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서원은 삼우당(三友堂) 문익점(文益漸)과 풍암 문위세(文緯世)를 배향하는 서원으로 옛 이름은 월천사(月川祠)였다. 원래는 임진왜란 때 창의한 문위세를 향사하기 위해 인조 22년(1644) 월천사를 세운 것에서 비롯된다. 숙종 28년(1702) 사우로서의 건립절차와 규모를 새로 마련하였고 영조 10년(1734)에는 문익점을 추배하면서 그를 주벽으로 하고 문위세를 배향케 되었다. 정조 9년(1785)에는 전라도 유생 600여 명이 이들의 공덕을 흠모하여 사액(賜額)할 것을 청하는 청액소를 올리게 되자 이에 조정으로부터「강성」이라는 액호(額號)를 받았다. 그 후 고종 5년(1868) 훼철되어 고종 31년(1894) 후손 문정원・문욱호 등에 의해 설단하였다가 1905년에 강당을 중수 하였다. 그리고 1929년에는 신실(숭덕사)를 중건하였다. 문익점(1329~1398년)은 진주 강성현 출신으로 자를 일신(日新), 호를 삼우당(三友堂)이라 하였다. 공민왕 9년(1360)에 문과에 급제하여 1363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들어 갔다가 3년후 귀국할 때 목화씨를 붓대 속에 감추어 옮으로써 우리나라의 의생활(衣生活)에 큰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공은 고려 우왕 1년(1375)전의주부, 고려 공양왕 1년(1389)좌사의대부가 되었고, 이성계 일파가 추진한 개혁에 반대했다가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세조때 사당이 세워졌고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하였다. 문위세(1534~1600년)는 문익점의 9대 손으로 자는 숙장(叔章) 풍암(楓庵)이다. 명종 22년(1567)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보다는 오직 한문 연구에만 전심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때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 조달 등으로 공을 세워 선조 28년(1595) 용담현령에 임명되었다. 또한 정유재란 때는 읍민을 동원하여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많은 왜적을 무찔러 선조 33년(1600)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사당(祠堂)인 숭덕사(崇德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전면 반칸을 툇간으로 개방하였다. 양박공면에는 바람막이판을 설치하였고 처마는 겹처마로 꾸몄다. 가구는 1고주 5량가이다. 강당(講堂)은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내・외삼문을 갖추고 있다.
2. 고산사 석조여래좌상(高山寺 石造如來坐像) 도유형문화재 제161호
고산사는 장평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km 떨어진 야산 협곡에 있다. 이 석불은 1966년 새로 지은 법당 안에 봉안되고 있는데, 원래는 절터 상태였으며 이 석불은 파손된 채 땅속에 매몰되어 있었다고 한다. 석불은 아랫부분이 파손되어 시멘트로 고정시켰으며 광배(光背) 일부도 훼손된 것을 보수하였다. 외모를 보면 배모양 광배를 갖추고 머리 위로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새겨져 있으며 몸체는 양각으로 조각되었다. 크고 높직한 육계(肉髻)에 소발의 머리를 하고 얼굴은 긴 타원형의 계란형으로 전체가 풍만한 편이며 이마엔 백호가 없다. 눈은 가늘게 뜬 실눈이며 코는 아랫부분을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입은 입술이 상・하에서 두툼하게 돋아나게 하였으나 꼭 다물고 있다. 턱은 이중 턱이며 두 귀는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는데 귓부리가 길게 어깨 위까지 내려왔다. 목은 3도가 표현되었으나 원래 균열이 간 것을 시멘트로 붙여 놓았다. 어깨는 얼굴에 비해 약간 좁은 듯 하며 법의는 통견으로 수직선을 그리며 아랫부분으로 내려 뻗히고 있다. 수인(手印)은 양팔을 구부려 앞가슴에 대고 있으나 옷주름에 가려 그 형태를 알 수 없다. 광배는 배모양의 거신광(擧身光)에 두광과 신광이 겹쳐서 나타나고 있다. 