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의 내용과 저자소개
“설교의 성패 요인은 설교자의 열정입니다.
이 책은 설교를 잘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영적으로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는가, 설교를 듣는 대상들을 향해 어떤 열정을 가져야 하는가, 설교자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어야 하는가와 같은 부분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통찰을 보여 줍니다. 설교자는 강의실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산실에서 태어나는 것을 강력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저자 김남준 : 총신대학원(M,Div.,Th.D.cand)졸업. 대신대학 신학부 선임강사 역임. 현재 기독신학대학 조교수로 재직중이며, 열린장로교회를 말씀으로 섬기고 있는 저자는 특별히 영적인 각성과 참된 부흥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 일에 헌신하고 있다.
저서로는 [창세기의 신앙 부흥] [십자가]외 다수.
대표적인 역서로는 J.Gilles의 [18세기 위대한 영적부흥(상,중,하)와 C.E.Dargan의 [설교의 역사](1,2,3)]가 있다.
저 자 서 문
설교자로 부름받은 사람에게 가장 커다란 보람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설교를 통하여 회중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설교를 통하여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는 것이 그의 꿈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교회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혼란 중 가장 교회를 어렵게 하는 것은 가치관에 대한 혼돈입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오래도록 사용해 오신, 설교라는 은혜의 방편이 자기 자리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를 소유한 신적인 기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을 포함해서 모든 세상 사람들은 그 교회가 가르치는 성경 진리를 깨닫지 않고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속에는 이러한 ‘깨닫게 하는 요소’ 보다는 ‘느끼게 하는 요소’와 ‘즐기는 요소’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뒤틀린 교회의 현실 뒤에는 마땅히 설 자리를 잃어버린 강단과 불타는 복음 진리를 잃어버린 냉담한 설교자가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 한복판에는 잠든 교회가 있었고 잠든 교회 한가운데는 선포를 잃어버린 강단이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적힌 몇 편의 글은 제가 성경을 읽으며 설교자의 정체와 삶에 대한 생애적인 도전을 받았던 내용입니다. 때로는 본문이 주는 도전과 용기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기도 하였고, 때로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도무지 설교자라고 불릴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한 삶과 복음에 대한 천박한 이해를 인하여 가슴 아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역시 살아 있어서, 어떤 경우든지, 설교자로서의 외길을 걷기 원하는 저에게 말할 수 없는 깨달음과 유익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춤추고 노래할 때가 아니라, 진정으로 춤추고 노래할 때가 오게 해달라고 탄원하며 말씀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서 론
소쩍새 우는 사연
사람들은 모두 국화꽃 피우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강해 설교 세미나”, “목회자 세미나”, “강해 설교 방법론 강좌” 등의 내용을 한 현수막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 시간표는 온통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 강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붐이 조국 교회 강단으로 하여금 설교의 능력을 회복하게 하는 데 얼마나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배울수 없는 설교
과연 그런 열심히 그 사람의 설교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만으로 잠들어 있는 교회를 깨우고 각성이 필요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현격한 영적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 사역이 가능할까요? 중요한 것은 성경을 잘 가르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설교자 자신이 변하지 않는 한, 설교를 변화시켜 보려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학습과 훈련을 통하여 설교가 세련되고 형식은 틀이 잡힐 수 있지만, 설교의 영적 수준을 높이는 것은 그런 식의 방법론의 추구만을 가지고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변화된 설교자는 변화된 시각으로 성경을 보게 되고, 그렇게 변화된 시각으로 성경을 보게 될 때, 변화된 설교 내용이 나옵니다. 그 변화된 설교 내용이 변화된 설교자의 심령을 통하여 선포될 때, 변화된 설교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소쩍새 우는 사연
눈에 보이는 사건 뒤에는 보이지 않는 사연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피어난 국화꽃을 바라보는 데 마음을 기울였지만, 사실 그 꽃은 자신의 모든 아름다운 탄생을 울다 울다 피 쏟고 죽어 간 소쩍새에게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연 있는 선지자
설교자라고 모두 같은 설교자는 아니듯이 구약의 선지자도 다 같은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중에는 삼류 선지자도 있었고 일류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요나 같은 사람은 삼류 선지자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같은 사람은 일류 선지자라고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그는 선지자로 소명 받았을 때, 목회의 성공을 꿈꾸며 슬퍼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설교를 생각하면서 절망했던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 앞에 드러나 비천한 자신의 죄악된 모습 때문에 절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엄한 영광과 비루한 인생의 죄악이 한자리에 공존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영적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심판에 대한 두려운 각성을 가져다 주는지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세례 요한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어느 날 요단 강변에 나타나 설교를 한 편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흐느끼며 감격했습니다.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감격했고, 포악한 군병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 설교 자 앞에 엎드러졌습니다. 간악한 세리들이 그의 설교 앞에서 그 마음이 물같이 녹아졌습니다.
세례 요한의 인생은 그런 설교 몇 편 남기고 이슬처럼 사라져 간 생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 몇 편의 설교를 위하여 그는 삼십년 가까운 세월을 광야에서 외롭게 지냈습니다. 그는 그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까지 설교자가 되기 위한 영적 준비의 사연을 적어 가고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준비
바울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사도였습니다. 신령한 것으로 말하자면 삼층천을 보았고, 권위로 말하자면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직접 뵈온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그는 아라비아 광야로 갔습니다. 삼 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추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심령이 강하여져 갔을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외로운 광야에서 홀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시 광야로 들어가셔서 밤낮 사십 일을 금식하며 지내셨고, 복음 사역을 위한 영적 준비의 칼날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후에 취임 설교를 하기 위하여 나사렛으로 돌아가셨을 때,(눅4:14-15)주님의 첫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자신들이 알던 하나님과는 다른 차원의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설교였습니다.
설교자를 만드시는 하나님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세우지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설교자와 오로지 훈련으로만 만들어지는 설교자는 차이가 있습니다. 훈련으로만 만들어지는 설교자는 언제나 훈련의 내용들을 주목하고, 자신의 설교만을 가지고 고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시는 설교자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가지고 고민합니다.
그들에게는 단지 설교만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거룩한 고뇌와 경건한 슬픔과 격렬한 영적 투쟁이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며, 설교의 변화가 아닌 자신의 영적 변화에 생사를 겁니다. 기술 문제가 아닌, 신앙 문제에 혼신의 힘을 쏟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우시는 설교자와 훈련으로 만들어진 설교자의 차이점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오직 자신을 울리는 하나님 때문에 흐느끼는 것이며, 그들의 눈물은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 가득히 인정받지 아니하는 현실을 인하여 통곡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남이 알 수 없는 아픔과 고통 속에서 홀로 하나님 면전에 서서 하나님을 끝없이 추구하는 가운데, 먼저 설교자 자신이 변화되는 역사를 체험케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만드시는 방법니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영적 준비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들이 배우는 모든 설교의 이론들과 학습들은 생명 없는 가화(假花) 조작들을 지어 내는 도구로 전략하고 말 것입니다.
설교자를 깨운다
이제 우리는 복잡하게 돌아가는 제도와 쉴새없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를 찾아서 분주하던 삶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세우시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 교회, 진리에 대한 신념을 상실해 가고 있는 냉담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상태의 개벽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오직 참된 영적 부흥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설교자들이 깨어나지 않는 한 교회의 수면 상태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온 땅에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가득하게 되는 세상을 보기 전까지는 기도하기를 쉴 수 없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숨을 건 선포 속에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하나님의 공의와 잃어버린 세상을 향한 눈물겨운 사랑이 불꽃처럼 죄인들의 가슴속에 섬광과 같은 각성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교회는 영광스럽게 그 모습을 회복했고 뒤틀린 기독교 신앙도 신약성경의 신앙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높아졌습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높이 들리운 하나님의 이름을 인하여 기뻐하였고, 하나님은 당신을 바라보며 감격해하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로 말미암는 참된 부흥(revival)입니다.
잠들었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깨어나는 이러한 위대한 영적 각성 한가운데는 언제나 하나님이 깨우신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흔들어 깨우시려는 한 사람의 설교자, 그가 바로 당신일 수도 있습니다.
