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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세계 원문보기 글쓴이: 수필세계
2007 <수필세계> 신인상 심사평/200711
바라봄과 기다림의 아름다운 어울림
- 유년의 추억 외 4편 -
당선자 : 공월천(경주)
심사위원
한상렬 : 수필가, 문학평론가, 계간 수필시대 주간
박양근 : 부산 부경대 영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최원현 : 수필가 문학평론가, 강남문학 주간
신인상 시상식 : 2007년 12월 21일(오후 6시 30분) 대구 아미고 호텔
신인상 당선자에게는 작가로서 대우하고 등단패와 당선고료 50만원(제출 원고 15편)을 부상으로 수여합니다.
2007년도 하반기 신인상
공월천은 서정과 서사의 아름다운 어울림으로 이야기를 끌어내고 끌어가는 힘이 범상치 않다. 그러나 수필이란 이름으로 작품을 차림 상에 내놓기까지 그 모양새가 어떨까 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이어야 한다. 자족하지 말고 겸손하게 더욱 열심히 공부하는 자세로 수필의 시대가 요구하는 좋은 수필가가 되길 기대한다. ― 심사평 중에서
속마음을 고운 물감으로 현란하게 색칠하기 보다는 조금은 촌스럽고 소박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내 보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소곤소곤 이야기 한 토막을 듣는 것처럼 귀 기울여주고, 아주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느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 당선소감 중에서
심사평
수필은 진실의 문학이다. 그러나 진실을 주장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수필은 동감(同感)이고 수용(受容)이고 그냥 감동(感動)이다. 가슴 밑바닥까지 촉촉이 젖어들게 하는 그 무엇, 그게 수필의 맛이다.
근래 들어 수필에서의 서사(敍事)성을 거론한다. 수필도 스토리가 있어야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맞다. 수필도 재미가 있어야 독자의 사랑을 받는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고 해도 재미가 없으면 독자는 읽지 않는다. 일단 재미가 없으면 읽지도, 좋은 작품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수필에서의 재미란 그냥 말초적 감각적인 것이 아니다. 적절한 단어의 선택, 쉽고 아름다운 문장,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문맥의 흐름이 아주 자연스러울 때 가능하다. 재미도 있고 깊이도 있어서 읽는 이가 작자의 생각에 “그래!” “그렇구먼!” 하고 맞장구가 쳐지는, 독자는 최소한 그런 수필을 원한다.
수필의 파격(破格) 내지 파괴(破壞)라는 말도 한다. 그래서 실험수필들이 등장한다. 독자는 이미 식상해 있는 유의 작품이 아닌 무언가 새로운 분위기와 느낌의 수필, 누구에게나 있을 일반적 체험으로 하나같이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닌 보다 산뜻하고 기발하고 쌈박한 맛을 원한다. 수필은 두어 편만 읽어 봐도 그 작가에 대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런데 책 한 권의 내용이 다 그런 내용이라면 말해 무엇 하랴. 그래서 수필에서의 서사를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무언가 독특한 그 작가만의 맛으로 스토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삶이란 대부분 대동소이하다. 아주 특별한 삶이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수필에서의 서사에는 분명 한계가 따른다. 진실, 사실, 자기 체험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꾸며낸 이야기 이상의 특별하고 재미있는 내 이야기라는 제한은 대단히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수필은 쓸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번 『수필세계』 신인상 응모에도 역시 많은 작품들이 투고되었다. 상당한 수련 기간을 거친 듯 무게 있는 작품들도 여럿 있었다. 그 중 5편에서 고루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공월천의 「유년의 추억」 외 4편을 당선작으로 한다.
공월천은 「유년의 추억」 등 다섯 편의 수필을 응모했는데 「유년의 추억」 「깜보네」 「기다림」은 ‘인과응보적 인연’을 바탕에 깔고 삶의 진실과 선(善)의 지향에 대한 작자의 철학을 의미화해 내고 있다. 「선물」과 「오래된 엽서」는 지나 버린 시간의 동산에 올라 아스라이 바라뵈는 과거 속에서 아름다운 남루를 끄집어내 그리움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살아온 날의 기억은 추억의 보물 창고다. 특히 글쓰기에 있어서 아니 작가의 체험이 근간이 되어 형상화되는 수필문학에선 쓰기의 동기요 제재요 욕망이다.
「유년의 추억」은 초등학교 친구 데릿사에 대한 추억이다. 데릿사와 한쪽 다리가 없는 양복장이 아버지, 그리고 노총각이었던 과외 선생과 야반도주를 한 어머니를 놓고 펼쳐진 안타까운 삶의 현장 이야기다.
삶이란 정형화될 수 없다. 얼굴이 다 다르듯 삶 또한 다르다. 그러나 삶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마음의 이야기들은 비슷한 게 많다. 작가는 「유년의 추억」에서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삶의 영역과 그렇지 못한 영역을 구분한다. “그곳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신성”으로 “자신에겐 영원히 어울릴 수 없는 이질감의 덩어리”였다. 그것은 선에 대한 나름의 기준이었다. 그러나 삶의 현장은 진실과 거짓(숨김)의 공존이었다. 하지만 작가에게 신성한 것, 그리고 진실한 것은 꼭 그러해야 했다. 그런데 진실이 유린당하고 거짓과 불의가 그 위에서 군림한다면 차라리 그걸 아주 잊고 모르고 싶다. “차라리 깨어진 사금파리로 소꿉놀이를 하던 그녀의 얼굴만 기억하고 싶음”이다.
「깜보네」는 어머니의 친구인 깜보네 딸을 통해 숨겨져 있던 비밀을 알게 된 작자가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생명에 대하여 자신도 모르게 잠재적으로 심한 죄책감의 짐을 지고 산다. 그러나 작가에게 그 갓난이의 눈동자는 진실과 순수라는 잣대가 되어 삶의 방향계가 되어 준다.
