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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線)
손 중 하
우리나라 누구라고 하면 알만한 고인이 된 Y라는 정치가가 있었다. 그가 초등학교 시절 월사금을 학교에 내지 않고 어디엔가 써버려 그의 부친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는데 잘 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아 그의 부친이 회초리를 가지러 간 사이에 도망을 가는데 화를 이기지 못한 그의 부친이 그를 잡으러 쫓아가자 그의 부친이 오는 길에 산에서 칡넝쿨을 끊어다가 가로 질러 쳐놓고 그의 부친에게 하는 말이 ‘이 줄을 넘어오면 내 아들’이라고 해서 그의 부친은 차마 그 칡넝쿨을 넘지 못하고 멍하니 자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말이 구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자식의 아들이 되기 싫어서 그 칡넝쿨의 선(線)을 못 넘었을까. 윤리의 선(線)을 파괴하기 어려워서였을까.
선(線)이란 때로는 우리 삶의 규칙이고 윤리이고 도덕이 될 수 있지만, 때로는 속박이고 억압이고 보수의 틀을 깨지 못하는 철벽일 수도 있다. 혹자는 우리의 삶에서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선(線)이 필요하다는 사람들도 있다.
나라마다 국경선을 그어 놓고 집집마다 울타리를 쳐놓는 물리적인 선(線)도 있지만, 이 세상에는 법률적인 선(線)과 윤리적인 선(線)등 알게 모르게 많은 선들이 쳐있어 어느 때 어느 선(線)에 걸려 곤욕을 치를지 모를 일이다. 같은 일이라도 선거 같은 것은 판단력이 뛰어나도 나이가 어리면 투표를 할 수 없고, 판단력이 흐려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해도 일정한 연령에 도달하면 아무런 제재 없이 투표에 참여 할 수 있다.
선(線)이 주는 갈등은 이런 것뿐만 아니다. 더 큰 갈등은 정신적으로 우리를 붙들어 매 놓는 심리적인 선(線)이다.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도덕으로도 풀 수 없고 윤리로도 또는 법으로도 풀 수 없는 그 선 하나가 내 삶을 짓누르고 있는데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다만 시간이 흐른 후에 후회로만 남는 선이 나를 감고 있는 것이다. 고희를 넘기는 동안 그런 후회도 많이 해 보았지만 선뜻 그런 선을 풀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내가 나를 다스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또는 내가 나를 다스리는 현명함이 어쩌면 어리석음도 아니고 현명함도 아닌 따라 하기에 편승하여 예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직장을 퇴직하고 나서 도전이라는 말이 생소하기만 했던 단어이던 것이 요즘은 심심치 않게 내 심장에서 요동을 쳤다. 하고 싶은 일, 내 주변을 꼭꼭 묶어 놓았던 선을 풀고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에다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도전이라는 친구가 합세하여 때때로 나를 곤욕스럽게 하였다. 그 곤욕을 참지 못해 벌린 일이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 이것이 노후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목표라면 더 큰 후회를 가져 올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일을 벌이고 말았다. 아침 거실의 커튼을 걷어 젖히면 떠오르는 태양을 맞을 수 있고 저녁이면 노을을 보며 그 노을을 닮기를 기도하며 밤이 되면 남으로 난 베란다로 나가 별자리를 보며 안식할 수 있는 곳. 낮에는 텃밭에서 일하고 참참이 아내가 내어다 주는 간식도 즐기고, 좋은 이웃을 만나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곳, 그렇게 꿈꾸던 것을 해냈다.
내 지인들은 모두가 말렸다. 그 나이에 병원도 가까워야 하고, 교통도 편리해야 하고, 문화생활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지인과 친구들과 멀어져서 어떻게 생활하려고 그러느냐며 모두가 걱정을 해 주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기우였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착오는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꽁꽁 묶여 있으면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습관처럼 버텨왔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니 나이만큼 날실과 씨실로 촘촘히 선(線)으로 얽혀진 세상에서 지금도 살고 있고, 그 하나하나를 풀려면 지나온 세월만큼보다 더 많은 세월이 필요 할 것 같기는 하지만 선(線) 하나를 풀고 나니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이제 윤리라는 선(線)을 걷어낸다면 초원에서 태초의 아담과 이브처럼 뛰놀 수도 있으련만 아직 그 윤리의 선(線)까지는 걷어내기 어려울 터, 아직은 풀어내야 할 선(線)과 묶어두어야 할 선(線)을 잘 구별하는 일 그것이 잘 늙어가는 비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어떤 선 하나를 풀어내 버릴까?
* 충남 금산 출생, (전)대문초등학교 교장, 월간 ≪한울문학≫(2005) 등단, ‘한국농촌문학상’(2006) 수상, jhson1971@hanmail.net |
빛과 그림자
권 예 자
일정한 시기에 꼭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삼일절에는 유관순이, 개천절에는 환웅과 단군 그리고 웅녀가 생각난다. 광복절에는 일본이 생각난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사순 시기(四旬時期)마다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한다. 묵상하고 아파하며 믿음을 새롭게 다진다. 그에 덧붙여 삼 년을 제자로 지냈으면서도 스승이 십자가에 못 박힌 처절한 시간에, 두려워 달아나 버린 열 명의 제자와 십자가 아래 남았던 사도 요한을 기억한다. 그리고 유다를 생각한다.
유다. 배반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그 이름. 어렸을 적엔 그가 밉고 싫었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점점 그가 가엾어졌다. 덧붙여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일이 늘 찜찜했다. 작년 사순 무렵만 해도 유다의 배반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 성경 모임에서 수녀님의 인도로 묵상을 배우던 중에, 갑자기 유다가 끼어들었다.
유다와는 관계없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묵상 중이었다. 내가 뿌린 씨앗은 돌밭에 떨어져 말라 죽었을 형편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바람이 돌 틈새의 흙 속으로 밀어 넣어 싹을 틔우고 큰 나무로 자랐다. 거기 사과와 복숭아를 합쳐놓은 것 같은 물이 많은 열매가 달렸다. 하도 먹음직하여 한 개를 따서 십자가 위에서 목말라하시는 예수님께 드렸다. 하지만, 성자께서는 고개를 저으시며 말씀하셨다.
“얘야, 나는 괜찮다. 그 열매는 유다에게 주어라. 그가 더 목마를 테니” 이게 웬일인가? 묵상도 할 줄 모르는 내가 이런 장면을 보다니. 아마 환상인가 보았다. 이 일로 전에는 쉽게 잊혔던 생각 하나가 또 고개를 들었다. “유다는 혹시 예수님의 분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최후의 만찬에서도 그랬다. 예수님께서 제자 중 하나가 당신을 팔아넘길 것을 예고하자 제자들이 놀라 물었을 때,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그 사람이다.(요한 15, 26)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 27)
이상하지 않은가? 보통사람도 제자가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말릴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말리지 않으시고 자꾸 배반을 재촉하셨다. 어서 네 일을 하라며.
생각해보면 하느님께선 무슨 일을 하실 때 꼭 이면을 준비하셨다. 빛을 지으실 제 어둠도 만드시고, 선악과를 만드시며 따 먹을 사람을 예비하셨다. 생물이 태어날 때 죽음도 준비하셨다. 그런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구원사업을 맡기실 때 그 일을 성사시킬 유다는 없으면 안 될 인물이 아니었을까?
유다의 역할이 없었다면 하느님이 계획하신 일이 수포가 되는 건 뻔한 일이다. 누군가 배반을 해서 성자께서 잡혀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어찌 부활이 있었겠는가? 삼 년 동안 제자로 따라다니며 돈주머니를 관리한 이도 유다였다. 물론 그가 돈을 관리하면서 빼돌렸다는 대목도 나오지만, 성경은 예수님 사후에 쓴 것이니 배반자를 좋게 기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회사나 경리담당자는 사장의 분신 같은 사람이 한다. 해서 회사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결정적인 때에 그를 파멸로 몰아가는 사람도 경리책임자다.
이런 정황으로 나는 민망하게도 예수님과 유다는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황당한 생각을 해본다. 하느님께서 두 분을 함께 지으시어 구원사업을 맡기신 것은 아닐까 하는. 한 분은 영광을 또 한 분은 어둠을 책임질 사명을 주어서 말이다.
많은 분이 유다에 대해 표현하기를, 유다가 그렇게 큰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자결을 했으니 죄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다는 제 목숨을 버릴 정도로 뉘우쳤다. 그는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자 은돈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께 돌려주며 말했다.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하였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 (마태 27, 4) 그는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마태 27, 5)
내가 가슴 아프게 여기는 것은 유다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복음을 전파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가 죽을 정도로 깊게 뉘우쳤으면 하느님의 용서를 구했어야 한다. 그랬으면 원수도 사랑하라 하신 하느님은 분명히 용서하시고 새로운 중요한 일을 맡기시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는 죄지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성 들여 지어주신 생명을 제 것으로 알고 제 마음대로 단죄한 것이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교회의 반석이 된 제자 베드로는 달랐다. 성격이 단순하여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적도 있고 멋대로 판단했고, 여러 번 배반했다. 심지어 하룻저녁에 세 번을 배반하기도 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대사제의 집에서 사람들이 세 번째로 그에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하자,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하고 시치미를 떼었다. 순간 닭이 울었다. 그때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루카 22, 60-61)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사순절에는 예수님의 수난이 가장 아픈 대목이지만, 우리는 베드로의 배반 장면에서도 눈물을 흘리게 된다. 믿었던 제자의 나약한 모습에 몸을 돌려 아픈 눈으로 바라보시는 예수님, 그 자리에서 물러나 슬피 우는 베드로. 단순하여 흥분도 잘하고, 행동에 거침없는 베드로의 마음을 주님도 아시고, 우리도 안다. 그는 크고 작은 실수와 배반에도 늘 되돌아와 용서를 받고 더 단단한 제자로 거듭났다.
예수님과 유다는 앞으로도 사순 시기마다 성경에서 되살아나 우리에게 올 것이다. 한 분은 빛으로 다른 이는 그림자로.
그런데 오늘 부활 둘째 주간을 지나며, 내가 지금 유다를 동정할만한 여유로운 위치에 있기는 한 것인가? 혹여 예수님은 베드로가 배반하던 그때처럼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시지는 않으실까? 아마 그럴 것이다. 나는 그분의 가르침대로 잘 살아온 것도 아니고, 앞으로의 행동을 자신하기도 어려우니까.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그분께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한다. 유다처럼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베드로처럼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러 오고 싶다. 그림자가 아닌 빛 속에 머물기 위해……
* 대전 출생, 수필《창작수필》, 시《문학저널》로 등단, 시집『숲이 나를 보고』,『비밀일기장』, 수필집『내안의 피에타』, 『봄비, 꽃잠 깨다』등. 예술문화상, 창작수필 동인문학상, 옥로문학상 수상, mailto:bombi42@hanmail.net. |
등 굽은 할아버지
김 순 길
흐드러지게 만발한 꽃잎이 온 누리에 나부낀다. 마치 꽃동산을 방불케 한다. 때마침 미세먼지는 시샘이라도 하듯 극성을 부린다. 외출을 망설이게 하는 날씨이다. 그럼에도 나는 집을 나선다.
전철역으로 가다 보면 큰 길 건너 코너에 잡화상 슈퍼가 있다. 상점 맨 앞줄에는 주로 그날의 세일 물품이 진열되어 있어, 오고 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세일 품목이 많으니 지나치다 호기심이 발동한다. 혹여 값싼 물건이 있나 상점 안을 기웃거리게 된다. 우연히 들렸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물건도 사들고 나온다.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상점 한 모퉁이에서 종이 상자를 모으고 있는 한 할아버지를 보게 된다. 나이는 75세가량으로 깡마른 체구에 키는 가까스로 140㎝나 될까? 등은 마치 바가지 한 쪽을 엎어 놓은 듯 심하게 구부러졌다. 그래서 키가 더욱 작아진 모습이다.
그는 상점에서 나오는 네모난 빈 종이상자를 뜯어서 납작하게 발로 잘근잘근 밟는다. 상자 작업이 다 끝나면 옆에 세워 둔 리어카에 차곡차곡 싣는다. 그리고는 근처 상점을 배회하며 종이 상자를 또 거두어 온다. 리어카에 가로로 쌓고 세로로 쌓아 실을 틈이 없이 빽빽이 산더미만큼 쌓으면 리어카를 끌고 고물상을 향해 간다. 가득이나 약한 체구에 리어카를 간신히 끌고 기우뚱거리며 가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불안하다. “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지지나 않을까? 갑자기 거센 바람이 세게 몰아쳐 할아버지를 덮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어느 날, 시내에 갔다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난 오후였다. 날씨는 겨울의 끝자락인지라 냉기가 가시지 않고 을씨년스러웠다. 이 날도 상점 모퉁이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종이를 실은 리어카로 바람막이를 하고 손바닥만한 도시락을 펴고 점심을 먹고 있었다. 찬밥덩어리와 단무지 서너 쪽이 전부였다. “날씨가 추운 이런 날엔 따뜻한 밥이나 국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마저 할아버지에는 분에 넘치는 성찬일까? 노인은 국물이 있어야 밥이 잘 넘어 가는데……. 이것들을 챙기는 것은 사치스런 주문일까? 그나마 찬밥덩어리라도 연명하기 위해선 매일 같이 종이상자라도 모아 팔아야 되는가? 질긴 것이 목숨이라더니 생명의 연장이 이런 것일까?”하고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할아버지는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셨다고 한다. 늦둥이 외아들로 귀하게만 키웠더니 이제는 저 혼자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져 자란 듯 천방지축이란다. 오늘날 아들을 의젓한 사회인으로 키우기까지 노인에게는 많은 노고와 희생이 따랐을 것이다. 나는 그 아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부모님의 깡마른 피골을 한 번만이라도 쓰다듬어 봤는지? 궂은 일 힘든 일 가리지 않고 시달린 몸이 쇠약하여 신음할 때 한 번이라도 들려는 보았는지? 마치 바가지 한 쪽을 엎어 놓은 듯 구부러져 있는 아버지의 등이 가족을 위한 희생의 산물임을 알고나 있는지?”를.
잘 되라고 타이르는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집 나간 아들이 방황할 때, 당신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마음속의 시름은 뼛속까지 파고 들어 까만 재가 되었을 것이다. 노인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힘없이 처진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노인이 언젠가 이곳을 떠날 때, 자식은 뒤늦게 깨닫고 애통하며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불효로 남게 될 것이다. 목숨이 다 하는 그날까지 자녀에게 짐 안 지우고 어떻게 해서든지 당신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부모의 심정을 만분의 일이라도 헤아려 주었으면 한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스스로 휴지라도 주워 자립하고 있음에 만족할지도 모른다. 비록 그의 지갑은 비어있을지라도 영혼만은 충만하여 어느 누구보다 풍요로운 부자이리라. 그를 통해 의미 있는 노년의 삶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 대전여고 졸업, 수도여자사범대학 영문과 수료, (전)중등학교 교장, ≪상상의 힘≫(2012) 수필부문 신인상, kimsk3527@hanmail.net |
여행풍속도
김 기 태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다리가 후들거리니 가슴이 흔들릴 때 여행을 다니라고 권한다. 그러나 시간이 많은 사람은 돈이 없어 여행을 못 가고 돈이 많은 사람은 시간이 없어 여행을 못 가니 이것도 문제다.
첫 번째는 감성과 체력과의 승부이며 둘째는 시간과 돈의 싸움이었다. 제반 여건들이 충돌을 하면서 절충안으로 나온 것이 젊어서는 먼 곳으로 여행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가까운 곳으로 다녀오며, 노년에는 여행사가 안내하는 유적지 관광 여행보다 한 곳에 머무르며 관광과 휴식을 겸한 여행을 하라고 이야기를 한다.