제1장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 주신 사람
“제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이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왕의 사로잡힌 지 오년 그 달 오일이라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겔1:1-3)
[에스겔의 소명 체험을 통하여 설교자의 소명 체험을 살펴보고, 설교자는 결코 훈련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을 깊이 체험함으로써 태어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오늘날 설교가 회중들에게 신령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원인을 생각한다].
선지자 에스겔(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는 뜻)은 옛 시대와 새 시대 사이에서 구속사의 물줄기가 만나는 중요한 시점에서 선지 사역을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의 사역은 왕국의 신속한 회복을 소망하던 대중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예언적 비판이었습니다. 그는 주전 593-571년경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포로들이 유다로 속히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때, 낙관적인 사고를 가진 선지자들의 활기 찬 설교는 소망을 부채질하였으나(실상 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예루살렘에 보다 완전히 쏟아지려는 찰라에 평강의 메시지로 사람들을 기만한 자들),
에스겔은 그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에스겔은 그들의 거짓말의 실상을 폭로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보내심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에스겔 선지자의 메시지를 불신하였고, 심지어 비웃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속담으로 선지자의 훈계를 무시하였습니다.(겔12:22).
그는 바벨론 남쪽이자 니푸르 북쪽 유브라데 강의 하수로인 그발 강가 텔아빕의 유대인 식민 지역에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그가 만약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와 함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을 것),에스겔과 함께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도 고달픈 노역이 끝난 저녁이면 강가에 모여서 고향 잃은 시름을 달랬던 것 같습니다.(시137:1-2).
오늘 에스겔이 선지자로 소명을 받은 것도 그발 강가였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역사의 한 장면입니까?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부름을 받게 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이 예루살렘도 아니고, 유대 땅도 아닌 이방의 그발 강가였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스라엘도 망하고 유다도 패망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사로잡혀 갔고 국권은 껍데기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의 땅,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역사는 기울어도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구원섭리는 이렇게 선지자를 세우심으로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현실을 직시하되, 현실보다는 그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설교자를 세우고 계시는 한, 그 시대의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 교회사에 필요한 사람들은 자신의 비전을 가지고 단지 제도 속에서 양산된 많은 일꾼들이 아니라, 이 세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답게 전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 추방되어야 할 가장 커다란 악 중의 하나는 무지입니다. 설교자들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여, 설교하도록 부름받은 자신이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행하는 오해
설교에 대한 연구는 설교를 보다 세련되게 해주고, 설교 행위에 한 연습은 설교라는 기능 자체를 숙달된 행위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가 깊고 폭넓게 되는 것은, 결코 이러한 훈련이나 학습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리를 가르침에 있어서 설교가 깊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완전에 가깝게 드러낸다 의미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인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은 자극을 받거나 밝혀지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열을 더 많이 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도 설교나 해석에 의해 그것을 읽을 때보다 듣는자의 가슴에 불꽃을 더 크게 일으킨다.
하늘이 열리며..
그가 소명을 받을 때 가졌던 영적 체험은 먼저 하늘이 열리는 사건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겔1:1) 하나님은 에스겔로 하여금 먼저 하나님 자신의 임재와 영광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준비시키셨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의 체험처럼).
이 모두 하늘로부터 오는 체험이었습니다.
소명체험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하늘을 열어 주시는 영적인 소명 체험을 통해서, 그는 단지 남이 갖지 않은 신비 체험만을 소유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 열려진 하늘을 통하여, 계속되는 배교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고 이방 가운데 포로로 사로잡혀 이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전수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엎드러졌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심을 소명 체험을 통하여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기와 자신의 민족들이 너무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고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은 설교가 바뀌기 전에 먼저 설교자 자신이 변화되는 체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설교자와 영적 체험
우리는 마땅히 단지 듣고 배운 성경의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설교가 하나님 자신의 음성이 되어야 하며, 우리 안에 깊이 체험된 진리로서 설교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설교자 속에 일어나는 영적 체험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함께 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인격에 대한 깊은 체험이 동반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설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설교 사역을 보십시오. 그들은 언제나 진지했고 한 번도 되는 대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격력한 반대와 핍박 속에서도 그들의 설교가 조금도 유연해질 수 없게 만들었던 그 모든 연단된 강직함의 뿌리,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 순교까지 불사하게 만들었던 그 모든 단련된 꿋꿋함의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소명하면서, 이 같은 영적 체험을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그들의 영혼 속에 깊이 각인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대언의 영, 하나님의 마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대언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이 시대를 아파하고 그리스도와 같은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며, 그리하여 설교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좁힐 수 없으리만치 현격한 차이가 나는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한 선지자적인 시각과 시대를 향한 예언자적인 전망들을 보여 주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일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설교자로 부르신 소명의 체험입니다.
뼈 속의 불길
“설교하도록 부르시는 소명의 체험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는 설교해야 한다. 그것은 그의 뼈 속의 불길과도 같아서 불꽃이 밖으로 퍼져 나가기 전에는 견디지 못하리라. 친구들이 판단하고 적들이 비난하며 사람들이 조롱하며 비웃을지라도 그는 굴복하지 않는다. 하늘로부터 부르심을 입었다면 그는 설교해야만 한다.
그 사람의 마음을 하늘이 움직였는데 누가 그를 멈추게 할 것인가? 나타나신 하나님이 움직이신 자를 누가 방해할 것인가?”......(스펄전)
이 시대의 교만한 백성들과, 허기진 영혼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부요한 사람들을 거룩한 고뇌에 번민하며 자신의 삶을 복음 앞에서 돌이키도록 만들어 주지 못하는 무능력은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보다도 선지자들의 생애 속에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 사역에 대한 긴박감과 다급함들이 강단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은 설교자의 영적 체험의 부재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설교자의 이해가 경박하기 때문입니다.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이 설교자 자신을 사로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깊은 골짜기를 돌아오는 메아리가 울림도 깊습니다.
설교, 하나님의 음성
오늘날, 설교를 들어도 모호한 반응을 보이는 수많은 회중들의 불분명한 태도는 설교자로부터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설교는 언제나 분명한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롤 부름받은 사람의 최대 관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고 분명히 회중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대치할 수 없는 사명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는 포로생활을 통하여 민족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그들을 회복하게 하실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를 향하여 당신의 분명한 음성을 들려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시대 정신 속에 깃든 편견과 그릇된 열심과 빗나간 목표 의식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르게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설교 잘하는 방법을 습득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관심을 설교 내용과 회중들에게 집중시킵니다.
아아, 얼마나 자주 우리의 본질적인 소명이 부차적이고 사소한 일들에 의하여 곁으로 밀쳐집니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우리를 부르신 설교의 소명 앞에 충실하지 못하는 형편에 대한 이유와 변명을 늘어놓는데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모든 빗나간 사역으로부터 견져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특별한 설교자
오늘날 교회 속에서 느껴지는 영적 무감각과 고통스러운 영적 수면 상태, 그 진원지가 설교단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설교자, 그는 결코 침묵 가운데 설교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침묵 이상의 반응을 일으킬 수 없는 설교를 통하여, 어떻게 성도들이 이 어둡고 험악한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서 그리스도를 알리는 증인으로서 매일의 삶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설교 방법들을 배우고 스피치(speech)기술을 익히러 다니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설교자들이 자신의 설교는 고치려 하지만 자신을 고치려고는 하지 않는 한, 그들이 섬기는 강단으로부터 변화된 수준의 설교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대면한 사람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 모세가 뛰어난 선지자였던 것은 하나님이 친히 대면하여 말씀해 주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영적인 교통의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그의 말을 다른 모든 선지자들의 말보다 권위 있게 하였고, 그의 설교는 뚜렷이 구별되었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설교자들이 먼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의 수준과 상태에 대하여 깊이 점검하고 반성할 때에만 그들이 자신의 설교 내용에 대하여 갖는 불만이나 변화의 소망들이 가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말씀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영적 관계 속에서 임한 사실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설교 내용을 가지고 고민하기에 앞서서 먼저 설교하고자 하는 진리와 기독교 신앙의 도리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인하여 고민하여야 합니다.