어떤 이유로든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작자는 깜보네와 그 자식들까지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한 것이 어린 죽음에 대한 죄과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또 작가를 지금까지 있게 해 준 양심의 소리로 “그 눈동자 두 개가 나를 감시하며 따라다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다림」은 이해와 용서와 믿음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 준다. 갈등과 원망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기다림을 키우는 핏줄의 연민과 원망하면서도 용서가 자꾸 앞으로 나서고 그것은 한 가닥 바람으로 작가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다. 거기다 작가에게 따스한 마음을 주던 오빠라는 존재는 현실적 삶의 괴리를 인정케 하면서도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기대치를 저버릴 수 없게 한다. 그것이 자신에겐 서운함이 되어도 “정을 떼기 위한 어머니의 모진 계략” 쯤으로 이해가 되고 “오빠는 내게 아버지였고 마음을 헤아려 주는 친구였고 애틋하게 그리운 애인”으로 남아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오빠를 품고 있는” 어머니와 “가슴에 무덤 하나를 만들어 오빠를 묻”는 작가 사이에서 “희망을 나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두 사람의 믿음이 된다.
「선물」과 「오래된 엽서」는 대립과 갈등이 화합에는 쉬 이르지는 못하지만 어느 땐가는 화합을 이루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는 작품들이다.
잘나가는 초등학교 동기의 선물을 통해 돌아보게 된 자신, 바라보이는 것은 허상이고 진실이 가려진 그림자의 움직임일 수 있다. 그것은 “서로가 가진 것에 대해 전혀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서로에게 더 많은 환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고 되고 싶었던 그 무엇은 모두 내 안에 잠들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자 무엇이 가장 소중한 지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선물에는 “단순한 선물의 의미” 그 이상이 있었던 것이다.
「오래된 엽서」는 육 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엽서를 통해 남아 있는 것과 잃어버린 것의 의미를 생각케 한다. 운동회에서 “선생님의 손을 잡고” 1등을 한 작가가 “팔뚝에 퍼렇게 찍힌 1등이라는 도장”을 “일주일 넘게 씻지 않았”던 추억은 꿈속에서만 선생님을 만났지만 “아스라한 향기를 품은 천만 송이 꽃”만큼이나 큰 그리움으로 “손바닥만한 작은 엽서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래서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지아 오키프’라는 화가는’ “아름다운 꽃이 있더라도 잠시 멈추어 바라보지 않으면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없다. 무언가 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친구가 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좋은 수필 또한 바라봄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런 바라봄과 기다림으로 진실의 세계를 작가의 상상력으로 확대시켜 나가고, 작가의 객관적 지성을 통해 지적 흥미를 유발하며, 주제와 소재를 새로운 의미와 상징으로 표현하면서 내면적 문학적 향기를 풍겨나게 하는 것이다.
수필은 궁극적으로 인간 근원에 대한 탐색이고, 이를 위해 삶의 실체를 형상화하는 것인 만큼 작품 속의 ‘나’는 결국 수많은 인간들의 한 전형이고 그 한 전형을 통해 많은 사람이 문학의 향기를 공유케 하는 것이다.
이번 당선자의 다섯 작품 모두는 진실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노크하고 있는 것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그 대학생 과외 선생을 출세시켜 대학교수로 만들어 자식까지 낳고 잘살고 있다는 재수 없는 소문이 피보다 더 시뻘건 거짓말이라는 걸 그녀의 입으로 듣고 싶을 따름이다. 그리고 종종 우리 집에 놀러 와 깨어진 사금파리로 소꿉놀이를 하고 놀던 그녀의 얼굴을 그저 한번 만이라도 보고 싶을 뿐이다.”와 “내가 크게 죄를 짓지 못하고 장년의 세월까지 그럭저럭 살아온 건 아마 그 눈동자 두 개가 나를 감시하며 따라다녔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내 안에 고스란히 존재한다는 걸 나는 지금도 느끼고 있다.”라는 「유년의 추억」 중 작자의 두 말로 축약될 수 있으리라. 그것은 작가의 삶에 대한 바라보기의 기준이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지켜 갈 기다림의 잣대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란 보이지 않는 데서 풍겨나는 향기일 때 더욱 고상해진다. 문학화란 고도의 기량이다. 기량은 고도의 훈련의 결과다.
수필에 대한 시대적 기대치가 대단히 높아졌다. 수필의 시대를 열어 달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필을 쓰는 우리가 그것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새롭게 등단하는 작가에겐 기쁨과 함께 그런 시대적 요청에 대한 기대와 부담이 주어진다.
공월천은 서정과 서사의 아름다운 어울림으로 이야기를 끌어내고 끌어가는 힘이 범상치 않다. 그러나 수필이란 이름으로 작품을 차림 상에 내놓기까지 그 모양새가 어떨까 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이어야 한다. 자족하지 말고 겸손하게 더욱 열심히 공부하는 자세로 수필의 시대가 요구하는 좋은 수필가가 되길 기대한다. 수필 식구의 탄생에 큰 박수로 축하를 보낸다.
(심사평 최원현)
당│선│소│감
다시 거울 앞에 앉았습니다
어느 날, 거울 안의 한 여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희끗희끗 새치가 돋아난 여자의 모습은 낯설었습니다. 그녀는 젊음이 사라진 윤기 없는 피곤한 얼굴이었으며, 몸도 마음도 몹시 무거워 보였습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살아온 세월보다 살다 갈 세월이 훨씬 짧다는 것을 알고 말았습니다. 마주 앉아 쳐다보며 거울 속 여자가 말을 건넸습니다.