해외여행은 이렇게 금전적으로 또는 신체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아 형편 따라 목적지와 여행사가 정해지지만 여행을 가기로 결정이 되면 한 동안 꿈같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여행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 크게는 배낭여행과 패키지여행으로 나눌 수가 있으며, 배낭여행은 자신이 많은 공부를 하여 계획을 수립하고 떠나야 한다. 패키지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여행사마다 경비 차이가 많이 난다. 유럽의 7박 9일의 경우 제일 싼 것이 방송을 통한 홈쇼핑에서 모집하는 것이고, 다음이 중저가 여행 경비를 걸고 모집하는 경우인데 홈 쇼핑과는 여행 경비가 백만 원 가까이 차이가 있다. 반면 여유 있는 여행을 생각하면 고가의 상품을 선택할 수 있는데 중저가보다 100여만 원의 차이가 난다. 이 세 종류의 스케줄을 보고 비행기와 숙박 그리고 중요한 먹거리를 비교하고 선택해야 하는데, 비교 검토하여 진정한 가격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확인하고 결정을 해야 한다. 대부분 비행기와 호텔 수준, 그리고 현지에서의 이동 수단이다. 젊었을 때는 가격이 싼 쪽을 선택해도 좋을 것 같고, 나이 들어 여유가 있다면 고액 상품을 선택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 스케줄을 보고 인터넷을 통해 그 지역의 역사와 볼거리 그리고 먹거리를 사전에 파악하고, 기후를 확인하여 입고 갈 의상과 비상약 등 준비물을 챙기며 여행의 기대감에 빠져든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해외여행을 다녀와 대중화가 되었다고 본다. 이로 인해 다른 나라와 비교하며 우리나라의 기후가 얼마나 좋고,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는 지하수가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정부가 부패했다고 말들이 많지만 우리나라 지도자의 역량과 국민들의 노력으로 우리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피부로 느끼게 하는 계기도 된다. 지금은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 사람들이 가이드의 깃발 따라 종종 걸음으로 유적지를 돌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등산모에 조끼를 입고 등산배낭을 매고 있는 모습이 한국 사람들이라는 것을 어느 나라를 가도 알고 있다. 또한 관광지마다 한글로 된 여행안내서가 있고 안내방송도 한국어로 방송된다. 상점의 상호까지 한글로 되어 있으니 우리의 국력을 세삼 느끼게 된다.
센 강(Seine River)의 유람선에도, 융플라우(jungfrau)를 올라가는 산악열차 안에서도 한국어 안내 방송이 나온다, 처음 그곳에서 우리말로 나오는 안내방송을 듣고 나면 한동안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었다. 이제는 스페인의 골목 상점 간판에도, 2026년 준공 예정인 '성가족 성당'에 각국 언어로 새긴 주기도문 중에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문구가 한글로 표기 되어 있었다. 한국인이 그만큼 많이 찾아온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세계가 우리를 반긴다는 것을 입증하는 모습이다.
우리나라의 해외여행이 정부로부터 국민들에게 허락이 내린 것은 88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일이라고 기억이 된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일이다. 지금은 엄청난 수의 관광객이 출국을 하고 또 들어온다. 이제는 정부도 관광 사업에 매력을 느껴 적극적인 정부시책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얼마 전 중국관광객 수천 명이 한국에 들어와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뉴스시간에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행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일이며, 그들의 생활 속에 젖어 보거나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본질을 보고 내가 살아 온 삶을 생각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삶을 한번쯤 조명해보는 계기로 삼는 일이라고 본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한때 미국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아느냐의 'Know How' 라고 말했다면, 일본 사람들은 왜? 아느냐의 Know Why였는데, 우리는 무엇을 아느냐? 의 Know What 이었다는 말로 국민성을 표현하기도 했었는데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나는 몇 개국을 여행했다.”라는 자랑으로 여행을 대변했다. “그 곳에는 우리보다 잘 된 것이 무엇이며 우리보다 못 한 것이 무엇이다.” 라는 생각은 아예 안중에 없었다. 여행은 그런 느낌과 내 삶과 비교해 보는 일인데 다녀왔다는 것으로 목표가 되는 어리석음이 있었다. 다니는 직장이나 국비지원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차 안에서도 호텔에서도 술 마시는 것으로 일과를 마무리했다. 술 마시러 여행 온 사람으로 여겨져 씁쓸함마저 들게 되었다. 여행사에서 주관하는 패키지여행에도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거의 대부분이 유적지 견학이다. 그러다 보니 오전에 7시간을 버스를 타고 가서 한 곳을 보고, 점심을 먹고, 또 5시간을 달려가 한 곳을 보고 파김치가 되어 숙소로 들어간다. 외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가 역사를 전공한 걸로 알고 있을 것 같다. 아니 역사를 좋아하는 민족으로 각인시킬 것 같다. 매일 차를 타고 오랜 시간 달리다 보니 버스를 타면 조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여행을 잠자러 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체력적으로도 극기 훈련을 하러온 것 같은 분위기이다. 여행이 끝나면 시차 적응에 여독으로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니 이 부분도 생각해 볼 일이다.
최근에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 엄마와 둘이서 장거리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나이가 어려 외국을 보는 눈이 아직 정립되지 안 했을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기념일에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도 여행을 하다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인 것 같다.
외국의 나이 드신 분들의 여행하는 모습을 보면 부부가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남편은 돈 벌러 회사로 보내고 여친끼리 그룹을 만들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다반사이다. 한국 여인들은 기가 세도 아주 많이 세다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은 돈 벌게 하고 속 편히 여자들끼리 여행 오는 것은 우리만의 풍속도였다.
여행을 통해서 잃어버린 기운을 충전시키고 새로운 활력을 얻어 내 삶의 활력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 생각해 본다.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이런 풍속도를 보면서 한번쯤은 여행에 대하여 생각해 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큰돈을 들여 모처럼 떠나는 여행이 가정의 행복에 도움이 되고 삶을 충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느 노친네의 삶
살아가면서 얻은 경험들이 모여 축척되고, 축척된 힘에 의해서 가치관이 형성된다. 사람마다 형성된 가치관에 의해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제 각각 다르니 그것이 그 사람의 색깔이고 매력이 되는 것이다.
돈을 벌고 명예를 쫒아가는 것이 생의 목표일 때는 앞 얼굴만 잘 관리해도 돋보이는 사람으로 살 수 있었지만, 그런 조건들이 애들 달래는 과자부스러기처럼 생각되는 나이가 되면 마음을 비우고 올곧게 살아가는 뒷모습이 좋아 보일 때도 있다.
때로는 돈과 명예가 예수님과 부처님의 마음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법정 스님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남자의 과년(瓜年)인 64세가 지나고 보면 그런 마음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도 생긴다.
내 주변에 그런 노친네가 하나 있다. 험한 곳에서 힘들게 살며 견뎌왔지만 연못 속에서 자란 연꽃처럼 올곧은 마음을 보여주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의 행동에서 기인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실상 그렇지는 않다. 그가 평생을 직업으로 택한 곳에서는 경험을 중시하여 그가 일한 경험들이 퇴직 후 경험을 필요로 하는 같은 계통의 회사에 이력을 빌려주면 비상주하면서도 연봉이 나온다. 적게는 부부가 일 년에 한번은 가까운 이웃 나라에 여행을 다녀 올 수도 있는 금액이고, 많게는 자신이 일 년 동안 쓸 용돈으로 충분한 금액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제도상의 문제이지만,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그 유혹에서 그는 자존심을 지키며 살고 있다.
글을 쓰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등단이라는 길을 걷고 있다. 등단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등단하는 길이 많이 개방되어 있다. 등단을 하게 되면 끼리끼리 패거리가 되어 뭉친다. 대부분 등단하고 부터는 글공부에 충실하기 보다는 모임에 충실하고 이벤트에 강하며 글 쓰는 이로 알리는데 주안점을 두는 것 같다.
힘 있는 사람 앞에 줄을 서고 싶어 하고, 상 받을 일이 생기면 썩은 동아줄이라도 연결시켜 이력에 한 칸을 채우고 싶어 한다. 어디 직함이라도 하나 있는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자존심을 저당 잡힌다. 때로는 이런 일로 장사를 하는 사람도 보인다. 그래서 그는 등단이란 길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글은 자기의 생각과 가치관을 글로 써 보여주며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을 가치로 여긴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으로 쓴 글 때문에 원고료를 받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또 책을 써 서점에 내 놓고 돈을 벌 생각도 안 하는 것 같다. 책을 내는 날 지인들 불러놓고 술 한 잔, 밥 한 그릇으로 대접하며 책을 안겨 주고 싶어 한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우표까지 부쳐 보내준다. 책을 받고 고맙다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그는 자기 생각을 전하고 싶어 한다. 물론 그가 쓴 글이 좋아서 어디서 상을 준다 해도 상을 받지 않을 것이다. 아마 지금 그 나이에 국가에서 훈장을 준다 해도 사양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답게 살게 해준 자연에 대한 보답이고, 내가 자연을 활용하며 윤기 있게 살아온 자연에 대한 임대료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옛날 선비들이 과년(瓜年)을 맞이하면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든가 책을 저술하는 것으로 남은 생을 활용했던 모습을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과년이 지나면 동창회 총무나 회장직도 안 한다고 마음먹어 과년이 오기 전에 모든 직책을 미리 수행하고 지금은 그 약속을 지켜가고 있다. 모임 단체, 학교 관련 동창회, 종친회 등 어떤 형태에서든 직함이 없다. 자유인(自有人)에 충실한 것이다. 자유인이 아니고 자유인으로 살아가려 하는 것이다. 즉 내 삶에 내가 주인이 되어 내가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그동안 나를 나답게 살게 해 준 분들에게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지금까지 잘 살게 해준 사회와 국가에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도 생각해 본다. 특히 나이가 들면 외로움도 함께 찾아오니 혼자 있는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는 방법에 신경을 쓰기도 한다. 손자 손녀들에게 잘 나가는 할아버지로 보여주기 보다는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 한다. 남은 삶을 보내면서 내가 가진 재주로 흔적을 남겨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이런 마음에 매료되어 그 노친네는 일어날 때는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가장으로 사회의 일원으로 자기 몫을 다하고 황혼의 문턱을 넘어가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는 혼자 있을 때마다 조오현 스님의 「마음 하나」를 되씹으며 마음을 다스린다.
그 옛날 천하 장수가
천하를 다 들었다 놓아도
한 티끌 겨자씨보다
어쩌면 더 작은
그 마음 하나는 끝내
들지도 못했다더라.
이런 노친네가 주변에 살고 있어 나는 그를 좋아한다.
인생은 여행이다
모처럼 아내와 여행을 다녀왔다.
살아오며 주식으로 돈 버는데 흥미가 없었는데 작년 말에 주식에 빠져있는 친구가 신약을 개발한 어느 제약회사 주식을 관심 있게 보라고 해서 생각 없이 통장에 있는 비상금 400만원으로 주식을 샀다. 그런데 이 주식이 6개월 만에 620만원의 이익을 냈다. 퇴직 후 10년 동안 돈을 벌어보지 못한 나에게는 로또 복권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돈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돈이 좀 부족했지만 스페인과 포루투갈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스페인에는 평소 내가 좋아하던 가우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우디를 찾아가는데 13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는 길이며 하루 평균 만 보 이상 걸어야 하는 강행군이니 체력이 필요했다. 올 봄에 넘어져서 발목이 골절되어 2개월 동안 고생한 아내가 걱정이 되었다. 치료 후에도 조금만 걸으면 발목이 부어오르기 때문이다. 한 달 동안 가까운 동산에 오르며 체력단련을 한 후 큰 용기를 내서 떠나기로 결정한 일이다.
스페인의 모양새는 우리가 주먹을 쥔 모습이기도 하고 하지감자 모습 같기도 했다. 그곳에는 땅도 넓고 기후도 좋았다. 6월 초인데 햇볕에 노출 될 때는 따가웠지만 그늘로 들어가면 시원했다. 땅만 넓은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다닌 나라 중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제일 넓은 대평원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쪽 사람들은 여유가 있어 보인다. 검소하고 화려하지도 않으며 실용주의 삶이 인상적이었다.
우리와의 시차가 7시간이고 아침에 해가 뜨는 시간도 6시 반경이며 저녁에 해지는 것도 9시 40분이 지나야 해가 넘어가니, 여행하는 9일 내내 적응하기가 참 어려웠다.
스페인은 가톨릭이 국교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보이는 것이 성당이다. 한 때 많은 기간을 아랍의 지배를 받아 그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가톨릭의 성지임에 틀림이 없었다. 평소에 가우디를 좋아 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의 흔적을 보게 된 것이 나에게는 큰 보람이었다.
가우디의 삶은 예수님과 건축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다닌 학교 교장이 가우디에게 졸업장을 주면서 "내가 천재에게 건축기술자 자격증을 주는지 바보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라고 했단다. 그렇게 그의 건축에 대한 상상력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던가 보다. 옛 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건축 양식은 직선의 미를 강조했다. 이것은 사용하기 편한 실용주의적 생각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가우디는 자연에서 보는 곡선의 미를 추구하며 표현한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교외에 곤충의 뚜껑을 연상하는 집들이 가우디 건축 양식과 에어로 콘크리트를 품어 붙이는 숏크리트 공법과 병행하여 지은 가우디 방식인 것이다.
가우디는 한평생 결혼도 안하고 집 짓는 일에 매진하였다. 일을 해서 번 돈은 몽땅 라다파밀리아 성당을 짓는 곳에 투자를 했다. 가우디가 74세에 전차 사고로 사망했는데. 당시 입은 옷이 너무 누추하여 세상 사람들의 관심에 벗어나 있었다.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신원을 확인해 보니 그가 바로 가우디였다. 가우디가 만든 건축물 중에는 바르셀로나에 카사밀라 건물이 있고 구웰공원과 지금도 짓고 있는 사그라다파밀리아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성가족 성당이라고도 부르며, 바르셀로나의 한 출판업자가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성당을 보고 감명을 받아 돌아와 바르셀로나에도 이와 버금가는 성당을 짓자는 시민운동을 펴 성금을 모아 1882년부터 짓기 시작하였다. 그때 가우디가 31세였는데 죽는 날까지 43년간 이 공사에 남은 인생을 건 것이다. 그가 죽은 지 90년 동안 그의 정신을 계승하며 짓고 있는데 이제 완공하기까지 10년이면 되는 것 같다.
석조건물이기 때문에 많은 돈이 필요하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이곳에서는 공사대금을 성금으로 충당을 했는데, 우리나라처럼 다니는 성당이나 교회 신자의 헌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규모로 헌금을 모았다고 한다. 그 돈으로 공사를 하다 돈이 떨어지면 공사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 성당의 내부를 부분 개방하면서 입장료 수입이 년 1천억 정도가 들어와 지금은 공사를 계획적으로 시행할 수가 있으며 공사 장비도 현대화 되어 공기를 단축하여 가우디가 서거한 지 100주년이 되는 2026년에 완공 목표로 삼고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총 공사기간을 200년 목표로 하였는데 136년이 걸리는 셈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는 총 3개의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가 있는데, 각각 ‘예수 탄생’, ‘예수 수난’, ‘예수 영광’을 주제로 설계되었고, 이 중 ‘예수 탄생’의 파사드는 가우디가 생전에 직접 완성시킨 것이다. ‘예수 수난’ 파사드는 1976년에 완공되었고, 마지막 남은 ‘예수 영광’ 파사드는 이제 착공한 것이다. 3개의 파사드 위에는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12개의 종탑이 세워지고, 중앙에는 예수를 상징하는 거대한 탑이 세워질 계획인데, 현재까지는 8개의 종탑만 완공되었다. 내부는 마치 숲 속에 와 있는 것처럼 나무와 꽃들을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기존의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아름답게 빛난다. 내부가 다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미사를 여는 데는 지장이 없는 수준이 되어 가고 있다.
이곳의 내부을 보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첫째 구조물의 중심을 잡고 있는 돌로 된 기둥의 모습이었다. 기둥이 3단계로 이어지는데 밑 부분에서 하나의 기둥으로 올라가다 세 개의 기둥으로 벌어지더니 또 거기서 한 개의 기둥에서 3개의 기둥으로 나눠지면서 지붕의 하중을 분산하여 받아주고 있었다. 기둥은 지붕의 하중을 수직으로 받는다는 정설을 거부하는 꼴이 된다. 우리가 흔히 보는 나무 가지가 뻗어가는 모습과 같았다. 또 하나는 사이드 기둥이 수직으로 서 있지 않고 중앙으로 좀 뉘었다는 점이 가우디 건축물의 특징이었다.
또 하나는 오랜 기간 성당을 짓다 보니, 공사에 참여하는 기술자들의 변동이 있었으며 기능공도 변하기 마련이었다. 성당 중간쯤에 조각된 천사의 얼굴 모습이 다른 곳에 등장하는 인물과 달리 표현이 되었다 그 천사의 모습이 동양인을 닮은 것이다. 이 시기에 참여한 조각가가 일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동양인의 얼굴로 조각하는 것을 인정한 것도 조그만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문 옆에는 아직 완성품인 아닌 모조 조각 작품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구절 중 간략하게 한 소절을 각국 언어로 새겨 넣은 것이었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니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것이 한글로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 글씨 모양이 좀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는 많은 글씨체가 있는데 하필 초등학교 학생 글씨 같은 글씨체로 새겼는지 좀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성당 전면 중앙에 예수가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땅에 엎드린 모습이 있는데, 그 모습을 높은 위치에서 바라보는 가우디의 모습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또한 준공 후 성당을 운영하며 이곳에서 유명한 성직자가 돌아가시면 지하에 시신이 안치되는데 이미 준공이 되기 전에 예수님을 좋아했던 가우디가 건축을 했다는 이유로 바티칸의 승인을 받아 제일 먼저 가우디 시신이 그곳에 안치 되는 개방된 식견을 볼 수 있어 여행의 큰 소득이 있었다.
