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13. 다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건의 영향으로 옳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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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불 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가 되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묘청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여 조선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묘청이 승리했다면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나아갔을 것이니, 이 사건을 어찌 1천년래 조선사의 제1대 사건이라 하지 않으랴.”
-<조선사 연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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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문벌 귀족 사회가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다.
②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였다.
③ 몽골은 고려의 고유한 주권과 풍속을 인정하지 않았다.
④ 진골 귀족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되었다.
정답: ①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이자겸의 난(1126)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들과 묘청,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하였다.
묘청 세력은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 통해 문벌 귀족 사회가 양분되어 후일 무신정변으로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고,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에서 이 사건을 ‘조선 역사 1천년 이래 제1대 사건’으로 크게 평가하였다.
② 신라 말 중앙 진골 귀족들의 왕위쟁탈전으로 지방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며,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다.
③ 원 간섭기(1270~1351) 몽골은 고려가 독립국을 유지하고 고려 내에서 국왕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것을 보장하였지만, 국왕에 대한 임면권을 원이 확보하여 불완전한 자주국이 되었고, 불개토풍(不改土風)으로 고유풍속을 인정하였지만 몽고풍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
④ 신라 중대 신문왕(681~692)은 김흠돌의 난 진압을 계기로 진골 귀족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을 전제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