“무겁지 않나요? 끙끙거리며 짊어지고 가지 말고 꺼내세요. 가벼워지고 싶지 않으세요?”
사실은 녹록하지만은 않은 시집살이에 만만찮은 세상살이에 그저 삼키고 삼키기만 했던 생각과 말들을 모두 담아 두기엔 내 작은 육신이 너무 비좁고 힘겨웠습니다. 무엇보다 보도블록 틈새로 시멘트 포장의 갈라진 틈 사이사이로 끊임없이 돋아나는 잡초처럼 자꾸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속마음을 모른 체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 꺼내야겠다. 나이 들어 더 희미해지기 전에 내 유년의 기억들을 돌이켜도 보고, 이웃의 이야기도 조만조만 풀어내어 보자.’ 하고 이참에 수다쟁이가 되기로 마음먹었지요.
한(恨)이 되었던 일들, 기쁨으로 남아 있는 일들, 부끄럽고 아팠던 사연들, 그냥 두었으면 사장(死藏)되어 버렸을 그런 내 안의 풍경들을 조금씩 조금씩 꺼내어 수필이란 이름을 빌려 적어 보았습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도 혼잣말처럼 두런두런 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온 세상이 말을 걸기 시작하더군요. 무심히 스쳐 지나가던 바람도, 지붕 위를 두들기는 빗방울도 내게 눈짓을 하며 아는 체를 하더군요. 처음엔 내가 마법에 걸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지요. 이전부터 속살거리는 소리를 내 마음이 닫혀 미처 듣지 못했다는 것을요. 마법에 걸린 것이 아니라 글쓰기는 그렇게 눈도 귀도 깨어나도록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빗장을 열어 준 것이지요.
다시 거울 앞에 앉았습니다. 거짓말처럼 여자의 마음이 가벼워 보였습니다. 얼굴빛 또한 한층 편안해졌습니다. 꺼낸 기억의 양만큼, 풀어낸 이야기의 무게만큼 가벼워졌겠지요. 늦었지만 이제는 내 안에 살고 있는 수없이 많은, 그러나 모두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나를 다 꺼내 보이고 싶습니다. 어리석고 부끄러운 모습까지도 말입니다. 물론 내 기억 속에 세 들어 사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요.
후일, 모든 것을 비워 버린 나는 깃털처럼 가볍고 맑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땐 참 홀가분하겠지요?
나는 속마음을 고운 물감으로 현란하게 색칠하기보다는 조금은 촌스럽고 소박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소곤소곤 이야기 한 토막을 듣는 것처럼 귀 기울여 주고 아주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느꼈으면 좋겠다는 터무니없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그리고 오늘, 내 안의 풍경들이 신인상 당선이라는 커다란 기쁨이 되어 돌아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너무나 큰 기쁨은 웃음보다 느닷없는 눈물로 먼저 배어 나오는 것임을 예전엔 정말 몰랐습니다. 언제나 아이들의 엄마였고, 남편의 아내일 뿐이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완전한 내가 된 것 같습니다.
별이 되어 빛날 글들을 만나기 위해 안타까이 함께 헤매던 경주수필 문우님들 사랑합니다. 부족한 글 보아주신 심사위원님 참으로 고맙습니다. 세상 모두가 다 고맙습니다.
당│선│작│품
유년의 추억 외 3편
초등학교 동기 몇이 모인 자리에서 우연히 데릿사의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때 그녀의 가족을 둘러싼 소문들이 진실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풍문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둘 중 어느 것에도 확신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실존 인물이었는지조차 혼돈될 만큼 까마득히 잊고 있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40년을 넘게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녀의 소식이 달나라에서 방아를 찧고 있다는 토끼의 소식을 듣는 것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자욱하던 안개가 걷히고 내가 유년 시절 수없이 드나들던 골목길이 점차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잰걸음으로 서너 발자국도 되지 않는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집과 우리 집 울타리는 마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골목이 끝나는 큰길에 그녀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양복점이 있었다.
좀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우리 집 울타리와 나란히 한 그 긴 울타리는 수녀원 담장이었으며 수녀원 담장 끝 모퉁이에 그녀의 아버지 가게가 있었다. 판자로 엮은 낡은 수녀원 울타리는 촘촘했으며 어린 내가 가늠하기엔 너무나 길었다. 우리 집 대문을 나서면 늘 마주치는 그 높이 때문에 자주 숨통이 막히곤 했었는데 내 답답함은 장대같이 높은 담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얼굴만 빠끔히 드러내 놓은 채 온통 검은 천으로 덮어쓴 어쩌다가 마주치는 수녀님들이 도대체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궁금해서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혹여 무엇 한 가지라도 발견할 양으로 깨금발을 하고 호시탐탐 옹이 구멍 사이로 들여다보곤 했지만 황량하고 넓은 마당 한 귀퉁이에서 호미로 채소밭을 일구는 수녀님 한둘을 본 것이 전부였다. 그곳은 우리에게 감히 넘볼 수 없는 신성한 곳인 것과 동시에 영원히 어울릴 수 없는 이질감의 덩어리로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길모퉁이 그녀의 집은 수녀원에 속한 것이었다.