가우디 건축의 창작성과 독창성에 놀라움을 느끼고 유네스코 세계문회유산에 가우디 작품이 8개나 선정 됐다는 사실이 그의 위대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그의 행적이 성공도 하고 실패도 있었지만 불굴의 정신으로 자기가 추구하는 분야를 밀고 나갔다는데 높이 평가할 부분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금까지 지은 성당 중에서 가장 예술적 부분에서 우위를 차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 다른 환경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나 하는 것을 확인해 보는 일이다. 그것을 보기 위해 긴 시간 고생을 하며 찾아가는 것인데 이번 여행도 나에게는 소중한 여행이었다. 체력적으로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하나라도 더 기억 속에 담아 보려고 졸음과 싸움하며 눈을 부릅뜨고 돌아 다녔다. 다음에는 어느 곳으로 가서 또 공부를 해 볼까 여행지를 검토해봐야겠다.
* 충남 서천 판교 출생, 글지이, 부름새, 서각인, (전)계룡건설 토목본부장, 온동마을 촌장, 저서 『삶의 시방서』.『소똥 위에 홍시』.『살아보니 어뗘』,『그려』등. blog.daum.net/ondong |
잊혀진 백제, 깨어난 왕국을 찾아서
강 명 수
2010년 사찰의 가람 같은 고요한 땅에 단지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백제 문화권, 새 역사의 시작이었다. 점점이 들어선 ‘백제 문화 단지’라는 이 하드웨어의 위용은 천년의 업화를 누른 옥색 새벽 같은 야심찬 빛이었다. 문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혼돈과 시름을 딛고 천년 망각의 막을 내리고 사비성이 꽃 새벽처럼 부활한 것이었다.
예전에 간혹 부여, 공주 등을 여행하면서, 과거 백제인은 타 국민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은 탁월한 문화와 지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그다지 욕심 없이 살아갔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러기에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 천삼백여 년이 지난 후에도 지금까지 이렇게 조촐한 동네가 되었는지 무척 안타까웠다. 백제 사람들에게 특별한 욕망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평소 이곳을 여행하면서 고대 백제 사람들의 성향은 온순하고 내향적이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2015년 공주의 무령왕릉, 공산성으로 시작된 이 역사는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 능산리 고분군, 부소산성에 이어 익산의 미륵탑사지 까지 백제 역사유적지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나는 도시와 대륙과 산을 지나며 기행서를 쓰는 여행가로서, 잃어버린 왕국을 이제 막 깨운 변화를 조명하려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혹자는 ‘신라’ 하면 통일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고, ‘고구려’ 하면 광개토대왕의 용맹이 떠오른다고 한다. 그러나 ‘백제’ 하면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최후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떠오른 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허망한 소리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세상의 모든 제국들의 멸망사이다.
고구려의 용맹? 그러나 백제의 의자왕처럼 의지적인 인물이 어디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도 맹주였다. 한때 신라의 중앙부까지 침투하여 수도였던 경주까지 함락을 꿈꾸었던 야심찬 군주였다.
논산, 황산벌의 계백
피난의 애환을 노래한 두보의 시「춘망」을 떠올리며 떠난 백제의 길, 제일 먼저 도달한 논산시 부적면 탑정호 근처에 ‘백제 군사 박물관’이 위엄 있게 세워져 있다. 이곳은 2005년에 개관되었는데, 계백의 충절과 예학과 전통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유물과 기록이 전시된 박물관이다.
제 1전시관은 백제군의 군사 활동을 시대별로 정리하고 백제의 성곽을 모형화 하여 입체 전시하였고, 제 2전시관은 백제군의 행렬모형과 실물크기의 휘장, 무기, 복식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었다. 또한, 계백의 영상과 기록도 볼 수 있어 장군의 충절과 호국정신을 되새길 수 있었다.
호곡공원은 수천만 원을 호가할 듯한 조선 소나무들이 산재 된 산림이다. 이만한 정경의 공원을 가진 유적지도 드물 정도로 논산시에서 정성을 들여 만든 회심의 장소이다.
이 날도 계백의 혼이 초대한 수백 명의 아이들이 공원 조경의 풍경을 더욱 완벽하게 형성해준다. 계백의 묘와 함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충장사에 있는 계백의 표준영정이 이채롭다. 인근 충혼 공원에 펼쳐진 백제 영걸들의 넋이 떠도는 듯했다.
660년 7월 9일. 단 하루 동안에 벌어진 전투 황산벌. 삼국의 운명은 물론, 동아시아 전체의 구도가 바뀌는 절대 절명의 전투. 그러기에 단순한 큰 전쟁의 의미를 넘어 후세에 각인이 된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요동을 치고 있었다. 막강했던 당은 고구려와의 요동 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급기야 신라의 제안에 따라, 先 백제 멸망, 後 고구려 멸망이라는 야심을 가지고 드디어 660년, 13여 만의 대군을 이끌고 지금의 인천 부근인 덕문도에 접근하였다. 무려 1천㎞나 되는 바닷길을 건너온 당나라 군사는 금강하류 기벌포에 상륙하였고, 육상에서는 신라군이 남천정에서 탄현 방향으로 진격하는 양동작전을 벌였다.
성충과 흥수 같은 선견지명이 있는 백제 충신들이 진언한 해안진지나, 사비성 이중 방어선 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라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밀려오고 있었다. 황산벌은 신라군이 반드시 그 곳을 돌파해야 할 요충지였기에 양측 다 운명의 대결 장소였다. 일본 전국시대의 패권을 겨룬 역사적 전투로 회자되는 ‘세끼가하라 전투’에 버금가는 결투라고 볼 수도 있겠다. 황산벌 전투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재편을 가르는 그 이상의 중력을 가진 전투였다. 백제 멸망 후 고구려의 멸망도 곧 이어졌고, 당과 신라의 세력싸움이 벌어 진 것도, 바로 이 전투에서의 승패가 낳은 결과들이다.
넓은 황산벌 벌판에서, 나는 계백이 서 있었을 한 편의 진지를 바라보았다. 네 번의 승전 후 이제 다섯 번째 부딪치는 전투에서, 장군은 벌판 건너 울창한 수림에 드리운 자신의 죽음의 그림자를 애써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하들의 호곡소리와 적군의 팔마(哵馬)소리 따위는 듣지도 않았으며 평정심을 유지했을 것이다. 어쩌면 난세에 호국할 일체의 힘을 상실했을 때 갖는 도덕 같은 것은, 그에게는 이미 사치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폐부를 찌르는 예리한 시선으로 신라군을 응시할 뿐이었다. 계백에게는 그 자신이 바로 황산벌 전투였고, 이 벌판보다 몇 곱절 큰 위대한 군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불같은 의기조차도 사랑하는 부하들의 노호(怒號)에 묻혀 사라질 즈음, 죽음을 택한 백제군 결사대들의 상쾌한 도박은 나락을 향하고 있었다.
부여, 백제 금동대향로
구 부여 국립박물관 건물은 김수근이라는 당대 최고의 천재 건축가의 작품이지만, 페인트가 벗겨진 약간은 위축된 모습으로 현재 문화재 사업소 사무실로 쓰인다. 미학적으로 멋진 예술품으로 인정받는 이 근대 건축물은 백제의 후손들에게 그대로 선사할 가치가 있다.
개인적 견해로는, 현 박물관 못지않게 이 건물은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아주 훌륭한 박물관의 전형으로 생각한다. 부소산 언저리의 녹음 속에 있는 지리적 배치와 주변 풍치의 조화도 기가 막힌다. 혹여, 관리부족으로 이 건축물이 훼손되는 결과가 온다면, 이 예술가와 건축물을 사랑하는 예인들에게 서운함을 서리게 만드는 행위이다. 새 단장과 보살핌이 이어진다면 부여의 새로운 근대명물이 될 것을 확신해본다.
90여 년 가까운 긴 세월동안 이어진 전통의 부여국립 박물관에서, 나는 만여 소장유물 중 백제 금동대향로를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바라보았다. 마치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수십만 점의 소장품 중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최고의 상징이 되듯, 여기에서는 가장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하게 보관된 것이 국보 제 287호로 지정된 대향로이다. 불교의 사상적 복합성까지 깃들인 백제 최고의 걸작이다.
국보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서울중앙 박물관에서 상시로 전시되고 있다. 수도하는 자세로, 신비스러운 미소로 중생에게 무언가를 일깨워주고 있는 이 같은 불상이 부여 같은 고도에 소장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에 근무자에게 몇몇 질문도 해보았다. 은은한 조명 아래 비추어진 이 불상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상상하며 지방 박물관에서는 볼 수 없는 아쉬움 이 있어 애매한 투정도 해보았다. 지방 박물관을 다니다 보면 이렇게 모든 것이 수도권 중심의 행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불상에서 부처의 염원을 역력히 느껴보고 싶은 나그네의 느지막한 미련이다.
은거의 땅, 고요한 제국을 찾아왔다
사람들은 흙을 밟아 보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 부소산은 흙으로 된 육산이기에 사람들은 이 길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속세의 모든 것을 벗어나 무언가를 향해 갈구하는 구도의 길,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찾는다면, 그것은 부소산 길이다. 부소산이 바로 그 작은 길을 품고 있다.
전혀 광활하지 않으며 미지의 길이며 신비스러움이 있다. 백마강에 허리를 휘어 감겨 있는 부소는 요염하기 보다는 정숙한 여체의 산이다. 충절의 의인을 모신 삼충사에 들어서며 그들의 영정에 눈을 돌렸다.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절망 속에 성충은 수많은 상념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집권 초기에는 그렇게 의기가 강했던 주군이었고 비주류였던 자신들을 파격적으로 등용시킨 영민하고 고마웠던 주군. 그러나 이제 시대를 못 내다본 임금을 원망하며, 흥수는 서 있을 인내조차 없는 조국의 운명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물을 깊이 보는 전략가, 안과 밖, 좌우를 통찰할 줄 아는 성충과 흥수 같은 가신이 몇 명만 더 있었어도 그 짧은 기간 속에 사라지는 황망한 멸망은 결코 없었으리라.
이제 막 영일루, 군창지, 반월루, 사자루를 거쳐 고란사에 다다랐다. 그렇게 2시간여를 천천히, 지극히 천천히 돌았다.
과거 삼천 궁녀들이 평화로운 시대, 이러한 땅을 밟고 거닐며 내쉬는 호흡은 얼마나 태연스러운 안정이었을까. 그리고 왕의 광휘는 눈부시었을 것이고 그들은 항상 왕을 갈망하였으리라.
고란사에서 목을 축인 후 좁은 길을 내려가 낙화암 벼랑에 이르렀는데, 너무 큰 것만 보아온 현대인들에게는 작은 강, 작은 벼랑이다. 이 벼랑에서 왕국은 지난 700년 동안 그 많은 것들을 사유했지만, 그 날 그 귀한 이들을 잃었다. 그녀들은 저승에서 왕과의 종용한 시간을 보낼 것을 기원하면서 육체와 정신을 강물에 던졌을 것이다.
내 머릿속은 백제의 비운과 방종의 상징인 삼천궁녀의 숫자, 그 실체의 허구를 조정하기보다, 자유를 잃은 삶의 방식을 절망하며, 강 속에 몸을 던져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는 신선한
사연만을 생각했다. 낙화암에서 흐르는 백마강을 보자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낙화암, 백마강에 온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자 감성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 중에는 백제의 아이콘인 계백과 삼천궁녀 그리고 의자왕에게 특별한 연민이 솟아났다.
햇살이 눈부시고 고란초 향기가 허공에 퍼지는 벼랑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꽃들의 메아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것은 그녀들이 후세인에게 각인된 방탕과 욕정의 아이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삼천 궁녀들은 낙화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백제를 굴복시킬 수가 없다며 왕국의 예찬을 본능적으로 발휘 한 것이리라.
정림사지, 익산 미륵사지 석탑
부처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완성시키는 것은 ‘불상’이고 불법의 세계를 현실 세계에 증거 하는 건축물은 ‘사찰’이다. 그리고 은은히 생명을 다해 바치는 절실한 희구는 ‘탑’으로 창조되었다.
정림사지와 금마의 미륵사 탑, 이 두 탑은 백제만이 가진 미와 기술로 그 정형을 보여주며 그 탑이 지닌 염원을 역력히 느끼게 하는 건축물이다. 백제 문화단지의 사비성 옆에 세워진 목조탑의 기술은 백제인 아비지로 하여금 신라의 황룡사 9층탑을 구축하는 대담함까지 구현한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새로운 창조물인 석탑으로 발전하는 혁신을 이룬다. 눈이 내릴 때나 비가 올 때, 춘추의 계절마다 나는 이곳을 돌아보며 균형 잡힌 정림사지의 감각적인 특색을 지켜보았다. 에누리 없이 소쇄원의 미에 버금 갈 정도로 매력적인 것은 여전히 연약하고 날씬한 오층 석탑이 정 중앙에 서 있기 때문이다.
흙의 나라에서 목조, 그리고 석탑으로, 돌 한 덩어리 까지 세세하게 추상하고 발휘된 위대한 백제의 뛰어난 건축이 과연 지금까지 이어지는 지, 지난겨울 찾아간 익산의 미륵사지 복원장소에서 백제후예들이 징으로 조각하는 소리가 자못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지나간 1천여의 세월은 생략되었지만, 그들은 무거운 돌 한 덩어리를 척척 쌓아올리고 난이도 높은 기법도 사용 할 것이며, 그리하여 세련된 미륵탑을 복원하여 지난 날 백제탑의 황금시대를 열어 나갈 것이다.
다시 논산 길과 접경인 부여 인근 능산리 고분을 찾아 왕릉을 돌아보았다.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한 사비 왕족들의 능과 부여의 관문 로터리에 세워진 백제 최대 국보인 금동대향로도 바로 능산리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이미 정지 작업이 끝난 능산리에 사지가 제대로 조성된다면 정림사지 이상으로 부여의 큰 자원이 될 것이다. 빠른 시일 내에 예산이 확보되어 사지가 조성되기를 기원해본다.
유치원생들이 제주 오름같이 부드러운 왕릉 능선을 끼고 돌아다닌다. 왕릉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이 지역 아이들이 마냥 행복해 보인다. 의자왕의 비석과 북망산에서 퍼온 흙이 묻힌 가묘와 단이 사지정지를 하고 있는 전시관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의자왕은 싸움에 강했다. 그러나 싸움은 어려운 것. 그의 인생도 어려웠다. 해동증자라 할 만큼 효자였던 그는 37세의 나이로 늦게 태자로 책봉된 후, 641년에 왕으로 즉위했으니 이때 나이가 46세였다. 이렇게 늦게 왕위에 오른 것을 보면, 즉위하기까지 얼마나 큰 장애와 근심이 놓여 있었을 지를 짐작하게 된다. 나는 공주에서 부여, 논산 땅을 여행하면서 그가 비범하지는 않을지언정, 그리 범속한 사람으로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세계는 그리 평화가 많지 않았다. 즉위 초기, 승전 후에 갖는 자만감과 허무감에 빠져 국가 관리의 맹점도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건강하지 않은 운명이 어디선가 자신의 발목을 잡고 백제를 잡고 있었다. 즉위 15년이 지난 후, 이미 이순을 넘긴 그에게 야성은 이미 몸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그가 삼천궁녀를 모두 품에 안고 있을 때, 사물은 한 쪽만 보였으며, 그 때 백제 고원의 해는 기울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 땅, 죽음을 앞두며, 패망이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그는 망상 하였을까? 영겁의 세월 속에 핀 벚꽃망울을 보며,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비탄에 사로잡혔을까? 타국에서의 임종 직전, 그는 분명히 조국의 파란 물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때, 그가 궁남지를 떠올리던 바로 그 순간, 수면 저 쪽, 사비성 남쪽 푸른 물 내음이 물씬하게 풍겨오며 사랑했던 이들의 아련한 모습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연꽃이 보석처럼 띄어진 연못 둘레를 돌고 있는 젊은 무왕 서동왕자의 손을 꼭 잡은 선화공주도 있었을 것이다.
