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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맏타 상가하> 7장 혼합된 범주의 모음(밋사까 상가하) - 영양분(아하라) 4가지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닷사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닷사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닷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 모든 번뇌 소멸하신 분, 스스로 완전히 깨달으신 붇다께 예경 올립니다.)
지금 하고 있는 밋사까 상가하(missaka-saṅgaha. 혼합된 범주의 모음)는 앞에서 배운 선업과 불선업을 다 모아서 다시 정리하는 겁니다. 밋사까 상가하에는 선업도 들어있고 불선업도 들어있습니다. 마음, 마음부수에서 선업에 관련된 것들도 들어있고 불선업에 관련된 것들도 들어있는 것을 다 같이 섞어서 다시 재정리하는 겁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아하라 4가지에 대해서 강의하겠습니다.
윤회를 유지시키는 영양분 4가지: 음식, 접촉, 의도, 마음
아하라(āhāra)는 영양분이죠. 영양분이 공급되어야 무정물도 유정물도 유지됩니다. 영양분이 없으면 지속되지 않고 죽습니다. 끊어집니다. 계속 지속 유지시키는 게 영양분입니다. 여기 밋사까 상가하에서 영양분이라는 것은 중생이 윤회를 돌며 태어나고 죽음을 반복하는데, 계속 윤회를 돌게 만드는 영양분입니다. 끊어지지 않고 죽음을 이어가게 하는 영양분입니다. 완전히 끊어진다는 것은 아라한이 되면 끊어지겠죠. 그 전까지는 계속해서 죽음의 반복입니다, 죽음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들이붓는 영양분입니다. 영양분이 공급되면 계속 살지 않습니까. 요즘에는 의학이 발달돼서 예전 같으면 다음 생으로 갔을텐데 기계로 낡은 생에 묶어 둡니다. 어쨌든 그렇게 영양분이 공급이 되면 삽니다. 중생도 4가지 영양분이 계속 공급되면 윤회를 끊지 못하고 거듭거듭 죽는 길로 계속 들어갑니다.
'음식'이라는 영양분
‘까발리까로 아하로(kabaḷiṅkāro-āhāro)’라는 게, 부처님 당시에는 숟가락, 젓가락을 쓰지 않고 손으로 다 드셨죠. 지금도 그 지역에서는 손으로 먹습니다. 네팔에 가면 다 손으로 먹고, 미얀마 사람들도 손으로 먹습니다. 미얀마 선원의 공양간 식당에서나 젓가락, 숟가락을 주지, 후원에서는 다 손으로 드십니다. 쉐우민 사야도께서도 손으로 드셨다던데. 그래서 밥이 뜨거우면 잘 못 먹습니다. 밥을 식혀서 먹습니다, 거기 사람들은. 뜨거운 밥이 잘 없습니다. 거의 다 식은 밥. 식은 상태여야지 잡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일단 탁발해오는 밥들은 다 식어있겠죠. 탁발해서 오는 동안 다 식습니다. 그 밥을 손으로 먹을 수 있는 크기로 만든 것이 ‘까발리까로’입니다. 손으로 주물럭거려 뭉쳐서 입으로 넣을 수 있는 영양분. 이게 ‘까발리까로 아하로’입니다. 물질음식 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영양분. 이게 있어야 됩니다. 중생이 살기 위해서. 욕계 중생들에게는 이게 꼭 필요합니다. 색계나 무색계 중생들에게는 필요하지 않겠지만, 욕계 중생들에게는 필요합니다. 없으면 못 살죠. 이 영양분이 7일만 끊어져도 그 생에서 죽습니다. 그 영양분. 물질의 영양분입니다.