데릿사의 아버지는 한쪽 다리가 없었다. 그래서 엉덩이 바로 아래 부분까지 양복바지는 늘 접혀 있었다. 양쪽 어깻죽지 아래에는 헝겊으로 손잡이를 칭칭 동여맨 매끌매끌하게 윤이 나는 누런색 목발이 제 몸인 양 언제나 힘겹게 붙어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수녀원에서 강냉이 죽을 배급하는 날이면 쭈그러진 양은 양푼이나 냄비를 들고 온 사람들이 수백 명씩 새벽부터 자리다툼을 하며 장사진을 쳤었다. 그 가난했던 시절, 장애자였고 고아였던 데릿사 아버지는 수녀원의 배려로 그곳에 보금자리를 이루고 남들보다 여유롭게 살았다. 데릿사 아버지 직업은 양복을 짓는 양복장이였지만 수입은 수단 좋은 데릿사 엄마가 훨씬 많았다. 미국에서 원조 나온 구제품들이 양복천 대신 그 좁은 가게에 가득했다. 국산보다 훨씬 부드러운 미제 껌을 비롯하여 햄이며 우유며 레이스 달린 예쁜 어린이용 드레스까지 가게에는 정말이지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우리가 살던 소도시에서 내로라하는 멋쟁이나 허영 많은 여편네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그녀들의 출입 횟수에 비례해서 데릿사네 재산은 점점 늘어났다.
데릿사는 새로 나온 구제품 옷들을 말끔하게 입고 다녀서 여느 부잣집 딸들 못지않게 부티가 났다. 미제만 먹어서 그 집 아이들이 뀌는 방귀에서 조차도 고소하면서도 니글거리는 미국 냄새가 폴폴 날 것만 같았다. 양복점 오른쪽에 붙어 있는 큰길가 수녀원 대문으로 집채만한 미군 트럭이 수시로 드나드는 걸 보면서 나는 혹시 그녀의 할아버지가 미국 사람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하기도 했다.
사교성 많고 활달한 데릿사 엄마는 가끔씩 초콜릿 같은 걸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고, 우리 어머니나 한 골목 안 자기 또래 아주머니들을 불러 미국에서 건너온 야한 필름을 슬라이드로 보여 주며 환심을 사기도 했다. 흰 광목천으로 된 이불홑청을 한쪽 벽에다 치고 필름 한두 장씩을 비춰 준 다음 날부터는 동네 아주머니들 얼굴이 며칠씩 홍당무가 되어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고 내가 조금 컸을 때 어머니가 고백하신 적이 있었다. 그 방면으로는 참으로 선각자이신 셈이다.
그 즈음 재산을 모은 데릿사네는 장사 때문에 아이들 공부에 지장이 있다며 조금 떨어진 오리정 근처에 집을 마련하여 아이들 살림을 냈다. 그때는 중학교에 시험을 쳐서 들어갈 때라 먹고 살 만한 집에서는 담임선생님이나 대학생에게 알음알음 과외를 시키기도 했는데 데릿사네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대를 제대한 늦깎이 대학생을 데릿사의 과외 선생으로 두고 갓난이 하나를 등에 업은 채 가게로 집으로 부리나케 다니느라 데릿사 엄마의 치마에는 휙휙 바람 소리가 났다. 그리고 채 서너 달도 되지 않아서 동네는 그녀의 스캔들이 마른 가지를 스치는 바람처럼 온통 버석거리기 시작했다. 소문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공동 수돗가에 모여서 웅성거렸고 수도가 있는 몇 안 되는 집 중의 하나인 우리 집에도 수돗물을 받으러 오는 아주머니들의 수군거림으로 공기는 탁하게 오염되어 갔다. 데릿사 엄마와 과외 선생 사이에 수상한 바람이 일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누구 보란 듯이 잘살아야 됩니더. 데릿사 아버지 천애고아인 거, 다리 빙신인 거 그것 때문에 받은 모진 설움 다 보상 받아야지예. 두고 보시이소.”
서글서글 웃으며 입에 달고 다니던 그녀의 말은 부도가 났다. 내가 직접 본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바람이 난 건 어쩌면 그 이상한 장면이 나오는 미국 필름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간혹 들기도 했다. 소문이 전염병처럼 온 동네에 퍼질 즈음 데릿사의 아버지는 데릿사와 그의 갓 난 막내아들과 함께 인생의 전부였고 구원자라고 여겼던 아내에게 버림을 받았다.
땜장이가 있었고 새우젓 통을 짊어지고 팔러 다니던 노인이 있었고 간혹 똥장군을 어깨에 멘 사람까지 거리를 활보하던 그 시절, 그들의 불륜 사건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안줏거리였다. 후일 들은 얘기지만 젊은 남자에게 미친 데릿사 엄마는 집과 세간까지 몽땅 팔아 노총각이었던 과외 선생과 야반도주를 하였다고 했다. 슬펐다. 그 즈음 어린 나는 까닭도 없이 자꾸 눈물이 났다. 왜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겨울 초입 어느 날, 파출소를 지나, 철공소를 지나 오리정을 돌아 그녀가 살던 집 앞으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옮겨졌을 때 인근 논에는 채 베어내지 않은 썩은 벼 밑둥치 사이사이로 살얼음이 어석어석 얼어 있었다. 봄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벼는 더 이상 싹을 틔우지 않으며, 세상은 잔뜩 흐린 그날처럼 다시는 색을 입지 않고 회색으로 남아 있을 것만 같았다.
그해 겨울, 모퉁이 데릿사네 가게 앞에는 해마다 어린 우리들의 발길을 붙잡던 진분홍 반짝이와 금색 별과 알록달록한 산타 할아버지의 지팡이와 호랑가시나무 잎조차도 온통 미제로 장식된 황홀한 크리스마스트리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한 번쯤은 데릿사를 만나고 싶기도 하다.
그녀가 받은 상처나 그 뒤 어떻게 살아왔는지 같은 것에 대한 관심은 없다. 다만 그녀의 어머니가 그 대학생 과외 선생을 출세시켜 대학교수로 만들어 자식까지 낳고 잘살고 있다는 재수 없는 소문이 피보다 더 시뻘건 거짓말이라는 걸 그녀의 입으로 듣고 싶을 따름이다. 그리고 종종 우리 집에 놀러 와 깨어진 사금파리로 소꿉놀이를 하고 놀던 그녀의 얼굴을 그저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을 뿐이다.
