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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재촉하는 빗줄기가 잦더니 촉촉한 날씨와 함께 벌써 가을이 익어 가는 냄새가 풍겨 오기에 풍년이 점쳐지는 들판을 바라보다가 오늘의 번영은 어디서 왔을까하는 생각을 문득 해 보았습니다. 우리 인류에게 지금의 발전을 가져다 준 동기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리의 먼 조상이 두 발로 일어선 이후 가장 큰 사건은 불을 사용할 수 있는 지혜를 얻었다는 점이고 다음의 계기는 아마 쇠의 발견일 것입니다.
물론 이 앞에 돌이나 흙을 다루어 석기나 토기를 만들 줄 알게 되었지만 이런 물리적 가공보다 제련이라는 특수한 과정을 거친 청동이나 철의 발견은 가히 획기적이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다시 철기시대로 발달해 감에 따라 각 시대의 사회적 생산력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는데요, 특히 철은 무른 청동에 비해 생산도구나 무기로서 사람들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철이 발견되므로 국가의 힘이 되는 제대로 된 무기를 만들 수 있었고, 쟁기의 보습이나 괭이, 낫을 만들어 농사를 확대할 수 있었고, 도끼와 끌이나 생활용 칼을 만들어 안정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는 집을 튼튼히 지을 수 있게되었으니 비로소 인류는 문명에 대한 준비를 할 수가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쇠를 활용하였을까요? 사람의 지혜에 의해 쇠를 처음으로 녹여낸 것은 서기전 205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Ur탑 옆에 쇠를 녹인 가마자리와 쇠 찌꺼기가 발견되었고, 동양에서는 서기전 1100년경 중국 은나라의 유적에서 발견되었지만, 널리 사용하게 된 것은 서기전 770년 무렵 춘추전국시대부터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쇠를 처음 사용한 흔적은 서기전 4-5백년 전이지만, 철을 직접 생산하는 최초의 철광산이 울산에 있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놀라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고대 최고의 철광산은 바로 울산에 있습니다. 지금의 북구 농소3동 그러니까 달천동에는 달천산이 있고, 이 산의 가슴속에는 고대의 강력한 국가를 형성시켜준 힘이 숨어 있었습니다.
쇠가 어떻게 힘이 되느냐하면요, 바로 쇠는 인류가 발전하는 큰 고갯마루에서 문명의 지렛대 역할을 하는 한편 힘의 상징으로, 쇠를 장악한 집단이 국가를 장악했고, 이웃나라를 정복하였으며, 부와 영광을 함께 누렸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쇠는 인류가 영위하고 있던 수 백 만년의 원시공동체생활을 청산하게 하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변혁을 가져다주었는데, 이것은 지구상에서 일찍이 쇠를 사용하지 못한 남북아메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몇몇 대륙은 16세기이래 서유럽 사람들의 침입이 있기 전까지는 아직 원시상태에 머물고 있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쇠가 어떻게 먼 옛날부터 울산에서 나왔다는 증거가 어디 있고, 왜 중점적으로 많이 나왔느냐를 알아야 하겠는데, 우리는 고대의 역사를 풀 수 있는 열쇠로 흔히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를 인용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천년이나 앞서 편찬되었고, 비록 주변국의 일이지만 제법 자세하게 역사를 기록했으므로 많이 인용하는데요, 이 삼국지의 기록에는 ‘변진에서 쇠가 나오는데, 한(韓), 예(濊), 왜(倭)와 교역을 하였고, 이의 매매와 교환에는 화폐 즉 돈처럼 사용한다.’