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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0일(목), 이태리 로마순례
로마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크루즈 선박에서 하선하여 버스를 타고 로마로 향하였다. 배에서 내리니 날씨가 선선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로마 순례일정을 도와줄 가이드는 이곳에서 성악을 공부를 하고 있는 이재준 씨로 현재 로마연합교회 집사로 섬기고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고대의 화려한 전통과 유물을 간직하며, 현대의 최첨단 패션과 유행을 잘 융합시키는 이탈리아는 유럽대륙에서 지중해 쪽으로 장화처럼 뻗어 나와 있다. 로마제국의 찬란한 역사와 르네상스의 화려한 꽃을 피운 곳으로 줄리어스 시저 등이 활약한 데 이어 BC 27년 아우구스투스가 왕위에 오른 것으로 시작된 로마 제국은 그 뒤 아프리카 북부는 물론 중동과 영국까지 손을 뻗치는 큰 제국을 이루었다. 4세기 말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세계 종교로 전파시켰다. 15세기에는 높아진 시민의식과 귀족들의 비호로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으며, 5세기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분열된 국토는 1861년 통일을 이루었다.
제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승전국과 패전국의 자리에 서게 되었으며, 2차 대전 뒤에는 자동차 공업, 패션 산업, 관광 등으로 경제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공업이 발달해 부유한 북부 이탈리아와 지중해를 중심으로 농업과 어업이 주를 이루는 가난한 남부 이탈리아가 공존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국토는 남한의 3배 크기이며, 인구는 6천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탈리아는 동,서,남쪽에 해안을 끼고 있으며, 반도(半島)와 시칠리아섬, 샤르데냐 섬의 3개로 구성되어 있다. 땅의 모양이 장화처럼 생겼는데 우리나라처럼 삼면이 바다인 반도로 되어있다.
기후는 사계절이 분명하지만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봄, 가을이 짧고 여름과 겨울이 길다. 그리고 일교차가 심하며, 겨울에 우기, 여름에 건기의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이탈리아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좋은 날씨이다. 그리고 비옥한 땅이다. 좋은 날씨와 비옥한 땅으로 인하여 이탈리아는 농업강국으로 자리잡고 있다. 다음으로 조상들이 남겨준 수많은 문화유산이다. 이 유산 때문에 수많은 관광객이 이탈리아로 몰려오며, 수많은 관광수입을 제공하여 준다. 여기에다가 아름다운 자연유산이다. 이탈리아가 연간 거두어들이는 관광수입이 연간 전체 재정수입의 15% 수준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높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 국민소득은 약3만7천불에 달한다. 모든 패션은 이탈리아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만큼 수많은 명품이 made in Italy 로 전 세계 사람의 인정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 산업, 우주항공산업, 조선업 등에 있어서도 높은 기술력을 자랑한다. 그리고 순수예술(미술, 음악 등) 분야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또 매장되어 있는 대리석은 앞으로 100년을 수출하여도 남을 정도로 많다고 한다. 로마의 유적지 모든 조각품과 건물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탈리아 국민들은 이처럼 축복받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 교육열이 높지 않으며,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라고 한다. 굳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조상대대로 가업을 물려받아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 대학진학률이 낮고, 전문지식을 요하는 분야에 인적자원의 층이 얇은 취약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장만으로는 취업하기 어렵기 때문에 무조건 대학을 가고, 그나마 명문대학을 가야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대조적이다.
국민소득이 높지만 도심지로 들어와 보니 고층 건물이 적고, 대형차량보다 중소형 차량이 많으며, 명품 패션을 몸에 걸치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탈리아는 역사 보존의식이 강하여 건물을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헐어서 재건축을 하는 법이 없고, 필요한 경우 내부 리모델링을 한다. 그러다 보니 특별히 새로 짓는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역사가 오래된 문화적 가치를 지닌 도시가 되어있다. 그리고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을 잇는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다보니 한 번 태어난 곳을 좀처럼 떠나지 않기 때문에 대도시 집중화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도로사정은 매우 열악하다. 오래된 도시를 재개발하지 않고 자동차 보유대수는 늘어나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특히 로마시내의 교통체증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며, 주차사정도 매우 열악하다. 그리고 보험료과 유류대가 매우 높아서 대형차량을 선호하지 않고 중소형 차량을 보유한다는 것이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하여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으로 소득에 비하여 사치 낭비가 심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우리가 잘 살게 된 것이 얼마나 되었는가? 국민소득 2만불을 넘긴 것도 불과 2년 전인데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잘사는 나라사람처럼 보인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열심히 일하고, 교회에서 시간마다 기도하였던 믿음의 선조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런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데, 다음세대 젊은이들은 이 사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기성세대들도 불필요한 낭비와 사치를 절제하고, 아직 주변에서 고통당하는 이웃과 주변 국가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로마
현재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이다. ROMA를 거꾸로 하면 AMOS가 되는데 이는 ‘사랑’이란 뜻의 프랑스어이다. 그래서 로마를 사랑의 도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로마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옛 유적을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다. 그래서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으로 몰려온다.