깜보네
우리가 외가에 도착했을 때 이미 결혼식은 끝이 나고 뒤풀이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어머니는 꼭두새벽부터 서둘렀건만 결혼식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듯 유월 땡볕 아래 십 리 길을 걸어온 어린 딸을 외갓집 대청마루에 앉혀 놓고는 옆집으로 가 버렸다. 그곳에는 대낮부터 얼큰하게 취하여 목소리 톤이 한껏 높아진 하객들이 멍석 위에 앉아 웃고 떠들며 잔치판을 벌이고 있었다. 유월의 모란꽃잎처럼 피곤했던 나는 어머니를 따라붙일 힘이 없었다.
여남은 채의 초가집이 모여 사는 외가 동네는 그 시절 차가 다니지 않는 곳이라 꽤 오지였다. 돌배기 키 높이도 채 안 되는 토담을 사이에 둔 옆집 깜보네 딸들과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 친자매처럼 지내는 사이여서 그 집 선반 위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젓가락이 몇 개인지조차 알고 있있다. 그 깜보네 셋째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다.
그날 새벽 어머니는 곤하게 잠든 나를 서둘러 깨워 단장을 시켰다. 꾸벅꾸벅 조는 나를 앞에 앉히시고 머리카락을 솜씨 좋게 양쪽으로 갈라 꽈배기처럼 꼬아 핀으로 고정시키고 하얀 바탕에 딸기 무늬가 있는 ‘간다호크’라 부르던 원피스를 입히셨다. 간다호크가 일본 말인지 그게 올바른 발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옷을 입을 때가 참 좋았다. 뒤로 끈을 살짝 당겨 리본 모양으로 묶고 나면 나는 늘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딴엔 그 옷에 어울리는 품위 있는 표정이라 생각해서였다. 남동생을 업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시내 합승 정류장까지 갔을 때 그제야 푸르스름하게 날이 밝아 왔다. 열 명도 안 되는 승객을 싣고 흥해 읍내에 도착했을 때 마침 장날이었는지 장터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인산인해에 어리둥절해 할 틈도 없이 십 리 길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그곳이 종점이었고, 외가인 ‘봉님이’까지는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 고개 넘어 또 한 고개 굽이굽이 촌길은 어찌 그리 멀던지, 유월 햇살은 보드라운 나의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소나무 아래서 동생에게 젖을 물릴 때를 빼고는 쉬다가 가자는 소리 한 번 하지 않는 걸 보아 어머니 마음이 몹시 바쁜가 보았다. 제법 자라 넝쿨이 진 콩잎들이 새들새들 말라 몹시 목말라 보이는 들판이었다.
잠이 왔다. 왁자지껄하던 사람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사람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와 잠결인지 꿈결인지 슬그머니 방에서 나와 소리 나는 쪽으로 가 보니 옆집 잔칫집에서 난리가 났다. 멍석 위의 소반들이 내동댕이쳐지고 주전자가 찌그러져 있었다. 고함소리와 부추기는 소리, 뜯어말리는 소리로 그 곳은 잔치판이 아니고 난장판이었다. 술 취한 하객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은 승복을 잘 갖추어 입은 스님이었다. 어찌나 입이 걸고 힘이 세던지 넘어진 사람 배 위에 턱 걸터앉아 주먹으로 내리치는 본새가 영락없는 싸움꾼이었다.
스님이 저렇게 술을 잘 마시고 저렇게나 싸움을 잘하는 사람인 줄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어른이 되더라도 절대 스님한테 시비 거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나는 입을 앙다물었다.
내가 다시 외가에 간 것은 깜보네 셋째 딸 결혼식이 있은 다음해 외할머니 병이 위중하다는 전갈을 받고였다. 어머니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깜보네 큰딸이 친정에 왔다. 인근 마을에 살아서 자주 들락거리는 눈치였다.
저녁상을 물린 후 먼 길을 걸어와 피곤하기도 했지만 가물거리는 호롱불이 자꾸 잠을 재촉했다. 꿈속에서 호롱불 심지의 불꽃이 파랬다 붉었다 마녀처럼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심한 요의를 느껴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차마 어머니한테 변소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직나직하고 은밀하게 들려오는 어머니와 깜보네 큰딸의 이야기 소리 때문이었다.
“그때가 언제고?”
“내가 시집가기 전이니까 몇 년 되었제?”
“그 얼라가 너거 아부지 씨가 아닌 거를 니가 우예 알았노?”
“보면 모리나? 울 아부지 병든 지가 어디 한두 해 되었나? 남자 구실 몬 한데이. 그 아제가 우리 집에 하도 들락거리니께 동네에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카더라. 남사시럽다.”
“그라믄 그 스님 얼라라 말이가? 아이고 낯짝도 두껍다. 얼라는 우쨌노?”
“그 아를 내가 안 받았나. 엄마한테 닦달하이까네 그 아제 아라 카더라. 엄마를 쥐어뜯을 수도 없고 기가 딱 차더라. 암만 생각해도 안 되겠더라. 나오자말자 보자기로 덮어 뿌렸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녁을 너무 먹었는지 아침에 탔던 차 때문에 그때서야 멀미가 나는지 자꾸 속이 매슥거리며 토하고 싶었지만 잠이 깬 기척을 할 수가 없었다.
“야야! 우얄라꼬 그랬노?”