는 글귀가 있고, 이보다 100년뒤에 나온 ‘후한서’에도 이와 같은 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체로 기원전 1-2세기에 한반도의 남쪽에 형성되었던 정치집단인 삼한 가운데 낙동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변한과 진한에서 쇠가 나왔고, 이 쇠는 삼한사회는 물론 동예와 왜국 그리고 낙랑과 대방을 거쳐 중국에까지 공급되었다는 사실은 고대사회에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무역을 할만큼 많은 양의 쇠라면 그 산지의 규모 역시 만만치 않았을 것인데요, 여기에 대해 후대의 기록이지만, 조선 세종실록지리지에 남한에서 생산되어 나라에 바쳐진 철의 양을 적은 내용이 있습니다. 이미 이때는 전국적으로 철 광산이 있었는데, 경상도와 전라도를 통틀어 62,273근의 철이 생산되었으나 울산의 달천 철장 한 곳에서 12,500근 그러니까 전체의 1/5이상이 바쳐졌다는 것은 그 규모를 짐작케 하지만 보다 구체적인 증거가 계속 밝혀지므로 고대에는 울산 달천 철장이 유일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쇠의 활용 경위를 알 수 있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원료가 발견되었고, 이를 녹일 수 있는 기술이 발달했다는 것 자체가 경이가 아닐 수 없는데요, 아시다시피 철은 녹는 온도가 무려 섭씨 1,535도인 점을 감안한다면 놀랄 일입니다. 물론 무쇠의 융점은 이보다 낮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일은 요즘처럼 철광석을 캐는 일이었습니다. 바위보다 더 단단한 광석을 더구나 땅속에 깊이 묻혀있는 것을 과학적인 장비도 없이 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 철광석 이전에 철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흙이나 모래를 사용했는데, 이를 토철, 사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토철은 땅위에 그대로 들어나 있는 광물을 말하는 것이고, 사철은 냇가의 모래를 걸러 철 성분이 많이 포함된 것만 골라 용광로에 넣어 쇠를 만드는데, 울산 달천에는 이 토철이 무진장으로 널려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곳의 토철은 철 함유량이 70%를 넘는 아주 양질의 원료였으니 쉽게 원료를 얻을 수 있었겠지요. 물론 달천 이외에 이만한 광산이 발견된 일이 아직 없습니다.
자, 고대 외국과 교역을 할만큼 대단했던 우리나라의 쇠 산지가 달천이라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 철 속에는 탄소, 규소, 인, 유황 같은 온갖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중 일부에서 비소가 검출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유황과 비소가 섞인 철을 황비철이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일본의 고대 철 유물의 분자구성을 분석해 보니 대부분 비소가 포함된 황비철이었습니다. 이 황비철은 일본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와 중국에도 대단히 드물게 나타나는데, 오직 울산 달천 철장에서만 황비철이 생산됩니다. 그러니 울산의 쇠가 삼국지의 기록대로 왜와 다른 지역으로 수출되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셈입니다.
그러면 이 시기가 언제냐 하는 것 또한 밝혀야할 문제지요. 첫머리에 알아보았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처음 쇠를 사용한 흔적은 평안북도 독로강 유역에 자리잡은 노남리 유적에서 쇠도끼와 꺾쇠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적의 편년이 서기전 500-400년 전이고 보면 이 때 이미 쇠가 사용되었지만, 이 쇠는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고, 순수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쇠는 여러 기록과 출토품을 정리해 보면 기원전 3세기경 그러니까 지금부터 2천 3,4백년 전부터임을 알아내었습니다.
이때 그러니까 한반도 산 최초의 쇠가 달천쇠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이 울산 달천 철장을 중심으로 한반도에도 명실공히 철기시대가 제대로 열리게 됩니다.