피로 물든 모자
종교 개혁 이전의 개혁자였던 이탈리아의 설교자 기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의 영적 삶은 이 같은 사실에 대한 좋은 예가 됩니다. 그는 14세기에 접어든 후 더욱 부패해진 로마 교회 아래서 온갖 향락을 즐기며 타락해 가는 조국 이탈리아를 향하여 설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혼인 미사를 올린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방종은 실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화려한 종교 행사와 더불어 광란의 축제가 함께 벌어 졌습니다. 백성들은 독재 정치와 교황권의 폭압 아래서 자기 동포들의 자유가 박탈되어 가는 것도 모르는 채, 온갖 사치와 방탕에 젖어 있었습니다.
멸망을 향해 치닫는 조국 이탈리아 역사의 비탈길에 서서 그는 플로렌스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죄악의 도성 플로렌스를 하나님이 멸하시리니 회개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추기경의 자리를 주겠노라고 제의하던 로마 교황을 향해 추기경의 붉은 모자보다는 차라리 순교의 피로 물든 붉은 모자를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결국 1498년 어느날, 적들에게 체포되어 목 졸려 죽은 뒤 화형당하여 한줌의 재가 되어 아르노(Arno) 강물 위에 뿌려졌습니다.
그러나 1485년부터 그가 설교하던 두오모(Duomo) 교회당에서는 매시간 불 같은 메시지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목숨을 건 용기와 도전 속에서 외치던 그의 선포는 정치 지도자들과 성직자들과 시민들의 부패한 삶을 하나님 앞에 눈물로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청중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들고 각성된 그리스도인들이 한밤중부터 교회문 앞에서 줄을 서서 예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회중들은 이제껏 보지 못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결코 미소를 띠신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갇혀 있는 나약한 하나님이 아니라, 순결을 상실해 버린 교회를 향하여 진노하시는 엄위로우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실 삼아 방종으로 흘러 버린 천박한 교회를 향한 심판의 위험 앞에 성도들은 사무치는 두려움으로 눈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악속에 잠든 백성들을 깨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면전에 데려다 주었던 설교자, 사보나롤라는 한줌의 재가 되어 강물을 따라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에 대한 각성을 외친 그의 설교는 다음세대에 도래할 종교 개혁을 알리는 횃불이 되어 칠흑 같은 중세 교회사에 찬연히 타올랐던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삶에 대하여 한 전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깊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깊은 기도는 필연적으로 기도 시간의 연장을 가져왔는데, 무릎을 꿇고 간절히 드리는 그의 기도는 대체로 대여섯 시간씩이나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기도하고 일어나서 말씀을 강론하기 위하여 단상에 오르는 그의 얼굴에서 밝은 광채가 발하여 회중들이 그 빛을 뚜렷이 의식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감동으로 설교하였던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과 특별한 교통을 누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 삶을 돌아보라
설교는 언제나 설교자의 인격과 영성에 매입니다. 무릇 설교자의 사람됨이 경박하면 그의 설교도 그러하고, 그가 경건하면 설교도 그러합니다. 설교자가 헌신된 인격을 가진 사람이면 그가 헌신을 설교할 때 언제나 설교는 빛을 발합니다. 그가 거룩하고 신령한 영적인 세계 속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특별히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설교는 특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대한 설교자들의 명성을 바라보면서 마치 배우 지망생이 은막의 스타를 보며 마음 들떠 하는 것처럼 들떠 하는 대신에, 그들이 누렸던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와 영적 삶을 누리며 닮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사모하고,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면 거기에 설교자로서의 모든 목표와 비전을 걸고 매진하는 내면의 생활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두 번째 도전입니다.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은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간 지 약 사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설교자를 세우시는 일이 언제나 학식 높은 사람들이 있는 명문 대학이나 유명한 신학교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설교자들을 부르시는 것일까요?
그발 강은 나일(Nile)과 같이 커다란 강이 아니라 니푸르 지방에 있는 유프라테스 동쪽 지류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샛강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수도나 번화한 도시나 왕궁이 아니고, 왜 이 한적한 샛강가였습니까?
광야의 사람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로 하여금 말씀을 증거하는 자로 부르시는 장면들을 유의하여 보십시오. 소명의 영적 체험과 부르시는 장소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있습니다.
모세는 오랜 세월을 광야에서 자신이 가졌던 비전을 포기하며 인고의 세월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호렙산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인적이 끊기고 아무도 와 줄 이없는 외로운 광야 호렙 산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물 한 모금, 떡 한 조각 없는 유다 광야였습니다.
세례요한이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을 지내며 심령이 강하여지는 연단을 받는 곳이 어디였습니까? 그것도 빈 들, 곧 광야였습니다. 낮이면 뜨거운 태양볕이 내리쬐고 밤이면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모닥불을 피워야 하고, 맹수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고적한 광야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하늘이 열리고 마지막 날에 될 일들을 영광스러운 이상으로 목격하게 된 곳이 어디였습니까? 그곳은 청사에 길이 남을 그 위대한 계시의 주고받음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진 절해 고도의 외로운 섬, 밧모에서 주어졌습니다.
광야의 신학교
오늘날 우리의 신학 교육이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 중 하나는, 제도를 통하여 소정의 교육 과정을 밟는 것이 곧 설교자가 되는 과정과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결코 단지 강의실에서 공부를 하고 설교의 이론들을 습득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빈 들에서, 외로운 섬에서 하나님과 대면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준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자로 부르신 소명을 영적 체험 속에서 경험함으로써 설교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광야와 같은 영적인 연단을 통해서, 그의 사상과 정신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을 주목하고, 그분과의 만남을 통하여 인생 자체가 진리를 선포하는 일에 매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그러한 영적인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설교자들은 마땅히 이 모든 세속적인 풍조와 사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영적인 연단을 기쁘게 감당하여야 합니다.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하나님 한 분 앞에서 죽도록 외로워지기까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어 그의 거룩하심에 사로잡히는 또 다른 광야의 신학교 과정을 수료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에스겔은 “부시의 아들”이 아니라 선지자 에스겔로 세움을 입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주목받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진실로 당신을 설교자로 세우기를 사모하며, 고적한 강가에서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 한 분께만 소망을 걸고 그를 바라고 있습니까? 바로 설교자의 길을 걷기 원하는 우리가 받는 세 번째 도전입니다.
여호와의 권능이
설교의 진정한 목표는 그 설교를 통하여 회중들을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설교를 통해 이전에 모르던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경험함으로 깨달아 알게 하고 그 가운데서 자신의 삶을 결단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 있는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고전2:4-5)
성령의 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에 새겨진 의문을 알고 온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성령이 마음에 역사하사 말씀을 영혼 깊이 체험하고 그 진리에 붙들린 사람들입니다.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손에 붙잡힐 때, 그가 전하는 말씀과 증거하는 복음 앞에서 수많은 회중들은 깨어나고, 그들의 마음은 말씀이 불러일으킨 거룩한 고민과 경건한 슬픔으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위대한 부흥
진정한 부흥은 오직 그 설교가 하나님의 권능 있는 손에 붙잡혔을 때 한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설교를 하나님의 권능의 손으로 붙들어 사용하실 때 영광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분명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설교와 그 위에 물 붓듯 부어지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맺는 말
오늘날 우리 가운데 유행하고 있는 수많은 목회 이론들과 설교 방법들과 교육 이론들을 보십시오. 그런 것들은 필요하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타락한 세 속의 물결로부터 지켜 주기에는 너무나 무력합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하나님을 만난 설교자가 하늘의 위대한 권능으로 설교단을 지키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본문이 주는 마지막 도전은 바로 이것입니다. “설교자들이며, 권능의 사람이 되라.”
2장 골수에 사무친 불을 가진 사람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애1:12-13)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그 황폐한 도성을 눈앞에 두고 슬피 우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설교자가 설교 활동 이전에 지녀야 할 내면 세계에 대하여 살핀다. 그리고 그의 “골수에 사무친 불”의 기원을 알아보고, 그것이 오늘날 설교자들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규명한다. 아울러 대치할 수 없는 설교자의 열망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심이어야 함을 밝히면서, 오늘날 설교자들에게 왜 이런 것들이 결핍되고 있는지 생각한다].
