이름붙인 ‘복도 한류’ 한가운데서 책상과 걸상을 내놓고 간수처럼 앉아 있다. <우리교육>이 내게 부탁한 주제는 ‘성찰’이다. 대개, ‘성찰’이라는 말은 긴요하지 않은, 조금은 한가한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성찰의 현장성’을 조금이라도 부여잡고자 굳이 이런 자리에서 글을 쓴다.
비평준화 지역에 속한 우리 학교에는 우열반 제도가 있다. 우수반에 속한 3개 학급의 교실은 굳이 감독이 필요 없을 만치 고요한 침묵이 흐른다. 나머지 4개 교실은 ‘평반’이다. 아이들은 책상에 앉아 있는 그 자체가 고역인 듯 끊임없이 부시럭거리고, 소곤대고, 문자메시지를 주고받고, 화장실을 들락날락한다. 나는 두더지잡기 게임을 하듯 이곳저곳 교실을 오가며 ‘소음’들을 틀어막는다.
내가 앉은 책상 위에는 오래전 읽었던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대담 기록 <우정에 대하여> 번역 인쇄물이 있다. 나는 제도 교육의 한가운데서 간수처럼 앉아 현대 교육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의 글을 읽는다. 나는 왜 굳이 이런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일까, 문득 생각해본다. 한 사람의 교사로 올바르게 살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무력감으로 나는 자주 우울해진다. 내가 되돌아갈 수 있는 곳은 ‘우정’밖에 없다. 이것은 젊은 나로선 어느 정도는 자포자기의 감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우정’의 직업으로 교사를 생각했고, 지금도 우정 때문에 이 공간을 떠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일까,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래서 나는 우정으로 난 길 위의 이정표들을 되짚어보고 싶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성찰’이다.
고교 시절
나는 1988년 3월에 고교에 입학하여 1991년 2월에 졸업했다. 내 고교 시절은 교육에 대한 인식과 판단의 원천이다. 나에게 ‘비폭력’에 대한 신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시절 내가 학교에서 겪은 ‘폭력’ 때문이다. 내가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교사가 되고자 하는 것은 그 시절 선생님들이 우리들과 잘 놀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고교 시절을 이렇게 건조한 몇 개의 표현으로 정리할 수도 있다. 스파르타식 기숙사 생활, 모의고사 점수, 짧은 스포츠머리의 금욕, 체벌, 수면에 대한 모멸(나는 늘 ‘자고’ 싶었다), 속물근성의 주입.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우정’ 때문이다. 기숙사 아이들과의 새벽 축구, 새우깡 봉지를 풀어놓고 밤새도록 지껄이던 그 많은 이야기들, 야자 쉬는 시간의 철봉과 줄넘기, 자전거를 타고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한 논둑길을 밤늦도록 헤매던 기억, 소금이 가득 담긴 광주리를 누군가가 발로 뻥 차서 흩어놓은 듯 별들로 총총한 밤하늘…, 그렇게 3년을 견뎠다.
그 시절의 갈망과 그리움을 지금 만나는 아이들에게서도 느낀다. 나는 그것을 충분히 확인했다. 내가 교직에 몸담고 있는 이유는 그 갈망의 시간을 그 나이대에 겪었던 자로서, 아이들을 다독이고 함께 그리워하기 위해서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내가 전교조 활동을 하는 이유는 그 조건들, ‘불관용’과 ‘통제’가 인이 박힌 학교에 ‘관용’와 ‘자유’의 공기를 불어넣기 위한 몸부림이다.
전교조
나와 비슷한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겠지만, 내 고교 시절 아이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선생님들은 거의 전교조 교사였다. 새로 출시된 자동차 이야기, 공부 잘해서 성공한 제자 이야기, 짧은 시간에 큰 돈 버는 재테크 이야기 따위 잡담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 선생님들이 대부분인 학교에서 전태일과 신동엽과 광주의 비극을 이야기해주던 극소수 선생님들은 예외 없이 전교조 교사였다. 나도 저런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희미한 꿈을 그때 처음으로 품었다.
대학 시절, 그 당시 대학 사회를 휩쓸던 열병을 나 또한 앓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과학적 세계관’, ‘사상 투쟁’, ‘강철 대오’ 이런 단단한 금속성의 언어와 군사주의에 적응하지 못했다. 나는 ‘연민’, ‘가난’, ‘우정’과 같은 연성(軟性)의 수사에 더 깊이 감응하는 문학도였다. 2학년 무렵, 민주광장에서 사범대 학생회가 주최한 ‘전교조 사진전’이 기억난다. 순하고 착해빠진 인상의 해직 교사들이 백골단들에게 사지를 비틀린 채 끌려가가는 사진, 단식장에 찾아온 제자의 손을 잡고 웃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 교문 바깥에서 교문을 부여잡고 반대편 아이들을 쓸쓸히 바라보는 선생님의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난다. 투사가 될 자신은 없었지만, 저 선생님들처럼 사랑 때문에 고통 받는 교사가 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기 전까지 2년간 대안교육잡지 <처음처럼>을 편집하는 실무를 담당하면서 더러 제도권 바깥을 넘보기도 했지만, 결국 공교육으로 들어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전교조’ 때문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전교조 활동가로 살면서, 올해 위원장 선거까지 통과하면서 나는 착잡한 기분이 된다. 지금 전교조 운동의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전교조 자신이다. 이 사실을 전교조를 이끌어가는 활동가들은 깊이 고민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착잡하다.