이후 울산의 철을 중심으로 숱한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신라의 왕들도 대부분 철과 인연을 맺어 왕이 되지요.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석탈해 왕입니다. 탈해가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가 왕경을 내려다보니 마치 반달같이 생긴 땅이 보이는지라 가보니 호공이라는 사람이 집을 짓고 살고 있었겠지요. 탈해는 이 땅을 빼앗을 요량으로 집 주변에 숯덩이와 쇠붙이를 몰래 파묻고, 호공에게 이 집은 본래 내 집이니 내어놓으라고 말합니다. 호공은 너무나 뜻밖이라 황당하여 관가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관가에서는 탈해를 불러 물었겠지요. “이 집이 네 집이라는 증거가 무엇이냐?”하니 “우리집은 본래 대장장이 였습니다. 잠시 타향으로 떠도는 사이 이 사람이 차지했지만 땅을 파보면 증거가 나올 것이요” 그래서 땅을 파보니 과연 쇠부스러기와 숯이 나오는지라 그 집을 차지했고, 이 소식을 들은 남해왕이 범상한 아이가 아님을 알고 사위로 삼았다가 훗날 왕이 되니 이 이가 바로 신라 4대 석탈해 왕입니다. 그런데 이 석탈해가 바로 울산사람이고, 이 쇠를 지배할 열쇠를 간직한 덕분에 왕위에까지 올랐다는 학설이 새롭게 제기되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만, 지난 1991년 울산 학성공원 뒤쪽에서 공사를 하다가 신라시대의 토성이 발견되었고, 이 토성의 아래층에 신라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야철지가 발견되어 석탈해 시대와 관계가 없나 연구중입니다.
삼국시대에만도 철산지를 차지한 나라가 강성했고, 이 산지를 빼앗김으로 침몰해간 기록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6~7세기에는 울산의 달천을 중심으로 합천, 양양, 충주, 재령과 요동반도 일부에서 쇠가 나왔는데, 초기 동해안의 철산이 고구려에 흡수되므로 국력이 급격히 신장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던 백제는 충주의 철산을 잃으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지요. 또 신라는 가야를 공격하여 합천 광산을 수중에 넣으므로 힘이 넘쳐 나지만 뒷날 백제와의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빼앗겼다가 다시 반격하여 합천 철산을 회복하는 이른바 유명한 대야성 전투는 바로 쇠를 수중에 넣기 위한 전투였다는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기도 하고 있습니다. 자, 이 쇠가 고대사회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삼국시대부터 14세기 후기까지 토철이나 사철을 이용하여 쇠를 꾸준히 생산하므로 국력에 크다란 힘을 보태왔습니다만, 조선시대의 지나친 사대부 우대풍조 때문에 이 귀중한 철장도 한 때 문을 닫고 잊혀지고 만 일이 있었습니다. 이 쇠의 원료를 생산하던 지역을 철소(鐵所)라고 불렀고, 여기에는 소를 통괄하는 소리(所吏)와 생산노동에 종사하는 소민(所民)이 있었습니다. 철소는 쇠 생산이 전문화되어 있는 생산공동체로서 그곳에서 생산된 질 좋은 생산물은 관에 모두 바치고, 품질이 떨어진 것만 일반 백성들이 서로 물물 교환하여 생활도구로 만들어 썼습니다. 더구나 생산업으로는 겨우 농사만을 본업으로 삼는 정책을 쓰는 한편 상․공업은 천시하여 양반이나 관리층이 이들을 학대하고 수탈을 하니 누가 이 일에 종사했겠습니까.
드디어 기질이 있던 달천 철장은 쇠퇴의 길을 걷다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문을 닫고 한동안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잊혀져 갔습니다.
그러나 난리가 끝난 후 재건을 해야겠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쇠였지요. 농공기구, 생활도구, 무기의 재정비... 무엇하나 이제는 쇠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길들여졌지만, 생산노동자나, 제련을 하는 야장을 천시한 까닭에 쇠의 생산은 어려워졌고, 고철이나 판장쇠라는 1차 제품의 값이 폭등하여 극심한 혼란을 겪었지만, 정부에서는 이처럼 급박한 상황아래에서도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답니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구충당 이의립입니다.
