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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 22장 2절, 욥기 1장 20~22절, 고린도후서 5장 18~20절, 야고보서 2장 18절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창세기 22장 2절, 새번역>
이 때에 욥은 일어나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다음에,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욥기 1장 20~22절, 새번역>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고린도후서 5장 18~20절, 새번역>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야고보서 2장 18절, 새번역>
드디어 제대로 된 우물 '브엘세바'를 소유하게 된 아브라함은 영생하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블레셋 땅에서 머물러 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에서, 영생하시는 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아브라함은 오랫동안 블레셋 족속의 땅에 머물러 있었다. <창세기 21장 33~34절, 새번역>
이 사건은 지금 아브라함의 우선순위가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우선순위는 하나님도, 사라도, 이삭도 아닌 '우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담판(談判)을 지어야 할 때가 왔음을 아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창세기 22장 1~2절, 새번역>
창세기 21장 후반부의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였습니다. 이 일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시험' 바로 'Test'입니다. 자격을 검증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시험 종목이 너무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인생의 최고난도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아브라함의 시험이 없었다면 '욥'에게 찾아온 고난이란 시험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험의 목적이 분명하고, 시험을 내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결국은 이 시험을 통과할 믿음으로 정금같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욥도 쉽지 않은 풀이 시간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출제하신 시험 과목을 듣자마자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에 이 출제 과목을 듣고 자신 있게! 고민 없이! '아멘'이라고 하실 분이 몇 분이나 계시겠습니까? 그것도 아브라함에게는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아들입니다. 첫번째 아들인 이스마엘을 떠나 보낸 것도 너무 마음 아팠는데, 이젠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니, 그것도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시니, 아브라함은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숨도 잘 수 없었던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말씀 이 후에 바로 행동을 취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바로 응답했던 것처럼 오늘 다시 그런 민첩한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을 다시금 묵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처음 부르신 그날과 동일한 명령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소위 이 담판(談判)을 해결할 수 있는 'Key Point'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창세기 12장 1절 B, 새번역>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창세기 22장 2절 B, 새번역>
분명히 하나님이 보여주신 땅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문제로 인하여, 정처없이 헤매었던 지난 수십년을 돌아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의 여행의 목적지인 '하나님이 보여주는 땅'에 아직도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동역자 여러분, 혹시 '순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절대 어렵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그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대로', '일러주시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엄청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신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첫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곧장 말씀하신 땅 모리야로 향합니다.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창세기 22장 3~4절, 새번역>
하나님이 출제하신 시험과목을 듣고 난 후 아침 일찍 일어난 아브라함은 곧장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으로 이삭과 두 종과 함께 떠납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3일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3일은 모든 것을 회복하기에 충분한 묵상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보낸 3일처럼, 예수님이 죽음 가운데 계셨던 3일처럼, 부활의 신호탄이 될 만한 충분한 시간, 3일이었습니다. 그렇게 3일이 지나자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예전에 기록되었어야 할 아브라함의 행동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이 얼마나 많이 이주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아브람은 또 거기에서 떠나, 베델의 동쪽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옮겨 가서 장막을 쳤다. 서쪽은 베델이고 동쪽은 아이이다. 아브람은 거기에서도 제단을 쌓아서, 주님께 바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아브람은 또 길을 떠나, 줄곧 남쪽으로 가서, 네겝에 이르렀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그 기근이 너무 심해서, 아브람은 이집트에서 얼마 동안 몸붙여서 살려고, 그리로 내려갔다. <창세기 12장 7~10절, 새번역>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모리야 땅에 왔습니다. 굳이 왜 모리야 땅인지에 대한 설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장소'라는 것입니다. '왜? 그 장소로 가야만 합니까?'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네'라는 대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네'라고 순종하고 모리야 땅으로 간 것입니다. 왜 그곳인지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담판(談判)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번 시험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우선순위'를 확실하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주어진 모든 것보다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길 바라셨습니다. 우물이 없어도, 재산이 없어도, 이삭이 없어도, 하나님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시험이니 말입니다. 사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을 때도 이 모든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금 소유하게 된 아브라함입니다. 모두 다 내려놓고, 하나님과 독대하는 담판(談判)이 그래서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담판(談判)을 위해 모든 준비를 끝낸 아브라함을 우리는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지난 3일의 시간동안 아브라함은 다시 '믿음의 아버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던 아브라함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변화를 바로 종들에게 하는 아브라함의 언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로 믿음이 생기면 언어부터 바뀌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는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 그 동안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창세기 22장 5절, 새번역>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단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 아이'와 '함께'입니다. 오늘 창세기 산책에서 이 두 단어만 가지고 가셔도 좋습니다. 이 두 단어에 담긴 아브라함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전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이 아이'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아닙니다. 이삭도 아닙니다. 종들에게는 도련님이고 주인입니다. 하지만 종들에게 아브라함은 이삭을 '이 아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여전히 이삭을 너무도 사랑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나님이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제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하였기에, '이 아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속한 '나의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께 드릴 아이'라는 결심을 종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내 자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임을 잊어버리고 부모가 소유자라는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저 우리 부모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보석같은 선물의 청지기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세상 그 어떤 우상보다 더 소중한 우상으로 만들어 버릴 때가 많습니다. 받은 선물로 인하여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과연 '내 사랑하는 자녀'를 '이 아이'로 객관화 시키실 수 있겠습니까? 함께 예배 드리는 그 순간에는 나의 자녀가 아닌 동일한 '예배자'로 내 자녀를 대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 어려운 결심을 아브라함은 지금 종들에게 먼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의 고백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때에 욥은 일어나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다음에,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욥기 1장 20~22절, 새번역>
둘째, '함께'입니다. 사실 성경 히브리어 본문에는 '함께, Together'라는 단어가 아니라 '우리, We'라는 주어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종들은 당연히 아브라함이 'We'라고 주어를 사용하는 것에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볼 때는 이상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고 돌아오면 결코 '우리, We'가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혼자서 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확신합니다. 분명히 함께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주어 '우리, We'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의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입니다. 그리고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하나님입니다.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한 아브라함은 이제 하나님과 함께 돌아와 새로운 믿음의 여행을 떠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물'로 만족했던 자신의 지난 몇년을 돌아보면서 후회하며, 회개하며, 새롭게 결단하며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우리, We'가 되는 것입니다.
잊지마십시오. 믿음의 여행은 결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십니다. 모든 일에 주어가 '나, I'에서 '우리, We'로 바뀔 때 비로소 우리는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기에 '그, He'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와 동역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우리, We'라는 주어를 영광스럽게도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맡겨 주심으로 '동역'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고린도후서 5장 18~20절, 새번역>
말씀을 더 살펴보지 않아도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담판(談判)은 이미 결론이 난 것 같습니다. 시험 출제자의 의도를 시험을 푸는 사람이 너무도 명확하게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땐 시험을 보나마나 결과는 동일합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우선순위를 회복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입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품게 된 아브라함입니다.
우리 역시 이 '확신'을 소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이 출제하시는 문제를 뒤로 밀어만 두고, 주저 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풀기도 전에 이 담판(談判)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믿음을 주님께 보이고 확실히 소유할 때입니다. 사랑하고 축복하고 존경하는 예배자 여러분, 이제는 더 지체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보여드리시길..소망하며 축복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야고보서 2장 18절,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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