<녹색평론>
대학 시절, 내가 꿈꾸었던 미래는 이런 것이었다. 작고 깨끗한 집 한칸, 마당 텃밭에서는 푸성귀들이 자라고, 빨랫줄에는 손으로 빨아 널어놓은 옷가지들이 나부낀다. FM 라디오가 흐르는 방에서 책을 읽고, 다음날 도시락을 싸서 자전거 뒤에 매달고 출퇴근하는 생활을 나는 꿈꾸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이 거대도시의 생리와는 맞지 않는, 그저 낭만적인 몽상일 따름임을 사회생활 첫해에 곧장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대로 가다가는 세상이 그리 오래 지탱할 수 없으리라는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진보 사상’은 내 자식, 그 자식의 자식들이 살아갈 불과 5~60년 뒤의 세상조차 그리지 못했고, 인간의 삶이 지속가능한 조건에 대해 성찰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가다가는 거의 모든 먹거리를 수입해서 먹어야 할 판인데, 석유가 50년 뒤에는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을 텐데, 지구가 갈수록 더워지고, 자연이 남김없이 파괴되어가고 있는데, 그 나머지 것들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진보 사상과 그들이 그리는 미래 사회에 대한 이러저러한 비전들은 내가 보기엔 그저 ‘근대적 습관’의 한 형태일 따름이었다.
<녹색평론>만이 오직 이러한 ‘지적 수음 행위’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녹색평론>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로 구조화된 문명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비와 안락에 대한 충동, 자기만족과 과시의 욕망에 게걸든 사회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근원 자체를 망각한 철저한 교만을 넘어서 ‘고르게 가난한 사회’로 가야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녹색평론>은 지금 이러한 총론의 반복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긴급한 여러 문제에 대한 분석과 대안의 집필로 분주하다. <녹색평론>은 과거에도 지금도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의미 있는’ 지적 공간이다.
안락(安樂)
교사집단을 관통하는 가장 광범위한 정서적 기류는 바로 ‘안락’이다. 이 사회는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후지타 쇼조)가 완성돼 있고, 교육 현장도 예외는 아니다. 속되게 표현하면 이런 것이다. ‘좀 편하게 가자.’ 자동차가 인간에게서 ‘다리’의 사용가치를 거세하고, 사물을 ‘풍경’으로 대체하듯이, ‘안락의 교육’은 교육 그 자체를 거세한다.
전교조 운동 또한 안락을 향한 교사집단의 열망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간다. 21세기에도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머리’를 자르라고 지시한다. 심지어 직접 제 손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자르기도 한다. 그렇게 ‘단정한’ 두발로 정돈된 교실 풍경에 안정감을 느끼는, 그야말로 파시스트적인 미감을 가진 교사가 지금 너무도 많고, 나는 이런 현실에 말할 수 없이 절망한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한 전교조의 노력은 겨우 ‘학생인권법 제정’이다. 학생인권법이 통과되면 무얼 하나. 동료 교사들과 더러 의가 상하고, 보수집단으로부터 공격을 당할지라도, 조합원 내부에서 반발이 있을 지라도 학교 안팎의 비인권적인 관행과 직접 맞서 투쟁하고, 토론하는 길 말고는 다른 길은 없다.
몇년 전, 한 결손 가정의 아이의 집에 가정 방문을 갔던 기억이 있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집, 안팎으로 발디딜 틈도 없이 쓰레기와 옷가지로 가득찬 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학교로 오는 아이가 있었다. 우리는 그 아이의 ‘빈곤’을 ‘풍요’로 바꾸어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아이의 ‘빈곤’을 ‘가난’으로, 보살핌과 우정으로 견딜 만한 조건으로 만들어 주는 일이다.
모든 교육적 상황은 백가지 문제에 대한 백가지 답을 가진, 근원적으로 무정부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풀려는 노력은 ‘법과 제도’라는 시스템의 그릇 속으로 옮겨 담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방향으로 흐른다. 이것을 사람들은 ‘개혁’이라 부른다.