두광은 두 줄의 원형띠를 돌리고 그 안에 16잎 연꽃이 새겨져 있는데 보수한 부분은 연꽃이 없다. 신광에서도 두 줄의 타원형 띠를 돌려 몸전체를 감싸고 있다. 이 석불은 몸체 아랫부분을 볼 수 없어 아쉽지만 광배와 얼굴에서 보여준 분위기는 중국 당나라 불상과 비슷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손의 모양은 화순 운주사 석불 군(群)에서 나타난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점은 당시 각 지역간의 문화교류의 영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만든 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3. 금강반야바라밀경 권 제일 (金剛般若波羅密經 卷 第一) 보물 제1251호
이 책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문으로 번역한「금강경」의 본문과 야부 도천(冶父 道川)의 송(頌), 예장 종경(豫章 宗鏡)의 제강(堤綱), 함허당 득통(涵虛堂 得通)의 설의(說誼)등 3가(家)의 주해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여 조선 성종 13년(1482)에 궁중에서 정축대자(丁丑大字), 을해증자(乙亥中字), 한글 소활자를 인출한 책으로 「금강경삼가해」라고 한다.「금강경」은 석존이 금위국(金衛國)의 기수급자독원(祇樹給子獨園)에 머무를 때 설법하였던 내용을 그의 제자인 아난존자(阿難尊者)에 의해서 결집되었으며, 이후 중국에 전래된 이래 구마라집 등 5인의 번역이 전하고 있다. 그후 구마라집의 번역본에 양(梁)나라 소명(昭明) 태자가 32과분(科分)으로 분장하였고, 당(唐)나라 조계육조대감사 혜능(慧能)등 여러차례 주해(註解) 작업이 있었다. 「금강경삼가해」의 저본이 되는 「오가해(五家海)」는 중국에서 찬술된 것을 태종 15년(1415)에 안암사(安巖寺) 주지를 지낸 성거(省居)등이 처음으로 판각 간행한 판본(보물 1082호)이 전해진다. 조선초기에 한문본오가해 간행 이후 세종의 숙원 사업이었던 「금강경」의 언해(諺解) 사업이 세조 8년(1462)에 와서 본문과 육조의 해의만을 국역하여 간경도감에서 간행했고「금강경삼가해언해」가 성종 13년에 활자본으로 연출되었다. 이 책은 본문 대자(大字)는 세조 3년에 한문본 오가해를 간행할 때 주조한 정축자(丁丑字), 중자(中字)는 을해자 중자를, 한글 활자는 세조 7년(1461)에 「능엄경언해」를 인출할 때 주조하였던 활자를 보관했다가 사용하여 300부를 간행했다. 「금강경삼가해」언해본은 모두 5권 5책이며 권1에는 함허 득통(涵虛得通)의<금강경서>, 종경(宗鏡)의 <제송강요서>, 본문 첫행에 권두제(卷頭題)인 ‘金剛般若波羅密經’, 2행에 「금강경」전반에 걸친 득통(得通)의 설의(說誼)가 위에서 2자를 낮추어 시작되고 있다. 이어 「冶父(道)川禪師○著語(幷)頌/豫章(宗)鏡禪師提綱/涵虛堂得通 說誼」라는 저작사항 3행이 있고 설의와 연송, 제강이 반복되다가 「法會因由分第1」의 ‘如是’ 두자로부터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 권5의 끝에 종경 선사의<제송경요후서>와 <得通決疑>가 있고 성화(成化)18년(1482)의 한계희(韓繼禧)와 강희맹(姜希孟)의 발문이 있어 편찬과 간행 등의 사실을 살필 수 있다. 보림사본은 전 5권 5책중에 권1의 1책(58張)만이 발견되었다. 변란은 전체가 사주단변, 광곽크기 27?9.8cm, 반엽 기준11행, 한 행마다 15~21자로 판각되어 있다. 판심은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 그 어미 사이에는 ‘金剛經三家解’라는 판심제와 권장수가 표시되었고 활자본의 특징인 계선(界線)이 있다. 본문의 구마라집 역본을 양나라 소명태자에 의해서 32과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금강경」의 본문은 정축 대자로, 본문 다음에 구성되어 있는 득통의 결의, 야부의 저어와 송, 종경의제강과 송 등은 을해 중자를 사용하였고, 구결과 언해문은 모두 세조 7년에 주조된 한글활자를 이용하여 인출하였다. 주해자인 야부와 종경 그리고 그들의 頌은 모두 음문(陰文, 墨蓋子)으로 표식되어 있다. 지질은 조선 세조에서 성종사이에 인경에 주로 사용되었던 종이로 가로발문이 들어 있으며, 황갈색을 띠고 있는 고정지(藁精紙)이다. 권1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동국대도서관, 심재완씨 소장본은 약간의 낙장이 있는데 보림사본은 앞뒤의 표지만 떨어졌을 뿐 본문의 내용은 완전하다.