'대상과의 접촉'이라는 영양분
‘phasso dutiyo’. ‘두띠요(dutiyo)’는 두 번째고, ‘팟사(phasso)’는 접촉입니다. 대상과 접촉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상과의 접촉. 표 보이십니까? 여기 이 표에서 12연기인데, 무명이 있어서, 어리석어서(avijjā) ‘~하고 싶다’(saṅkhārā)가 됩니다. 어리석음이 있어서 ‘~하고 싶다’가 생깁니다. 우리가 지금 수업을 듣는 것도 ‘수업 듣고 싶다’ 해서, 어리석어서 ‘수업 듣고 싶다’가 됩니다. 12연기에서 보면. 근데 이 ‘싶다’가 우리가 하는 것은 8정도로 가는 방법을 듣고 싶다'인 거죠. 벗어남으로 가는. ‘수업을 듣고 싶다’ 해서 지혜 쪽으로 가게 되겠죠. 어쨌든 12연기에는 어리석어서 ‘~하고 싶다’가 생깁니다. 의도(업)가 생깁니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죠. 그래서 입태(윈냐나)합니다. 이 ‘~하고 싶다’가 있어서. 12연기에 윈냐나(viññāṇa)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태어나는 겁니다. 어딘가에 태어나게 하는 마음. 욕계, 색계, 무색계. 여기에 태어나게 하는 마음. 입태하면 그 입태에 맞는 물질과 정신이 만들어집니다. 욕계 중생은 욕계 각각의 중생에게 맞는 6문 물질과 정신이 만들어지고, 천신은 천신에게 맞는 물질과 정신이 만들어지고. 범천은 범천에게 맞는 물질과 정신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찰라야따나’, 6문이 만들어집니다. 욕계 중생들에게만 6문이 모두 만들어집니다. 범천들은 6문이 생기지 않습니다. 3문만 생기죠. 범천은 눈, 귀, 마음 3개만 생깁니다. 6문은 욕계 중생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6문이 있으면 접촉이 생깁니다. 열린 6문으로 대상이 들어옵니다. 그게 ‘팟사’입니다. 대상이 6문으로 들어오는 순간, 접촉하는 순간, 대상과 6문이 접촉하는 것. 범천들은 3가지 문으로만 대상이 들어오겠죠. 눈과 귀와 마음. 여기로만 대상이 들어오겠죠. 욕계 중생은 문이 6개니까 6문으로 대상이 들어오겠죠. 팟사가 생깁니다. 그리고 접촉으로 인해서 웨다나, 느낌이 생기겠죠. 이 팟사(접촉)를 말합니다.
두 번째 아하라(팟사), 중생이 계속 윤회를 돌게 하는 영양분. 팟사가 있으면 그로 인해 느낌이 생기고, 느낌(웨다나)이 있으면 ‘하고 싶다’, ‘피하고 싶다’(딴하- 원함)가 생기고, 그 다음에 우빠다나(갈구)와 바와(업 지음), ‘~함’이 생기고 그로 인해 생의 후반부가 생깁니다. 이것들이 팟사에서 시작하겠죠. 대상과 접촉함으로 인해서. 느낌. ‘~하고 싶다’, ‘~하고 싶다’ 이후에 ‘~함’이 생기는 거죠. 담배를 피우고 싶다, 하고 나서 담배를 피웁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가 없으면 담배 피우지 않습니다. ‘수행하고 싶다’가 있어서 수행합니다. ‘수행하고 싶다’가 없으면 수행하지 않습니다. ‘출가하고 싶다’가 있으면 출가합니다. ‘출가하고 싶다’가 없으면 출가하지 않습니다.