들어가는 말
유다는 도움이 될 수 없는 애굽을 의지하는 일에 소망을 두고 바벨론을 끝까지 대적하였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노력 속에서 국권을 부지해 보려고 하는 유다의 외교 정책은 애처롭다 못해 가엽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냉엄하였습니다. 그 메시지는 유다는 망할 것이며, 그들에게 마지막 남은 길은 순순히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같은 메시지가 수많은 백성, 특별히 조정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왕실은 그를 핍박했고 수많은 대적들은 예레미야의 발언의 신적 기원을 믿지 않았습니다.
못다 부른 슬픈 노래
그들이 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언약이 깃들여져 있던 예루살렘 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는 간 곳이 없고 그 성과 성전은 황폐하게 무너졌습니다. 이전의 어떤 성도 그렇게 비참하게 짓밟혀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이방인의 말발굽 아래 유린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송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들이 군화를 신은 채 들어가서 탈취해 갔습니다.
이처럼 비극스러운 졍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었습니다. 무엇을 믿었을까요? “약 속의 성 예루살렘과 시온을 하나님이 영원히 지키리시라. 시온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은 그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는 끝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믿었으나 예루살렘은 훼파되고 성전은 약탈당했습니다.
홀로 거룩하신 하나님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이 땅에서 거룩한 것이 있다면,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한해서 거룩한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룩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거룩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 성을 구별하고 택하여 그 곳과 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점에 있어서 잘못된 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신학은 그들로 하여금 그릇된 확신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 예루살렘과 그 가운데 있는 성전은 하나님이 택하셨고 그러므로 이 성과 성전은 영원히 거룩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성과 성전을 보호하고 지키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은혜와 사랑이라는 선입견적인 교리의 창살에 가두어 버리려고 하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신학이 바로 이 백성들을 오늘 이처럼 비참한 멸망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렇게 가르치던 사람들과 함께....,부르짖어도 귀기울이지 않고 외쳐도 응답하지 않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제는 바벨론의 창칼 아래 찢기운 시체가 되어서 눈을 부릅뜬 채, 남은 백성들을 향해 눈물 흘리며 애가를 부르는 선지자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받은 예레미야 선지자는 멸망당한 민족과 함께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라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한 숙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손 안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사로잡혀서, 온전히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 영광만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거룩한 갈망에 불타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전망
오늘날 하나님을 등지고 구원의 복음을 거절하는 세상을 보십시오.
우리들의 교회는 안일함 속에서 살아가며, 신앙 선배들의 소중한 영적 유산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한 때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숱한 순교의 피를 흘렸던 이 교회의 강단들은 이제 생기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그쳐 가고 직업적으로 봉사하는 강단꾼들만 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학생들은 세속적인 목회 방식을 자신도 모르게 배워 가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성직자연(然) 하는 직업적인 태도들을 몸에 배이게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회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도록, 소명의 문제를 분명히 하지 않은 사역자들은 언제나 교회의 독(毒)입니다. 설교자들이 변하지 않는 한, 강단의 변화는 요원하고, 강단이 변하지 않는 한 교회의 변혁에 대한 기대는 헛된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의 영적으로 새로워지는 각성과 부흥이 없다면, 세상의 도도한 타락의 물결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비웃으며 변함없이 흘러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오직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을 때만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그 양 떼들을 의와 거룩함과 진리로 이끌도록 부름받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히지 아니하면 교회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눈에 보이는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육체에 속한 모든 것들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복음으로 세상의 실체를 직시하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심령들의 영적 상태를 직관하고 그것을 인하여 슬퍼하며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의 능력을 소유한 선지자의 영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설교하는 것을 "prophesying(예언하다)“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설교 방법론을 말할 때 ”Arts of Prophesying(예언의 방법)“이라고 하기도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울부짖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그 고귀한 성전이 훼파당하는 비참한 현실이 되었는데 그것이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다는 말이냐? 너희에게는 어찌하여 내 마음에 가득한 슬픈 노래와 아픔이 없다는 말이야.
이때 사람들은 무너진 성전을 바라보면서도 오히려 오늘 먹을 양식을 구하기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훼파된 예루살렘 성전을 인하여 근심하는 사람들을 예레미야가 찾고자 하였으나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방의 거리에서 이런 사람들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없는 열방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언약의 백성들 중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예레미야와 같은 눈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조국과 조국의 교회를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자신의 불편한 삶과 아픔을 인하여 눈물 흘렸으나 하나님과의 깨져버린 신앙의 관계를 인하여 슬퍼하고, 이방인 가운데 모욕 거리가 된 하나님의 이름을 인하여는 흐느끼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염려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내일은 무엇을 마실까, 모래는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 남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을 위하여
저는 이 속에서 우리 시대의 조국 교회를 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교회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보이는 교회는 벽돌을 계속 쌓으면 언젠가 웅장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그렇게 세상의 물질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며, 교회 건물을 유지하는 유지비 같은 것으로 건실하게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성전은 그 성패가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고 그 안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살아가는 한에서만 건실한 영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훼파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며 울고 있을 때, 사실은 하나님이 울고 계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애국심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하나님을 위한 열심 때문에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유다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예레미야의 마음속에 전해졌고, 그러자 그는 통곡하며 슬피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사람들로 가득 차는 교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가 새롭게 건축되어 주님의 이름이 존귀하고 높이 여김을 받도록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오늘도 하나님의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근본인 깊은 속 사람을 뒤흔들어 깨울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흐느껴 울 것인가?
돌이킬 줄 모르는, 산처럼 높아진 이 시대의 교만한 백성들과 허기진 영혼을 부여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그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세속적인 가치관과 어리석은 사조에 장단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의 길을 걸어 가는 우리들의 사명은, 이전에 자신의 안일과 일락을 위하여 살기 좋아하던 사람들을 말씀의 세례로 데려가서 전에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존전 앞에 그들을 세워 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 보여 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품은 비전(vision)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것을 버리기 전에는 참된 비전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진 터 앞에서 울고 있는 선지자의 비전은 무엇일까요? 선지자는 지금 비전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고 있는 현실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 현실에 대하여 임한 지금의 하나님 말씀 때문에 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렘23:9).
때를 알라
여러분, 지금은 춤추고 노래할 때가 아니고 황무하게 된 이 시대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바라보며 흐느껴 울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먹고 마실 때가 아니라 금식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시대의 가난한 교회 속에 다시 나타나도록 간구해야 할 때입니다. 선지자를 보십시오. 아무도 근심하지 않는 시대에 그는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시대는 누가 뭐라 그래도 냉담한 시대입니다. 오늘도 싸늘한 침묵 가운데 드려지는 대부분의 냉담한 예배를 보십시오. 그 침묵은 바로 교회의 죽음을 알리는 침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치 죽은 자들이 누워 있는 묘지에 깃드는 적막 같은 것과 같은 침묵입니다. 그 침묵은 경건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의 영적 상황에 획기적인 변화없이도 예배순서나 고치고 프로그램이나 자꾸 개발하며, 지금처럼 영적인 삶에서 패배를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흘러 나가는 시대가 오리라고 전망할 수 있습니까?
대언의 영이 있는가 돌아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염려해야 합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설교자들이 냉담한 태도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격과 무너진 성전을 인한 슬픔이 없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대언의 영을 받은 설교자들이라면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객관적인 진리를 말하듯이 그렇게 설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있는 날 동안에 우리 입술의 혀가 굳어지고 우리 혈관의 피가 마르기까지 설교하기에 합당하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어 가진 증거의 종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우리의 인생 목표는 교회를 개척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심지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족속에게 구원을 전파하는 것도 일차적인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비전은 하나님이 홀로 영광 받으시는 교회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기회를 주셔서 설교단에 세우실 때 우리는 그 기도의 영으로 설교하고, 말씀을 마치고 나서 단 아래로 내려서게 하실 때는 다시 설교의 영으로써 이 선지자처럼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탄원할 수 있는, 마음에 불을 받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질 수 있다면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어떠한 고난의 수렁 속에서 슬픔의 잔을 마시며 그 눈물을 병에 담게 되든지, 우리가 무명으로 살든지 억울하게 죽어 가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설교자로 부름받은 사명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분에 있어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 직무에 있어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먼저 만난 사람들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기 전에, 먼저 호렙 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났던 모세처럼 말입니다.