은근히 재촉하는 듯한 어머니의 물음에 깜보네 딸은 더 낮아지고 더 음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양철 다라이에 죽은 얼라를 담아 가지고 삽을 들고 그 밤에 저쪽 건넛산에 갔지 뭐.”
“아이고 세상에! 어둡지는 않더나?”
“열나흘 밤이라 천지사방이 훠언하데. 조막만한 거 하나 묻는데 땅 많이 팔 거 뭐 있노? 대충 파 놓고 보자기 벗기니까 얼라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거 같더라. 얼매나 놀랬는지. 등에 식은땀이 주룩 흐르더라. 얼라 묻고 빈 다라이 이고 오는데 와 그리 무겁던지. 머리도 천근만근, 다리도 천근만근. 이거는 아무도 모린다. 사람들은 엄마가 노산이라 죽은 얼라 놓은 줄 안다.”
나는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절대로 깨어나서는 안 될 것처럼 인상을 쓰면서 눈을 꼭꼭 감느라 눈 주위가 뻐근했다. 갓난아기의 까만 눈 두 개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소름이 돋느라 으스스 몸이 떨렸다. 외삼촌이 초저녁 내내 군불을 지폈을 만도 한데 자꾸 추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 이후는 내 기억에는 없다. 혼이 달아나 까무러쳐서 잠들었는지 이불에 지도를 그렸는지 말았는지…….
그 후, 나는 제법 자라 사춘기가 끝날 때까지도 자주 가위에 눌리곤 했었는데, 다 그놈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꿈속에서 반들거리는 눈동자 두 개가 천장에 붙어 조금씩 조금씩 내려와 반듯하게 누워 있는 내 코앞까지 왔을 때 나는 그 천장을 밀어내느라 안간힘을 썼다. 아무리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천장은 점점 내게 더 가까이 내려오고 눈동자 두 개는 시퍼렇게 빛을 내며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죽을 힘을 다해 그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옷은 언제나 흥건하게 젖어 있었고 그런 후면 나는 며칠을 앓곤 했다. 어쩌다 학용품을 사고 남은 돈을 어머니한테 돌려주지 않고 달걀 아이스케이크라도 하나 사 먹는 날엔 밤새 눈동자 두 개가 시뻘겋게 불을 뿜으며 나를 쫓아다니는 꿈에 시달려야 했다.
몇 해 전 어머니한테 지나가는 말로 슬쩍 깜보네 소식을 물어보았다. 할머니라 부르기엔 너무 젊다 싶어서 한 번도 할머니라고 부르지 못했던 외가 옆집 할머니의 이름은 진짜로 깜보라고 했다. 지지리도 가난한 집의 막내로 태어나 까만 피부 탓에 이름이 깜보라고 불리자 무지한 그녀의 아버지는 호적에 그냥 ‘감보’라고 올렸다 한다.
깜보네는 열여섯 어린 나이에 논밭 몇 마지기 친정에 떼어 주는 조건으로 마흔이 다 되어 가는 홀아비한테 대를 이어 주기 위해 재취로 시집을 왔다. 연년생으로 내리 딸을 셋이나 낳고 결국엔 아들을 낳았지만 오냐오냐 키운 통에 개망나니로 자라 열일곱, 열여덟 살에 벌써 노름판에서 재산을 다 탕진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친구인 큰딸 역시 중풍으로 수족을 못 쓰다가 얼마 전 세상을 등졌다. 나는 그 갓난이의 눈동자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내가 크게 죄를 짓지 못하고 장년의 세월까지 그럭저럭 살아온 건 아마 그 눈동자 두 개가 나를 감시하며 따라다녔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내 안에 고스란히 존재한다는 걸 나는 지금도 느끼고 있다.
선물(膳物)
상자의 뚜껑을 열자 노트 한 권이 얌전하게 들어 있었다. 도톰하게 비단을 입혀 놓은 표지는 무척 고급스러웠다. 비단 천에는 리본으로 주둥이를 묶은 호리병의 문양이 서로 다른 질감으로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름 모를 새도 양 날개를 펴고 호리병 사이로 표표히 날고 있었다.
그녀가 출장지인 상해(上海)에서 샀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해도 나는 그것이 중국산이라는 걸 단박에 짐작할 수 있었다. 제법 귀한 느낌이 전해져 오는 이 물건을 그 먼 데서 나를 위해 샀다니 조금은 의외였다.
“여러 나라를 다녀 보았지만 비단으로 표지를 한 노트는 처음 봤어. 문득 너 얼굴이 떠오르더라. 글쓰기 시작했다며?” 그녀가 건넨 뜻밖의 선물은 콧등이 짜안할 정도로 고마웠지만 부담이란 짐도 함께 얹혀져 왔다. 취미 삼아 시작한 글쓰기인데 그녀가 너무 확대하여 해석하고 기대하는 건 아닌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무거웠다. 어릴 적에 주위로부터 내가 가진 재주보다는 언제나 더 많은 기대를 받던 나는 그 무게가 너무나 힘들어서 몸뚱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널 보면 참 안타까워. 눈만 뜨면 언제나 내 앞에 니가 있어서 화가 났었는데……. 일제고사도 글짓기 대회에서도 나는 늘 너 뒤에 있더라구.”
일찌감치 가망(可望)의 싹을 모조리 고사시켜 버리고 어물쩍 살아가는 내 미지근함이 안타깝다던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젊은 날의 나는 그녀가 부러웠다.
그 시절 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포기하고 결혼이란 덫에 걸리어 고된 시집살이와 잡다한 집안일에 파묻히어 그런 저런 아줌마로 전락해 가고 있었다. 둘째를 낳기 얼마 전 만삭의 몸으로 태어날 아이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하러 시내에 나갔다가 초등학교 동기 녀석을 우연히 만났다.