가이드의 우스갯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건물이 적어도 2천년이 되어야 제대로 건물로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역사를 보존하는 도시, 그래서 이곳을 ‘불변의 도시’라고도 하며,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백발이 되어 돌아와도 옛날의 추억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변화를 추구하는 역동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는 전쟁의 신 마르스(MARS)와 인간인 레아 실비아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 형제 레무스와 로물루스에 의해 건국되었다. 쌍둥이는 태어난 후 티베레강에 버려졌지만 쌍둥이 아기를 늑대가 데려다 젖으로 키웠다고 전해진다. 성경의 모세 이야기와 비슷한 부분이 있어 흥미롭다.
로마는 BC 753년에 건국되었으며, BC 509년에 부족 대표 300명의 원로, 2명의 집정관(오늘날 정부에 해당), 2명의 호민관(오늘날 야당에 해당)으로 소위 공화정 정치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
로마에서의 첫 번째 순례지는 과거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 시절에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땅에 굴을 파고 살던 카타콤 중 가장 규모가 큰 성 칼리스토 카타콤이다.
313년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이 내리기까지 기독교는 공인되지 않았다. 박해가 극심하였던 1~3세기경 기독교인들은 공식적인 활동이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예배나 집회를 위해 지하로 잠적했다. 이 지하교회 또는 지하묘지였던 곳을 희랍어로 웅덩이란 뜻의 카타콤베라고 부른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거주하고, 예배하던 장소였을 뿐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그 곳에 시체를 안장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런 카타콤 중에서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성(Saint) 칼리스토 카타콤는 그 길이가 20km에 달하며, 지하 4층까지 되어있는데 모두 당시 기독교인들이 손으로 굴을 파서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실제 흙을 만져보니 석회질이어서 사람의 손으로도 쉽게 팔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웠으며, 이 흙은 공기와 접촉하게 되면 표면이 딱딱해진다는 것이다. 군데군데 환기구도 만들어 놓았고, 마치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몇 년 전 일본사람이 여기를 방문하였다가 길을 잃어 목숨을 잃은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외부인 방문은 지하1층까지만 허용된다.
당시 로마사람들이 이 카타콤의 실체를 모를 리가 없었지만 지하무덤만큼은 신성시하였기 때문에 묵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후일 박해가 심해지면서 카타콤 입구에 불을 놓아 연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는 기독교인들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카타콤 입구와 내부에 군데군데 익투스 고기 그림이 새겨진 돌이 목격되었다.
그동안 말로만 듣던 카타콤 안에 실제로 들어와 보니 참으로 가슴이 아프고,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는 저들처럼 신앙생활을 할 때 고난을 당하지 않고 너무나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마음도 없고, 자신에게 조금만 부담스러운 상황이 생겨도 미련없이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저버리는 것이 우리들 자신이 아니었는가 생각이 든다.
한편 이 카타콤을 방문하는 관광객으로 인하여 로마가 막대한 관광수입을 올리는 것이 매우 이율배반적이다. 사실 로마는 기독교인을 핍박하였고, 핍박당한 자들이 피땀으로 세운 카타콤인데 현대에 와서 로마가 이를 이용하여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기념성당
베드로가 심한 박해를 이기지 못하여 로마를 빠져 나가던 중 예수님을 만난 곳에 세워졌다는 기념교회를 방문하였다.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한 베드로의 그림과 예수님의 발자국(바티칸 자료에 의하면 270mm) 형상이 보인다.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베드로는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다 도망을 가더라도 자신은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며, 세 번 이나 부인하고 큰 낙담에 빠져있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베드로는 제자들을 이끌어가는 리더가 되었다. 극심한 박해가 찾아왔다. 제자들은 하나 둘 잡혀가서 순교를 당하고, 성도들도 굶주린 사자들에게 던져져 죽게 되었다. 베드로도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다른 제자들이 "당신은 죽어서는 안 된다."라고 로마를 떠나도록 종용했다. 그리고 도피하도록 권한다.