3장 진리로 가득 찬 사람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마5:1-2)
[산상 설교의 시작을 알리는 성경의 묘사를 토대로 주님께서 그토록 능하신 설교로 듣는 이들을 신령함 감화에 젖게 만드셨던 내적 준비에 대하여 살펴본다].
병 고침 이상의 것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기적을 행하고 권능을 베푸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병을 고치시는 위대한 능력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서 그분을 뵈옵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들은 병 나음 이상의 그 무엇을 그분께로부터 받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시간 팔복산에서는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중풍병자가 자기의 침상을 들고 가는 일이 일어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나아온 많은 무리들은 엄청난 경외심과 놀라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전에 상처 때문에 더 이상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조차도 고요하게 들리는 팔복산의 설교가 그들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지나가, 그들은 새로운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리가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마7:28-29).
심각한 영적 불감증
오늘날 조국 교회가 당면한 가장 커다란 문제 중의 하나는 예배의 형식화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예배 의식의 수면 현상은 잠자는 교회 시대의 특징이 되어 왔습니다.
살아 있는 예배입니까?
우리들의 교회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예배 시간은 점점 짧아져 가는데, 그 순서는 점점 복잡해져 가는 것 같은 추세입니다. 드디어 성가대의 주악이 울리고, 합창이 시작되고, 침묵 가운데 성가대 연주를 경청하고, 설교가 시작됩니다. 그때 예배당의 분위기는 답답하기까지 합니다.
낮 열두 시 십 분경, 드디어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예배가 끝나고 사라들은 예배당 밖으로 나섭니다. 그렇게 일시에 떠밀리듯이 교회당 문에서 쏟아져 나와 돌계단을 걸어 내려, 거리고 흩어지는 교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예배당을 떠나고 있을까요?
한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을 떠나고 영적인 각성의 필요 아래 놓였던 시기에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 있는 영적 삶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에게나 모두 고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배를 통하여 신령한 감화를 받기보다는 형식에 대한 욕구를 채우는 것으로 흡족해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길 힘을 교회로부터 공급받고 그 능력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는 영적인 현실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영적으로 회복되지 않으면 안될 위기의 교회 시대에 나타나는 교회의 수면현상입니다.
강단의 침묵
그러나 이러한 형편은 설교단 아래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도무지 설교 시간을 통하여 회중들에게 무엇인가 깊은 영적인 감화와 신령한 말씀의 영향을 끼쳐야 하겠다는 설교자로서의 사무치는 결단과 간절한 도전 의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일반적인 불평은 도무지 그 설교가 설교를 듣는 자신의 마음에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설교자 자신도 자기가 전하는 말씀 선포 내용에 감동하는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강단 아래에 있는 회중들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진리를 증거하고 선포하는 일은 진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친밀해야 합니다. 소위 설교의 자기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설교자의 갱신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렇게 화석화되어 버린 설교 시간이, 생명과 감격이 있고 신령한 체험이 있는, 영적 영향력이 있는 시간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거기에 대한 대답은 설교자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묵상과 본문 체험
오늘날 왜 강단에서 영적인 각성과 위대한 부흥의 시기에 볼 수 있었던 생사를 건 진지하고 열정적인 말씀 선포가 보기 힘들어졌습니까?
그것은 설교자들이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을 깊이 묵상하지 않고, 본문에 대한 일반적인 기초로 설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 내용은 준비되었으나 그 설교 내용이 설교자의 마음을 뜨겁게 감화시키고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본문에 관한 메시지를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설교하고자 하는 욕구가 사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먼저 설교할 본문 속에서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설교하기 위하여 성경을 대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설교에 있어서 가장 천박한 직업주의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골이 깊으면 물이 많듯이 묵상이 깊으면 자연히 설교하고자 하는 그 본문 앞에서 자기의 신념이 물같이 녹아지는 감격을 경험하게 되고 설교하고자 하는 진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그의 설교는 단지 진리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목격자의 증언이 되며 증인으로서의 권위를 갖춘 선포가 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폭포수처럼
홀로 말씀 앞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설교자가 설교단에 올라서는 모든 것을 다 느끼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역겨운 위선입니다. 조작된 음성, 과장된 몸짓, 의도적인 감정의 조작, 이 모든 것은 바른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는 모든 설교자들이 미워해야 할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을 여시자 폭포수처럼 산상수훈이 쏟아졌습니다. 이것은 설교자로 산상에 앉으시기 전까지 예수께서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과 친숙하게 살아오셨는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말씀에 목마른 설교자
참된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를 인하여 먼저 고민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부족한 자신의 존재를 인하여 고통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자신의 설교 방식을 바꾸기 위하여 고민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초라하고 죄악된 모습을 인하여 아파하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얼마나 무지한지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였습니다. 자신의 박약한 영성과 초라한 영력을 인하여 쓰라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누가 될까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에 소망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에 온 마음과 뜻을 다 바쳤습니다.
영혼을 깨우는 윗필드의 설교 한 편을 듣기 위해 한 달을 고생하며 대서양을 건넜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로이드 존스목사가 런던에 있는 한 교회당에서 인도하는 저녁 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스톡홀롬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 같은 목마름과 깨닫기를 사모하는 열심, 그리고 자신의 영적 수준과 처지의 개선을 위하여 오직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만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사모함이 없다면, 스스로 받았다고 생각하는 설교자로서의 소명은 거룩한 신적 소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설교자로 부름받았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4장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사람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호1:1)
[호세아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사건을 통하여 설교자가 설교뿐만 아니라, 세상의 역사와도 어떻게 밀접한 관계를 갖는지 본다. 그리고 설교자가 추구해야 할 나라가 단지 세상 정치가들이 추구하는 나라와 어떻게 다른지 살피고, 분단 조국의 상황에서 조국 교회 설교자들의 사명을 정위한다. 설교자의 대치할 수 없는 소명이 하나님의 진리를 설교함으로써 역사에 영향을 주는 것임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번영
선지자의 메시지를 바로 이해하려면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호세아는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타락한 신앙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겉모습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라가 부강하고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동안,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철저히 무너지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서의 독특성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군사적으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도덕적으로는 극도로 부패해 있었으며 사회의 타락은 모든 계층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의 타락은 그 원인 자체가 하나님을 떠난 영적인 타락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회의 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분야의 사람들에게 타락의 징후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백발이 얼룩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호7:9)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백성들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워 주도록 부름을 받은 제사장들마저도 악당들처럼 타락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백성들이 죄악에 빠져 드는 것을 기뻐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그들이 죄 가운데 빠져 들수록 그들은 더 많은 제사를 드리기를 원했고 그만큼 자신들의 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회는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상황이 되었고 사태는 절망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호4:1-3).
설교자와 분단
호세아 선지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혈연적이고 지연적인 나라가 아니라, 영적인 나라였습니다. 선지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조국은 오직 하나의 영적인 조국이었으며, 이것은 정치에 의하여 분단되어도 나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바로 그 나라를 위하여 일하도록 부름받았던 것입 니다.
공교롭게도 당시의 유다와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조국도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북에 있는 동포들의 영혼에 대한 무거운 부담들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복음의 비밀을 맡아 설교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단지 교회 안에서, 교회만을 위하여 설교하도록 부름받지 아니하였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자로 부름받은 우리들은 분단 조국의 아픔을 교회의 영적 상태와 관련해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선지자와 예루살렘
선지자의 우선적인 관심이 예루살렘의 영적 상태였던 것처럼, 설교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 거리는 교회의 영적 상태입니다.