그 팟사라는 것이 여기서, 대상과의 접촉에서 웨다나가 생길 때, 좋은 대상에서는 보통 좋은 느낌이 생기고 안 좋은 대상이 들어오면 안 좋은 느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더 갖고 싶다’, ‘피하고 싶다’ 이런 ‘싶다’가 생깁니다. 팟사는 똑같이 들어오는데 웨다나는 조금씩 다를 수 있겠죠. 그래서 ‘싶다’도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하고 싶다’가 생겨납니다. 같은 것을 보고, 요기가 수행처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을 봤을 때, 어떤 사람은 기쁜 느낌, 큰 희열이 생길 수도 있고. 부러움이 생길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화냄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 웨다나(느낌)에서. 좋은 느낌이 들었으면 ‘수행하고 싶다’가 되고. 안 좋은 느낌이 들었으면 ‘다시 안 오고 싶다’가 되겠죠. 좀 다릅니다. 팟사는 같이 들어오는데 느낌은 다르게 생깁니다. ‘~싶다’도 다르고 하게 되는 것도 다르게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술을 보고 좋은 느낌이 들어서 ‘술 마시고 싶다’가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 술은 싫다’ 이렇게 싫은 느낌이 들 수 있겠죠. 그러면 ‘하고 싶다’도 다르게 됩니다. 우빠다나(갈구)도 다르게 되고.
여기 ‘상카라’(~하고 싶다)에서. 우리는 모두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전생에 지은 선업의도가 달라서 입태할 때 마음이 조금씩 다르겠죠. 어떤 마음으로 입태했느냐에 따라서 그에 맞춰 물질과 정신도 다르게 생기고, 6문도 조금씩 다르고. 어떤 사람은 시력이 좋고 어떤 사람은 시력이 나쁘고. 어떤 사람은 후각이 좋고 어떤 사람은 후각이 아주 없기도 하고. 이렇게 다릅니다. 이렇게 (감각의 예민함과 받아들임이) 달라서,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들어오는 접촉과 느낌은 조금씩 다르고 그로 인해서 ‘하고 싶다’, 마음도 또 다르게 생깁니다. 그러면 뒤이어지는 생도 다르게 생깁니다. 그러면 다음생의 태어남도 다른 데 태어나겠죠? 어떻게 반응하고 생각했느냐에 따라서 다음 태어남이 결정 됩니다. 그중에서 이 팟사(접촉)가 있어서 이 과정이 계속 이어집니다. 12연기에서 중요한 것은 팟사로 인해서 웨다나 다음에 ‘~하고 싶다’, 그리고 ‘~함’, 그리고 생. 이렇게 이어지는데, 이것들이 제가 좀 전에 말한 것은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이고. 좋은 느낌이 일어나서 선업을 짓고 하더라도 결국 계속 이 죽음으로 끝나는 바퀴를 굴린다는 겁니다. 계속 죽고, 또 태어나고 늙어서 죽고, 어리석어서 또 태어나고. 이 뿐 입니다. 12연기는. 12연기를 돌리는 정신적인 아하라. 첫 번째 정신적인 영양공급원이 팟사입니다. 접촉함으로 인해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이 생겨서 싫다, 좋다, ‘하고 싶다’가 생기고. 그리고 ‘~함’이 생기고, 생이 생깁니다.
'마음의 의도'라는 영양분
그 다음에 세 번째, ‘마노산쩨따나 따띠야(manosañcetanā tatiya)’. 마노산쩨따나(manosañcetanā)는 마음의 의도입니다. 선업과 불선업이라는 상카라. 여기 상카라 있죠. ‘하고 싶다’입니다. 좀 전에 말한 의도. 상카라는 의도입니다, ‘하고 싶다’. 이 의도가 여기에도 있죠. 웨다나 다음에 있는 여기 ‘하고 싶다’에도 똑같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상카라’라고 했고 여기서는 ‘딴하’라고 했습니다. 집착이 있으면 ‘하고 싶다’가 되겠죠. 이름을 다르게 불렀는데 같은 겁니다. 똑같이 ‘하고 싶다’, 의도입니다. 딴하, 집착이 있어서 ‘하고 싶다’. 그리고 이걸 또 다르게는 ‘쩨따나’(의도)라고도 부릅니다. 쩨따나, 상카라, 딴하. 같은 겁니다. 딴하는 로바죠. 딴하는 로바입니다. 탐욕이라는 쩨따시까, 같은 겁니다. 상카라, 쩨따나, 로바, 딴하. 같은 말이죠.