* 대전 출생, <충청신문> 논설위원, 기행수필집 고마코의 설국에서 블랑세의 뉴올리언즈까지(2009), kms19522001@yahoo.co.kr |
텃밭의 추억
이 명 년
“어머니! 밭 때문에 동네아주머니 두 분이 싸우셔요!”
“무슨 밭?”
“우리 집 공사장 옆에 있는 땅을 서로 먼저 차지하겠다고 난리예요. 다툼이 커질 것 같아 겁이 나요!”
“그래, 내가 가서 말 할 테니, 너희는 가만히 있거라.”
아파트 베란다에서, 스티로폼 박스에 몇 포기의 상추씨를 뿌린다. 그 때마다 “한 뼘의 텃밭이라도 있음 얼마나 좋을까!”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나는 농촌에서 태어났고, 농촌에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늘 눈에 익숙한 풍경들이 있다. 집집마다 마당 한쪽 울타리 주변에 밭을 몇이랑 일구어 양념 채소를 골고루 가꾸는 모습들이다.
사람들은 파, 마늘, 부추, 당근, 상추, 쑥갓, 오이. 가지 등등을 심어 가꾼다. 채소가 싱싱하니, 필요 할 때마다 바로 채취해서 밥상에 올릴 수가 있다. 집에 냉장고가 없어도 그리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먹을거리들이다. 예전에, 우리 이웃들은 이 싱싱한 야채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생활해왔다. 주는 재미나 받는 재미의 즐거움은 나눔을 경험한 사람만이 갖는 기쁨이다. 현대인들이 주고받는 단순한 선물꾸러미들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웃과 공유했던 따뜻한 정은 도시의 메마른 삶 속에서 가끔은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인지 텃밭의 존재도 많은 노년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가꾸고 싶은 대상일 것으로 보인다.
아들 내외가 두어 해 동안, 취미로 주말농장을 빌려 야채를 가꾸어 왔다. 부부는 힘들다고 하지 않고 꽤 재미있어 했다. 그 즐거움은, 추억 속에 머물며 여전히 주위를 맴돌고 있는 텃밭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져 주택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그곳에서 집 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마침 양 옆에 아직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공유지가 있었다. 그 공유지에 건물이 들어 설 때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걸릴 듯싶었다. 빈 땅이니 얼마동안은 텃밭으로 이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잡초가 너무 많아 밭으로 사용하기까지 많은 일손이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비가 오면 물이 여기저기 고이는 것도 문제였다. 그래도 마음 다져먹고 옆 건물이 들어 올 때까지 잘 이용해보자는 생각으로 세 이랑의 밭을 일구었다. 물이 고일 수 있는 웅덩이도 가운데쯤에 하나를 팠다. 물웅덩이에는 모기를 예방하기 위해 미꾸라지도 구입해서 넣었다. “모기 알을 미꾸라지가 먹이로 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우리가 밭을 일구고 야채를 심자, 중년의 한 남자가 와서 자기도 고구마를 심고 싶다고 말한다. 문제는 빈 공지가 아닌 공사 중인 우리 집터 바로 옆이었다. 그곳은 공사를 하는데 지장이 많으니 내가 손 본 부근을 일구어 고구마를 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땅의 지대가 너무 낮아 비가 오면 물이 고여서 싫다”며 돌아갔다.
문제는 며칠 후에 발생했다. 북쪽의 밭에 아주머니 한 분이 나보다 먼저 밭을 두 이랑 만들어 파를 잘 가꾸고 있는데, 난데없이 어떤 여인이 나타나 자기가 퇴비를 먼저 뿌렸다는 둥 별별 소리를 다한다. 둘이서 싸움이 붙겠다고 젊은 애들이 애가 타서 걱정을 한다. 그런데 다음날, 우리가 공사하는 흙을 밀어 놓았더니 그곳에 고구마를 심었다고 한다. 그 여인의 하는 행동과 늘어놓는 수다는 들을수록 황당하여 어이가 없었다. 정직한 땅이 비웃을만한 처사였다.
요즘은 필요 할 때마다 시장이 아닌, 가까운 동네 마트에 가도 싱싱한 야채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 구태여 텃밭을 가꾸지 않아도 살림하는데 조금도 불편하지 않다. 수익성도 없고 즐거움보다 가꾸는데 힘이 드는 게 텃밭이다. 그런데도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유용했던 텃밭의 추억이 가슴에 남아 있는가 보다. 나에게도 유년시절, 마당 한 편에 자리했었던 텃밭이 영상으로 남아 있다. 그 텃밭은 무성한 야채의 생명력과 성장의 신기함을 보여 주었고, 이웃과 공유하며 서로 정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었다. 그 공간은 시골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는 그 텃밭이 소유의 공간이며 집착의 공간으로 전락해 버렸다. 눈에 띄는 공지만 있으면 공유지든 사유지든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심으려고 집착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잡초가 무성한 곳을 개간하여 손수 밭을 일구려고 하지 않는다. 공사로 흙을 덮어 밀어 놓은 데만 골라서 파종을 하려고 한다. 현대인들에게, 힘 드는 일은 욕심까지도 무력화시키나 보다. 더욱이, 밭의 주인도 아닌 사람들이 남의 땅을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큰소리를 친다. 조금씩만 양보하면 서로가 즐겁게 가꿀 수 있는 것이 야채이다. 작은 욕심 때문에 네가 맡은 자리, 내가 맡은 자리를 가리며 싸우는 모습을 보면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다.
지난 시절, 텃밭에 대한 아련한 추억들이 마음속 깊이 잠들었다가, 나이 들면서 소일거리가 줄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깨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불현듯 옛 기억을 잘못 살려 내어 한 뼘의 땅을 더 가꾸고자 하는 욕심으로 싹트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하루를 지내고나니 그 다음날,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담 공사를 하는 곳 옆에 씨앗을 심고 갔다.
문득, 먼저 차지한 내 모습이 저들의 모습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곳이 풀밭으로 방치되어 있을 때는 밭으로 만들 엄두도 못 냈었다. 젊은이들이 흙을 뒤집어 놓은 뒤에야 이곳에 야채를 심었다. 가끔 부려보고 싶은 욕망의 끈이 아직도 내 속에도 남아있는가 싶다. 내려놓아야 할 때가 지났는데도 그 끈을 여전히 붙들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래서 남을 탓하기 전에 내가 내 속에 자리한 욕심을 먼저 내려놓자는 생각으로 그들을 불렀다. 그리고는 내가 흙을 덮어 밀어놓은 자리를 나누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며 굳은 자세로 이야기를 듣던 여인들의 얼굴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싸울 듯이 덤비면서 “내가 먼저!” 라고 큰소리치던 여인도 잠잠했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이웃인데 한 발씩 양보하며 서로 나누어 가꾸며 즐겁게 삽시다. 특별히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라고 말하자, 모두 동조하는 듯했다. 텃밭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억지를 부린 것에 미안함을 느꼈는지,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챙겨왔다. 모두의 얼굴에 흐뭇함이 배어나와 밝은 표정이 되었다. 한발 ‘양보’ 하는 씨앗이 ‘화해’라는 귀한 열매를 맺게 한다는 소박한 진리가 이곳에서도 실현되고 있었다. 이 텃밭을 통해, 옛날 이웃과 나누었던 그 정겨움이 다시 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새해 첫 선물
내일이면 2016년도 새해 첫날이다.
하루가 눈 깜짝할 사이만큼 짧아진 것은 칠십을 넘긴 이후부터이다. 마음은 번개같이 빠른데 행동은 굼벵이를 닮았다고 하면 옳을 것이다. 어김없이 새해는 다가왔다. 아무리 뒤돌아봐도 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한 살 한 살 나이만 더해가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4남매 중 두 딸이 각각 일본과 미국에 나가 생활하면서 명절에 자식들과 함께 모이기가 어려워졌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상황을 받아드리면서도 마음 한 곳이 텅 빈 듯 허전하여 안절부절 못하고 할 일없이 눈이 문 쪽만 응시하며 왔다 갔다 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새해 첫 선물이 배달되었다. 미국에서 대학교에 재학 중인 외손녀의 정성이 가득 담긴 카드와 선물상자였다.
할머니 새해 福 많이많이 받으세요~
2016년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길 기도할게요.
이 과자는 마카롱이라는 과자인데요, 할머니를 위해서 아몬드랑 꿀을 듬뿍 넣었어요.
글 쓰시면서 하나씩 드세요~ 할머니 사랑해요!
HAPPY NEW YEAR
손녀의 사랑이 가득 담긴 편지를 대하고 보니 새삼 눈시울이 뜨거워온다. 외손녀의 ‘글을 쓰면서 먹으라는 말’에 나는 글을 잘 쓰는 작가라도 된 듯 착각에 빠질 뻔했다. 카드를 보내 온 손녀는 막내가 낳은 첫 딸이다. 올해 스물두 살로 대학교 심리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어렸을 때에는 소아과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겠노라며 자기의 꿈을 크게 그리기도 했다.
할머니께 드리려고 특별히 아몬드와 꿀을 듬뿍 넣어 손수 만들었다는 말이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다. 여섯 명의 손자손녀가 명절마다 건네주는 카드에는 “할머니 마음 깊이 사랑해요!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여서 너무 감사해요.” 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 카드를 읽을 때마다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채워진다.
4남매를 통해 내게는 손자 네 명, 손녀 세 명, 모두 합해서 일곱 명의 손자손녀가 있었다. 그러나 맏딸이 낳은 첫 손자를 대학 1학년 때 뜻하지 않은 병으로 천국으로 보냈다. 첫 손자라 유달리 사랑했다. 손자를 잃은 아픔보다 더 큰 것은 정작 자식을 잃은 딸애의 아픔을 보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픔을 견딜 수 있도록 마음의 위로가 되어준 것은 남아있는 여섯 명의 손자, 손녀의 씩씩하고 밝게 자라주는 모습이었다.
지금은 제각각 미국, 일본, 서울,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하지만 편리한 통신 덕에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쁨이 있다. 손자, 손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할머니!” 하며 부를 때에는 이 세상에 나만이 손자 손녀가 있는 듯 흐뭇한 기쁨을 맛본다.
세 명의 손자들은 무뚝뚝한 성품이지만 운동을 좋아한다. 한편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열심히 도전하는 모습이 사나이답고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손녀들이 행동하는 모습은 사랑스럽고 귀엽다. 특별히 손녀마다 부리는 넘치는 애교는 무엇이라 표현하기 어렵다. 둘째의 열한 살짜리 외손녀는 내가 일을 할 때마다 돕겠다고 나선다. 외손녀가 아홉 살 때의 일이 기억난다. 어린손녀가 풋배추 다듬는 할머니를 돕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다.
배추를 다듬는데 크기를 한 번은 내가 자른 대로, 한 번은 그 절반으로 잘라 다듬어 놓았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다. 손녀가 대답하기를 “먹을 때에 어른은 긴 것, 어린이는 작은 것이 알맞다.”고 한다. 나는 어린손녀의 지혜로운 생각에 놀랐다. 어른, 아이가 한 식탁에 모여서 식사를 할 때마다 큰 토막 김치는 상황에 맞게 잘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바로 위에 언니는 얼마나 용감한지 초등학교 때도 캐나다에 사는 이모 집에 비행기를 세 번이나 갈아타며 혼자 다녔다.
마카롱이라는 과자를 새해 선물로 보내온 외손녀의 이야기를 더 해야겠다. 언니답게, 누나답게 푸근한 마음으로 이종사촌동생이나, 외사촌 동생들을 끔찍이 위하고 돌본다. 동생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고 애쓴다. 고등학교 11, 12학년 때는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농아들과 영어 수화를 통해 예배봉사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방학만 되면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찾아 봉사활동에도 힘쓰는 모양이다. 한편으로 내 마음을 더없이 기쁘게 한 것은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최고의 상인 ‘Best student’를 영어, 수학, 생물 선생님 세 분으로부터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손녀가 마카롱을 만들게 된 동기는, 나이 드신 분들이 누구나 즐겨하는 쿠키인데 값이 너무 비싸단다. 그래서 먹고 싶어도 생활이 어려운 분들은 사먹지 못한다고 한다. 손녀는 재료를 구입하여 집에서 만들면 이를 즐겨하는 분들에게 선물로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만드는 방법을 배우려고 했고, 여러 번의 실패 끝에 그 방법을 완전히 익혔단다. 그리고 방학이 되어 집에 올 때마다 쿠키를 만들어 이웃노인들을 대접한다고 한다. 이러한 손녀의 따뜻한 모습에서, 작은 것이나마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그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할머니를 생각하며 아몬드, 꿀을 듬뿍 넣어 손수 만들었다는 손녀의 마음 씀씀이가 기특하다. 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달콤한 마카롱에는 손녀의 정성이 가득 담겨있다.
2016년 새해 첫날의 허전했던 나의 빈 마음이 흐뭇함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다.
* 전북 여산 출생, 한밭대 문학창작과정 수료, 한국방송통신대학 국문학과 4, echlmn@hanmail.net |
성묘(省墓), 상춘(賞春) 그리고 봄길
조 영 숙
한식이 가까워지면 부모는 성묘를 생각한다. 4대 명절의 하나인 한식이 되면 아버지를 비롯해 우리 형제들은 조상들 산소에 성묘하러 간다. 여자들이 포함될 때도 있지만 대체로 남자들만 간다. 고향 아저씨들과 함께 날짜를 정해 성묘를 하고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우애를 다진다. 올해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족묘원에 안장된 후 처음 맞는 한식이다. 이제 우리 형제는 해외 선교사로 나간 막내를 제외하고 모두 일에서 풀려나 비교적 시간에 자유로운 상태다. 그래서 장조카 일정에 맞추어 날짜를 정하기로 하였다. 성묘길에는 형수님과 조카 부부, 세 살 된 딸이 한 차, 그리고 아버지, 형님, 동생, 막내 동생의 딸인 조카가 다른 한 차에 동승했다. 장남과 장손 부부를 비롯해 둘째인 나와 동생, 그리고 막내는 딸이 참석했으니 대표성으로 생각하면 우리 가족 모두 참석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첫 성묘길인데 며느리 둘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시다. 사실 아버지는 성묘 전에 아들을 통해 며느리들도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런데 사전에 아무 말 없이 성묘날에 며느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마음이 편하지 않으신 것 같다. 나는 아내의 건강이 좋지 못해 성묘 참석의 어려움을 이야기 했다. 아내는 몇 해 전 갑상선 수술을 받아 몸이 무리를 하면 힘들어 한다. 그래서 아내도 가야 하는 것이 도리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나는 아내에게 가지 말라고, 내가 아버지께 설명하겠다고 하여 결정한 사안이다. 남자들도 강릉 성묘길에 다녀올 때, 오랜만에 고향 집에 들렀으니 손길을 기다리는 일이 기다리고 있어, 바쁜 일정에도 일까지 하다 보니 집에 돌아오면 며칠을 쉬어야 평소의 건강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번 성묘에는 집안일을 마다하고 나는 성묘만 마치고 돌아섰다. 다만 아버지와 형은 고향 집 주인이기에 하루 묵으면서 집을 돌보고 돌아왔다.