새벽 미명에 로마를 빠져나가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로마로 들어가시고 계셨다. 그때 베드로가 질문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Quo vadis, domine?") 주님의 대답은 언제나 동일하며 한 가지. 나는 죽으러 왔다. 내가 가는 곳은 십자가이다. 生卽死, 死卽生(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베드로, 네가 버리고 간 십자가 내가 다시 지러 로마로 간다."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도 주님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화려한 궁중으로 가시나이까? 정권을 잡으러 가시나이까? 억울함을 푸시러 가시나이까? 온 세상의 왕이 되기 위하여 가시나이까? 주님의 대답은 언제나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위해왔다.
우리도 어디로 가는지 때때로 자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고 말이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큰 자리 하나 차지할 욕심으로 그 길을 따라갔던 베드로가 다시 질문한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이 가시는 곳이 십자가였다면 제가 주님을 애초에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
하지만 베드로도 그 길을 걸어간다. 발길을 돌려 로마로 들어가 베드로 역시 순교한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는 비로소 주님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았다. "주님이 가신 곳 저도 갑니다. 이 길이 영광의 길... 생명의 길.." 바로 그 십자가는 나를 위한 십자가인데 난, 그 십자가의 고난에서 멀게만 느껴지고 그저 바라만 볼까 주님! 이제 다시금 잃어 버렸던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슴으로 안고 사랑하겠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오니 주님, 받으시옵고 사용하소서. 주님의 손으로 다듬으시고 빚으사 사용하시옵소서. 그리하시면 이제 이 몸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남은 시간, 나의 생명을 주님 영광을 위하여 드리겠습니다. 사용하시옵소서. 드러나지 않게 주님의 도구로 오직, 주님의 도구로...
사도 바울 참수터
사도 바울이 로마에 죄수의 신분으로 끌려가서 순교한 현장이다. 그 현장에 세워진 기념교회 안에는 사도 바울이 참수를 당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로마 정부에서도 배려하는 차원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고 참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사도 바울의 목이 참수형을 당한 후 세 번 구르는 곳마다 샘물이 터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에 세워진 교회를 “세 분수(噴水)교회”라고도 부른다.
사도 바울이 참수당한 현장 옆에 기독교인들을 가둔 감옥이 있었는데 참수당하는 모습을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여 배도하도록 유도하였다.
사도 바울은 살아서 많은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그의 공적은 전 세계에 아름다운 기독교를 꽃피우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위대한 인물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시대에 한 사람을 통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신다. 이 시대에는 누가 사도 바울처럼 쓰임을 받을 수 있을까?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트레비 분수
분수의 도시로 알려진 로마의 분수 가운데서도 트레비 분수는 가장 유명하다. N.살비 설계의 대표작으로, 1732년 착수하여 살비 사후인 1762년에 완성하였다.
흰 대리석 작품으로 개선문을 본뜬 벽화를 배경으로 거대한 1쌍의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해신(海神) 트리톤이 이끄는 전차 위에 해신 넵투누스상(像)이 거대한 조개를 밟고 서 있으며, 주위의 거암거석(巨岩巨石) 사이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와 연못을 이룬다. 이 연못을 등지고 서서 동전을 던져 넣으면 다시 로마를 방문할 수 있다고 하는 속신(俗信)이 있다.
