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함께 나누기
<화엄경> 입법계품에 보면 선재 동자라는 젊은 구도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재 동자는 도를 구하고자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사회로 나갑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요.
도를 구하고자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비구·비구니 같은 수행자들도 있었지만 농부·상인·대장장이·이교도인·바라문·창녀도 있었습니다.
52번째로 찾아간 미륵보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보살님, 보살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이 말은 보살이 어디에서 태어나 세상에 나오게 되느냐는 뜻입니다.
이에 대한 미륵보살의 답변은
첫째, 보살은 대비심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보살은 크게 아파하는 마음, 즉 비심(悲心)에서 출발합니다.
크게 아파하는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서면 그 아픔을 함께 해야 되겠다.
그리고 그 아픔을 치유해야 되겠다는 자심(慈心) 즉,
사랑을 베푸는 마음이 보살의 둘째 고향입니다. 142쪽
이처럼 보살의 힘과 서원은 아픔에서 옵니다.
비(悲)의 인도말 어원은 신음입니다.
혹시 우리들이 길을 가다가 아주 처참하게 쓰려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 순간 가슴이 찡하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아픔을 느낀 경험이 있었는지요? 불쌍하다. 도와줘야겠다는 느낌과는 다르게 이 생각보다 훨씬 이전에 느껴지는, 마치 전기처럼 다가오는 찡한 느낌, 그것이 바로 비심입니다.
전율로서 다가오는 이 마음이 마치 자기가 겪은 것처럼 느끼는 아픔이요, 곧 비심인 것이지요.
아픔은 훨씬 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베푸는 행위는 아픔을 함께 느끼는 사랑에 비하면 좁은 사랑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아픔을 기반으로 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아픔을 겪거나, 그렇지 않으면 타인의 아픔을 마치 자기가 겪은 아픔처럼 느낄 수 있는 그것이 바로 보살행의 원천입니다.
‘저런 처지에서 얼마나 아프겠느냐. 내가 여유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은데, 참 미안하다.’는 마음이 있으면 설령 도와주지 못해도 무량한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꼭 재물로만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재정 형편이 안 될 때는 마음으로라도 함께 아파하여 도와주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으면 족합니다. 그것이 바로 큰 수행인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한 집에 살면서도 자식이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
부모님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나한테 어떻게 해주느냐에만 초점이 맞춰 있지요.
우리들이 자기중심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부모님이나 자식의 처지를 서로 이해하는 것,
그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이 보살행의 첫걸음입니다. 144쪽
법륜스님의 <젊은 불자들을 위한 수행론> 중에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먼저 고개를 쳐드는 나의 이기심!
저에게는 경계대상 1호입니다.
이기적인 나를 알아차리고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비 수행을 이어나가겠습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보살은 대비심!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보살의 힘과 서원은 아픔에서 옵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
항시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나무아미타불...()()()....
dalma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