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동구 역사(지역역사)를 성울시강동구 역사기록에서 발췌하여 옮긴다.
기록에서 광주안씨가 광주에서 出身하여 살아온 씨족연원(氏族淵源)을 알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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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지방토착세력의 영향력이 커서 그들이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도와 실질적으로 자신의 고을을 지배하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 왕건은 23년(940)에 지방제도를 개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무렵에 토성(土姓)을 분정하였다. 토성은 호족 내지 호족의 후예로서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집단이었다. 그들은 향리가 되거나 중앙으로 진출하여 사족(양반)이 되었다. 고려는 조선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지방의 힘이 컸으며,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군현 즉 속군과 속현도 많았다. 고려의 향리는 조선의 그것과 달리 세력이 커서 자신의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토호 내지 유지였다. 광주목에도 목사가 파견되었지만 토성의 영향력이 컸던 것이니 광주의 토성은 이 일대를 지배한 성씨집단이 된다.
고려시대를 어느 정도 반영한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광주목에 따르면 토성(土姓)이 이(李), 안(安), 김(金)등 셋으로, 가속성(加屬姓)이 박(朴), 노(盧), 장(張)등 셋으로 망성(亡姓)은 윤(尹), 석(石), 한(韓), 지(池), 소(素)등 다섯으로 나타난다. 망성은 대개 망토성(亡土姓)을 가리킨다. 조선중기『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 성씨조에는 이(李)·윤(尹)·석(石)·한(韓)·안(安)·김(金)·지(池)·소(素), 그리고 ‘속(屬)’으로 표시된 노(盧)·장(張)·박(朴)이 실려 있다. 이를 보면 고려시대에 광주를 지배한 토호는 토성내지 망성으로 표시된 이(李)·윤(尹)·석(石)·한(韓)·안(安)·김(金)·지(池)·소(素)등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토성으로 표기된 이·안·김이 핵심 지배세력이었지 않나 싶다.
고려시대에 광주 출신으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왕규였다. 그는 그의 전(傳)에 ‘광주인’이라고만 되어 있어 광주의 어느 지역 출신인지는 알 수가 없다. 위에서 언급한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에서 왕씨는 확인 되지 않는다. 왕규는 원래부터 왕씨가 아니라 태조 왕건으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아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왕건을 사위로 둘만큼 광주의 대호족이었던 왕규는 토성인 이·안·김 등과 관련되었을 가능성과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후 가문이 몰락해 토성으로 취급되지 않았을 가능성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왕규는 태조 왕건을 섬겨 대광(大匡)이 되었으며 왕건에게 딸을 둘씩이나 바쳤는데 하나는 제15비 광주원부인, 하나는 제16비 소광주원부인이었다. 특히 제16비는 광주원군이라는 왕자까지 낳았다. 나아가 왕규는 다른 딸 하나를 왕건의 아들인 제2대 혜종에게 들여보냈는데 후광주원부인이다. 왕규는 태조가 아파 죽음에 임박한 태조26년 5월에 염상, 박수문등과 함께 모시고 앉아 태조의 유언을 들을 정도로 태조의 신임을 받고 세력을 떨쳤댜. 그의 사위인 무가 제2대 혜종으로 즉위하자 그의 세력은 더욱 떨치게 된다.
그런데 『고려사』권 127 반역 1 왕규전에 따르면, 태조가 세상을 뜨고 혜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왕규가 왕의 배다른 동생인 요(정종)와 소(광종)가 반역하려 한다고 참소하고 해치려 하였다. 혜종이 무고임을 알고 그 동생들을 더욱 잘 대해 주었으며 맏딸을 소와 혼인시켜 그들의 세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또한 왕규는 외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어느날 밤에 부하를 왕의 침소로 잠입시켜 잠든 왕을 시해하려 하다가 왕이 깨어 반격하는 바람에 실패하였지만 왕은 추궁하지 않았다. 또 어느 날 밤에 왕규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궁에 들어와 벽에 구멍을 뚫고 침소에 침입하였다. 왕은 점술가 최지몽의 예언에 따라 이미 다른 곳으로 몰래 피신해 있던 터라 무사하였지만 역시 왕규의 죄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왕규는 혜종의 후원자였던 대광 박술희를 평소에 미워하던 차에 혜종이 세상을 뜨자 정종의 명이라 꾸며 살해하였다. 혜종의 병이 깊어지자 정종이 왕규가 다른 뜻이 있음을 알고 비밀히 서경(평양)의 대광 왕식렴(태조의 사촌동생)과 연결하여 대응하였으며, 왕규가 난을 일으키려 하자 왕식렴이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지키니 왕규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에 왕규를 강화도의 갑곶으로 유배하고 사람을 뒤따라 보내 참수하였으며 그 당여 300여인을 주살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개과정이 이른바 ‘왕규의 난’이며 그래서 왕규는 불명예스럽게도 반역전에 실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록을 세밀히 음미해보면 왕규가 사위인 혜종을 몰아내고 외손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별로 없다. 오히려 막강한 호족인 충주 유씨를 외가로 두었으며, 태조의 사촌동생으로 서경의 군사권을 장악한 왕식렴과 친밀한 요와 소 형제가 정변을 일으켰다는 인상을 받는다. 요는 혜종의 뒤를 이어 정종이 되며, 소는 정종의 뒤를 이어 광종이 된다. 후삼국과 고려초기에 정국을 호령한 광주의 대호족 왕규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하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 인물조에는 고려시대 인물이 없는데 왕규 정도면 실리고도 남을 인물이다. 왕규의 외손이자 태조의 아들인 광주원군은 가엾게도 왕규가 몰락하면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모른다고 한다.