베네치아 광장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면, 모든 로마는 베네치아 광장으로 통한다고 말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 광장이다. 1871년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됐다. 광장 북쪽으로는 코르소 거리가 뻗어 있고, 남쪽으로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국왕이다. 그의 기념관은 현재 통일기념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16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의 로마 대사관 역할을 하던 베네치아 궁전을 볼 수 있다. 베네치아 궁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재자 무솔리니가 집무실로 사용한 곳으로 유명하다. 현재 르네상스 예술품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베네치아 광장과 콜롯세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 ‘포로(Foro)’란 공공광장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포럼’(forum)이라는 용어가 바로 '포로 로마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의 공회를 의미한다. 300명의 원로와 2명의 집정관, 2명의 호민관들에 의한 공화정 정치가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 시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우스 신전이며, 당시 로마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2개의 개선문을 지나서 제우스 신전 앞에 나와서 노예와 모든 전리품을 바쳤다고 한다. 그러나 개선문과 제우스 신전은 지진으로 인하여 파괴되고 땅에 묻혔다가 후일 발굴되어 흔적만 남아있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갇혔던 지하 감옥
포로 로마노 안에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갇혔던 로마의 감옥이 남아있다. 지하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고, 밧줄을 통해 지하로 출입하도록 설계가 되었다고 한다. 사도 바울이 이 감옥에 갇혔다가 바울 참수터로 끌려가서 순교하였고, 사도 베드로도 이 감옥에 갇혔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당하신 것이다.
그 건물을 보는 순간 마음에 깊은 전율이 느껴진다. 마지막까지 복음을 위해 살다간 두 사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오늘날에는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 가운데 복음의 광채와 능력은 사라진 지 오래이다.
로마에서의 첫날 점심 ; 중국식 요리
크루즈에서 하선하여 온종일 로마의 유적지를 돌아다니다 보니 오후 2시가 훌쩍 넘었다. 가는 곳마다 한국인 관광객이 쉽게 눈에 띈다. 반가운 마음으로 서로 인사도 나누었다. 그런데 단체로 관광을 온 사람들이 많은 까닭으로 식당을 이용할 때에 불편하기 짝이 없다.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식당을 이용하다보니 미리 예약이 되어있었지만 1시간가량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그동안 느끼한 양식만 먹어서 얼큰한 김치찌개나 된장국 생각이 나던 터라 한식이 아니라 중국식 음식이었지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게다가 점심 식사시간도 늦어져서 모두 배가 고팠기 때문에 맛있게 식사를 했다. 지쳐있던 일행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대단한 요리도 아니었지만 찰진 쌀밥과 김치 깍두기만 먹을 수 있어도 행복하였다.
콜로세움
플라비아누스 황제 때 세워진 것으로 원래는 플라비아누스 원형경기장이라고 불렸다. 70~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공사를 시작해 80년 티투스 황제 때 100일간의 경기가 포함된 제전을 위해 공식적으로 헌정되었다. 82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최상층을 덧붙여 공사를 완성했다.
여분의 떠받치는 힘을 더하기 위해 적당한 언덕을 파서 세운 이전의 원형경기장과는 달리 콜로세움은 돌과 콘크리트로 세운 완전한 독립구조물로서 가로, 세로가 각각 190m, 155m에 이르며 80개의 문을 통하여 5만 명의 관객을 단 몇 분 만에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경기장에서 수천 회에 걸친 검투사 시합과, 맹수들과 인간의 싸움, 모의 해전 같은 대규모 전투장면이 실연되었다. 중세 때에는 낙뢰와 지진으로 손상되었으며 반달족에 의해 더욱 심하게 파손되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었던 좌석과 장식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피지배계층의 관점이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다소 잔인한 측면이 있으나 고대 로마 시민들에게 원형 경기장은 경기를 보며 일체감을 느끼고 그 내용을 즐기는 하나의 공공 오락시설이었다.
한편, 로마 정치가들에게 원형경기장은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화합을 도모하며 때로는 로마나 귀족의 권위에 불복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보복을 암시하는 공간이었다.
일정 관계 상 콜로세움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입구에는 수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콜로세움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외벽(外壁)은 높이 48m로 4층이며, 내부는 약 5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放射狀)으로 설치되어 있다.
로마에서의 첫날 저녁식사 : 한식
점심을 늦은 시간에 먹은 탓에 배가 크게 고프지 않았지만 모처럼 한식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 날마다 대하는 식탁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했던가 생각해 보았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감사의 제목을 잊고 사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다. 감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우리가 반드시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인 것이다. 감사는 감사할만한 조건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을 우리가 믿는다면 감사야 말로 그 말씀에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감사의 수준이 곧 신앙의 수준이다.
로마에서의 하룻밤, 호텔 안토넬라(Antonella)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 첫 번째로 호텔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시간도 늦었고, 모두 지쳐서 간단한 샤워를 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 성지순례의 모든 일정이 막바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하나님, 두고 온 교회와 성도, 가족들을 지켜 주소서. 마지막까지 성지순례에 동참한 사람 중 한 사람도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