세상에 각성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교회에 각성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를 통하여 끊임없이 영적으로 영향을 받아 그 신령한 영향력을 세상에 끼치고, 자신들이 믿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진리를 삶으로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신령해질 때, 그리고 신적인 영향력으로 가득찰 때, 그 도시의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우선적인 관심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데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기뻐할 줄 모르는 불신앙과 영적 무감각으로 나아기 쉬운 교회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십 년 가까이 분단되어 온 민족이 단지 함께 사는 것만으로 하나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 날의 아픈 상처를 씻어 내고 원한이 바뀌어 사랑이 되고, 복수심이 바뀌어 동정심으로 나타나는 일을 위하여서는 이 민족에게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 옛날 자부심 강한 유대인과, 지혜를 자랑하던 헬라인을 한 형제로 만들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종과 자유인을 한 형제로 묶어 줄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한 사람 호세아
여섯 왕들의 계보에 마주하여 한 사람 선지자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호세아”였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구원”입니다. 그는 브에리라는 평범한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한 사람 호세아를 주목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설교자로 부름받은 우리에게 이 얼마나 가슴벅차는 일입니까? 잠시 심장의 박동이 멎을 것 같은 영원을 향한 긴장이 우리의 가슴으로 밀려오지 않습니까? 역사는 흘러가고 왕들은 바뀌었어도 구속사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한 사람, 그는 설교자였습니다.
열방과 혼잡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잃어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져있는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고요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 호세아를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 호세아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고 음란한 여인에게 장가들러 갑니다.
보십시오. 이것은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타락한 한 시대에 그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을 가지고 바라볼 때 고멜을 찾아가는 선지자의 발걸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타오르는 메시지였습니다. 이미 소망이 없어 음란하고 타락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찾아갈 때 선지자 속에 끓어 오르고 있는 분노와 혐오감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그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타락한 여인을 찾아 장가들러 가는 선지자의 모습을 통하여 가치 없는 자신들을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호세아 선지자를 자신들에게 보냄으로써 그렇게 이스라엘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 앞에 심령이 녹아져야 했습니다.
타는 불을 가슴에 안고
진리에 대한 신념이 없는 사람은 결코 설교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자신의 정체성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자신의 메시지를 통하여 세상이 변화되고 교회가 자기의 설교를 통하여 이전에 모르던 새로운 신앙 세계를 보게 되고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을 믿어야 합니다.
뜨거운 마음을 가진 모든 설교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뜨겁게 하는 것은 신적인 열정뿐 아니라, 인간적인 격정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설교자는 언제나 뜨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어떻게 뜨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적인 능력이 그의 내면 세계를 뒤흔들었는데 어떻게 냉담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하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을 침묵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특별히 신앙 생활과 영적인 삶에 있어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해답을 얻고자 하는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연하게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답답한 마음을 갖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 바르지 못한 태도나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해서 생기는 영적인 불만족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알리시기를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교회
교회 안에서의 가치관과 세상에서의 가치관이 커다란 충돌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선교사적인 삶을 택하는 대신 양자를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세속적인 타협의 방식을 배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까?
안락한 생활이나 세속적인 유행, 화려한 복장, 소유물에 대한 집착, 재물과 세상이 주는 감정과 흥분에 너무 예민해져 있지 않습니까? 그것들에 마음과 시간과 생각을 빼앗기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인 우리를 어떠한 사랑으로 구속하고 인도하여 이곳까지 오게 하셨는지를 기억하고 감격하는 일에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모든 감격을 잃어버리거나 무더져 돌덩이와 같이 되어 빈 심령으로 교회당을 메우고 있지 않습니까? 돌 같은 가슴으로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겠으며, 감격이 없는 마음으로 어떻게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당신의 영적 생활이 실패하고 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찰스 피니(Charles Finney)].
불붙은 논리
설교단이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는 데 실패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에 대하여 그처럼 안일하고 교만한 태도로 교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말씀으로 돌아가고 그 백성들 가운데서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신앙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먼저 설교자들의 살을 에이는 것 같은 각성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평범하게 설교해서는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회중의 변화를 위하여
설교자로 고향에 돌아온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놀란 갈릴리 사람들은, 그의 설교 속에 깃든 심오한 학문성 때문에 충격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충격받은 것은 간결하고 명확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구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더욱 더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그 해석들을 설교할 때 느껴지는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영적 권세였습니다.(마13:53-55)
설교사의 교훈
18세기 독일의 교회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지 아니하는 설교자들의 그릇된 태도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경건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초자연적 명상주의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추종하는 설교단의 합리주의적인 태도는 설교단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설교 속에서 잘 정의된 설교자 자신의 확신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비평적인 태도만 만연하였습니다. 종교와 신학 사이의 대화는 탈교리를 부추기고 교리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는 위대한 진리(거룩하심, 성육신, 대속, 믿음, 종말)들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것이 후기 경건주의적인 설교 경향에 비하여 비평적 합리주의 설교가 우위를 점하게 된 이유입니다. 합리주의 운동은 원기 왕성한 사역을 계속하였고, 설교단이 여기에 가세하였으며 그 결과 타락이 찾아왔으며, 설교단이 망했습니다. 그들은 무너져 버렸던 것입니다.
대 표 자 들: 쉬팔딩(Spalding), 졸리코퍼(Zollikofer)
설교의 주제들: 왜 예수님이 장가들지 아니하셨을까? 생매장되는 것의 위험, 유령들의 무서움, 여행의 장점들, 마마를 위한 예방 접종의 중요성 등.
통곡하는 사도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성경을 깨닫고자 사모하고 열망하여야 합니다. 청교도 설교자들이 흔히 성경을 읽을 때 무릎을 꿇고 읽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계시록 5장에 보면은 사도 요한은 깨달을 수 없는 계시의 말씀 앞에서 그는 무엇으로도 달래도 도저히 그칠 수 없는 통곡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일평생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왔던 백발의 노사도가 파도 소리밖에 들리는 것이 없는 외로운 섬에서 피 어린 통곡으로 어린 아이처럼 목 놓아 울고 있는 모습을 묵상해 보십시오. 지위에 어울리는 좋은 승용차를 타지못해서, 명성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교인들의 곁을 떠난 외로움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울고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계시를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설교 사역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설교자로 하여금 설교자로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에 대한 설교자 자신의 무지입니다.
진정한 권위
설교자의 참된 권위는 자신의 인격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인격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합니다. 자신의 권위를 위하여 쓸데없이 치장(명예, 형식)해서는 안됩니다.
찰스, 스펄전, 조지 윗필드, 요한 웨슬레, 무디, 필립 부룩스, 존 번연들은 학벌이나, 교파에서 그렇게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맺는 말
하나님의 진리가 혈관 속에 뜨겁게 흐르고 전파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심령 속에서 불타 오르고 있는데 어떻게 설교가 그에게 부담이 될 수 있으며 준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설교할 기회를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설교자는 진리의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5장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간 사람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1:9)
[예레미야의 소명을 알리는 사건 기사 속에서 연약하리만치 어린 그로 하여금 가장 격동하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꿋꿋하게 감당하도록 만든 동인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그 시대 속에서 평범하게 태어나 그 시대의 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신적 계시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하는 일 하나에 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원천이 무엇인지 보고, 설교자의 인격 속에 깃들어야 하는 거룩한 정서와 오늘날 왜 냉랭한 설교가 유행하게 되었는지 진단한다].
예레미야의 소명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상당히 어린 나이(12-13세)에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어, 약 4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역하였습니다. 그는 매우 강직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먼저 말씀을 지켰고, 불변하는 확신을 가지고 설교 사역에 헌신했던 사람이었으며, 결코 자신에게 주신 메시지를 개인의 고난(감옥, 무섭고 어두운 구덩이) 때문에 변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출3-4장에서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부르심과 거절의 줄다리기가 벌어집니다.
스스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원했던 때와 참으로 하나님이 그를 말씀의 종으로, 민족의 지도자로 부르시던 때에 결정적인 차이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즉, 처음에 모세의 마음속에 사명감은 역사하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고 함께하시리라는 보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소명의 사건에서는 하나님이 그를 소명하는 보증으로서 떨기나무 사이의 타지 않는 불꽃 가운데 임재하여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를 부르고 만나 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함께하실 것을 약속해 주셨고, 이에 대한 표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 노동에 종사하는 늙은 목부에서 선지자와 입법자와 해방자로 세움을 입었던 것입니다.