“너 이래밖에 안 되었나? 실망했다. 나는 네가 무엇이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하며 남산만한 배를 안은 남루한 내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그의 시린 눈길을 나는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것밖에 볼 줄 모르는 너에게 오히려 실망했다며 발끈 화를 내고 돌아섰지만 그의 눈에 비쳐진 내 초라함이 싫고 아팠다.
무엇? 그 무엇이 무엇인가?
그 후, 무엇이 되지 못한 무능함 때문에 나는 깊은 좌절의 늪에 빠져 좀처럼 헤어나지를 못했다. 내가 한동안 바깥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계기가 된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그럴 때쯤, 초등학교 동기인 그녀는 일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좋은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며 독신인 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나는 시집식구와의 갈등도 남편과의 크고 작은 불협화음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무능함에서 오는 우울함도 전혀 가지지 않은 자유롭기만 한 그녀가 부러웠다. 본인이 가진 능력을 마음껏 꽃피우고 그 꽃 향기에 취해 참으로 행복할 것 같았다. 나와는 아예 종(種)이 다른 부류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아파해도 일상은 변함없이 되풀이되었고 내 삶은 누렇게 발효하며 계속되었다.
서로 다른 테두리 안에서 생활하느라 한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지명(知命)을 한참 넘긴 어느 날 고향을 찾은 그녀와 뜻밖의 해후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벤처 회사의 오너(owner)가 되어 있었다.
“지독하게 아픈 날이 있었제. 온몸이 땀에 젖고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더구나. 곁에 누군가가 있어 물 한 모금이라도 가져다주었으면 싶더라만 주위를 살펴보니 내리누르는 어둠뿐. 어쩌면 이러다 내가 죽어 버려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싶데. 전화벨이 상주의 곡인 양 저 혼자 울다 지치겠고 찾는 이 하나 없는 나는 서서히 굳어 썩어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끼치고 슬프더라. 팔아 버리면 없어지는 물건 말고, 쥐었다 놓아 버리면 사라져 버리는 명예나 성취감 같은 그런 추상적인 것 말고, 만지면 잡히는 진짜 내 것이 갖고 싶어. 내 남편 내 자식 이런 거. 지우고 찢어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내’자가 붙은 것. 아무리 떼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 내 것 때문에 지긋지긋하도록 성가셔 보고 싶어. 정말이지 결혼하고 싶다.”
나는 그녀의 넋두리 속에서 눈 속에서 허무를 보고 말았다. 혼자여야 하는 삶의 막연함에서 오는 두려움과 외로움 때문에 그녀는 지쳐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자아의 실현, 명예, 성취감, 주위의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 내가 죽을 만큼 부러워했던 일련의 것들이 그녀의 외로움 앞에 허무로 작용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변화 없는 지루한 나날들이, 그토록 잔인하기만 했던 힘든 나의 일상들이, 나를 암암리에 구속하던 가족들이 그녀가 갖고 싶은 그 무엇에 속할 줄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안정되어 보이는 내 삶 뒤편에 나 자신만을 위해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해 늘 허기가 진 또 하나의 내가 웅크리고 있듯이 그녀가 오른 높은 성취의 산 아래에도 서늘하고 어두운 산그늘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왜 미처 하지 못했을까?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해 보였던 그녀였기에 나는 충격이 컸다.
그렇다면 결혼은 덫이 아니라 비바람을 피하는 따뜻한 둥지였단 말인가? 끊임없이 위기를 맞았지만 끈을 놓치지 않고 애써 잡고 있는 결혼 생활이, 그런대로 반듯하게 자라 준 우리 아이들이, 그래서 이루어진 가족이란 울타리가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그 무엇이란 말인가? 내 속에서 끊임없이 스쳐 지나갔던 우울하고 아픈 순간들과의 조우는 어쩌면 불행하다고 믿는 내가 마음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일 뿐은 아니었는지.
그녀와 헤어지기도 전에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는 어느새 이렇게 스스로에게 변명처럼 위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결핍에 대해 조금만 더 너그럽게 이해할줄 아는 지혜를 가졌더라면 지나온 삶이 훨씬 가볍고 따뜻하지 않았을까 하는 늦은 깨달음으로 아쉬워하고도 있었다. 내가 원하고 되고 싶었던 그 무엇은 모두 내 안에 잠들어 있다는 깨달음도 함께였다. 늦었다고 느꼈을 때 이미 때는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우리는 서로가 가진 것에 대해 전혀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서로에게 더 많은 환상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내게 늦게 시작한 거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보람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글쓰기를 권했다. 나 역시도 그녀에게 지금이라도 정말 좋은 배필이 나타나 더는 외롭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녀와 나의 서로 다른 꿈이 이루어지는 날 어쩌면 노트의 표지에 새겨진 무늬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호리병 속의 내 이야기가 술술 쏟아져 나오기 위해 묶였던 리본이 스르륵 풀려져 버리고, 혼자 날던 새는 날개를 접고 두 마리가 다정히 둥지를 틀고 있는 문양으로 말이다.
그녀가 내게 건넨 선물에는 단순한 선물의 의미만 담긴 것이 아니었다.
오래된 엽서
방문 앞에 선생님이 서 계셨다. 새하얀 저고리를 걸치고 발아래 구름을 잔뜩 몰고 오셨다. 때늦은 점심 요기를 할 요량으로 반찬 두어 가지를 얹어 소반 앞에 앉았다가 어찌나 반가웠던지 수저를 든 채 와락 선생님의 옷자락을 잡았다.
오랫동안 참으로 그리웠던 터라 가슴이 알싸했다. 고향집 꽃밭 모퉁이에 피어 있던 박하꽃잎 내음이 났다.
