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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뱀과 대화하는 해리. (출처 : 워너브라더스)
2001년 개봉한 영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주인공 해리(다니엘 래드클리프 扮)는 다른 이들에겐 없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깨닫는다. 바로 뱀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물원에서 뱀을 풀어주고, 뱀에게 공격을 멈추라 말하는 등 대화를 나누지만 다른 이들은 그저 해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를 못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해리처럼 뱀의 말을 해볼 계획이다. 겁먹지 마시길, 여러분을 해치는 글은 아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기하학 수리물리 연구단의 주요 연구 주제 중 하나인 '오쿤코프 바디(Okounkov Body)'를 소개한다. 난이도 상·중·하로 이뤄진 챕터를 모두 이해한다면, 당신은 최소 수학 천재.
▣ 도움 : 원준영 IBS 기하학 수리물리 연구단 연구위원
▣ 참고 : What is Algebraic Geometry? 금종해(과학의 지평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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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동기에 대한 질투에 눈이 먼 김주영 선생은 딸인 케이를 결국 파멸로 이끈다. (출처 : JTBC 'SKY캐슬' 화면캡처)
장안의 화제인 드라마 [SKY캐슬] 19화에서는 대학입시 코디네이터인 김주영 선생이 비뚤어진 교육관을 갖게 된 과거가 드러났다. 대학동기와의 지나친 경쟁심 때문. 19화에서 김주영 선생의 경쟁자인 송희주 교수가 한국 최초, 역대 두 번째 여성 '필즈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뉴스가 나온다. 조력자인 조선생은 TMI(Too Much Information)스럽게 정보를 덧붙인다.
“필즈상이라면 수학의 노벨상 말씀하시는 건가요?”
오늘의 주제인 '오쿤코프 바디'의 개념을 만들어낸 러시아의 수학자 안드레이 오쿤코프(Andrei Okounkov, 49세)는 2006년 바로 이 필즈상을 수상했다. 그는 1996년과 2003년에 각각 발표한 두 논문에서 오쿤코프 바디 개념을 도입했다. 오쿤코프 바디가 두 논문의 핵심 주제는 아니었지만, 그 뒤 여러 학자가 이 개념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면서 대수다양체(난이도 中에서 설명할 계획이다)를 연구하는 한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오쿤코프 바디의 아버지인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이며 빠르게 성공가도를 달렸을 것 같지만, 각종 인터뷰를 통해 본 그의 삶은 예상과 조금 달랐다. 오쿤코프가 다양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하나의 대화처럼 편집해봤다.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역사적인 수학자의 문답을 따라 읽다보면, 오쿤코프 바디가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2006년 필즈상 수상자인 안드레이 오쿤코프. (출처: HSE)
저는 특수학교 출신도 아니고, 올림피아드 출전 경험도 없어요.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에야 수학을 하게 됐죠. 논문을 쓰기 전에 이미 가정이 있었고요. 일찍이 수학에 매진했다면 머리가 잘 돌아갔겠지만 그렇진 않았어요. [2007, 미국수학회(AMS)]
대학원에서 수학을 전공하려 결심한 건 어쩌면 보조금 때문일지도 몰라요. 모스크바 국립대에는 제대한 학생들을 위한 보조금 혜택이 있었거든요. 당시 한 달에 125루블(약 2125원) 정도였어요. (※참고 : 1990년 러시아 노동자의 평균 월급이 150루블) 아내에게 주머니 사정 고민 없이 큰 꽃다발을 안겨줄 수도 있었고요. 그때는 제가 완전 일등 신랑감이라고 생각했어요. [2015, 러시아 고등경제대학교]
1993년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을 때, 저는 이미 가정이 있었고 나라 경제는 파탄이었어요. 러시아 과학자들 대부분이 돈벌이를 위해 서양으로 떠났고요. 제 경우는 제가 수학을 생각하고, 집안일을 하는 동안 아내가 사업을 시작해 가족을 먹여 살렸어요. 사실 제가 학위논문 심사를 받던 날 삶은 기저귀를 놓치는 바람에 한쪽 팔에 붕대를 감고 갔네요. 그래도 가장 행복한 때였어요. 젊은 연구자들이 겪는 계약직 스트레스를 감안하더라도 저는 여전히 대학원 시기가 젊은 수학자들에게는 최대의 자유 시간이자 가급적 활용해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수학과 과학에 호기심을 가지고, 그야말로 숙고하고 음미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2017, 일본 도쿄대 Kalvi 우주물리수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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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쿤코프 바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수기하학의 세계로 가야 한다. 오쿤코프 바디는 대수기하학에서 다루는 '대수다양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름은 낯설지만 우린 이미 학교에서 대수다양체를 배웠다. x축과 y축, z축이 각각 90°를 이루게 3차원 공간을 그린 다음 그 안에 직선이나 원, 포물선, 타원, 쌍곡선, 평면, 구, 포물면 등을 그렸던 기억을 떠올려보라.