가족 성묘 후, 아버지와 아내가 통화하는 가운데 아내는 성묘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몇 차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통화를 끝낸 후에 우리 부부는 결정했다. 상춘 여행으로 2박3일 일정으로 통영을 가기로 했던 계획을 바꾸어 당일치기로 강릉 성묘와 봄 여행을 겸하여 다녀오기로. 사실 대전에서 강릉을 하루 만에 다녀오는 것은 쉽지 않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복합터미널에서 첫 차인 7시 차를 타려면 집에서 한 시간 전에 지하철을 타고 다시 버스를 바꾸어 타야 하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6시 이전에 타려면 집에서는 5시 30분에는 출발해야 한다. 이렇듯 출발이 새벽부터라야 한다. 돌아 올 때도 집에 10시 정도 도착하려면 강릉터미널에서 6시 이전에는 출발해야 한다. 몸이 약한 아내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내가 남편이 운전하는 것을 편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긴장해야 하기 때문에 불편하고 힘들어도 대중교통을 선택하는 이유다. 산소를 수십 번 다녔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 걸어서 찾아 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부모님과 할머니를 비롯한 조상들의 산소 가는 길은 이미 바우길* 11구간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찾는 걷고 싶은 길이 되어 있다. 그 길을 이번에 처음으로 아내와 걷게 되어 가슴이 벅차다. 새소리, 바람소리, 산수유, 개나리, 목련, 진달래 등 많은 꽃들이 웃음 지며 반기는 곳, 어머니와 조상들이 잠들어 계신 곳. 봄꽃은 내 영혼을 깨우고, 솔바람은 마음의 찌끼를 씻어준다. 걷는 길이 자동차로 다닐 때와 다른 길은 아니지만 결코 같은 길이 아니다. 고은 시인도 말하지 않았던가.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그 꽃”
그리고 나는 봄 길을 걸었다. 불현듯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 생각났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중략-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사랑이 되어/한 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어머니 산소가 있는 가족묘원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집 근처 산소까지 그렇게 봄 길을 걸었다. 할아버지는 말씀으로 기억되지만 할머니는 나의 유년시절을 함께 했고 이후에도 오래 함께 지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일곱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힘든 시절을 사셨을까. 아들은 외아들. 강릉에서 아들을 춘천으로, 공주로 유학을 보내면서 홀로 어르신들을 모셨으니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가 고향 집으로 돌아올 때 집안 어르신에게 인사를 드리지 않고 먼저 집에 와 어머니를 찾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호통으로 아버지는 어르신을 뵙고야 어머니에게 인사를 할 수 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아들에게 엄격하셨다. 하지만 손자들에게는 그리고 손자의 자식들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셨다. 아들에게 마음 놓고 못하던 사랑을 집안 어른들이 없을 때는 자유롭게 펼치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내가 살던 고향집을 방문하여 할머니를 부르면 할머니는 맨발로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껏 “누가 나를 그렇게 기쁨으로 반겨 준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산소 앞에 서면 나는, 오늘의 내가 있게 해준 조상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고 앞으로 부끄럽지 않은 후손, 자랑스러운 후손이 되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형제끼리 화목하고 복된 가정을 꾸려가겠다고 다짐한다. 지켜보시고 응원해 달라고 기도도 드린다.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를 뒤로하고 시루봉을 지나 경포대로 향한다. 시루봉 아래 ‘경포 캐빈 펜션’이 있다. “시루봉 아래 펜션 허가가 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였는데 지난 성묘길에 아버지가 이 마을에 살았던 K씨가 운영한다고 일러주셨다. 지나는 길에 누구인지 궁금하여 들러 인사를 했다. 나는 그 분을 잘 몰랐지만 마을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이어가며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할머니, 그리고 우리 집에서 살며 학업을 마쳤던 충영이 아저씨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칭찬과 우리 집안을 잘 알고 있었다. K 씨는 당시 강릉농고에서 국어는 황금찬 시인, 수학은 아버지, 그리고 영어는 조순 전 서울 시장이 가르치며 유명하셨다고 회고하신다. 당시 강릉에서 계속 교편을 잡으셨으면 대학으로 가셨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는 자식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오셔서 용산고, 경기고 등에서 수학을 가르치며 중학 교장으로 퇴직하셨다. 정년 퇴임식장에서 바라본 아버지는 집에서보다 훨씬 큰 분임을 알게 되었다. 그 집 둘째 아들이라고 소개하며 잠시 옛 기억에 잠겼다.
시루봉은 나의 유년 시절의 추억이 어린 곳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일출을 보기 위해 마을의 높은 산 시루봉에 올라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했던 곳이다. 여름에는 동네 사람들과 바다로 나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나에게는 그 후 또 다른 추억이 있다. 나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40일을 아내와 함께 고향 집에 머물며 주변 지역을 관광하고, 쉬고, 즐기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울릉도를 다녀오는 밤이었다. 시루봉 아래 찻길에 고라니가 서 있다가 자동차 불빛에 시루봉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어린 시절 가까이서 꿩이 날고, 토끼를 쫓고, 다람쥐를 잡고, 참새를 처마에 손전등을 비추며 잡아 구워먹기도 했지만 고라니를 직접 이곳에서 목격하기는 처음이다. 대전에 오기 전 경기도 양평에서 전원주택을 짓고 8년을 살았다. 그 때 거기서는 집 앞을 가로지르는 고라니도 보고, 집 마당에서 거니는 꿩도 보고, 청설모가 나뭇가지를 오르내리며 뛰어다니고 집 데크를 돌아다니는 모습도 보았지만 말이다. 내게는 이런 동물의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오지만 실제 농촌에서 사는 사람들은 반갑지 않은 농사의 방해꾼이다. 그래서 밭 가장자리에 펜스를 만들어 놓는다. 매스컴에서 멧돼지의 피해가 있다는 보도가 여러 차례 있는 것처럼 고라니 폐해도 적지 않을 것이다. 먹을 것을 인간이 남겨두지 않으면 동물도 살기 위해 인간을 괴롭히게 된다. 최근 한국이 사드(THAAD) 배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하자 시진핑 주석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損人不利己(손인불이기: 남에게 폐를 끼치면 자신에게도 이롭지 않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면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이미 그런 모습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눈멀고 귀먹으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우리 안에 나의 욕심, 나의 뜻이 강하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요청을 들을 수 없다. 작은 일의 낌새를 미리 발견하여 대비하면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 우리는 호미로 막을 것을 방치하여 가래로도 못 막는 잘못을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나. 소비자의 작은 불평을 외면하다 크게 손실을 보고야 대처하는 기업이나, 좋은 말로 타이를 때 외면하여 결국 큰 소리가 나야 변화를 시도하는 인간관계나, 기회를 여러 차례 주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끝내 천둥이 치고 피해를 입어야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어느덧 발길은 경포대에 다다른다. 벚꽃 축제가 한창이다. 공터에는 천막들이 세워져 먹거리, 기념품, 일용품 등 나름대로 축제장 분위기를 띄운다. 나의 관심은 경포대 언덕에 시화전에 눈길이 머문다. 마음은 그곳에 빠지고 싶은데 아내가 손을 이끈다. 그래도 경포대에 올라 잠시지만 호수를 바라보고 술잔을 기울이던 선비를 떠올려 보았다. 하늘의 달, 호수의 달, 술잔의 달, 그리고 당신 두 눈의 달이라고 풍류를 누렸던 일화가 떠오른다.
경포대에서 허난설헌 생가 쪽으로 걷기를 선택한다. 경포대 쪽에서 바닷가로 가면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많아 더 복잡하다고 생각해서이다. 호수는 바람으로 자주 주름을 선보였다. 오리들이 삼삼오오 노닐며 자맥질을 친다.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서인가. 백로들은 평화롭게 호숫가를 날기도 내려앉기도 한다. 넒은 호수, 그리고 벚꽃이 환하게 주변을 비추고, 여러 명이 타는 자전거를 타고 즐기는 상춘객들 속에 나는 봄길을, 꽃길을 걷고 있다.
아내가 입을 연다. “여기 강릉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한다. 마음이 울적하면 경포 산책길을 걷거나,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기만 해도, 이렇게 좋은 날 만발한 꽃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솔바람,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기만 해도 근심 걱정 훨훨 날아갈 것만 같다고. 아내는 종종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에게 제일 좋은 점은 강릉이 고향이라고.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마음이 아팠다. 어찌 내게서 좋은 점을 찾지 못하고 강릉에서 찾느냐고 말이다. 다른 사람을 내 마음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내가 해석을 잘함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다. 변할 수 없는 사실이 강점이라면 이것은 영원한 것. 나는 아직 삶이 끝나지 않았고, 계속 달라질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내 안의 감추어진 장점, 탁월함을 갈고 닦아 보여주리라고 결심했다. 학생이 성적을 받을 때도 정말 아무것도 몰라 형편없는 점수를 받는 학생도 있지만, 제법 아는데 아직 완전히 자기 것을 만들지 못해 점수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학생의 경우 부모님이, 선생님이 전자의 학생과 동일하게 자신을 무시하고 비난하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나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후자의 마음을 여러 차례 겪은 아픔이 있다.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린 아이가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무생물인 것처럼 취급하지 않듯이. 사람에게는 생명의 씨앗이 있다. 가능성의 씨앗이 있다. 내게도 그런 잠재된 씨앗이 있다고 믿는다. 비록 지금까지 발현되지 못하여 없는 사람과 동일하게 취급 받았을지라도, 생명은 생명이다. 맹수도 새끼 때는 연약하다. 잡초도 어릴 때는 보잘것없다. 하나님은 씨앗을 주셨지, 완제품을 주시지 않았다. 자신의 강점을 발견하여 키우리라 다짐한 것도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를 거둔 후였다. 돌아보면 인생 전반기에는 나답게 살기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원하는 삶에 나를 맞추어 살았다. 성적표는 평범했다. 나는 그것으로 인생을 마치기에는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길을 찾아 나섰다. 길이 없는 곳에도 길을 내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삶의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나의 길을 가는데 함께 하심을 믿기 시작하자 두려움이 없어졌다. 지금 내가 누리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준비되고 내 안에서 자라오고 있었던 것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경포 호수의 산책로는 4.35km이다. 조각공원을 지나 경포해수욕장에 다다른다. 족히 3km 정도는 걸은 것 같다. 해수욕장 입구에는 ‘느린 우체통’이 있다. 엽서가 준비되어 있고, 이곳 우체통에 넣으면 1년 후에 배달해 주는 우체통이다. 엽서는 두 종류가 준비되어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상징하는 스케이팅 사진과 하늘과 맞닿은 고냉지 배추밭 ‘안반데기’ 사진이 준비되어 있다. 나는 안반데기 엽서를 고른다. 그리고 나의 다짐을 바다를 바라보며 적어본다. 강릉 팔경처럼 8가지 다짐을 한다.
1. 나는 교회 잡지 <대덕행전>의 편집장 책임을 받아들인다. 2. 나는 우리 집을 사무실로 하여 1인 기업 ‘하늘마음 라이프코칭’을 설립 운영한다. 3. 나는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쓰기에 도전한다. 4. 나는 나의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키고, 나의 강점을 탁월함으로 꽃피운다. 6. 나는 웰다잉 강사로 활동한다. 7. 나는 시 또는 수필로 등단을 한다. 8. 나는 ‘읽고 싶은 책 쉽게 배우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아내는 시간이 없다며 나의 손을 이끈다. 동해 바다 앞 솔밭 벤치에서 맞이하는 바람은 솔바람인가 바닷바람인가. 내 영혼에서 들리는 소원을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 마음에 새겨본다. 그리고 나의 성묘, 상춘, 봄길 여행은 마무리 된다. 이제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만든다. 1년 후 지금의 나의 다짐은 얼마나 이루어져 있을까.
* 바우는 강원도 말로 바위를 가리킵니다. 강원도와 강원도 사람들을 친근하게 부를 때 감자바우라고 부르듯 바우길 역시 강원도의 산천답게 자연적이며 인간친화적인 트레킹 코스입니다. 바우(BAU)는 또 바빌로니아 신화에 손으로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죽을 병을 낫게 하는 아주 친절하고도 위대한 여신이기도 합니다. 이 길을 걷는 사람 모두 바우 여신의 축복처럼 저절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으면 하는 바람을 길 위에 담았습니다.
오부자의 첫 나들이
어머니는 오래 편찮으시다 지난 해 9월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건강하지 못해 우리 가족은 가족여행을 해보지 못했다. 평소 조상의 제사, 부모님 생신, 명절을 제외하고 별도로 부모님을 찾아뵙거나 형제들을 별도로 만나지도 못했다. 여러 해 전에 처가 식구들이 모두 모여 제주도 가족여행을 함께 한 적이 있다. 제주도도 좋았지만 가족이 함께 하는 추억을 쌓은 것이 아름답고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우리 가족도 이런 여행을 하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느 정도 애도의 시간이 지난 후 셋째가 아버지와의 추억을 만들자며 가족여행을 제안했다. 아버지의 연세가 89세, 아들들도 모두 60이 넘었다. 어머니를 돌보시느라 아버지도 여행다운 여행을 하신 지 오래다. 집을 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 부자는 모두 찬성이다. 그렇게 첫 나들이는 강원도 평창 두타산 휴양림으로 숙소를 정하고 1박2일의 나들이 길이 열렸다. 4형제가 10만 원씩 40만 원이 예산이다. 여자들의 도움 없이 모두 남자들의 힘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형제들은 모두 전날 아버지 집으로 모였다. 이번 여행에는 필리핀 선교사로 나가 있는 막내도 참여할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언제 남자들만 모여 자유롭게 지내본 적이 있었던가. 물론 먹는 것이 다소 서툴 수도 있다. 쌀도, 김치도 아무것도 도움 받지 않고 오 부자는 서울에서 아침 6시 30분경 진부를 향해 출발했다. 형이 운전하고 앞자리에는 아버지가, 뒷자리에 삼형제가 자리를 잡았다. 자리가 좁아 다소 불편했지만 그래도 한 차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진부 IC에서 멀지 않은 부일식당, 형이 이 지역에 갈 때 자주 들리는 제법 유명한 식당이었다. 메뉴는 산채 비빕밥이다. 다양한 산채로 비벼도 좋고, 백반으로 먹어도 좋다. 반찬이 스무 가지는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첫손님으로 보였다. 잠시 후 일행이 들어온다. 아침 9시도 되지 않았는데 손님들이 방을 채운다. 모두 이 지역 사람들이 아니다. 50여 년 전 내가 기억하는 진부는 강릉에서 서울 가는 새벽 시외버스를 타면 진부터미널에서 아침을 먹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상인들이 차 안으로 들어와 삶은 계란이나 삶은 옥수수를 팔던 아련한 기억이 교차된다. 그리고 그때는 강릉에 비해 진부는 가난한 낙후된 지역이었다. 이곳이 세월이 지난 후 식당이 이곳 주민만 고객이 아니라 전국에서 찾아온다는 것이 신기하다. 아니 어쩌면 해외에서 찾아오는 식당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그만큼 우리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고,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지기 때문이리라. 이날 아침 식사비는 내가 내기로 했다. 2015년 평생학습 중심대학 수기 공모전에서 장려상 수상 턱이다. 지난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배재대에서 ‘라이프코칭 컨설턴트’ 과정을 300시간 이수하고 소감문을 보냈는데 입상한 것이다. 사실, 돌아보면 가족이나 형제들에게 식사 한번 산 적이 없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주변에 한국자생식물원을 돌아보고, 먹거리를 쇼핑하고, 점심 식사 후 휴양림으로 들어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한국자생식물원 입구에 다다르자 문을 열지 않는다는 표지판이 있다. 먼 길을 온 우리는 그래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대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우리는 대문을 살짝 열고 주변을 잠시 산책할 수 있었다. 2011년 화재 발생 이후 2013년부터 2015년까지 휴관했으나, 새로운 리모델링이 늦어져 2017년 4월에 개장할 예정이란다. 한국자생식물원은 우리나라 토종 들풀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여러 해 전에 아내와 들러 예쁜 꽃 엽서 몇 장 사온 기억이 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진부 농협 마트에서 쌀을 비롯한 김치, 등심, 오리고기, 된장, 간장, 상추, 고추, 마늘, 양파, 국수, 방울토마토, 참외 등을 샀다. 저녁에 소고기 샤브샤브를 주 메뉴로 준비했다. 그리고 마트 부근에서 점심 식사를 해결하고 두타산 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 안내를 따라가지만 중간 중간에 표지판이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후 2시부터 입장이지만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입장에는 문제가 없었다. 비교적 넓은 길에서 두타산 휴양림으로 들어서는 길이 차량 두 대가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아마 조만간 길을 넓히는 작업을 하리라 믿는다. 우리 일행은 7∼8인실 너구리 집에 들었다. 옆방은 이름이 오소리다. “자연 속에서 동물처럼 지내는 것도 좋겠지”라고 생각한다.
방에 짐을 풀은 후 주변 등산로를 잠시 탐색해본다. 길은 돌짝밭으로 걷기에 불편하다. 그래도 깊은 산속이라 바람과 공기는 나무랄 데 없다. 딱따구리 소리는 깊은 산중임을 말해준다. CCTV 공사 차량이 오가며 공사가 진행 중이다. 휴양림으로 숙소를 정하기로 한 것은 내가 제안한 것이다. 우리 부부는 관광보다 맑은 공기 속에서 쉬고 온다는 마음으로 가끔 휴양림을 찾는다. 복잡하지 않아 좋고, 비용이 펜션보다 비교적 싸다. 성수기나 주말을 피하면 저렴한 값에 이용할 수 있어 좋다. 봄철에는 운이 좋으면 고사리나 쑥 등을 만날 수 있다.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은 휴양림이 익숙하지 않은가 보다. 예상보다 천정도 높고, 나무로 잘 지어진 집을 보고 감탄한다. 셋째와 내가 중심이 되어 식사를 준비한다. 형이 물건 살 때 너무 많지 않나 염려했다. 그런데 동생들이 먹는 것을 보더니 이해가 된다고 말한다. 휴양림은 가스 불이 아니라 인덕션으로 설치되어 있다. 익숙하지 않아 처음에는 불이 붙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채소를 씻어 끓는 물에 집어넣고, 간장으로 적당히 간을 맞추고 등심 조각을 넣어 건져먹도록 했다. 그리고 밥솥에 밥을 하고 그렇게 저녁을 해결했다. 식사 후 잠시 집 주변을 둘러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셋째와 이번 여행에서는 절대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정말 오랜 만의 여행인데 마음 상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평소에 보지 못하는 하늘의 별 보기를 시도했다. 달은 보름달인데 별은 생각만큼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몇 개는 보았고 밝기도 더했다. 어린 시절 여름밤에 보았던 별밭은 이제 볼 수 없는 것일까.
