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홀(彌鄒忽)은 현재의 인천 입니다
공산성 공북루(북문)
백제역사유적지
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 진남루와 임류각과 영동루를 찾아서~
백제 목곽고의 안내문
백제 연못의 안내문
백제 연못
쌍수정의 이야기
조선 시대, 1624(인조 2)년 정월에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이괄이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우대받지 못하고 평안 병사(兵使) 겸 부원수로 좌천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반란이 실패하자 일부가
후금(後金)으로 도망하여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였는데, 이것이 1627(인조 5)년에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2월 이괄의 난으로 한양이 함락되어 조정에서는 2월 8일에 인조가 공주(公州)로 피난 가는 일을 논의하여 남행을
결정하여, 2월 16일 공주에 당도하여 공산성 쌍수정에 머물다가 난이 진압된 2월 22일에 한양에 돌아가게 되었다.
쌍수정은 공산성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자 입니다
쌍수정은 1624년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켜 인조가 남쪽으로 내려와 공산성에서 피난하고 있을 때 두 나무에 기대어 멀리 북쪽
궁궐을 바라보았는데,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에 두 그루의 나무에 금대와 통정대부의 작호를 내린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자이다. 이는 1788년 관찰사 홍억(洪檍)이 지은 쌍수정 중수기에 잘 보인다.
중수기에 따르면 인조가 쉬었던 두 그루의 나무가 죽어 옛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자
옛터를 기념하기 위하여 관찰사 이수항(李壽沆)이 1734년(영조 10)에 쌍수정을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1787년(정조 11)에 관찰사 홍억이 대지를 평탄하게 한 후 다시 건축하였으며, 고종 1903년 (광무 7)에는 관찰사 홍승헌(洪承憲)이
다시 수축한 것으로 전한다. 이후 1947년 공주읍 보승회의 주관으로 중수하였으며
1970년에는 옛 건물을 전면 해체하여 새로 복원하였다
공산성 쌍수정은 원래 2층의 누각이었고, 누각 주변에는 담장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현재 복원된 쌍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공계통 건물로 원형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쌍수정 뒷모습
쌍수정 사적비
백제 목곽고를 지나 성곽으로 갑니다
추정 왕궁지에서 성곽따라 진남루로 갑니다
추정 왕궁지에서 금서루로 이어진 성곽
추정 왕궁지에서 진남루(남문)로 가고 있습니다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오전 07시 10분에 출반하여 공주를 경유하여 부여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공산성회전로터리에서 하차하면서
버스에 휴대폰 두고 내려는데 다행히 부여에 도착한 버스기사님과 통화를 하였는데, 오전에 부여를 출발하여 서울동서울터미널로
운행할적에 오전 11시45분 공주를 경유한다 하여 나는 공산성에서 공주종합터미널은 거리가 멀고 불편하니 가까운
공산성정류소 이곳에다 맡겨 두었으면 하는 바램을 중언부언한 곳 입니다
뒤돌아 보았습니다
오른쪽으로 추정왕궁지와 쌍수정이 있는 곳 입니다
진남루로 진행 방향 입니다
진행 방향 입니다
뒤돌아 보고~
뒤돌아 보고~
진남루 남문 입니다. 송산리6호분 사신도에 남문은 주작이 그려저 있습니다
봉황 모습에머리는 닭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그린 그림이랍니다
앞쪽 깃발엔 주작을 그린 그림으로 두 날개를 활짝 펼친 붉은 봉황이다
뒤쪽 깃발은 황토기 입니다
황토기는 임금을 상징하는 황룡을 그린 황룡기라 합니다.
금서루, 진남루, 영동루, 만하루, 공북루 좌우에 1기의 깃발이 게양되어 있는 것은 왕궁이 있었다는 공산성 문루에
백제의 왕을 상징하는 뜻이랍니다
진남루는 원래 1903년(고종 40)에 관찰사 홍승헌(洪承憲)이 수리하였다. 그 뒤 45년이 지난 1948년에 붕괴된 것을 공주읍장과
읍민들이 새로이 중건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1971년에 모두 해체하였다가 원래대로 복원한 것이다.
진남루에서 쌍수교 밑으로 영은사를 갈 수 있지요.