다 비슷한 겁니다. 문맥에 따라서, 말을 쓰는 자리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뉘앙스로 쓰였는데 같은 말입니다. 의도가 있어서 ‘~함’이 되니까 그에 따라 또 다시 태어나고, 생이 만들어지겠죠. 만약에 술이라는, 와인이라는 대상이 들어가서 좋다는 느낌이 들고, 마셨으면 취한 생이 있겠죠. 정신이 깨끗하지 못하고 흐릿한 생이 있겠죠. 다음 생에 태어날 때 그에 맞는 자띠로 태어나겠죠. 태어나서 늙고 죽습니다. 또 다시 어리석어서 태어나고, 이에 맞는 무명이 있고 또 태어나겠죠. 항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라는 게. 항상 이 조건 그대로 있으리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오늘 내가 한 결정에 따라서 그에 따른 생이 있고, 또 새롭게 태어납니다, 다음 생에는. 어디에 어떻게 태어날지 알 수 없는 거죠.
이 쩨따나, ‘상카라’에서 ‘딴하’에서 말하는 쩨따나, 같은 겁니다. 이것도 윤회를 계속 돌게 만드는 영양분이 됩니다. ‘상카라’에서 쩨따나는 생을 연결짓는, 어디에 태어나는가, 인간인가 천신인가 범천인가, 생을 만드는 쩨따나였고, 여기(‘딴하’~‘바와’)에서 쩨따나는 이번 생에 어떻게 되는가, 이 정도의 쩨따나 입니다. 그리고 또 어딘가에서 태어납니다. 늙고 죽음을 계속 유지시키는 세 번째 아하라(영양분)가 쩨따나입니다. 의도가 계속 윤회를 돌리는 영양분 입니다. 계속 의도를 일으키는 거. 위빳사나 수행이 아닌 다른 것을 할 때는, (수행이 아닌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여기 안 좋은 느낌이 일어났을 때, 성냄의 웨다나가 일어났을 때, 통증이 일어났을 때 이걸 피하고 싶다거나 아니면 다른 대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어제 붇다왕사 시간에 한 법문(기질, 성향에 대한 법문)에 보면,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면 그 마음을 다른 자리로 옮기라고 했죠. 다른 자리로 옮긴다는 것은 대상을 바꾸는 겁니다. 라가 짜리따(탐욕 기질)의 경우는 좋아하는 대상이 있으면 라가가 더 생기는 거죠. 탐욕이 더 생깁니다. 그러면 그런 대상이 아니라 안 좋은 대상 쪽으로 바꾸라는 겁니다. 안 좋은 대상, 싫은 대상. 아름답지 않은 대상. 보고 싶지 않은 대상, 듣고 싶지 않은 대상 쪽으로 마음을 돌리라는 겁니다. 대표적인 게 부정관이죠. 시체를 관하는 것. 꼭 진짜 시체가 아니더라도 사진으로 나온 것, 그런 걸 보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12연기 원 그래프의 각 부분들 사이즈가 다른 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됐습니다. 왜 이렇게 됐냐고, 질문하셔서 질문에 대답하겠습니다. 원 그래프 사이즈가 ‘무명’, ‘상카라’ 같은 부분은 크고 ‘윈냐나’, ‘나마루빠’ 같은 경우는 작지 않습니까. 사이즈가 다른데, 사이즈가 다른 이유는 이쪽(무명~상카라) 4분의 1이 집성제입니다. 여기(윈냐나~웨다나) 4분의 1이 고성제. 여기(자띠~자라마라나) 4분의 1도 고성제. 여기(딴하~바와) 4분의 1은 집성제입니다. 그러니까 4성제 중에서 고성제, 집성제, 도성제, 멸성제, 이 4가지 4성제가 있는데. 이 원에서 나와 있는 게 집성제-고성제-집성제-고성제. 이렇게 (4성제 중) 2개가 나와 있죠. 이 4분의 1 사이즈 전부 다 고성제여야 되고, 여기는 집성제. 이렇게 들어가야 되는데 이쪽 칸(윈냐나~웨다나)에는 6개가 들어가야 되고, 이쪽 칸(무명~상카라)에는 2개만 들어가면 되니까 이 사이즈가 다른 겁니다.