다음날 아침 오리고기를 주 메뉴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아침 산책을 계곡을 따라 아침 햇살을 받으며 두세 명씩 걸었다 그리고 물가에 발을 담그고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되어 본다. 그러면서 웃음 지으며 몇 장의 사진을 기념으로 찍는다.
점심식사는 11시 30분쯤 샤브샤브를 위해 준비했던 국물에 국수를 끓여 해결했다. 그래서 12시 10분쯤 열쇠를 돌려주고 휴양림을 나올 수 있었다. 남은 과일은 방울토마토 케이스에 넣어 쉼터에서 먹기로 했다.
우리 여정은 오대산 상원사로 이어졌다. 오대산 입구에서 운전사가 노인이고 앞자리에도 노인이니 자동차 주차료만 받고 통과다. 아마 우리 모두를 노인으로 이해했나 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월정사를 지나 물길을 따라 족히 10㎞를 달려 상원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 물이 있는 쉼터에서 잠시 둘러 앉아 과일을 먹으며 담소를 나눈다. 그리고 상원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오르는 왼쪽 입구에 조선시대 세조가 목욕을 하기 위해 의관을 걸어놓았다는 ‘관걸이’가 있다. 세조는 피부병으로 고생했는데 이곳 계곡물에서 목욕을 하고 나았다고 한다. 상원사로 가는 길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즐비하고, 길 한편에 스님의 사리를 보관한 부도가 몇 개 서 있다. 약간 오르막길을 걸어 상원사를 둘러보고 부처님 사리가 보관되었다는 적멸보궁 보기를 포기했다.
상원사는 고양이 석상으로도 유명하다. 세조가 대웅전에 참배하기 위해 들어가려는데 고양이가 곤룡포를 물어 방해를 하자,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확인한 바, 자객이 대웅전에 숨어 있어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조는 상원사에 묘전(猫田)을 하사했다.
상원사에서 내려올 때 돌계단을 밟고 좌우를 살핀다. 신자들이 봉헌한 나무들이 이름표를 달고 심겨져 있다. 그렇게 상원사를 돌아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아버지가 좀 더 걸어야 하겠다고 하신다. 만보기를 보시더니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막내는 차를 지키기로 하고, 우리 일행은 형의 안내로 계곡을 따라 선재길을 2㎞ 정도 걷고, 다리를 건너 막내 동생을 불러 합류했다. 선재길은 옛날 스님들이 상원사로 행하는 길이었다고 한다.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다양한 자생 식물들이 어우러진 길이다. 그렇게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나는 횡성휴게소에서 일행과 헤어졌다. 서울에 갔다가 다시 대전으로 내려오는 것보다 횡성에서 대전으로 오는 것이 보다 편리했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행은 이천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고. 저녁을 먹이지 못하고 보내 마음에 걸린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 대해 아버지는 고맙다는 말씀을 몇 번인가 하신다.
10시가 넘어 나는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한 후 라면으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일찍 아버지가 찍은 사진이 휴대폰으로 전송되었다. 동생은 앞으로 얼마나 자주 이런 여행을 하면 좋겠냐고 문자를 보낸다. 나는 계절에 한 번이라 대답한다. 시간 때문이냐, 비용 때문이냐고 묻는다. 아마 더 자주 했으면 하는 눈치다. 나는 시간, 비용 모두에서 그 정도면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정말 좋으면 점차 늘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없던 일을 한 번 시작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번 나들이에서 특별한 깨달음이나 통찰을 얻지는 못했지만 공통의 추억이 소득이라 할 수 있다.
언제쯤 우리는 우리의 속내를 진솔하게 드러내며 자신의 꿈과 삶을 이야기하며 자신과 타인을 새롭게 만날 수 있을까.
* 강원도 강릉 출생,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수료, <글샘회> 동인, 양평문협회원, ysc1951@naver.com |
별똥별
오 월 석
2013년 8월에 전라북도 부안면에 있는 위도로 직원연수를 갔었다. 격포항에서 카페리호를 타고 40분 정도 가면 위도에 닿는다. 배 삯은 차량이 기사 한 명을 포함하여 15,000원, 사람은 1인당 4,000원을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위도가 내륙에서는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을 주었기에 두 번째 찾았다.
도시의 시끄러운 소음과 뿌연 스모그가 없는 위도는 나의 귀와 눈을 깨끗하게 씻어 주었다. 위도의 규모는 자가용으로 40분 정도 운전하면 섬 전체를 둘러 볼 수 있다. 섬을 여유 있게 둘러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겠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이미 바다로 가 있었다. 2013년 당시, 어느 분께서 선뜻 40만원을 내놓으셔서 200미터 길이의 그물을 샀기 때문이었다. 그물을 바다에서 걷어 올릴 생각에 직원들의 마음은 모두 설레었다. 2년 전 그물 가격에 비해 두 배 오른 가격이었지만 위도 여행의 백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그곳에 가면’이라는 펜션이었다. 펜션 이름은 잘 지은 것 같았다. 그곳에 가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들은 서둘러 숙소에 짐을 던져 놓고 바닷가로 나갔다. 배는 생각보다 작아서 직원 7명이 모두 탈 수 없다는 선장님의 언급에 여직원들끼리 가위 바위 보를 해서 2명은 섬에 남았다. 남자들은 조금 힘이 세다는 이유로 모두 승선했다.
작은 배는 힘차게 바닷물을 양 옆으로 가르며 힘차게 달렸다. 온 몸으로 바닷바람을 맞으니 바다의 비릿함이 느껴졌다. 선장님은 마치 개선장군처럼 망망대해를 향해 우뚝 서서 말없이 배를 운전하셨다. 선장님은 작은 체구에 검게 그을린 얼굴이었지만 강해보였다. 잠시 후 선장이 배를 멈춘 후 갈고리로 부표를 끌어올렸다. 바다에 쳐진 그물을 배의 전동모터에 연결하고 스위치를 올렸다. 철봉에 줄이 둘둘 말리자 그물이 딸려 올라왔다. 만선을 기대하는 우리들의 눈에 커다란 숭어가 올라오자 모두들 탄성을 질렀다. 그물에 뒤엉켜 올라온 꽃게를 비롯하여 입이 비뚤어진 광어, 뱃살이 유난이도 하얀 간재미, 날렵하게 생긴 놀래미, 조금은 흉하게 생긴 장대 등 갖가지 종류의 물고기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뭍에서 온 우리들은 잠시 동안이지만 모든 것을 잊고 어부가 되었다. 선장님은 아이들처럼 좋아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으셨다. 만선을 하고 금의환향한 우리들의 마음은 갈매기가 되어 나는 듯 했다. 주인집 아주머니의 능수능란한 칼솜씨에 물고기는 회로 변신하였다. 우리들의 저녁은 시원한 소주와 쫄깃쫄깃한 회로 완벽해졌다.
우리들이 2차로 간 곳은 위도의 유일한 오락시설인 노래방이었다. 사실 2년 전 위도에 갔을 때 이 노래방을 갔었다. 노래를 부르고 맥주를 다 마시고 나왔는데 주인이 없어 숙소로 돌아온 후 다음날 돈을 가져다 준 적이 있었다. 노래방 여주인은 노래방 뒤편 가정집에서 걸어 나왔었다.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었었는데 수줍은 듯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었다. 여주인은 작은 키에 날씬한 편이었고 교양 있는 말투에 세련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 여주인의 모습은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내 아내가 저렇게 곱게 나이를 먹어갔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 생각했다. 그 분의 근황이 궁금하던 차에 노래방에 도착했다. 세월이 여주인의 얼굴에 몇 개의 주름을 추가했을 뿐 교양 있는 모습은 여전했다. 그 분은 고맙게도 나의 기대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1시간 쯤 뒤에 또 언제든 찾아갈 날을 기약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보니 별들이 천장에 박혀 있는 듯했다. 순간 반짝이는 저 별들의 존재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저 광활한 우주 속에서 나의 존재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우리들은 아름다운 별을 감상하기에 적합한 곳을 찾았고 내가 바닷가로 가자고 제안을 했다. 모두들 맥주 캔을 하나 씩 들고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에 가서 하늘을 보고 누웠다. 귀로는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듣고, 눈으로는 검은 하늘에 영롱하게 반짝이는 별들을 감상했다. 그런데 별안간 밝은 빛이 어두운 하늘에 긴 줄을 긋고 사라졌다. 별똥별이었다. 우리들은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밤하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연이어 탄성을 지르며 별똥별을 보고 또 보았다. 중학교 때 들마루에 누워서 본 뒤로 25년 만이었고, 살아오면서 별똥별을 가장 많이 본 날이었다. 소원을 빌려고 했으나 별똥별은 너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나의 감정은 신기함 반, 아쉬움 반이었다. 그날 밤 총 8개의 별똥별을 보았다.
2016년 3월 7일 저녁 8시경이었다. 막내 고모와 통화하다가 입원하신 고모부께서 복수가 심하게 차셔서 숨 쉬시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출장을 다녀와서 다시 병문안을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한 생각이 들어 동생 달석이에게 전화를 해서 서울로 가자고 했다. 다급하게 말하는 내 말에 동생이 차를 운전하고 가겠다고 했다. 장거리 운전에 가끔 졸음운전을 하는 나를 동생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둘은 서둘러 호남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강변북로에 접어들었다. 서울에 들어서면서 고모와 다시 통화하니 고모부께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쉬시고 계신다고 했다. 동생은 강변북로를 달리며 많은 차들을 추월했다. 속도계가 140km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울 한강변의 야경은 우리들의 마음과는 대조적으로 너무 평온하고 예뻤다.
우리 식구들과 고모부의 인연은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막내 고모는 운명에 굴곡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본인 결혼식 날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기막힌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를 찾아뵙고 절을 올려야 하나 강 씨 집안의 법도에 따라야 했다. 내가 알기로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100일이 지나서야 산소에 가서 절을 올린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33년 전에는 정말 그랬다. 그래서 처음에 고모부는 우리 집안에서 미움을 받았었다. 하지만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고모부는 처갓집 일에는 발 벗고 나섰다. 1985년 여름에는 처갓집 조카들인 우리를 서울대공원에 데리고 가서 구경 시켜주셨다. 우리들은 친 삼촌들도 하지 못한 일을 고모부가 해주셨다. 덕분에 시골 촌놈들이 서울구경을 제대로 했었다. 그림과 텔레비전으로만 보았던 동물들을 직접 본 경험은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모부는 목소리가 좀 크신 편이다. 성격은 활발하시고 호불호가 분명하셔서 얼굴을 뵈면 누구나 고모부의 심리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한 쪽 다리가 불편하셔서 걷는 모습이 조금 절룩이셨으나 걸음걸이가 무척 빠르셨다. 고모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바로 서울지하철공사에 취직하셨다. 주간, 야간작업을 번갈아 하시면서 휴가를 모아서는 가을에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셨다. 밤을 줍는 것부터 벼를 베고, 탈곡 하는 일 등 시골 일에 겁을 안내셨다. 동네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셔서 항상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담당하셨다. 내가 어렸을 때는 우리 마을에 자가용이 있는 집이 없었다. 고모부는 서울에서 파란색 프레스토를 운전하고 오셨는데 동생과 나는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고모부는 힘든 일을 하시는 중간에 시간이 나면 우리들과 물고기 잡는 것을 좋아하셨다. 또한, 드시는 것도 무척 즐기셨다. 우리 식구들 중에 매운탕을 좋아하는 3인방이 있는데, 나의 친 매형, 큰 제수씨, 그리고 고모부였는데 고모부께서 유달리 더 좋아하셨다.
2015년 12월 27일, 내 사촌형 결혼식을 계기로 식구들이 많이 모였다. 추수가 끝난 들판을 삽과 양동이를 들고 헤매고 있는 이들은 고모부와 조카들이다. 논 가장자리 수로에 모여 동면하는 미꾸라지를 잡아서 매운탕을 끓여 먹을 셈이었다. 추운 겨울 들판에서 물고기를 잡다 말고 라면에 소주를 한 컵씩 마셨다. 큰 동생은 라면 상자에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넣어 바람을 막은 상태에서 라면을 끓이는 센스를 보여줬다. 야외에서 먹는 음식은 무엇을 먹어도 맛있는 것 같다. 모두들 지나간 과거의 에피소드를 곱씹으며 즐거웠다. 우리들의 미꾸라지 사냥은 평년작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어느 때 보다도 즐거웠고 사진도 몇 장 찍어 기념으로 남겼다.
나와 고모부와의 사이에도 갈등의 시간은 있었다. 항상 잘 해주시는 고모부셨지만 2002년에 고모와의 잦은 다툼이 있으셨고, 동생이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으며 기다리는 시간이나 끝나고 힘들어서 쉬었다 가는 곳이 고모 댁이었다. 그날도 병원에서 동생의 항암치료가 끝나고 서산에 사는 누나에게 가는 것이 무리인 것 같아서 고모 댁으로 갔다. 그런데 그날도 두 분 사이가 안 좋으셨다. 나는 고모부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고모 편에서 대변을 하다가 고모부와 언성이 높아졌다. 나의 참을성이 폭발하고 말았다. 나는 술을 마신 상태였지만 도저히 고모부 댁에 얹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운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일단 아픈 동생을 이끌고 짐을 들고 고모부 댁을 나왔다. 고모는 만류했지만 내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나는 여관에서라도 잘 생각으로 나섰는데 묵묵히 지켜보던 동생 충석이가 “형 내가 운전할게.”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밤에 비는 내리고 서울 불광동에서 서산까지 가야하는데 환자에게 2시간 이상 운전대를 맡기려니 미안했다. 하지만 따로 방법이 없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내 상식으로는 고모를 대변해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동생은 항암치료를 받고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해병대 정신으로 버티며 못난 형을 응원해 주었다. 환자를 보호해야 할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많이 후회했다. 고모부와의 갈등이 도를 넘은 것은 아니어서 추후에 내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고, 고모부도 나의 사과를 받아주셨다.
2016년 1월 12일, 누나가 조카들 세 명을 데리고 서울 나들이를 떠났다. 나의 큰아들 병택이, 작은 아들 형택이, 조카 창현이가 배낭을 메고 고모를 따라 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흥이 절로 났다. 고속열차도 타보고 남산타워와 수족관에도 갈 예정이었다. 누나가 첫날 조카들을 데리고 남산타워와 화려한 조명이 있는 공원에 데리고 갔고, 아이들에게는 고모할아버지인 나의 고모부께서 손자들을 데리고 수족관에 다녀오셨단다. 다리도 불편하신데 말썽꾸러기 손자들 세 명을 돌보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생각하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고모부는 조카들은 물론 조카들의 자식들까지 챙기시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셨다.
2016년 2월 27일, 일산시의 동국대병원 636호에 들렀다. 방사선치료를 받으시고 코를 골며 주무시는 고모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며칠째 통 잠을 못 주무셨다는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찡하더니 슬픔이 밀려왔다. 2개월 전에 고모부와 들판에서 라면에 소주를 마셨었는데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잠시 후 일어나신 고모부께서 조카들에게 소 등심 좀 사주라고 고모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울컥하여 눈물이 날 뻔했다. 고무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조카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병실에 고모부를 두고 나서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병간호에 지친 고모를 위로해 드리려고 생선찜 전문점을 찾아가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소주를 마시는 중간 중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고모는 눈물을 글썽이셨다. 평정심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던 나도 말을 잇지 못했다. 앞으로 고모부께서 겪으실 고통을 어떻게 감내하셔야 할 지 걱정이 앞섰다. 성격이 예민하신 고모께서 병간호를 어떻게 하실지도 걱정이었다. 상준이가 나에게 의사들이 아빠의 상태를 자꾸 안 좋게 얘기했다는 말에 가슴이 먹먹했다. 결국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인가?
