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벽당을 나와 다시 용소가 보이는 길을 따라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배롱나무가 늘어서 있다. 반듯하게 잘 쌓은 축대 위에 자리한 배롱나무는 광주 북구청에서 시가문화권의 복원· 보존차원에서 자미탄(한자로 자미란 배롱나무를 뜻하는데 자미탄이란 배롱나무가 심어진 여울을 말한다)을 재현한다고 1998년 9월말에 벌인 사업이었다. 어찌됐건 옛 정취를 복원한다는데야 이견이 있겠는가만 담양군과 북구청의 공조가 아닌 각자의 해석 때문에 원래의 자리가 아닌 이 자리가 자미탄이 되고 있다는 점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될지 모를 일이다. 다리를 건너면 지실 마을이 가까워지고 곧 완공을 보게 될 가사문학관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송강 정철 가사문학의 전당이 될 이 건물은 식영정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오는 2000년 10월 개관 예정으로 총 80억원의 예산을 들여 담양군에서 짓고 있다. 약 6층 높이에 해당하는 이 거대한 건물이 주변의 풍경을 훼손한다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필자도 이 부분에선 개인적으로 동의하고 반대하기도 했지만 이제 개관을 눈 앞에 둔 현실이고, 담양군이 지역 특화 사업으로 모처럼 큰 맘을 먹고 하는 사업이니 짓자 짓지 말자의 얘기는 접어 두려 한다. 다만 무리수를 두고 지어진 문학관인 만큼 단지 가사문학을 위한 공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지역 문화유산의 가치와 의미를 살릴 수 있는 공간으로 제대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바램 간절하다. 가사문학관 건물에서 좌측으로 돌아 조금만 가면 마을입구다. 바로 이곳이 지실 마을로 송강 정철 후손들의 집성촌이다. 부촌이었다는 이유로 6·25 때 마을 집들이 대부분 불타버려 집터와 담장만 남아 있는 곳이 많지만 우뚝 솟은 당산나무와 회화나무, 이끼 낀 돌담은 반촌(양반마을)답게 옛날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 보면 조립식으로 지어진 울림산장이란 식당을 만난다. 과거 이 자리에는 박동실이란 명창이 소리를 하고 그의 제자를 가르쳤던 집이었다고 한다. 박동실은 월북을 했기 때문에 우리들에겐 조금 낯선 이름이나 그의 제자 중에는 김소희와 성우향 같은 명창들이 있었음을 볼 때 예사 소리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석으로 된 초석 위에 지은 집이 당시 박동실이 소리를 가르쳤던 곳이며, 집 옆 바위에 새겨진 글은 박동실 이전에도 특별한 자리였음을 추측케 해준다. 그 집을 나와 당산나무가 있는 골목을 따라 마을 안쪽 깊숙이 들어가 보자. 졸졸졸 개울물 소리가 들려오는 끝자락 쯤에서 오랜된 옛집 계당의 철대문과 마주서게 된다. 옛 집의 소슬대문이 있었으면 더 어울렸으련만. 이곳은 송강의 후손으로 현재 광주·전남 환경운동연합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구선 님 댁이다. 이 집의 이름은 개울물이 마루 아래로 흘렀다고 해서 지어진 계당이다. 송강의 4째 아들인 기암 정홍명의 사랑채로 인조 10년인 1632년에 지어진 것이다. 현재는 세칸집인데 원래는 5칸 집이었다고 한다. 계류를 가로질러 지은 집은 화재가 났을 때도 건재하게 남았지만 홍수로 인해 세칸 집으로 잘리게 되고 홍수로 인한 토지 유실을 막기 위해 콘크리트 옹벽이 설치됨으로써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정구선 선생은 늘 아쉬움을 토로한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이 마을의 오랜 전통을 그나마 오늘날까지 전해주는 유일한 집임에 틀림이 없고 더불어 계당 앞의 영산홍은 수령이 아주 오래되고 잘 자라서 활짝 핀 봄날은 온 뜰이 꽃빛으로 환하게 빛난다. 앞서 말했지만 지실 마을은 과거의 영화로움이 6·25의 전란으로 인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그 터와 흔적은 남아있고 잘 다듬어진 담의 구조는 옛 집을 다시 복원하고자 하는 염원이 일게 된다. 필자는 이 마을을 지나면서 아직도 각 시대를 대표하는 전통 마을하나 오롯이 지켜내지 못하고 복원조차 못하는 우리나라에서 조선중기를 대표할만한 전통 선비촌으로 서로의 의지와 힘을 모아 재현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자 이제 왔던 길로 다시 나가서 식영정으로 향해보자. 소쇄원 입구에서 지실 마을 어귀, 가사문학관을 지나 식영정 입구까지 이어진 이 도로는 최근 공사가 있었다. 가사문학관 터를 정해 놓고 그 앞을 지나는 굽은 도로를 직선으로 만드는 공사였다. 그래서 그런지 차들이 이젠 경주하듯 씽씽 잘들 달리고 있다. 조심해야 한다. 차를 놓고 보아야 제 맛이라고 강조한 당사자로서 답사자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조금 더디 가더라도 이런 곳은 완상할 수 있도록 그대로 두면 안될까 하는 마음에 입맛이 쓴 것이 솔직한 필자의 심정이다.