여기 2개(무명~상카라)는 집성제, 고통의 원인인 거죠. 고통을 받게 하는 원인입니다. 어리석고 어리석어서 ‘~하고 싶다’가 생깁니다, 계속. 이 집성제,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고성제가 생깁니다. 고통 받게 됩니다. 우리가 고통받을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놓은 거죠. 만들어놔서 고통 받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시 태어나서 또 ‘하고 싶다’ 또 하는 거죠. 또 하고 싶다 해서 ‘~함’, 그래서 또 생이 있고. 원인을 또 만들고 있는 거죠. 만들어서 또 고통 받게 됩니다. 선업을 짓고 싶다. 보시하고 싶다. 계를 지키고 싶다. 이런 ‘하고 싶다’가 있으면 좋은 생이 있고 좋은 데 태어나겠죠. 그래도 둑카삿짜(고성제)입니다. 좋은 데 태어나도 둑카삿짜이고 안 좋은 데 태어나면 당연히 둑카삿짜이고, 좋은 데 태어나도 근심 걱정 늙고 죽고 또 다시 태어나야 되고. 이것도 둑카삿짜입니다. 안 좋은 생도 둑카이고 좋은 생도 둑카입니다. ‘하고 싶다’가 계속 고통의 원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했으니까. 우리가 일했으니까 월급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돈을 받음. 받은 게 고통인 거죠. 고통을 받는다는 겁니다. 어리석음에서 발현된 ‘~하고 싶다’가 있어서 고통을 받습니다.
다른 수행을 할 때는 대상을 바꿉니다. 좋은 대상, 안 좋은 대상이 있고. 집착이 생기는 대상일 때는 안 좋은 대상으로 바꿔서 집착을 줄이는 겁니다. 어제 나간 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라가짜리따(rāga-carita. 탐욕 성향)들은, 탐욕이 많은 사람들은 탐욕이 안 생기는 대상으로 자꾸 자기 마음을 보내줘야 됩니다. 안 좋아할 만한 대상으로. 내가 탐욕이 많다, 이런 생각이 들면 자꾸 안 좋은 대상들을 보고, 찾아가고, 그쪽에 계속 마음이 있도록 계속 그걸 떠올리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래야지 그 탐욕이 줄어듭니다. 계속 좋은 것들만 찾아다니면 안 된다는 거죠. 그러면 윤회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러면 계속 고통을 만들게 되는 거죠. 그리고 성냄이 많은 도사짜리따(dosa-carita. 성냄 성향)들은 어제 표에서 해결책이, 중생들의 여러 상황들을 보고 이해심을 넓히고, 그리고 좋은 자연, (거친) 5욕락이 아니라 자연환경, 좋은 자연 환경을 보고. 이렇게 해서 좋은 대상으로 마음을 돌리라는 거죠. 좋아할 만한 대상으로 마음을 보내면 일어났던 성냄이 크게 더 자라지 못합니다. 내가 성내고 있는 그 대상을 계속 보지 말고, 좋은 대상으로. 꽃을 본다거나 좋은 풍경을 본다거나. 아니면 다른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을 본다거나. 이렇게 대상을 바꿔주라는 겁니다. 이게 어제 나간 그 표에 대한 해설입니다. 대상을 바꾸라는 거죠. 기분 전환하러 야외로 간다거나. 피크닉을 간다거나 하는 거. 이렇게 바꿔주는 거죠. 대상을 바꾸는 겁니다. 영화 보러 간다거나 춤을 추러 간다거나 그런 데 가면 안 됩니다. 그런 데 가라고 나와 있지 않죠, 그 표에. 좋은 자연환경을 보거나 여러 중생들의 상태를 보거나. 이런 쪽으로 마음을 바꾸라는 거죠. 책을 읽는다거나. 바른 사유로 바꾸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웨다나. 싫은 웨다나, 좋은 웨다나. 이거에서 이 웨다나에서 느낌이 바뀌겠죠. 좋아하던 느낌에서 안 좋아하는 느낌으로 바뀌고. 