나와 동생이 동국대학교 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밤 11시 30분이었다. 황급히 병실에 올라가니 고모부께서는 이미 처치실에서 숨을 몰아쉬고 계셨다. 의식은 이미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고모부의 손을 한 쪽씩 나누어 꼭 잡아드렸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으나 손에는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고모부의 귀에 대고 “저희들에게 잘 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손자들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고모 잘 돌봐드릴게요.”라고 말씀드렸다. 고모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크게 맺혔다. 그 눈물이 바로 전에 “형수하고 조카들 내가 잘 챙길게 형 편안히 눈감으세요.” 라고 한 고모부와 제일 친한 셋째 동생이 한 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듣고 계신 것은 확실했다.
2016년 3월 8일 00시 12분, 강 씨 집안의 장남이자 많은 조카들의 별이 졌다. 33년 고모부와 함께 했던 인연이 위도 바닷가에서 보았던 병똥별 만큼이나 순식간에 우리들의 곁에서 사라졌다. 내년에 회갑을 맞으실 고모부는 내년에 칠순이신 나의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가자고 하셨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생전에 고모부는 우리들에게 즐겁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조카들에게 친구처럼 대해주시고 손자들에게는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시골에서 어렵게 농사지으시는 나의 부모님을 진정으로 걱정하시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고, 36년 간 올 곧게 직장생활 하시며 처자식의 안정된 생활을 감당하신 책임 있는 가장이었다. 집안의 장남으로 우직하게 일하셨고, 병환에 계신 어머니를 지극히 보살펴드린 효자였다. 이렇게 이 세상에 아름다운 족적을 남기고 가신 분이 나의 고모부 ‘강호만’이시다. 고모부는 내게 소원을 빌려하면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별똥별이었다.
병뚜껑 베개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슬픔을 겪는다. 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쁨을 누리며 산다. 내 경험으로 볼 때 기쁨보다는 슬픔의 무게가 훨씬 중량이 많이 나간다. 양팔저울의 한 쪽에 기쁨을 담고 다른 한쪽에 슬픔을 담아 수평을 가늠해 보아 내가 행복하게 사는 건지 불행하게 사는 건지를 알아 볼 수 있다. 슬픈 일은 그 무게가 어마어마하게 무겁다. 식구들과의 영원한 이별, 돌이킬 수 없는 사고의 후유증, 고칠 수 없는 질병을 얻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 친한 친구의 사기 등을 겪게 되면 한 가지 일로 인해서 양팔저울은 슬픔으로 무게가 쏠리고 만다. 기쁜 일은 슬픈 일에 비해 무게가 가벼운 편이다. 아이들의 재롱,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가족여행, 절친한 친구와의 소주 한 잔,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의 커피 한 잔 등은 기쁜 일로 자기가 마음을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과연 어떠한 삶이 행복한 삶인가를 고민했다. 어차피 태어난 인생 즐겁게 살다가 가고 싶었다. 무조건 오래 사는 것만이 행복이 아니고, 맛있는 음식만을 찾아다니며 즐기는 것도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없다. 내가 소유한 양팔저울의 균형을 맞추며 사는 삶 속에서 행복을 찾아보고자 한다.
내가 찾은 행복의 방법을 소개하자면 세상 사람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무거운 슬픔에 대비하여 기쁨 쪽의 양팔저울에 작은 행복을 차곡차곡 쌓아 놓는 것이다. 주말에 친구와 동생들이 모여 아버지의 농사일을 함께 돕는 것, 식구들이 모여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추억을 얘기하거나 사는 얘기를 하는 것, 매일 어머니께 전화해서 근황을 묻고 어머니께서 궁금해 하시는 나의 사소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 가끔씩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식사하거나 커피 한 잔 하는 것,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 등은 작은 행복이다. 나는 이러한 소소한 즐거움을 일상생활 속에서 기쁨 쪽의 양팔저울에 주워 담으면 된다.
과거를 돌이켜보니 나와 동고동락한 사람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아주 든든한 동생이 한 명 있다. 그 동생이 몇 달 전에 내게 참으로 독특한 선물을 주었다. 원래 대전에 살던 사촌동생은 어릴 때부터 나와 친하게 지냈다. 어려서는 내가 일방적으로 데리고 다니며 놀아주었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의 바로 아래 동생인 다섯째 작은 아버지께서는 명절 때면 제일 일찍 오셔서 맨 나중에 돌아가시곤 하셨다. 형님의 농사일을 최대한 많이 도와주고 가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식구들 모두 마음속으로 고맙게 느끼고 있었다. 나와 동생 충석이, 사촌동생 달석이와 형석이는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우리들 넷은 작은 아버지의 배려로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친해질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어려서 우리 넷은 두 팀으로 나눠서 이불을 펴놓고 레슬링을 많이 했는데 충석이와 달석이는 나이도 같고 생일이 1주일 차이 밖에 안 나는 데도 형과 아우의 구분이 확실했고 친해서 항상 같은 팀이었다. 나는 매번 다섯 살 어린 형석이와 한 팀이 되었다. 레슬링을 하면 형석이는 어리고 힘이 약해서 자주 장롱이나 벽에 부딪혔는데 “형석아, 머리에 벌레 있다. 가만있어봐 잡아줄게.” 라고 하면 아무리 아파도 울지 않고 꾹 참았다. 어린 동생이 벌레에 대한 공포 때문에 눈물을 그친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어려서부터 인내심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 동생에게 자주 찾아오는 충돌의 고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내 소멸되었다. 우리들의 레슬링은 동생의 머리충돌 때문에 잠시 멈칫 멈칫 했지만 오랫동안 계속 즐겼다.
1996년에 내가 제대하던 해에 몇 개월 간 다섯째 작은 어머니 댁에서 도서관을 다닌 적이 있다. 그 당시 형석이는 실업계 고등학교인 동아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실업계였지만 내신 성적도 좋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동생은 대학을 가기위해 나와 두 달 동안 합숙하며 수능시험을 준비했다. 매일 아침 작은 어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메고 한밭도서관으로 향했다. 책가방에 들어있는 책보다 도시락 가방이 더 무거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서관에 앉아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둘은 번갈아 가며 졸기도 하고 깨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생과 함께 먹는 점심시간에 머리가 가장 잘 돌아갔던 것 같다. 충분히 먹었는데도 부족할 때면 그다지 맛없는 국수도 사먹었다. 밤 10시쯤 귀가하면 작은 어머니께서 영양탕을 끓여 주시곤 하셨는데 가끔씩 찾아오시는 아저씨 한 분이 우리에게 매번 술을 권하면서 술을 마시고 다음날 술이 깰 때 외우면 잘 외워진다고 꼬드겼다. 근거 없는 이야기인 것을 알지만 나와 동생은 가끔 술을 받아 마셨고 작은 어머니는 그러는 우리를 그냥 지켜보셨다. 그 다음 해에 우리 둘은 나란히 대학교에 들어갔다. 아이러니 하게도 동생은 대전에서 공주로 나는 공주에서 대전으로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우리는 성격도 잘 맞았지만 취미가 같았다. 여름철에 농사일을 돕다가도 짬이 나면 경운기에 그물과 쇠스랑을 싣고 냇가에 갔다. 비교적 수량이 많은 큰 냇물에는 각종 물고기가 있어서 우리들을 유혹했다. 붕어, 미꾸라지, 구구리, 피라미, 버들치, 돌고기, 모래무지, 메기, 잉어 등은 우리들의 마음을 자석처럼 끌어 당겼다. 나는 오랜 경험 끝에 물고기 잡는 법을 나름 터득했고 형석이와 같이 할 때 그 효과가 극대화 되었다. 내가 개발한 물고기 잡는 공법은 ‘쇠스랑 공법’이었다. 내가 냇물에 들어가서 그물로 물가의 수초를 서서히 포위하면 동생은 물가 가장자리 땅에서 쇠스랑으로 수풀을 걷어 올리는 방식이다. 발로 수풀을 밟아도 물고기가 숨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나의 공법은 물고기에게 숨을 공간을 용납하지 않았다. 장마가 진 어느 해에는 메기를 여러 마리 잡으면서 식구들로부터 나의 공법을 인정받았다. 하루는 동생이 너무 힘든 나머지 집중력이 떨어져 쇠스랑으로 나의 얼굴을 찍을 뻔한 일이 있었다. 그 뒤로 내가 너무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것 같아 쇠스랑공법을 자제하였다.
우리들의 물고기 사냥은 겨울 강추위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매년 겨울이면 연례행사처럼 동생과 나는 삽과 양동이를 들고 눈 덮인 들판으로 향한다. 논 가장자리에 논의 물을 빼느라 파놓은 긴 수로에 미꾸라지가 동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동생 달석이는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라면을 끓이고 소주를 준비한다. 우리는 얼어붙은 얼음을 깨고 진흙을 거두어 내면서 미꾸리를 잡다가 달석이가 부르면 가서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고 라면을 안주로 먹는데 그 맛이 대단했다.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고 날씨는 비록 춥지만 우리들은 오히려 겨울이 선사한 추위를 온 몸으로 즐긴다. 셋이 같이하니까 재미있지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우리들이 겨울사냥을 멈춘다면 우리가 이미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매년 행사를 치루고 있으니 아직 청춘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2002년은 월드컵이 온 나라를 달구면서 대다수의 국민들은 히딩크의 리더십에 힘입어 4강까지 진출한 우리 팀을 응원하며 전국 방방곡곡이 떠들썩했다. 그러나 우리 식구들에게는 기억하기조차 싫은 아픔이 찾아왔다. 나와 형석이는 위암 투병중인 내 동생 충석이를 간병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세상은 모두 웃고 있는데 우리 식구들은 울고 있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동생과의 이별을 준비하며 긴장의 나날을 보냈다. 나와 형석이는 24시간 내내 동생 곁을 지켰다. 둘이서 12시간씩 교대를 해가며 충석이를 간호했다. 잠이 깊이 들고 감각이 무딘 편인 나는 주간 12시간을 책임졌고 형석이가 감각이 예민하여 야간 12시간을 간병했다. 나는 동생에게 핀잔을 자주 들었고 형석이는 항상 칭찬을 받았다. 우리 둘은 막내 고모 댁을 베이스캠프로 하여 교대를 했고, 우리들의 간병은 2002년 12월 말까지 이어졌다. 1년 내내 간병을 한 것은 아니고 동생이 수술을 받는 기간과 항암치료를 받을 때만 6차에 걸쳐 1주일 정도씩 한 것으로 기억한다. 동생이 항암치료가 없을 때는 서산에 사는 누나가 돌봐주었다. 2002년은 우리 식구들 모두가 비상사태 기간이었다.
나는 어느 화창한 늦가을 남향이라서 따뜻한 햇볕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서울대학교병원 10층 휴게실에서 충석이와 친구들이 한바탕 고등학교 시절을 곱씹으며 웃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식구들이 줄 수 없는 웃음을 친구들이 주었고 나는 그들에게 고마웠다. 동생의 웃음을 나는 눈을 떼지 않고 보았다. 어쩌면 앞으로는 동생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말 그게 마지막이 되었고, 나와 형석이가 같이 한 간병도 12월 말이 되어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시골일은 끝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아버지를 형석이는 큰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종업원이라서 사장님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형편을 빗대어 지어낸 별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 전에도 모내기한 논에 볏모가 빠진 부분을 때우는 소위 ‘땜빵’ 작업을 같이 했다. 푹푹 빠지는 진흙 논을 걷다 보면 평지를 걷는 것이 얼마나 가볍고 행복한 줄을 알게 된다. 서너 시간 동안 질퍽한 논을 걷고 허리를 굽혀 볏모를 심는 모양이 마치 황새가 먹이를 쪼는 듯한 모양과 비슷했다. 집 앞의 넓은 논을 다 심으려면 허리를 폈다 구부렸다를 수 백 번 해야 한다. 온몸이 뻐근하고 무릎과 허리에 통증이 밀려오지만 기분은 좋다. 나의 고통보다 부모님의 일손을 덜었다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장님의 명령은 끊임이 없는데 종업원들의 입에서 단내가 나거나 해가 저물어야 일이 끝이 난다. 콩 심기, 양파 캐기, 고추 심기, 고추 따기, 들깨 심기, 들깨 수확, 밤 줍기, 밤나무 가지치기 등 너무 많아서 농사일을 다 열거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시키시는 농사일을 함께하며 정이 더욱 돈독해지고 있다.
달석이와 형석이 동생은 뼈아픈 고통을 여러 번 겪었다. 1992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존경하는 아버지를 잃고 1998년 사랑하는 어머니마저 무심하게도 위암으로 세상을 등지셨다. 졸지에 고아가 된 동생들의 상황을 내게 대입해 보면 지옥이나 다름없는 세상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은 동생들이 너무너무 안쓰러웠다. 다행히 나의 부모님이 동생들을 불러들여 우리는 한 가족이 되었다. 대학생을 둔 형 때문에 군대에 가야하는 동생 형석이의 처지를 보면서 빽 없고 돈 없는 서민의 서러움을 느꼈다. 정부의 높으신 양반들의 자제들은 정상인인데도 군대를 잘도 빼내는데 부모님이 안 계신 내 동생은 소가 우시장에 끌려가듯 입대를 했다. 세상은 정말로 더럽게 불공평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동생은 지금 안정된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고, 착하고 현명한 아내와 우리 집안의 유일한 딸인 윤아와 복스럽고 귀여운 아들 윤찬이를 키우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올 봄에 형석이가 내게 아주 특별한 선물을 주었다. 값으로 따지면 120만원을 훌쩍 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생이 준 선물은 자기가 마신 플라스틱 맥주의 뚜껑을 10년 이상 모아서 만든 병뚜껑 베개였다. 병뚜껑 개수가 적어도 400개는 넘는 것 같다. 나는 매일 밤, 잠을 청할 때 병뚜껑 베개를 베고 눕는다. 베개를 베면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꽤 크게 나고 지압효과 또한 일품이다. 하지만 머리가 아파서 너무 오래 벨 수는 없다. 요즘은 베개를 베고 자지는 않더라도 매일 끌어안고 잔다. 작은 아들 형택이가 아빠베개라고 자기 전에 꼭 자기 옆에 챙겨 놓고 잔다. 그리고 아이들은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자랑삼아 베개를 갖다 보여 주고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이들도 황당해하면서 보여주곤 한다.
나는 베개를 베면서 동생을 생각한다. 동생이 험난한 삶을 헤쳐 나가며 겪었을 애환을 어찌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동생이 힘든 생활을 견디고자 마셨을 쓴 맥주가 매일 밤 나의 가슴을 적신다.
품앗이
저 멀리 논두렁길을 가로 지팡이를 짚고 터벅터벅 걸어오시는 분은 같은 마을에 사시는 나의 이모님이시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또 다른 손에는 담배를 들고 계신다. 연세가 87세임을 감안하면 걸음걸이가 무척 빠르신 편이다. 우리 집과 이모 댁은 직선거리로는 250m 동네 길을 따라 반원 모양으로 돌아가면 400m 정도 된다.
이모님은 항상 좁고 울퉁불퉁한 논두렁길로 다니신다. 시냇물을 건너시는 것도 워낙 오랜 기간 숙련이 되어서 거뜬히 넘어 다니신다. 이모님의 우리 집 방문 목적은 내 아들 병택이의 안부를 물으러 오시는 경우이거나 들에서 손수 장만하신 고사리나 취나물을 주려고 오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모님은 반찬을 주시는 것 보다는 2주에 한 번 정도 공주 할아버지 댁에 오는 병택이의 안부를 더 궁금해 하신다. 87세의 이모님과 12살 큰 아들과 매우 친하다고 하면 맞는 표현일까?
이모님은 내게 성인군자와 같으신 분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모님은 내게 듣기 싫은 말씀을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당신은 하루에 일곱 잔 씩 믹스커피에 설탕을 두 스푼 씩 넣어 드시면서도 나에게는 매번 건강에 좋은 홍삼차나 율무차를 타 주신다. 이모님은 조카의 건강을 염려해서 매번 커피를 제외한 전통차를 주신다. 내가 이모 댁에 가면 무엇이라도 챙겨주시려고 주위를 둘러보신다. 토종닭 계란은 이종사촌 누나들을 포함하더라도 내가 제일 많이 얻어다 먹었을 것이다. 매년 조카의 생일을 잊지 않으시고 틈틈이 모으신 쌈짓돈 10만원을 내게 쥐어 주신다. 나의 만만치 않은 개인사를 잘 아시는 이모님은 항상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시며 눈물을 글썽이시곤 한다. 내가 뵈기에 이모님은 해가 바뀔 때마다 청력이 더 나빠지시고 허리가 더 굽어지시는 것 같다. 세월의 무게에 눌려 자꾸 약해져 가시는 이모님을 뵈면 이 또한 자연의 섭리라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나도 이모님의 큰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매번 출장을 갈 때마다 잊지 않고 담배 한 보루를 사다드린다. 이모님께서 해외의 유명한 담배를 거의 다 피워 보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매번 독특하고 면세점에서만 파는 담배를 고른다. 나는 이모님께 새로운 담배를 맛보시는 작은 즐거움을 선사하고자 노력한다. 이종사촌 누나와 형도 연세가 많으신데 굳이 스트레스를 받으시면서 끊지 마시라고 한다. 이모님도 수차례 금연에 도전하셨으나 금단현상에 어지러워 일상생활을 하실 수 없을 정도여서 포기하셨단다.