4. 당포 앞바다 승첩도 (唐浦 앞바다 勝捷圖) 도유형문화재 제25호
이 승첩도는 선조 37년(1604)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공을 막아냈던 공신들에게 하사(下賜)했던 그림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림의 내용을 보면 당포 앞바다에서 왜적과 싸워 승첩(勝捷)하던 장면을 그린 것으로 그림 제목에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라 전서체로 쓰여져 있고 그 아래에는 전열을 가다듬은 선단이 줄을 지어 배치되고 있다. 또 배에는 영기를 달았는데 그 기세가 당당하여 전승을 곧 알아볼 수 있게 선으로 묘사 되었다. 배 아래는 묵서로「嘉義大夫兼全羅, 忠淸, 慶尙三道水軍統制使…」등으로 당시 활동상황을 기록하였으며 같은 줄 상단에는 「保功將軍行唐浦萬戶」등 벼슬명칭이 기재되었다. 또 그 밑으로 중앙칸에는 윤흥용, 박옹, 신여량, 김대관, 김일개, 이희춘 등 총 27명의 성명이 있고 아래 두 줄은 본관과 거주지가 적혀 있다. 이 승첩도는 임란과 관계된 그림으로 당시 전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5. 동백정(冬柏亭) 문화재자료 제169호
이 정자는 장동면 만년리 장항마을 강정산 아래에 위치하여, 최초 창건은 세조 4년(1458) 의정부 좌찬성 동촌김린(金麟 : 1392~1474년)이 관직에서 은퇴한 후, 은거하기 위해 가정사(假亭舍)를 건립한 데서 비롯한다. 그가 은거하면서 지은 가정사는 선조 17년(1584)에 공의 후손인 운암 김성장(雲岩 金成章)에 의해 중건되었고 이때 동촌(桐村)선생께서 심어 놓았던 동백이 울창함에 정자의 이름을「동백정」이라 개명하였다. 한편 1584년 중건 이후 현재의 건물 규모로 보존되는 고종 9년(1872)과 고종 32년(1895)의 중수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연혁은 상세하게 전하여지지 않으나, 숙종 41년(1715) 청주김씨를 비롯한 호계리(현재는 부산면에 속함), 상・하민이 참석한 대동계의 집회소등으로 활용되면서 ⌈동정(洞亭・洞閣)⌋의 역할을하여 왔다 현재의 동백정 건물은 1872년 후손들에 의해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팔작집이나 1895년 중건할때 측면으로 1칸을 더 내어 현재는 정면 4칸의 형태가 되었다. 평면구성은 서쪽으로부터 전면에 누마루 1칸과 후면에 방 1칸, 다음 중앙칸은 앞뒤로 툇마루를 두고 중앙으로 방 1칸, 그리고 끝으로는 계속 마루를 설치하였다. 기단은 막돌 허튼층 쌓기 형식이며 주춧돌은 자연석을 놓았고, 기둥은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로는 공포 구성없이 허튼층 쌓기 형식이며 주춧돌은 자연석을 놓았고, 기둥은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로는 공포 구성없이 창방(昌枋)을 걸고 주두를 놓았으며 창방 위로는 주간마다 3구씩의 소로받침을 두었다. 가구는 5량가이며 측면 중심 기둥으로부터 대량 위로는 충량(衝梁)을 걸었다. 처마는 모두 부연을 둔 겹처마이다.