변호자가 아닌 증언자
설교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은 단순히 인생을 보람 있게 헌신하고 싶다는 우리의 마음의 결심, 그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을 설교자로 부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 소명에 피할 수 없도록 마주해 본 사람, 자신의 죄인 된 참 모습을 발견하고 경악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주는 두려움 앞에 떨어 본 사람, 하나님의 격려를 힘입어 성결케 되어지고, 급기야는 “나를 보내소서”(사6:8)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로 부터 “가라”(사6:9)는 분부를 들은 사람입니다.
설교자는 피할 수 없는 부르심을 하나님 앞에서 경험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자기가 증거하고자 하는 “그 빛(the light)”에 매인 사람입니다. 설교가 적성에 맞는다는 이유로 강단에 서는 사람이 설교자가 아닙니다. 설교자의 소명은 결코 이런 식으로 다루어져서는 안됩니다.
사로잡는 소명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설교자로 부르실 때, 그것은 단지 설교자가 되겠다는 그들의 결심을 실행에 옮기도록 내버려두시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갔고, 그리고 부르셨습니다.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고요하던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손이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손은 예레미야의 입술을 만졌습니다. 어느모로 보든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기에는 부적합한 그 입에 거룩한 손이 닿자, 그의 입술은 “부정함”(사6:5)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이같은 행동의 의미는 이사야의 경우를 보더라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스랍의 손에 핀 숯을 이사야의 입에 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로 선언하게 하셨습니다. “.......보라 네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6:7).
만져 주신 하나님
설교자의 소명은 말씀을 전하고 진리를 선포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 없는 영혼의 내적 동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흔히 허락하지 않는 만남을 주신 사람입니다. 특이한 방법으로 만나주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회중들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숨길 수 없는 흔적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설교자들에게는 그분 곁에 있다 온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체취와 기운이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쉽게 숨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증언할 때 드러납니다. 그 속에는 언제나 확증과 신념에 넘치는 언어가 있습니다.
마치 바울의 다메섹에서의 소명 체험이 그의 신앙과 신학과 삶과 헌신 등. 그의 새로운 인생을 형성하는 핵이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손을 대고 지나가신 것은 잠깐이었으나 그 결과는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결핍을 느끼라
설교의 내용이 혼돈과 초점없음은 그의 지적인 역량 부족보다는 증거하고자 하는 본문에 대한 영적 체험의 결핍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어느 본문을 택하든지 꼭 같은 혼란을 일으킨다면 자신의 영적인 수준과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총체적으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설교를 믿으라
선교의 판도를 변화시키는 역사 뒤에는 반드시 설교의 변화가 있었고 설교의 변화 뒤에는 설교자의 변화가 있었으며, 설교자의 변화 이면에는 역사하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위대한 신앙의 부흥과 영적인 각성이 있었던 시대에는 언제나 강력한 언어로, 하늘의 신령한 은혜로 불붙은 말로써 “말하는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예배의 타락
여러분들은 중세 카톨릭 교회에서 어떤 식으로 예배를 드렸는지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성직자들이 설교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자 성경 본문도 읽지 않는 훈화 형식의 설교가 참된 말씀 선포를 대신하였고, 심지어 주후 7세기경에는 교부들의 설교를 라틴어로 대독해 주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하였습니다. 누가 그 라틴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같은 그릇된 경향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히 교회 안에는 “깨닫게 하는 요소”들이 사라지고 대신 “느끼게 하는 요소”들이 중시됩니다. 찬양과 기도 같은 것을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 이런 일들을 수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예배 속에서 설교를 통하여 깨닫는 요소에 대한 가치가 무시되기 시작하자 에배는 더욱더 타락한 형태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배 속에 “즐기는 요소”들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클라이드 라이드(C.Reid)는 주장하기를, 설교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것이며 이제까지 설교가 너무 강조된 것이 오늘날과 같은 기독교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예배가 의식에 집착하고 말씀의 선포보다 음악에 치중하는 경향 등은 대체로 설교에 대한 최근의 회의주의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 풍조들은 그리 놀라운 소식이 아닙니다. 인생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홀로 서는 일을 회피하는 방법은 언제나 무궁무진하였습니다.
불타는 설교자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잠들어 있을 때는 언제나 차가왔습니다. 세속적이고 육신의 즐거움을 위한 일에는 지나치게 분주하거나 열정적이고, 신령한 일에 있어서는 무감각하고 냉담합니다. 그래서 무디(D.L.Moody)는 당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것을 원하십니까? 장로교 신자들이 예배드리는 곳으로 가 보십시오.”
느끼지 못하는 설교
설교자는 설교하는 바를 느끼며 설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깊은 체험이 없는 설교자가 어떻게 십자가를 설교하면서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설교단에서 설교자의 정서는 강단에 오르기 전 그의 영적인 삶이 어떠한지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설교단 아래서 계속되어 온 기도와 묵상 속에서 신적인 정서로 충만해 있던 사람이 설교 시간에 본문에 흐르는 정서를 느끼지도 못한 채 냉담하게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맺는 말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능력으로 유화된 입술을 가진 신령한 설교자가 되기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세상 풍조나 지식의 가르침에 따라 단지 문자에 충실하게 설교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정결케 된 그 입술로 설교단에 오르기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6장 뽑고 파멸하는 사람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1:10)
[예레미야가 소명 받을 때 하나님께서 그가 선지 사역을 통하여 성취할 사명에 대하여 주신 두 가지 명령, 즉 설교의 파괴적인 기능과 건설적인 기능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이같은 논의를 통하여 오늘날 설교에 대한 이론과 연구가 많아도,왜 지난 시대처럼 커다란 영적 각성과 부흥을 일으키는 도구가 되지 못하는지 규명하고, 설교의 새로운 지향점을 성경을 통해 찾아본다.]
세상을 위한 설교자
한 세기 전의 설교자 찰스 스펄전의 목회학 강의를 보면 그는 자주 목회자가 되기를 지망하는 후보생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노상 설교를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사거리나 술집과 공회당 골목이 설교하기에 적합한 장소라고 지적하면서 술통을 엎어 놓아 즉석에서 설교단을 만드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설교자들은 이스라엘을 위한 설교자인 동시에 열방 만국을 위한 복음 선포자입니다.(렘1:10)
사도적 케뤼그마의 회복
그러면 왜 하나님의 교회가 이러한 원리를 굳게 붙잡고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불신하는 세상에 신앙적인 영향을 주는 일에 그토록 약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교회가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케뤼그마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확신을 침식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교회의 권위적인 선포를 싫어했습니다. 소위 대화를 통한 복음 전파의 길을 모색하면서 설교에 귀기울이지 아니하는 현대 교회의 임직임은 이 같은 시대 정신을 좇아간 것입니다.
설교자들의 가슴속에 이러한 복음의 케뤼그마들이 역동할 때 비로소 교회는 복음의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단지 차가운 의문의 진리만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항상 세상에 대한 교회의 게토(ghetto)化가 이루어졌습니다. 설교자들이 단지 냉랭한 교리만을 신봉하고 있을 때에는 세상과 교회가 뚜렷하게 담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담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상하게도 쉽게 세상 풍조에 물들어 갔습니다.