왕규의 몰락은 광주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8목의 하나로서 지방행정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전략과 교통의 요충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행적을 나타낸 광주 출신 인물이 없다는 점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광주는 반역의 땅으로 낙인찍혀 이곳 출신 인물들은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소외당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광주의 토성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고려 말로 가면서 사회변동의 폭이 넓어지자 중앙으로의 진출을 꾀하게 된다.
광주 토성의 두 번째로 올라 있는 안씨가 눈길을 끈다. 1871년경에 편찬된 『광주부읍지』의 인물조에는 고려 때 인물로 안방걸, 안기, 안국주, 안강이, 조선 때 인물로 안성이 실려 있다. 읍지에 따르면, 안방걸은 광주 사람이 난을 일으켜 그 주(主)를 살해하자 토평하였으며, 또한 평양에서 승리를 거두자 고려 태조가 그 공을 가상히 여겨 광릉군에 봉하고 광주를 관향으로 하사하여 안씨의 시조가 되었다. 안방걸의 후손인 안기는 충선왕을 섬기고 공양왕 때 이부상서 판전농시사에 이르렀지만 고려말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병을 칭탁하고 함안에 퇴거했는데 82세에 세상을 떴다. 안기의 아들인 안국주는 중랑장에 이르렀지만 정몽주가 피살되자 함안으로 돌아갔으며 두 번 불러도 응하지 않고 89세로 세상을 떴다. 안국주의 아들 안강은 아버지가 물러나 벼슬하지 않자 역시 은거하였다. 안성은 과거에 급제해 관직이 개성유수에 이르고 후에 ‘사간(思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비교적 객관적인 조종운의 『씨족원류』에는 광주 안씨의 계보가 안방걸(대장군) -> 후손 안수(安綏 문하시중)-> 안지(판군기시사) -> 안수(安壽 판도평의사사) -> 안해(판전농시사) -> 안기(판전농시사) -> 안성(개성유후, 사간공)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一本)에는 안수가 있으나 안기가 없고, 일본((一本)에는 안수가 없으나 안기가 있다고 세주를 달았다. 안수(安綏)가 수상인 문하시중을 안수(安壽)가 재상회의 도평의사사의 판사를 지냈다는 점은 추증직이 아니라면 신빙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재상직을 지낸 인물은 보통 정사에서 확인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중에 안성은 조선중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권 6 광주목 인물조 본조(조선)편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개성부 유후(留後)에 이르렀고 후에 시호를 사간(思簡)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어 신상명세가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인물이다. 『기우집』권2에는 조선왕조 개창에 반대해 절개를 지킨 두문동(杜門洞) 72현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안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안성은 관직이 직제학이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평양백에 임명하였지만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동문선』권16 칠언율시에는 안지상이 광주 촌장(村莊)에서 급제 동년으로 장원인 강화 만호 하을지에게 헌정하는 시가 실려 있다. 하을지는 충목왕 즉위년 11월에 박충좌와 이천 밑에서 장원급제하였다. 그런데 공민왕 22년(1373) 반남 박씨 준호구(准戶口)에 따르면 박수의 사위이자 박상충의 매부로 정산군 지사인 안길상이 실려있다. 또한 안길상은 본관이 광주이며 갑신년(충목왕 즉위년, 1344)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였다고 되어 있다. 박수의 아들이자 이곡(이색의 부친)의 사위인 박상충은 고려말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박상충의 매부가 되는 이 안길상은 바로 안지상과 동일인으로 판단된다. 그러니까 광주 출신의 안지상(안길상)은 충목왕 즉위년에 좌주(座主 : 고시관)인 박충좌와 이천 밑에서 2등 즉 아원(亞元)이라는 빼어난 성적으로 급제하였던 것이다. 안길상(安吉常)은 또한 안길상(安吉祥)과 동일인으로 판단된다. 안길상은 충목왕 때 개혁을 담당한 정치도감의 녹사(실무진)으로 활동한다. 안렴사가 정동행성의 이문(理問) 윤계종이 이천 향리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런데 안길상은 윤계종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어 은폐하였다가 정치도감의 판사인 왕후와 김영돈에게 뺨을 얻어맞고 쫓겨났다. 충정왕의 공부를 돕는 시학으로 활동했던 전교승(典校丞) 안길상은, 숙부 공민왕에 의해 쫓겨나 강화도로 향하는 충정왕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 하직인사를 올렸다. 