▲ 대수다양체의 모양은 상상할 수 없이 복잡하고 다양하다. (출처 : oliver lab)
실수 좌표축이 직교하고, 실수 3개로 한 점의 위치를 나타낼 수 있었던 이 공간은 대표적인 유클리드 좌표공간이다. 여러 연립방정식의 공통적인 해를 유클리드 좌표공간에 나타낸 결과 그려진 모든 직선, 포물선, 타원 등이 모두 대수다양체에 속한다. 하지만 모양이 복잡한 대수다양체가 훨씬 많다. 도형을 표현하는 방정식의 개수가 많거나 차수가 높으면 그에 대응하는 대수다양체의 생김새를 추측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대수다양체는 좌표축이나 공간에 따라서도 모양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실수로만 이뤄진 좌표축에서는 공통적인 해 중 실수인 것들만 나타낸 도형밖에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복소수 좌표축이라면 복소수인 해까지 나타낸 도형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원의 방정식을 복소수 좌표공간에 표현한다면 반지름이 양의 실수인 원은 물론 복소수인 원도 생각할 수 있다.
또, 유클리드 공간에서는 무한에서 대수다양체에 벌어지는 일을 알기 어렵다. 그래서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공간이 생겨나기도 했다. 한 평면 위에서 평행한 두 직선은 서로 만나지 않지만, 무한히 먼 곳에서는 만난다고 생각하는 사영공간이 그 예다.
이럴 때 유클리드 공간에 있는 우리는 유클리드 공간이 아닌 새로운 공간에서 표현되는 대수다양체를 온전히 알기 어렵다. 단지 대수다양체의 부분 부분을 탐구하고, 각 부분의 성질을 모두 모아 전체의 성질을 유추할 뿐이다. 연구해야 할 대수다양체의 종류는 무척 많고, 어떤 대수다양체의 어떤 성질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연구 방법도 다양하다.
▲ 너도 나도 아직 갈 길이 멀다곰! (출처: the alaska z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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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다양체를 조사하는 방법 중 하나는 대수다양체(X)와 그 안의 한 차원 낮은 특정 다양체(내재 다양체, Divisor)의 클래스를 쌍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 둘의 쌍은 (X, D)로 표현한다. 이때 Divisor와 특정 깃발(flag)의 관계를 볼록체(convex body)로 그려서 Divisor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다. 이 볼록체가 바로 오쿤코프 바디다.
깃발은 차원이 한 차원 차이나는 내재 다양체의 집합이다. 예를 들어, n차원 다양체 X(X0)로부터 X0보다 한 차원 낮은 X1을 찾을 수 있다. 이때 X1이 X0의 내재 다양체다. 마찬가지로 X1의 내재 다양체 X2를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만든 내재 다양체의 집합 {X0, X1, X2,...Xn}이 대수다양체 X의 깃발이다.
깃발 {X0, X1, X2,...Xn}과 특정한 내재 다양체 D가 있다. 이제 D와 관련된 어떤 조건을 만족하는 내재 다양체들만 모으자. 조건을 하나 예로 들자면 '안에 있는 일반적인 쪼갤 수 없는 곡선(irreducible curve)들의 교집합 수가 D에서 구한 그것의 수와 같은 것'이다. D와 공통점이 있는 무한히 많은 내재 다양체의 모음 {D0, D1, D2,…}을 D의 클래스라 부른다.