식영정은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지만 도로변에 자리한 덕에 답사객들의 발길이 가장 잦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영정 입구에서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고 혹여 못보고 지나는 사람이 있을까봐 그랬는지 대포 주둥이처럼 생긴 수출 100억불 기념탑 같은 탑을 세워 놓았다. 훌륭한 인물을 기리는 일이 그 사람의 삶과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이라면 탑을 세워 그가 살던 곳의 정취를 깨버리는 일이 과연 잘한 일인지 의문이 인다. 탑비의 아랫쪽을 보면 1991년 3월에 지은 넉살스런 글이 새겨져 있다. “위대한 시인은 종이가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 위에 시를 쓴다. 이곳 식영정 마루턱에 서면 바람도 옛 운율로 불고 냇물도 푸른 글씨가 되어 흐르나니 우리는 지금 풀 한 포기 흙 한 줌에서 송강의 가사 성산별곡을 온 몸으로 읽는다” 라고. 아무튼 그 탑에 가려 잘 보이진 않으나 뒤편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부용당(芙蓉堂)이란 누정과 오른편으로 김성원의 서하당(棲霞堂)이 자리하고 있다. 1574년 4월 이곳의 모습을 서술한 제봉 고경명의 유서석록을 보면 당시의 정취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서하당 뒷뜰 돌담가는 모란, 작약, 해당화, 왜철쭉 등이 빽빽히 심어져 있는 것이 그 모두가 뛰어나 자연미를 화려하게 더하여 주고 있다. 서하당 북쪽 모퉁이에는 네모진 연꽃이 반이랑쯤 되는데 여기에 백련이 너댓그루 심어져 있고, 샘물은 대나무 홈통을 타고 층계 밑을 지나 못으로 흐르도록 해놓았다. 못 남쪽에는 벽도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서쪽에는 석류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가지가 담장뒤로 높이 뻗었다.”
그리고 서하당의 오른편으로는 굳게 잠겨진 송강의 문집과 판각을 보관하고 있는 장서각이 있다. 그림자 마저 자취를 끊고 속되지 않게 살겠다는 의미를 가진 식영정. 식영정 정자에 오르는 것은 부용당과 서하당 장서각이 자리한 왼편 108 계단을 타고 가야 한다. 식영정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 1호로 담양군 고서면의 송강정과 함께 지정되어 있다. 이 정자는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이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을 위하여 1560년에 지은 것이다. 이곳은 무등산 원효계곡 자락을 타고 흘렀던 문화의 정수를 이뤘던 장소다. 식영정이란 이름이 탄생하게 된 것은 김성원이 이 집을 지은 후 석천에게 그 이름을 짓기를 간청하자 임억령은 장주(莊周)의 ‘그림자가 인간의 모든 것을 따라 하지만 정작 밤이 되거나 그늘에서는 따라 붙지 못한다’는 그림자에 대한 고사를 들어 사람의 처세는 그림자와 같은데 자신은 처세의 연연함 없이 하늘의 이치대로 욕심을 버리고 초연하게 강호에 은거하여 자신의 그림자를 거두고 살겠노라는 의미로 식영정이라 이름했던 것이다. 소담한 두칸 집에 방이 하나 들어있는 이 집의 앉은 모양을 보면 눈 아래로는 시원한 광주호가 식영정을 담고 있는 듯 하며, 눈을 들어보면 무등산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누정은 이렇듯 경관을 받아 들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있는 자연 그대로를 담아내는 기술들 참으로 훌륭한 건축기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식영정 마루의 들보를 유심히 살펴보라.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나무를 얹혀 그대로 활용하여 자칫 정숙하다 못해 근엄한 인상으로 흘러 버릴 정자의 건축을 자연스럽게 녹여 내지 않는가?
절로 강건한 웃음이 베어나오는 식영정의 건축물이다. 이 건물의 주인 석천 임억령은 식영정에 65세에 들어와 73세 때 해남 집으로 돌아가 운명할 때까지 8년을 식영정에 은거하면서 성산동(식영정이 자리한 곳)의 아름다운 자연과 벗하는 일상을 시로 그렸다. 그가 성산에서 지은 400여수의 시중 특히 식영정 20영(息影亭 二十詠)은 식영정에서의 생활을 잘 그리고 있는데, 주변의 자연경관을 형상화한 연작시로 이 지역 시단의 상징적 작품이며, 송강의 성산별곡(星山別曲)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말하자면 석천이 식영정 20영시를 짓자 면앙정 송순이 화답을 하고,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이 차운(그 시의 제목과 운율을 빌려옴)을 하게 된 것이다. 식영정에 걸려 있는 싯귀들이 그것이다.