이러한 사례들은 그가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의리를 중시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이후 안지상(안길상)은 고향 광주로 돌아와 은거한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이 시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하을지에게 보낸 시에 그의 불우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하을지는 공민왕 22년 7월에 강화만호로서 왜구를 막지 못하여 처벌받았으니 광주 은거지에서 안지상이 하을지에게 시를 보낸 때는 공민왕 22년 무렵이 된다. 이로 보아 안지상은 공민왕 치세의 거의 내내 관직에서 소외되어 있다가 공민왕 말년이 되어서야 지방관에 부임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는 이처럼 오랫동안 은거함으로서 자신이 모셨던 충정왕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안길상은 우왕 3년 6월에 정3품인 판전객시사로서 왜구를 근절시키기를 요구하는 임무를 띠고 일본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는 우왕 6년 11월에 병으로 그만 머나먼 타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충목왕때 아원으로 급제하여 우왕 때까지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안지상(안길상)은 광주가 본관이고 여기에 촌장을 갖고 있었다. 안지상은 처남인 박상충의 아들 박은이 강동 지역에 묻힌 것으로 보아 출신지가 광주 중에서도 강동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안지상은 그 가족관계에 대해 부친이 안생이라는 점 정도밖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정황들로 보아 앞에서 소개한 안성 집안과 친척관계였으리라 여겨진다.
박은은 전라도 나주의 반남(潘南)사람 박상충의 아들로서 창왕 즉위년에 정도전과 권근 밑에서 급제하고 조선건국 후에 활약을 많이 한 인물이다. 박은이 강동 지역에 묻힌 것은 부친 박상충의 매부인 광주 안길상의 연고지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광주의 토성 안씨는 광주 사람 왕규의 몰락으로 불이익을 받다가 안지상, 안성 등의 예처럼 고려말에 가서야 서서히 중앙으로 진출하지 않았나 싶다. 요컨대 고려시대에 광주 출신 인물들은 건국초에 이곳 출신의 왕규가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몰락하면서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소외되었다. 물론 이씨, 안씨, 김씨 등이 호족의 후예인 토성으로서 광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으며, 특히 이씨는 고려말 이집 때까지도 대대로 호장을 세습하였다. 안지상·안성의 안씨와 이집·이양중의 이씨 집안은 원 간섭기 무렵부터 서서히 중앙으로 진출하였으며 특히 이집 계열은 고려말~조선초에 급제자를 대거 배출해 명문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의 광주는 오늘날의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 경기도의 하남시, 광주군, 성남시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천녕군(여주군 홍천면), 이천군, 죽주(안성군 이죽면), 과주(과천 일대), 용구현(용인 일대), 양근현(양평읍) 등의 속현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광주는 더욱 광범위하였다. 광주에 관한 기록의 대부분은 그 안의 구체적인 지역을 가리키기보다 그냥 ‘광주’라 하여 포괄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그것이 강동구 지역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조선후기에 ‘면(面)’이라는 지방행정 단위가 체계적으로 시행되었을 때 강동구 지역은 광주목의 구천면(龜川面)에 해당하였다. ‘면’제가 실시되지 않은 고려시대에 ‘광주’라 언급된 경우 그것이 강동구 지역과 관련되는지 판단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강동구 지역과 명백히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지 않는 한 ‘광주’로 나오면 일단 소개대상을 삼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고려시대 광주의 읍치(邑治)가 어디에 있었는지 명확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조선 후기 인조4년(1626)에 남한산성 안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조선시대와 같은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중기에 쓰여진 『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에 따르면 덕풍역은 주 북쪽 5리에, 일장산(남한산)은 주 남쪽 5리에, 검단산은 주 동쪽 7리에, 망월봉은 주 서쪽 10리에 자리잡고 있다고 되어 있다.읍치는 이로 보아 ‘주(州)’ 즉 광주의 지금의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 자리잡지 않았나 싶다. 검단산이 광주의 진산(鎭山)으로 기록된 점도 그러할 가능성을 뒷받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