영은사에서 금강이 유유히 흐르는 곳으로 바라보면 만해루와 연지가 있습니다
왕릉 사신도 남쪽 벽면에는 주작이 그려저 있지요. 주작은 봉황과 닭의 모습을 형상화한 그림이랍니다
앞쪽 주작 그림은 봉황과 닭의 머리를, 뒤쪽 주작 모습은 달의 모습 입니다
토성(土城)이였던 공산성을 조선 초기에 석성(石城)으로 다시 쌓으면서 건립한 건물로 진남루는 공산성 남쪽 문의 누각으로
여러 차례 고쳐지었으며 1971년에 해체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진남루(남문) 누각 입니다
진남루에서 영동루로 이어지는 성곽은 가파르게 오르는 성곽 입니다
1971년 전면 해체하여 원형대로 복원한 진남루를 성곽 밖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성곽밖에서 바라본 공산성과 송산리6호분 사신도에 그려진 주작 깃발 입니다
진남루 출입구에서 성안을 바라 보고~
성안에서 바라본 진남루
쌍수교를 지나 12각 건물지로 가 보겠습니다
12각 건물지라~
12각 건물지에서 쌍수교를 거처 진남루 갑니다
12각 건물지에서 쌍수교를 지나 진남루에 왔습니다
진남루에서 영동루로 진행하는데 가파른 계단 오름길 입니다
공주 시내에서 진남루로 이어지는 통로 입니다
깃발 한쪽면는 닭의 형상을~ 반대편 면에는 봉황의 형상을 그린 주작 입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와서 뒤돌아 보았습니다
진남루 방향 입니다
진남루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성곽위에 쉼터를 만들어 두었군요
가파른 계단을 올라왔으니 당연히 쉬어 가야지요
성곽위의 쉼터에서 영동루(동문)로 진행하다
왼쪽으로 임류각지가 보이는군요
임류각이 있었던 자리 입니다
복원된 임류각은 임류각지에서 조금 떨어진 높은 위치에 복원되어 있습니다
백제 동성왕 22년(500년)에 이곳 자리에 임류각을 지어 왕과 신하들이 연회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임류각이 있었던 자리 입니다
공산성 강당지
1989년 발굴 조사를 통해 발견된 건물터로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백제를 병합한 이후 공주에 9주 가운데 하나인 웅진주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만들어진 관청 건물로 보인다
평면적이 910㎡ 이상으로 규모가 크다.
건물의 기초부에는 백제시대에 바닥면을 다진 층이 남아 있고, 기둥을 받친 40개의 주춧돌 중에 19개가 원상태로 복원되었다
임류각
현재 복원되어 있는 임류각 장소는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에 지은 건물(임류각) 위치가 아니랍니다
임류각 2층 누각
명국삼장비
명국삼장비 곁에서 바라본 금강 그리고 밤꽃이 하이얏케 만개한 모습니다
명국삼장비
임류각
임류각
임류각지, 공산성 강당지, 공산성 장대지, 복원된 임류각, 명국삼장비를 둘러 보고 성곽으로 왔습니다
영동루(동문) 성곽 깃발에 그려진 동물은 청용이랍니다
공산성의 깃발이야기를 꼭 읽어 보세요?
꼭요~
웅진백제역사관 실내에서는 카메라로 촬영하였는데 촬영기술이 부족하였습니다
실내에선 휴대폰 카메라가 아주 좋은데, 오전 09시에 버스에 두고 내렸던
휴대폰은 뭐가 잘못되어 공주종합터미널에서 오후 2시에 다시 전화해 보라고 합니다. 현재 시간은 정오 12시 03분 입니다
동하총(1호분) 석실 내부의 천장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그려저 있는 벽화 입니다
동쪽에는 청룡, 서쪽 벽면에는 백호, 북쪽면에는 현무가 그려저 있습니다
(아래 사진 2장은 부여 능산리고분군 동하총에서 발견된 사신도 입니다)
사신도(四神圖)란
사방의 별자리를 상징적인 동물상을 나타내며 방위를 지키는 신(神)인 동(東)쪽에는 청룡(靑龍)을, 서(西)쪽에는
백호(白虎)를, 남(南)쪽에는 봉황과 비슷하게 생긴 주작(朱雀)을, 북(北)쪽에는 뱀이 거북을 감고있는 현무(玄武)를 그린 그림
부여 송산리6호분 동쪽 벽면에 그려진 청룡
영동루(동문)부터 광복루 옆 성곽까지는
백제시대 때 쌓은 467m의 토성(土城)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뒤돌아본 영동루
현재 일부 수정을 하고 있습니다
백제역사유적지 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
영동루에서 광복루까지 백제시대의 토성을 걸으며~ 3부로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