세상과 교회를 쉽게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세상의 변혁을 위하여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중요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뽑고 파멸하며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운 것은 잘못 심겨진 것들을 뽑고, 뽑히지 않는 것들은 파괴하며, 파멸하며, 잘못 서 있는 것들은 넘어뜨리는 일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회중은 강하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표현을 빌자면 “모든 사람은 사상의 집을 짓고 살아가는 철학가라고 합니다. 모두 엉성하지만 나름대로 견해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그것은 생각보다 견고하다고 합니다. 비록 신앙 생활한지 얼마 안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누구시고 교회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고집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육척밖에 안되는 이 작은 인간은 그야말로 불가해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두 알고 있다고 단언하는 순간 그것은 곧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하여 배울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양파 껍질처럼 벗겨도 벗겨도 끝없이 감추어진 인간내면의 교묘함과 생각의 교활함은 우리를 경탄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속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느끼시는 것을 우리는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시는 것을 우리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릇된 구조물
무엇보다도 그 모든 사상의 중심부에는 하나님이 추방되고 이방의 우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파괴는 싫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설교를 통하여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삶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삶과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도저히 옳다고 판단받을 자신이 없을 때조차도 그들은 설교를 통해 주어지는 말씀으로 자신의 그릇된 견해들이 충격 받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그들은 피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설교를 들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회중 편에서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은 옳지 않은 것들을 드러내는 것과 올바른 것들을 제시하는 것이 하나의 설교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올바른 것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기 위하여, 잘못 심겨진 것들을 뽑고 파멸하는 일들을 위하여는 죄인의 상태에 대한 보다 예리한 분석과 판단이 필요하고, 그것을 넘어뜨리기 위하여는 더욱 더 커다란 하늘의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위대한 부흥
19세기 영구의 설교자 호러시우스 보너(H.Bonar)는 18세기 영적 부흥의 때에 거룩한 강인함으로 강단을 지켰던 믿음의 선배들을 추억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적들이 시비를 걸며 반대하고 소심한 친구들은 주저할지라도 그들은 앞으로 돌진하였으며 난관과 반대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설사 일만대 일의 싸움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단지 싸울 준비를 하자,
의를 위해 당당히 외톨이가 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해서라면 단신으로 나서는 것도 불사하는 자들이 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마 악이 지금보다 더 담대한 태도와 자세로 우리 앞에 버티고 있던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지금보다 더 큰 용기가 요구되던 때도 없었다.......”
파괴하는 설교자
그러므로 설교자들의 일차적인 직무는 설득을 통하든, 선포를 통하든, 논리를 통해서든지, 회중들의 마음속에 잘못 심겨진 사상과 그릇된 사고의 건축물들을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던 가장 시급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럴려면 건축된 구조물들의 결점과 약점이 무엇인지를 예리하게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부분을 말씀으로 강타할 때 구조물들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도 탁월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죄인을 알라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거룩한 교회당에 나아와 앉아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회중에게만 익숙해서는 안됩니다. 세상 속에서 그들이 자리하고 있던 죄악된 삶의 자리와 무슨 생각과 마음에 품은 어떤 소원으로 스스로 속고 있는지에 대해서 예리한 통찰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너지기를 거부하는 죄인의 몸부림은 진지하고 집요하기 때문입니다. 파괴되지 아니하려는 몸짓은 정말 설교자들의 인내를 요합니다. 탁월한 영적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입술에 손을 대고 지나가 말씀을 그 입에 둔 사람의 설교는 파멸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무너뜨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하나님 앞에 서기를 거절하던 죄인을 안절부절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던 사람들의 마음에 거룩한 고민과 경건한 슬픔을 불러 일으킵니다.
무너져 보셨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무너지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사람들이고, 주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 자신이 무너지는 신령한 말씀의 체험을 영혼 속에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하기 위하여 성경을 펴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바르지 못한 것들이 무너지기를 대망하며 말씀을 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이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는 그 이상의 무너짐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늘 경험하는 영적 삶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건설하며 심으며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주신 두 번째 사명은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1:10)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뽑고 파멸되는 경험을 했던 사람이 심겨지는 경험을 하게 될 때 그것은 한 번의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심은 대로 성장하게 됩니다. 말씀에 의하여 올바르게 심겨진 사고와 가치의 체계는 발전과 성숙을 거듭하게 됩니다.
맺는 말
설교자들은, 회중들의 겉 모습을 바꾸고 고치는 일에 열중하는 대신, 무엇보다도 본질을 고치고 근원을 새롭게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본질적인 사역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7장 하나님을 추구하라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시42:1-2)
[이 장에서는 바벨론에 끌려간 히브리 사람들의 모습을 해설함으로써, 이 모든 절망에 대한 최종적인 대안으로서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도전한다. 설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목마른 사슴
팔레스타인에서는 가을이 되면 사슴들이 짝을 짓습니다. 그때 암수가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되는데 많은 수사슴들이 짝을 찾아서 나섭니다. 이때 사슴들의 몸에 변화가 오는데 타는 듯한 목마름이 바로 그것입다. 사랑할 짝을 찾아 다니다가 이 목마름이 온 몸을 엄습하게 되자 이제 사슴들은 오직 물을 찾아서 달음박질합니다. (아시다시피 중동 지방은 물이 귀합니다)
결국 뜨거운 태양볕 아래 거꾸러지고 나중에는 거품을 물고 죽어 갑니다. 이때 사슴들은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다가는 견디가 못해 눈을 부릅뜨고 죽어 간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한모금의 물은 곧 생명이었습니다.
시인은 건장한 사슴들이 상처 하나 없이 광야에서 쓰러져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이 물 한 잔의 소중함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이야기하는 이 “시냇물”은 요4장에 나오는 “생수”가 의미하는 것과 꼭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생생한 영적 교통”을 의미합니다.
애곡하지 않는 세대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탄하시던 세대와 같은 시대입니다. 이 모든 것은 교회 안에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도대체 여러분들이 설교하고 있는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갈망을 가지고 흐느끼며 간절히 기도한 것이 언제의 일입니까?
문제 있는 신앙 생활의 모습을 설교자가 따라가고 있다면 그가 어떻게 타는 듯한 영적인 긴박감을 가지고 성도들 앞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추구하라
세상의 기준을 버리십시오. 하나님께로 부터 보냄받은 설교자들은 이미 회중들에게 기대하는 그 광대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붙잡힌 영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거짓된 위로보다는 진실한 책망을, 위장된 평화보다는 참된 고통을 택하는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는 자기 혼자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혼자 잘 설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설교해 온 경력과 자신의 지적인 능력을 믿고 설교하는 것보다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힘을 다하여 설교를 준비하여 그 원고가 완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설교자는 전혀 그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가난한 심령으로 설교를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 한 분을 갈망하여야 합니다.
시인의 절박한 문제는 하나님과 만나기를 원하나 그분이 와 주실 수 있는 성소를 잃어버렸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통하기를 원하나 그렇게 교제할 장소를 잃어버리고 특권을 빼앗겼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정직한 욕망
많은 설교자들이 사람으로 교회를 가득 채우는 일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인 그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먼저 하나님 자신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위대한 부흥의 시기마다 이 같은 일들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 자신으로 충만해진 사람들로 말미암아 교회는 잃어버린 영혼들로 가득 차게 되는 부흥의 새벽이 열리게 됩니다.
영적 무감각의 원인
한때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앨비스 프레슬리는 말년에 심한 마약중독에 걸려서 자신이 피우던 담배가 손가락을 태워도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조차 느낄 줄 모르는 무감각 상태가 되었습니다.
죄는 우리를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앗아가 버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이도 넉넉히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며 설교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죄로 말미암은 무감각입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데 익숙해지게 만듭니다. 은혜보다는 재능과 경험을 의지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성도들을 세워 줌으로써, 거룩한 삶을 갈망하게 만들기보다는 에배 자체를 하나의 일상적인 프로그램으로 여기며 사역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죄의 영향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시인이 갈망했던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생존하는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역사하면서 동행해 주시는 삶을 그리워하였던 것입니다. 시인이 갈망한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고 자신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위대한 일들을 행하시던 하나님이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교회와 동행할 때 그 교회는 매주 죄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형식적인 신자들이 자신의 사악함을 뉘우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 안에 붙들린 설교자, 그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설교를 통하여 다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시인에게 드러내 보여 주셨을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오직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에 모든 소망을 걸고 당신을 찾아 목마른 설교자들, 하나님은 동일한 목마름으로 바로 그 설교자들을 오늘도 찾으십니다.
이 메마른 땅에 위대한 각성과 부흥의 도구로 세우시기 위해서....
그 사람이 바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당신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