탐착에서 탐착 없음으로 바뀌고. 성냄에서 성냄 없음으로 느낌이 바뀌겠죠. 다른 느낌으로 바뀌는 겁니다. 다른 수행들은 느낌(그리고 느낌과 함께 일어나는 의도)을 바꾸는 거죠. 그 느낌 자체를 멈추는 게 아니라, 자르는 게 아니라. 근데 위빳사나는 그렇게 다른 대상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그 웨다나. 느낌 자체를 자르는 겁니다. 어떤 ‘싶다’도 일어나지 않게 자르는 겁니다. 위빳사나에서 하는 것은 이 웨다나를 좋은 것으로 선업이 되는 것으로 바꾸고 싶다가 아니라 웨다나에서 딴하(집착)로 넘어가지 못하게 사띠하는 겁니다. 사띠하면 웨다나에서 잘립니다. 위빳사나에서 의도는 웨다나를 자르려는 의도. 당연히 느낌에 따른 의도가 일어나는데 이 의도 자체를 자르려는 의도를 일으키는 게 위빳사나의 사띠입니다. 의도가 실현되지 않습니다. 실현되지 않게 계속 연습하는 겁니다. 첫번째로 하는 연습이 몸에 명칭하는 겁니다. 오른발, 왼발, 부품, 꺼짐. 몸에 명칭이 안 되면 ‘~하고 싶다’를 자르는 단계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일단 가장 큰 대상의 사띠부터 돼야지, 내가 ‘~하고 싶어 한다’를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싶다’를 알지 못하면 ‘하고 싶다’를 자를 수 없겠죠. 안 보이는데 어떻게 자르겠습니까. 보기 위해서 해야 되는 게 몸에 명칭 붙이는 겁니다. ‘듦, 나감, 내림. 부품, 꺼짐.’ 움직이고 있는 몸에 명칭을 못 하면 움직이기 전에 일어나는 의도, 이거는 보이지 않습니다, 절대로. 일단 움직이는 몸에 명칭부터 해야지, 그 움직이기 전에 일어나는 ‘움직이고 싶어하는’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걸 명칭으로 사띠해야 합니다. 명칭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사띠하겠습니까? 마음이 1초에 1조 개가 일어났다 사라지는데, 명칭을 해도 사띠할 수 있을까 말까 한데. 명칭하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그냥 다른 웨다나로. 이 팟사로 인해서 일어난 웨다나에서, 이 웨다나가 아닌 다른 웨다나로. 다른 느낌으로. 다른 ‘하고 싶다’로 새서 흘러가게 됩니다. 이 웨다나 자체를 자르는 게 아니라. 이 웨다나를 뚝 자르는 것이 도성제. 지금 집성제와 고성제만 있는데, 이 사이를 사띠해서 둘 사이를 갈라 놓는 게 도성제이죠. 도성제는 여기에 들어갑니다. 8정도를 다 넣어서 사띠하는 것, 이게 도성제입니다. 12연기에서 도성제.
오늘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다노- 뿐냥 아-사왁카야-와항 호-뚜
이마노- 뿐냐바-강 삽바삳따-낭 바-제-마
삽베- 삳따- 수키따- 혼-뚜
(Idha no puññaṃ āsavakkhayāvahaṁ hotu.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Ima no puññabhāgaṃ sabbasattānaṃ bhājema.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Sabbe sattā sukhitā hontu.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Sādhu sādhu sādhu.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필사자: 담마삐야
* 2023-01-03 인터넷(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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