6. 보림사 동부도(寶林寺 東浮屠) 보물 제155호
보림사 동쪽 숲속에 다른 부도들과 함께 있으나 이 부도가 뛰어나게 우수하여 곧 식별된다. 8각원당형을 따른 부도로서 백색양질의 화강석재는 더욱 이 부도의 조형미를 돋보이게 한다. 지대석(地臺石)은 8각으로 매우 넓으며 그 위의 하대석은 반구형(半球型)에 가까운데 소판팔엽(素瓣八葉)의 복련(伏蓮)이 덮혀있고 각 우각(隅角)마다 귀꽃이 있는데 연판(蓮瓣)에 착 붙어서 매우 평판적(平板的)이다. 또 팔각의 각면마다 안상 1좌(眼象一座)가 조각되었는데 첨두좌우(尖頭左右)에서 안으로 뻗은 두 개의 뿔이 날카로와 다른 부도와 다르다. 중대석은 가늘고 낮은 팔각석주로 표면에 꾸밈은 없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같이 반구형에 가깝고 귀꽃이 없을 뿐 하대석과 같이 소판팔엽(素瓣八葉)의 앙련석(仰蓮石)이다. 밑에는 낮은 3단의 받침이 있고 상면은 2단의 탑신받침을 마련하였다. 탑신 또한 팔각석주형인데 한면에 문짝모양과 열쇠가 얕게 모각되었다. 옥개석은 각부재에 비해 좁고 얕은 편이며 지붕 안쪽(屋裏)에는 탑신과 접하는 부위에 3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 밑으로 넓은 골이 파져있다. 추녀는 수평으로 평박(平薄)하고 옥상(屋上)에는 뚜렷한 팔조(八條)의 우동(隅棟)이 내려와 추녀 끝에 꽃형태가 새겨져있다. 상륜부는 간석을 세우고 그 위에 보륜이 있고 외반(外反)된 이중 연꽃잎 위에 보주가 얹혀있다. 이 부도의 조법은 세련되었으나 평판적이고 섬약하여 입체감이 약간 모자란 듯하나 상륜부의 완존함은 이 부도의 귀중함을 높이고 있다. 조성년대는 조형수법이나 조각양식으로 보아 신라말기에 가까운 작품으로 추정된다.
사천왕이란 불설장아함경(佛說長阿含經)에서 나타나는 인도의 재래신으로 수미산에 거주하면서 동, 서, 남, 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 왕들인데 대승불교에서 불법의 수호신으로 강조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며 보통 모두 창을 갖지만 서방의 광목천왕은 붓과 책을, 북방의 다문천왕은 탑을, 그 외에는 칼을 갖는다. 조선조에 이르면 약간씩 달라져 동방의 지국천왕은 비파, 남방의 증장천왕은 보검, 서방의 광목천왕은 용과 여의주 또는 새끼줄(견색), 북방의 다문천왕은 보탑을 받쳐들게 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조선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조성연대가 가장 빠른 것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인데 여러개의 나무를 잇대어 상을 만든 다음 부분적으로 표면에 천을 붙이고 회를 칠한 뒤 채색을 하였다.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像)은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얼굴은 분노한 표정을 하였으며 복장은 갑옷과 천의(天衣)를 입고 있다. 건장한 체구에 오른손으로 칼의 손잡이를 잡고 왼손은 칼끝을 들고 있는데 오른쪽에서 약20도 정도 내려들고 있으며 칼은 다른 것보다 굵은 편이다. 서방 광목천왕상(廣目天王像)은 굳게 다문 입과 함께 근엄한 얼굴표정을 하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칼, 왼손은 두갈래로 갈라진 짧은 창을 들고 있어 용이나 여의주를 드는 일반형식과 다르다. 동체가 당당해 보이며 돌출부분에서 성실하게 조성한 흔적이 역력하여 수호신으로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높직한 보관(寶冠)을 쓰고 미소를 띤 다소 인자한 모습인데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에서 부드러운 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양손에는 비파를 들고 있는데 4줄에 울림통이 없고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 하는 악귀가 왼쪽 다리를 받쳐들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부릅뜬 눈에 입을 벌리고 소리지르는 듯한 위엄있는 모습인데 보관, 천의자락, 갑옷 등의 차림새는 다른 상(像)들과 거의 같다. 