한 번은 내가 인도네시아에 처음으로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민속품 가게에서 나무지팡이를 봤는데 이모에게 선물을 해 드리고 싶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선뜻 샀는데 이 나무지팡이가 나와 함께한 여정이 길고도 길었다.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고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탔다. 가격은 별로 비싸지 않은데 출장기간 동안 가지고 다니는 것이 문제였다. 수 천 킬로미터를 나와 동행한 나무지팡이가 이모님의 손에 건네졌을 때 나름 뿌듯하였다. 하지만 지팡이가 무거운 편이어서 주말에 내가 동네에 올 때만 사용하신다고 어머니께서 귀뜸해주셨다.
나는 담배를 제대로 피워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남들이 담배 피우는 것을 매우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모님이 피우시는 담배는 인정하고 싶다. 이모님이 피우신 담배연기가 공중으로 하얗게 흩어질 때 이모님의 한(恨) 또한 날아가는 것 같았다. 젊은 새댁이 노 씨 집안에 시집을 왔을 때 시아버지, 큰 시어머니, 작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이모부께서 군대에 가셨다고 한다. 이모님이 겪은 시집살이는 책으로 엮어도 몇 권은 될 것이다.
동네 회관에서 아주머니들과 이야기 하시는 이모님의 말씀을 엿들을 적이 있다. 작은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물을 함부로 쓴다고 때리고, 큰 그릇에 밥을 비벼 먹어 식량을 축낸다고 때렸다고 한다. 시어머니와 시누이와 합세한 매질에 당하기도 수 차례였단다. 이모부가 제대하시고서도 구타는 이어졌단다. 어머니의 말만 믿고 아내를 때리라면 때렸다는 이모부는 과거 판 마마보이였다. 칠남매 자식들과 살기위해, 또 친정에 홀로 계신 어머니께서 걱정하실까 두려워 모진 시집살이를 질경이처럼 견디신 것이다. 이모부께서는 만년에 4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시며 이모님을 꼭 태우고 다니셨고 이모님의 모든 행동에 딴지 거는 일이 없으셨다. 젊은 날의 과오를 만회라도 하시려는 것으로 보였다.
시집살이로 힘들었던 이모님이 고통은 시작에 불과했다. 오토바이 사고로 큰 아들을 잃으시고 둘째 딸마저 폐암으로 앞세우신 이모님은 미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셨고 그때 이모부께서 담배를 권하셔서 배우게 되신 것이었다. 큰 며느리마저 이모에게 아이들을 떼어 놓고 재가하는 바람에 유치원에 들어가지도 않은 어린 손녀와 손자를 키우시게 되었다. 그 손녀가 결혼을 하고 손자가 직장을 다니게 되었으니, 이모님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수개월 전부터 큰 아들 병택이가 이모할머니 댁에 간다고 할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동네 길을 길게 돌아가곤 하였다. 하루는 이모님께 가져다 드릴 것이 있어서 이모 댁의 거실문을 열어 봤더니 병택이가 거실에 떡 하니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87세의 이모님은 손자에게 줄 율무차에 얼음까지 동동 띄워서 가져다주시는 것이었다. 이모할머니가 손자의 시중을 드는 꼴이 볼만 했다. 나는 아들에게 건방지게 할머니 앞에서 누워 있다고 나무랐는데 이모님은 내버려 두라고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이모할머니 댁에 있으면 먹을 것 계속 챙겨주시지 텔레비전 채널 권을 가지고 동생들과 다툴 필요도 없다. 매번 아침에 사라졌다가 저녁에 나타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모할머니 댁은 아들에게 일종의 유토피아였다. 한 마디로 병택이는 이모할머니 댁에서 작은 황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산해진미가 가득하고 공부하라는 사람도 없고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지상낙원이라 할 만하다. 이모님께서 즐겨보시는 ‘전국노래자랑’ 까지도 포기하시고 손자에게 리모컨을 넘기셨다.
이모님은 나에게 주셨던 사랑을 나의 아들에게까지 주고 계셨다. 이모 입장에서 보면 손자, 손녀들까지 떠나 홀로 사시는 외로운 집을 병택이가 채워주니 외롭지 않아 좋으신 모양이었다. 매일 혼자 드시는 세 끼 밥상을 점심만큼은 병택이와 함께 먹으니 좋다고 하신다. 몸은 귀찮을지언정 마음만은 행복하실 것 같아 나는 병택이에게 말썽을 피우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이러한 상황을 말씀드리니 황당해하시는 표정을 지으시면서도 이모가 외롭지 않으시니 내버려 두어도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모님이 돌아가시면 가장 슬퍼할 사람이 병택이 일 것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나 또한 이모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은 조카로서 슬픔의 크기가 엄청날 것 같다. 주말에 갈 때마다 들러 찾아뵙고 홍삼차를 한 잔씩 얻어 마셔야겠다.
이모님은 87세이고 병택이는 12세다. 75년의 시간차가 무색할 만큼 서로 도와 가며 사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둘의 모습은 마치 80년대 초반에 동네 사람들끼리 모내기 하거나 추수할 때 돌아가며 일손을 도왔던 ‘품앗이’를 보는 것 같다.
* 충남 공주 출생, ≪상상의 힘≫(2012) 수필부문 신인상,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moon5865@hanbat.ac.kr |
소중했던 시간들
진 원(CHEN YUAN)
나는 중국 유학생이다. 2012년에 한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했고, 이제는 유학생활 4년을 마치고 어느덧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써보는 글이다. 지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고, 친구들은 모임이 끝난 후 우산을 챙겨들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갑자기 나는 글이 쓰고 싶어졌다.
솔직히 나는 게으른 탓에 그동안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항상 생각나는 대로, 혹은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몇 조각의 글들을 적어 놓곤 했다. 그러나 오랜 동안 글을 안 쓰다 보니 글의 퍼즐 맞추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시간의 퍼즐을 맞추기가 두렵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씩 맞추어 나가다 보니, 이제는 한국의 생활에 익숙해졌고 그 어색했던 시간들과의 만남이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제는 시간에 끌려가기 보다는 나 스스로 시간을 조절하고 계획하는 사람이 되었다. 몇 시에 무엇을 하고, 몇 분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해놓고 일정에 따라 일과를 보내고 있다.
나는 외국인 전용 유학생 기숙사에서 3개월 동안 살았다. 그러면서 국제교류원 한국어연수 과정에서 한국어 1급 과정부터 3급 과정까지 이수했다. 8개월의 한국어교육과정을 마치고 나는 마침내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의 기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처음에는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처음 3개월 동안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이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보람과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더 열심히 한국어의 기초 발음과 쓰기를 매일 연습하고 그 과정에서 배움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면서 멀어졌던 책에게도 점점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책을 통해서 나는 다양한 감성과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나이와 성별에 따라 각자의 의견이 다를 수 있기에,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의 소중함도 알았다. 또한, 책은 사회생활을 함에도 유용한 학습 자료가 되어 주었다. 가족, 친구, 친척, 이성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려주고 소설이나 드라마를 통해 사회를 간접 체험 할 수도 있었다.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친절과 예의는 내가 중국에 돌아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실천해야 할 덕목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노약자나 경로인에게 자리를 양보 해 주는 미덕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가족 또는 친구와 공유하며, 한국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들을 중국에 돌아가 유용하게 사용하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의 생활들은 나의 삶에 있어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기에 나의 미래는 반드시 밝을 것이라 확신한다.
* 中國 陝西省 西安市 出生, 한밭大 視覺디자인學科 4, benbenkorean@naver.com |
또 다른 도전을 향하여
유 아 남
2011년 9월 27일. 나는 아직도 이 날짜를 기억하고 있어요. 그날은 바로 내가 처음 한국에 온 날이었어요.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벌써 4년이 흘렀어요.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를 회상해보니 내 기억 속에 있는 한국의 이미지는 참 아름다운 것 같아요. 한국 드라마에만 나오는 것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한국은 모든 것이 낭만적이었어요. 나는 한국의 모든 것들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어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내가 한국말을 못하므로 아무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 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한국에 도착하고 나서 우리는 학교 기숙사를 배정 받았어요. 그 때 한국에서 유학하는 많은 선배님들을 만났어요. 처음 학교기숙사에 들어가 보았을 때 생각보다 훨씬 좋았어요. 기숙사를 배치 받고 나는 좋은 환경에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한국말을 배우는 과정이 너무 어려웠어요. 우리와 같은 시기에 한국에 온 다른 도시 중국 친구들은 이미 미리 중국에서 한 동안 한국어를 배우고 왔었어요.
첫날 수업을 들었을 때 나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전혀 못 알아들었어요. 나는 너무 좌절감이 컸어요. 그때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어요. 어쩔 수 없이 나는 수업이 끝난 후에 선생님을 찾아가서 부탁했어요. 수업 중에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한 번 더 가르쳐 달라고 그렇게 말했어요. 여기서 다시 한 번 그때 나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요. 그 분들이 정말 나에게 큰 도움을 주셨어요. 말은 서로 통할 수 없었지만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어요. 그때까지도 한국말을 한 마디도 못 했던 나는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주변 친구들과도 조금씩 어울릴 수 있게 되었어요. 또한, 예전에는 내가 한국드라마를 전혀 못 봤는데 친구들을 따라서 같이 한국 드라마도 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점점 한국어도 재미있어졌어요.
그렇게 1년 동안 한국어를 배우고, 우리들은 입학시험 준비를 시작했어요. 같이 한국에 온 친구들 모두 순조롭게 입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나는 운이 너무 좋아서 시험을 잘 보고 통과했어요. 하지만 또 한 가지 고민이 생겼어요. 무슨 전공을 선택할까?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 내 마음속에는 일본어를 배우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나는 일본의 문화와 언어를 너무 좋아했었고 그와 동시에 내 꿈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거였어요. 하지만 다시 깊이 생각해보니 일본어 보다는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어요. 나는 공업디자인학과 면접을 보고 드디어 디자인학과에 들어갔어요.
그렇지만 우리 전공은 생각했던 것 보다 배울 게 훨씬 많았어요. 더구나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나에게는 정말 재앙이었어요. 그때는 당연히 한국말도 전혀 못 했어요. 내 성격은 원래 수줍음을 많이 타는 편이어서 처음 한국 친구들과 사귀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게다가 첫 번째 전공 과제를 받았을 때 교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과제도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 교수님은 별 말씀을 안 하셨지만 나는 두 번째 과제부터는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바로 옆 한국 친구들에게 물어보았어요.
우리 반에 외국학생은 나 혼자 뿐이에요. 한국 친구들은 학기 초부터 내가 중국인인줄 몰랐다고 했어요. 내가 중국인임을 알고 난 후부터 다행히도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4년 동안 내 옆에서 도와 준 한국 친구가 있어요. 항상 내가 공부하는 중에 문제가 생기면 다 도와줬어요. 비록 처음에는 서로 유창하게 대화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자주 한국친구들과 만나고 그렇게 내 한국어 실력도 향상되었어요. 그리고 학교에서 하는 활동도 많이 참가하고 관심 있는 동아리에도 들어갔어요. 나는 한국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고, 공부하고, 학교생활에도 충실했어요. 하지만, 전공지식을 배워가는 도중 이 전공은 나의 원래 생각과는 좀 다르다고 느끼기 시작했어요. 디자인은 재미있지만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관심만 갖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노력이 따라야 했어요. 내 주변의 중국 친구들은 학교 공부뿐만 아니라 아르바이트도 대부분 같이 해요. 그들을 보고 나 자신을 돌아보면 그들보다 훨씬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고향에 있는 부모님께 걱정 끼쳐드리지 않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4년 동안 혼자 밖에서 자취생활을 하면서 많이 성숙해졌어요. 이 4년 동안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너무나 감사해요.
이제 나는 이미 졸업을 했고, 지금은 미래 인생의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에요. 아는 오빠 언니들이 많이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고 그들은 나에게 같이 한국에서 공부하기를 권해요. 계속 한국에 있게 된다면 내가 4년 동안 지낸 나라이므로 여기 있는 사람들과 문화에 익숙하고 편해서 좋겠지만, 나는 좀 더 먼 곳에 가보고 싶어요. 그리고 다른 문화도 좀 더 경험해 보고 싶어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아요. 아마 더 재미있는 일이 생길 수 있을 지도 모르죠.
* 中國 江蘇省 盐城市 出生, 한밭大 工業디자인科 卒業, hanny789@naver.com |
좋은 선택을 하라
장 몽 우(ZHANG MENGYU)
요즘에 드라마 ‘운빨로맨스’를 보고 있는데 운명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느냐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사람은 서로 출신이 달라서 운명도 다른 법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끝임 없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결과는 항상 시작할 때부터 결정이 되기 때문에 좋은 시작을 해야 한다. 따라서 좋은 시작은 바른 선택에 달려있다.
인생은 ‘B, C, D'와 같이 세 문자로 요약할 수 있다. B는 Birth(출생), D는 Death(사망)를 의미 한다. D는 어느 정도 B와 큰 관계가 있다. 그리고 'B to D'의 과정에서 중요한 Choice(선택)가 수반된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에 직면해야 한다. 주관적으로 원하는지 안 원하는지,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무슨 수단과 방법을 쓰는지와 같은 순간을 피할 수 없다. 결국 자신의 상황에 따라 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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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자신이 성취할 수 있을지를 확인하는 시금석이다. 험한 길을 걸어도, 미래가 어두워도 겁 내지 않고, 용감하게 선택해야 운명을 밝게 만들 수 있다. 인생은 기구한 일방통행로며 많은 갈림길이 있다. 그러므로 신중한 선택은 새로운 시작점이 되고, 올바른 선택은 성공의 모멘트가 될 수 있다. 반대로 경솔한 선택은 결국에 인생의 실패를 부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선택을 하고 나서 서로 반대의 결과를 얻었다. 젊었을 때의 뒤마는 넥타이조차도 살 수 없는 백수였다. 하지만 그는 운명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와신상담하면서 문학 창작을 선택하였다. 결국에 <삼총사> 라는 작품으로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졌다. 하지만 돈과 명예 앞에서 무너지고 만년의 뒤마는 주색에 빠지게 되었다.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함에 따라 생활도 어려워졌다. 서글픈 종말로 그의 작품도 빛을 잃었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선택은 어려움과의 전투이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을 선택하는지에 상관없이 반드시 고통과 괴로움을 거쳐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어려움을 극복해서 목표를 이루는 일이다. 기왕 생활이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으니, 우리는 그 기회를 붙잡고 신중하게 좋은 선택을 해야 올바른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출신, 지식, 능력 등이 다 다르다. 그런데 유한한 지식과 남보다 부족한 능력을 가진 우리가 난관의 절벽을 마주 했을 때에 도전을 선택할 것인가 도망을 선택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다. 성경 ‘마태복음’에서 이런 비유를 발견할 수 있다.
한 주인이 외국으로 떠나기 전에 종들의 재능대로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와 한 달란트를 맡겼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자는 장사를 하고, 또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다. 하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했다. 결국에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자는 칭찬을 받고, 주인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반면에 그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주인에게 훈계를 받고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마태효과는 바로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는 말씀에서 나온다. 사회 속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흔히 볼 수 있고 사람들이 저것은 운명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요인은 운명이 아니고 선택이라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기회는 조금만 늦어도 사라져 버린다. 두려움과 망설임 때문에 선택을 놓치거나 포기하는 것은 인생에서 무책임하고 미래를 배신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포기라는 것이 반드시 나쁜 선택만은 아니다. 인생은 많은 단답형 문제로 가득한 시험지라고 비유 할 수도 있다. A를 선택하려면 BCD를 다 포기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선택항을 포기하는 것이 선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며 온 시험지를 포기하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잘못 선택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그 잘못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뒤 문제의 해답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태어남과 죽음을 통제할 수 없지만 'B to D'의 인생 과정을 예쁘게 꾸미기 위해서 자신 있게 좋은 선택을 해야 한다.
* 中國 安徽省 滁州市 出生,한밭大 建設環境工學科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