이제 D의 클래스를 깃발 {X0, X1, X2,...Xn}이 섞인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D0는 aX1+P와 같다. D0를 다르게 표현하는 과정은 곧 D0의 X1 중복도를 찾는 과정이며, a를 '중복도'라고 한다. 이어서, X1을 제외한 P를 bX2+K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도 (X1을 뺀 상태에서) D0의 X2 중복도를 찾는 과정이며, b도 중복도 정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중복도 정보 a, b, c, d…를 찾은 다음, 이를 (a, b, c, …)라는 점 1개로 대응시킨다.
D1, D2, D3도 같은 방법으로 점 1개에 각각 대응시킬 수 있다. D의 클래스를 이루는 무한개의 다양체로부터 대응되는 무한개의 점을 모두 모아 실차원에 찍으면 볼록체가 된다. 이것이 오쿤코프 바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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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보니 어디 꽂는 것도 아닌데, 왜 하필 '깃발'이 수학 용어가 됐을까? 1930년대에는 깃발을 점과 직선의 쌍을 뜻하는 단어로 썼던 기록이 있다. 정확한 유래는 찾지 못했으나 수학 토론 사이트 mathoverflow.net에서는 가늘고 긴 삼각 깃발인 페넌트(pennant)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하는 글이 지지를 받고 있었다. 페넌트 면의 세로 길이가 한 점 0에서 시작해 점점 길어진다. 내재 다양체의 차원이 0, 1, 2…로 점점 높아진다는 정의와 비슷하지 않은가?
▲ 르네 드 소쉬르(Rene De Saussure, 그 유명한 언어학자가 맞다!)의 저작물 일부. 텍스트 맨 하단의 'drapeau'가 깃발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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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쿤코프 바디는 무엇을 알게 해줄까? 오쿤코프 바디의 모양, 부피와 같은 특징으로 내재 다양체 D의 특성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대수다양체에서 여러 개의 깃발을 얻을 수 있는데, 하나의 깃발에서 얻을 수 있는 오쿤코프 바디는 1개다. 그리고 각 깃발에서 얻은 오쿤코프 바디는 모양은 서로 다르더라도 부피는 모두 같다.
이외에도 오쿤코프 바디가 원점을 포함하는지, 원점을 포함하는 이웃을 갖고 있는지, 오쿤코프 바디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오쿤코프 바디의 좌표들이 어느 공간에 있는지와 같은 특징으로 내재 다양체 D의 특성을 구분할 수 있다. 깃발을 변형해 얻어지는 오쿤코프 바디의 모양 변화도 주요 연구대상이다.
요약하자면, 대수다양체 X 안에서 내재 다양체의 클래스를 변화시킬 때나 깃발을 변형할 때 오쿤코프 바디의 모양에 관한 정보와 내재 다양체의 특성이 어떤 관계를 보이는지 연구한다. 그럼으로써 대수다양체 X와 내재 다양체 D의 쌍인 (X, D)를 더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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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 다양체의 특성을 나타내는 개념은 Ample(내재 다양체의 클래스가 많음), nef(모든 곡선과의 교집합이 음수가 아님), effective(클래스가 존재함), big(ample과 effective의 혼합) 등 다양하다.
원준영 IBS 기하학 수리물리 연구단 연구위원 팀은 'Okounkov bodies associated to pseudoeffective divisors'라는 제목의 논문을 2018 런던수학협회에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는 big divisor에서만 알려진 오쿤코프 바디의 연구 결과를 보다 넓은 카테고리인 pseudoeffective divisor에서 처음으로 정의하고 여러 가지 특성들을 일반화시켰다. 오늘도 연구자들은 오쿤코프 바디를 통해 디바이저의 어려운 특성을 읽어내려 노력하고 있다.
/ 출처:기초과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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