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창땅에서 유명인사가 배출된 연유가 정녕 길지의 집터때문이었을까 하는 정도의 관심과 흥미는 유발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창땅(지금은 서창동과 용두동으로 나뉘어져 봉황산 아래의 명터라고 해야 적정하다고 봄)에서 그런 유명인사들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새삼 알고나서부터 그 양택지에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됐다면, 독자들에게 사실보도화의 단순 의미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다고 세번째의 집필 관점인 풍수지리학의 학리적 전문성을 강조하는 내용에 치우치다 보면 결국은 너무 난해함에 식상해서 독자들로부터 흥미와 관심을 잃고 말았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다.
따라서 풍수지리학이 너무 어렵고 난해한 까닭에 가급적이면 쉽게 풀어쓰려고 노력한다. 교단생활 44년동안 깨우친 것이 하나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내용도 쉽게 풀어서 이해하도록 여러 방안을 강구하면 학생들도 마침내 그 내용을 이해한다는 사실이다.
교육학자 브르너도 그의 저서 교육구조론에서 그토록 어려운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일지라도 알기 쉽게 풀어서 교육의 대상의 수준에 맞게 뜻을 가르쳐 주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고 역설한 바 있다.
필자도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풍수기행의 항로를 개척해 가기로 작정했다면 너무 경망스런 집필태도 일까. 며칠전 용두동 봉황산 아래 자리잡은 양택 명당인 구룡(九龍)터와 봉학(鳳學)터를 찾아 나름대로 열심히 살펴보고 산도(山圖)를 스케치했다.
그동안 5~6회 방문한 곳이지만 막상 이 글을 쓰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간산(看山)에 임하는 필자의 마음은 긴장되고 매우 생경스러웠다. 봉황산에서 내려다 본 용두동의 전경은 비록 상징적인 동물로 알려진 것이지만 그 형상이 틀림없는 용의 머리부분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송학산(松學山)에서 급락해 평지에 내려온 산맥(풍시지리학에서 용이 움직이는 형상과 같다 해서 용맥이라고 함)은 벌의 허리처럼 짤록하게 모아진 다음 다시 봉황산으로 치솟아 올라(飛龍) 마치 봉황이 비상하 듯 양날개를 활짝 펼친 형세로, 강룡(强龍)이 틀림 없었다.
그런 용세(龍勢)라면 두서너 자리의 혈은 족히 맺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아닌 게 아니라 봉황산의 왼쪽에 모아진 목성체(木星體) 수봉(秀峰)에서 출맥한 한 줄기 용맥은 김동신 전 국방장관의 생가가 있는 봉학마을로 꿈틀거리면서 내달아 내려갔다.
봉황산 중간쯤에서 다시 가깝게 낙맥 비룡해 금성체의 수봉을 세운 다음 출맥한 다른 한줄기의 생기 있는 용맥은 급락(급경사로 이루며 내리쏟아 내룡한 산줄기)한 다음 마치 세찬 물줄기를 가르며 헤엄쳐 나아가는 뱀장어처럼 좌우로 꿈틀거리며 구룡마을터로 향해 내룡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특립·특출한 봉황산의 정기가 양쪽마을의 명당양택을 주관하는 주체이므로 양대 주산이 영락없이 봉황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룡터는 봉황새가 용으로 화(化)했으면서, 그것도 9마리의 용이 되었으니, 그 움직임을 면면히 살펴보면 비록 주산의 봉황의 이미지를 지녔다 해도 거기서 출신한 용맥의 힘찬 형상이 마치 용틀임치며 나아가는 용의 움직임과 같다.
따라서 용에 빗대어 이름이 붙여졌고, 나아가는 용맥의 행도(行度·산맥의 줄기가 나아감에 있어 합법적인 각도를 형성이며 움직임)가 여덟번 변전박환(變轉剝換·용맥이 交度를 달리하며 변해가는 모양)을 이루며 양택지에 당도했으니 구룡이라(8번 변전하면 봉우리는 9개가 됨) 명명했을 것이다. 새삼 선현지사들의 형안(炯眼)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마을뒤로 극락강과 황룡강이 합수돼 본(本)터를 싸안아 돌아 흘러 영산강으로 이어져 흘러가니 물과 땅이 어우러진 조화로운 명당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물형(物形)으로 따지면 회룡해 언덕아래에 자리를 정했으니 회룡고조형세(回龍顧祖形勢)의 피상반룡형(披上蟠龍形)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송원 고제철 회장의 생가 터에서 주위를 살펴보면 내룡한 용맥이 180도를 휘돌아 정혈(定血)했음이 확연하다. 그리고 극히 자연스럽게 주산(봉황산)과 중조산(송학산)을 바라보고 앉았으니 돌아서 자리잡은 혈이 할아버지격인 조종산(祖宗山)을 돌아보는 형세이므로 회룡고조형국임이 틀리지 않다.
그 물형 역시 현무봉(주산에서 내려온 맥이 마지막 지기를 응결시키기 위해 나지막하게 세워진 만두 아래 언덕진 곳에서 구룡의 마무리를 맺었으니 언덕위에 서린 용(피상반룡형)이라 이름 붙여진 것이라 생각된다.
수년전 무슨 인연이었든 간에 송원 고 회장과 함께 이 명혈을 찾아서 생가 복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그야말로 토담집이었던 생가터에 새롭게 단장한 후 송원연제(松源燕齊)라는 이름으로 복원된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가택이 눈길을 끌었다.
또 주변에 둘러쳐 쌓은 담장과 정자며 대문이 생가터를 보전관리하려는 당주(堂主)의 의지와 애착심을 엿볼 수 있었다.
구룡터 그 중에서도 호남의 재력가를 탄생시킨 명혈양택지야말로 ‘인걸은 지령’이라는 풍수지리에 스민 뜻을 다시금 음미하게 하는, 중요하고도 검증된 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봉천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