오른손에는 당(幢=旗)을 잡고 왼손에는 무엇인가 들고 있었던 모습인데 현재는 없어져 알 수 없으나 보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사천왕문 입구에는 좌・우의 동방과 서방천왕 옆에 인왕상(仁王像)이 배치되어 있는데 부리부리한 눈, 큼직한 코, 일자로 다문 입, 양쪽 팔과 다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에서 강건함을 엿볼 수 있으며 각부의 조각도 우수하다. 이들의 조성시기는 천왕문에 걸려 있었던 목판기문인『寶林寺天王金剛重新功德記』와 『보림사중창불사기록』에 의해 중종 10년(1515)에 조성되고 1666(8)년과 1777년의 2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보림사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란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각부의 조각이 매우 우수할 뿐만 아니라 권속(眷屬)들과 함께 매우 화려하고 작품성도 뛰어나 조선조 사천왕상의 모본(母本)이 되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8. 천관사 삼층석탑(天冠寺 三層石塔) 보물 제795호
이 탑은 천관사 법당에서 약간 떨어진 좌측에 자리잡고 있다. 탑의 구조를 보면 이중 기단에 3층 석탑으로 상륜부(相輪部)가 갖추어져 있는데 여러장의 지대석 위에 중석을 놓았으며 각 면에 모서리 기둥이 표출되어 있고 중앙에 탱주(撑柱)가 생략되어 있다. 그 위로 하대 갑석은 두꺼운 편이며 상면은 가벼운 경사를 이루고 2단의 괴임을 주어 상층단(上層壇)을 받고 있다. 상층단은 4매의 면석으로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이 모각되고 역시 중앙에는 탱주가 없다. 갑석은 하면에 부연(副椽)이 생략되었으며 상면은 수평인데다 2단의 괴임으로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 1석씩인데 각 면에 모서리 기둥이 각출(刻出)되고 옥개석 층급 받침은 3층까지 모두 4단이다. 상륜부는 노반(露盤)과 구슬모양의 보주(寶珠)가 놓여 있다. 이 탑은 양질의 화강암에 이중 기단의 일반형으로 매우 안정감 있는 석탑으로서 특히 옥개석 상면에 추녀 끝의 전각이 밋밋하고 중후(重厚)하여 전체적으로 담담한 작풍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제된 면과는 달리 이 탑의 여러 수법에서 일부 퇴화현상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즉 상하 기단의 중앙에 탱주와 상층 갑석 부연(甲石副椽)의 생략 등이 그 예이며 또한 옥개석의 각 층에서 보인 층급 받침이 얇게 조식된 점 등이라 하겠다. 이러한 현상은 모두가 고려 석탑의 양식이 일부 지방화 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탑의 조성연대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이행되는 시기로 봄이 무리가 아닐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장흥도호부조에 의하면 천관사는 영통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존재 위백규(1727~1798)가 쓴 지방향토지인 「지제지」(支提誌)에는 신라 애장왕(哀莊王)(800~809)때 통영화상(通靈和尙)이 창건했다고 했다. 영통과 통영으로 두 기록이 각기 다르긴 하나 동일 인물로 추정되며 같은 경내에 9세기경으로 추정되는 5층석탑과 석등이 있어 천관사의 창건이 신라 애장왕 때라는 기록은 매우 주목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