‘허기진 삶에 떠밀리어 차마 찾아뵐 여유조차 없었다고 변명하면 믿어 주실까? 동글동글 굴러다니던 꼬맹이 제자를 허름한 중년 여자로 둔갑시킨 마술 같은 세월의 힘에 놀라진 않으실까?’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설레며 끌어안은 두 팔 안에는 구름 한 덩이뿐이다. 허망하여 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저만치 마당에서 창백한 얼굴로 나를 보고 웃으신다. 그리고는 부챗살같이 손가락을 펴서 잘 있거라 잘 있거라 손을 흔들며 구름 위에 둥둥 떠 조금씩 멀어져 간다.
그동안 이렇게 이렇게 살았습니다 하고 두서없이 조잘거리면 “우리 올챙이가 사는 것이 여의치 않았구나.” 예전처럼 별명을 부르며 내 여윈 등을 토닥여 주시리라 믿었는데 저렇게 홀연히 사라져 가니 서운하고 야속했다. 등에서 배 쪽으로 한줄기 시린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 눈을 떴다. 모로 누운 아래쪽 베갯잇이 젖어 있었다.
십수 년 전 마흔이 되던 해, 초등학교 동기 모임을 결성한다며 친구들한테서 분주하게 연락이 오가던 때였다. 사는 것이 늘 부족하게 느껴지던 나는 주눅이 들어 어디서나 당당하게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동기회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순전히 육 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을 만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육 학년 때 담임을 하셨던 다섯 분을 모시고 조촐한 사은 행사를 준비했다.
그날 모임 장소에 우리 선생님은 오시지 않았다. 아니 오실 수가 없었다. 두어 해 전에 이승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한 친구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나는 날벼락을 맞은 듯 머리도 마음도 얼얼했다. 지지난밤 꿈이 떠올랐다. 어림짐작으로 오십대 후반쯤 되었을 거라 여겼기에 상상조차 못 한 소식이었다. 젊은 나이에 교직을 그만두고 이태 후에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 이외엔 그 어떤 것도 더 알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다른 반 친구들이 서로의 담임선생님을 얼싸안고 떠들썩하게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 어찌나 부럽고 시샘이 나던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슬그머니 그곳을 빠져나온 나는 별이 눈물처럼 출렁거리는 초겨울 밤을 이슥토록 이리저리 헤맸다. 가문 마음에 이는 흙바람으로 자꾸 코가 매웠다.
다른 아이들이 입을 삐죽거릴 만큼 유독 내게 정을 주던 분이셨다. 힘든 시간이 지나가고 자리가 잡히면 꼭 찾아가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힘든 시간만 가는 것이 아니라 놓쳐 버려서는 안 되는 귀한 것들도 모두 함께 시간 속으로 흘러갔다. 버젓하게 출세하여 선생님을 일찍 찾아뵙지 못했던 내 처지가 가엾고 서러웠다. 그 서늘한 충격의 여운은 오래 지속되었다.
나날이 겉모습이 도시화되어 가는 고향을 보면서 왠지 실향민같이 느껴졌던 내게 선생님은 마지막 남은 고향의 풍경 중 하나였다. ‘언젠가는 찾아가리라. 그래서 그 그늘 아래 앉아 내 삶의 노곤함을 털어놓고 위안받으리라’하고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혀 놓은 고향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같은 존재였다.
그 후, 늘 그 자리인 고향에 살면서도 선생님의 부재로 나는 완전히 실향민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삶은 그 어떤 것도 성급히 단정 지어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하기 위해 장롱을 정리하던 중 처녀적 쓴 일기장 갈피에서 엽서 한 장을 발견했다. 백마 탄 왕자님의 입맞춤으로 긴 잠에서 깨어난 숲 속의 공주처럼 사십 년을 훌쩍 넘기고도 그 모습 그대로 잠자다 깨어난 엽서 한 장이 너무나 신기했다.
무료하던 차 너의 편지를 받고 몹시 반가웠다.
긴 겨울방학을 건강하게 잘 보내고 있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구나.
곧 개학날이 다가와 똘망똘망한 너희들의 눈망울을 다시 대할 것을 기대하니 마음이 벅차구나.
아무쪼록 국민학교의 마지막 방학이니 뜻 깊게 보내거라.
선생님이 보내 준 엽서였다. 낡은 종이 위의 글씨가 마치 마술에 걸렸다 풀린 것처럼 하나하나 살아 움직였다.
물오른 꽃대에 조롱조롱 지천으로 피어 있던 샛노란 배추꽃 사이로 나비가 어지러이 날던 봄날의 실과 실습장이 보였다. 허연 배를 드러내고 누워 버린 어항 속 금붕어를 묻고 차마 돌아서지 못해 울먹이던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달리기에서 단 한 번도 3등 안에 들지 못해 해마다 운동회날이면 늘 기를 펴지 못했던 내가 손님 찾기에서 선생님의 손을 잡고 나는 듯이 결승 테이프를 끊었을 때의 그 감격스러움이 되살아나 목이 메었다. 그때 팔뚝에 퍼렇게 찍힌 1등이라는 도장을 아마 나는 일주일 넘게 씻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잊고 있었을 때는 내 안에서 무용지물에 불과했던 기억들이 내가 떠올려서 그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뜨거워졌을 때는 아스라한 향기를 품은 천만 송이 꽃으로 피어나기도 하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고향은 손바닥만한 작은 엽서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우울하거나 무료한 날 어쩌다 엽서를 꺼내 볼 적마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나직이 드리워져 머물다 천천히 흩어지던,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한 고향의 풍경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이었다. 시간에 푹 절여진 낡은 풍경하며 그 매캐하고 정겨운 냄새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