서석한운(瑞石閑雲) : 무등산에 떠있는 구름 창계백파(蒼溪白波) : 식영정 아래편으로 흐르는 강물이 부서지는 모습 수함관어(水檻觀魚) : 정자의 난간에 기대서 물속 고기의 노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양파종과(陽坡種瓜) : 볕바른 제방에 오이를 심으면서 벽오양월(碧梧凉月) : 푸른 오동나무 사이의 서늘한 달 창송청설(蒼松晴雪) : 눈이 게인 후 푸른 소나무에 쌓인 눈 조대쌍송(釣臺雙松) : 조대에 서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 환벽영추(環碧靈湫) : 환벽당 앞의 신비스런 연못 송담범주(松潭泛舟) : 소나무가 있는 연못에 배를 띄움 석정납량(石亭納凉) : 바위에 앉아 더위를 식힘 학동모연(鶴洞暮烟) : 학선리 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로 광주호에 수몰된 마을 평교목적(平郊牧笛) : 성밖에서 부는 목동의 피리소리 단교귀승(短橋歸僧) : 영추앞 다리를 총총히 가는 스님 백사수압(白沙睡鴨) : 하얀 모래밭에 졸고 있는 기러기
노자암(鰲伸岩): 가마우지가 노니는 바위 자미탄(紫薇灘): 배롱나무가 여울지는 개울 도화경(桃花徑): 복숭아 꽃이 만발한 길 방초주(芳草洲): 방초가 피어있는 냇가 부용당(芙蓉塘):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 선유동(仙遊洞): 신선들이 노니는 골짜기.
이렇듯 식영정 20영은 식영정에서 바라보이는 외부의 경관을 시간과 계절을 두고 읊었음을 알 수 있다. 똑 같은 시제를 두고 다섯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우리 국문학사에서 한글로 쓰여진 가장 빛나는 업적이라는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이 이를 소재로 하여 쓰여졌음은 새겨 볼 대목이다. 시를 읽다보니 마음 한구석에 슬며시 아쉬움이 찾아온다. 무등산의 구름은 아직도 그 옛날의 정취처럼 한가로이 떠있는데, 댐으로 인해 수몰된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나 자미탄은 더 이상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식영정 앞으로 나아가 댐쪽을 보면 7개의 바위가 시야에 들어온다(단 만수일 경우엔 세 개밖에 볼 수 없다). 노자암이라 불리는 바위이다. 노자암이라 함은 가마우지가 앉는 바위란 뜻이다. 그런데 가마우지는 제주도의 성산포 앞 바다에서나 볼 수 있는 새이다. 그럼에도 이런 내륙에 있는 바위에 가마우지 바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황새나 왜가리가 가마우지처럼 물고기를 잘 잡는 새라서 그에 비유해 가마우지 바위라 이름하지 않았나 싶다. 노자암인지 알려주는 표석 하나 없지만 왜가리들이 가끔씩 바위에 앉아 물고기를 노리거나 강태공이 아예 바위 위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강심의 복판에서 고기를 낚고 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한편 그 맨 아래쪽 바위 한면에는 노자암이란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언제인지 모르게 바위의 한 귀퉁이를 정으로 쪼개서 없어지고 말았다. 광주댐에 물을 채우기 전에 바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로 밝혀진 것이 노자암이다.
식영정이 더 빛나는 것은 호남시단의 두 중심 즉 면앙정 시단과 더불어 그 중심이라는 점과 국문학사의 금자탑이라고 하는 성산별곡의 창작지이기 때문이다. 송강 정철이 이곳을 배경으로 성산별곡을 지었고 우리는 그저 이 정자의 주인이 송강 정철이란 점에 한번도 의문을 품지 않고 돌아가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적어도 원주인이었던 석천 임억령에 대해서도 생각을 품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순례자의 도리이다. 주인이 누군들 어떠랴마는 그래도 우리는 한 가닥 역사의 내용을 음미하면서 성산에 불어오는 무심한 바람을 맞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식영정의 이름을 일명 사선정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출입했던 4명의 사람을 일컬어 하는 부르는 이름으로 석천 임억령, 제봉 고경명,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을 식영정의 사선(四仙)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랜된 노송과 배롱나무의 연륜을 따져 보면서 우리 국문학사의 요람 식영정을 한동안 거니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뒤쪽으로 성산별곡 기념비가 있다.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로 시작하는 그 시를 읽어보는 것도 식영정에서 빠뜨리지 않아야 할 일이다. 그리고 답사가 끝나고 식영정을 비롯한 무등산권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거든 서점에서 박석무 선생이 지은 『다산기행』이라는 한 권의 책을 구해 읽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순례길에 모든 준비를 한다해도 부족한 것이 있듯이 얘기치 못한 숨은 얘기들이 그 책 속에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