감각적이고, 질감이 있으며, 육체성을 가진 교육이 사라지면 인간적인 상호접촉의 중요한 형식 하나가 사라진다. 교육개혁은 이 살아있는 대면 관계의 ‘황무지’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안락’에 대한 편집증이 낳은 비극이다. 교사에게, 그리고 전교조에게 필요한 것은 ‘자동차’가 아닌 ‘걸음’걸이의 교육이다.
‘지금 여기’
우리의 특기는 현재를 미래로 유예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온전한 의미를 배우지 못했다. 고교 시절은 대학을 위해, 대학 시절은 취업을 위해, 취업 이후는 결혼을 위해 언제나, 늘, 유예되었다. 이 습관은 지금도 완강하다. 이 학교가 힘드니 다른 학교로, 이번 주가 힘드니 빨리 놀토가 오기를, 이번 학기가 힘드니 빨리 방학이 오기를, 지금 교장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다음 교장이 들어서서 이 문제를 잘 풀어주기를, 이 정권이 실망스러우니 다음에는 제대로 된 정권이 들어서 주기를, 미국 제국의 포악이 하늘을 찌르니 부시가 재선에 실패하기를, 혹은 미국 경제가 어서 망해주기를, 언제나, 늘, 기다린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늘은 다만 내일을 기다리는 날이다. 그러나 그 내일이 오늘이 되었을 때, 달라진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내일을 기다린다. 그렇게 세월을 보낸다.
바로 ‘지금 여기’ 문제가 있다. ‘성찰’하는 정신은 ‘지금 여기’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이 끝없는 유예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러므로, 지금 여기, 아픔을 느낀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걸음걸이로라도 그렇게 걸어가면 된다. 모든 것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노무현 정권, 새만금, 천성산, 평택, 한미 FTA,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의 지역과 학교와 학급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그 모든 일들까지.
소외될 수 없는 정신 ; 우정
이 시대, 인간들은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다. 누구든,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내밀한 공간에서 만났을 때 그들에게는 짙은 고독감이 똬리 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제적인 풍요와 안락이 결코 채워줄 수 없는, 어떤 의미에서 풍요와 안락이 더욱 가속화시키는 근원적인 고독이다.
우리 교육의 현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깊은 좌절을 느낀다. 답이 없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결국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우정’이다. 아이들끼리의 우정, 아이들과의 우정.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우리 교육은 이렇게 맺어지는 우정들의 결과만큼만 좋아질 수 있다’. 이반 일리치의 대담 기록 <우정에 대하여>에 나오는 12세기의 수도사 성(聖) 빅토르 휴는 ‘우정’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친애하는 형제 로놀프에게, 죄인 휴로부터. 사랑은 끝이 없다네. 내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금방 그게 진실임을 알았었네. 나는 이방인이었고, 나는 그대를 낯선 땅에서 만났었지. 그러나 내가 거기서 친구들을 발견한 이상 그 땅은 정말 낯선 곳이라고는 할 수 없었네. 내가 먼저 친구를 만들었는지, 혹은 내가 친구가 되었는지 나는 모르겠네만, 나는 거기서 사랑을 발견하였고 나는 그걸 사랑했으며 나는 그 사랑에 싫증난 적이 없었다네. …… 나는 이 소중한 선물의 무게에 짓눌릴 정도가 되었지만, 그러나 결코 짐스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네. 왜냐하면 내 온 가슴이 나를 지탱해준 까닭에. 그리고 이제 긴 여행 끝에 나는 내 가슴이 여전히 따뜻해짐을 느끼고, 그 선물이 조금도 상실되지 않았음을 느낀다네. 사랑에는 끝이 없는 탓이라네.
결국 내가 시작한 곳도, 돌아온 곳도 ‘우정’이다. ‘우정’의 신비가 교육의 비밀이다. 나는 우정의 사도가 되어 아이들을 제도(濟度)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당치 않은 발상이다. 소박한 의미에서, 나는 그저 아이들의 싱그러움과 우정의 힘에 기대어 교사로서의 무력감과 고독을 조금씩 견딜 따름이다.
근대 교육은 ‘세속적 보편 교회’(라이머)이며, 체제의 지배를 영속화시키는 도구이다. 교사는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처럼 ‘간수’이며, 이 보편 교회의 집사일 따름이다. 근대 교육은 원래부터 그러했고, 거기에 ‘한국적 극악함’이 덧붙어 있다. 우리의 성찰은 결국 이만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아이들에게 선물같은 존재가 되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임을 느끼게 하는 것, 그리고 이 우정의 조건을 위해 투쟁하는 것. 그러므로, 희망은 ‘우정’의 영토를 조금씩 넓혀가는 것밖에 없다. ‘우정’은 영원토록, 소외될 수 없는 정신이다. 사랑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월간 우리교육 2007년 1월호)
첫댓글 우정의 글.. 고맙습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
이계삼 선생에게 동류의 안락함을 느끼며 우정의 편짓글 하나 답글로 올립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선물로 다가설 수 있다면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고맙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