이분은 광해군 때인 1621년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세가 지극하였는데, 불행히도 10살 때 어머니 설씨를 여의고, 21살 때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니 외로운 몸이 되었다고 합니다. 선고의 3년 상을 마친 그는 어느 날 생각하기를 ‘자식으로서 뜻을 세우지 못하면 사람의 자식이라 할 수 없고, 나라가 위난을 당하여 어려운데 백성으로서 순국의 정성을 다하지 아니하면 어찌 신하라 하겠는가. 이미 양친이 다 세상을 떠났으니 어버이 섬기는 마음으로 나라에 충성하리라. 지금 나라의 어려움에는 군사와 농사가 막중하지만 화약을 만들 수 있는 유황과 농기구와 솥을 만들 수 있는 무쇠가 생산되지 않고 있으니 내 이를 찾아 나라의 어려움에 보국하리라하는 뜻을 가슴에 품고 치술령에 올라가 백일동안 기도한 후 길을 나섰습니다.
그는 지리산, 가야산, 금강산, 묘향산에서 백두산까지 삼천리 산천을 14년 동안이나 뒤지면서 쇠를 찾다가 드디어 38세가 되던 1657년에야 울산 달천땅에서 옛날부터 캐오다 폐광이 된 토철광산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2년 동안 토철을 용해하는 제련법을 연구하여 드디어 판장쇠를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이 판장쇠로 함석 100근, 선철 1,000근, 주철환 73만개 솥 440좌 외에도 많은 철제품을 만들어 나라의 훈련도감에 자진하여 바쳤지요.
자, 집을 나와 14년 동안이나 온 산천을 헤매면서 쇠를 찾았고, 또 가난을 무릅쓰고 많은 장비와 자금이 필요한 제철산업을 하여 나라에 자진 헌납한 그의 애국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요, 나라에서도 현종임금은 그의 공을 치하하고 명예직 벼슬을 내렸고, 이어 유황도 만호봉이라는 곳에서 발견하여 나라에 바치니 숙종은 평안서도의 숙천도호부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목민의 길을 알지 못하는 무학걸재’라고 자신을 낮추고 극구 사양하였으므로 숙종은 이의립과 아버지, 아들 등 3대에 걸쳐 가선대부의 위계와 함께 달천의 광산도 하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달천광산에서 채광한 원료로 무쇠 부질을 사기업적으로 경영하였고, 이 기업은 그의 직계, 방계 후손들에게 그대로 승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업은 237년 동안 계속되었지만, 13세손 이은건에 이르러 통감부에서 공포한 한국광산법에 의해 철장은 일본인 나카무라에게 약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일본인의 손에서 대한철광회사로, 다시 삼미광업개발 울산광업소로 전전하는 동안 토철은 바닥을 들어냈고, 더 바닥 깊이에서 제철에 필요한 사문석을 채취하다가 그나마 지금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있다고 하니 이제 달천 철장은 수천년의 생을 마감하는 것인지 군데군데 채굴한 굴만이 을씨년스럽게 뚫려있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불과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호계역사에는 실려 가는 뻘건 토철이 산더미처럼 쌓여져 있었는데, 이제는 이 모두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달천 철장은 철의 함유량이 높고, 채광이 쉬운 점과 이것을 제련하는데 필요한 연료가 주변에 풍부했으며, 해외로의 교역을 위한 운송로인 물길이 옛날에는 철장 바로 아래에까지 들어 온 천혜의 조건으로 일찍이 발견 개발되었습니다. 신라는 이 쇠를 가지고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했으니 울산의 또 다른 면모가 여기에 있습니다.
쇠의 비밀은 엄청납니다. 그 역사의 현장이 울산이란 사실 또한 간과할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나라 사적 1호가 달천 철장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너무나 귀중한 유산의 현장을 팽개치고 있고, 이 철장을 재발견한 애국지사 구충당 이의립의 산소가 두서면 전읍리에 있지만 관심을 가지는 이가 별로 없습니다.
짧은 시간이라 ‘달내쇠굿’이라고 불리어지던 이곳의 유래와 언어학적 접근은 하지도 못했고, 문명의 지렛대 역할을 한 쇠의 고대역사에 접근해 보았습니다만 그 줄거리조차 추리지 못했군요. 다음주 이 시간에는 달천에서 생산된 토철을 가지고 판장쇠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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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러다가 나 울산 박사님 될거 같애 ^^.
달천에 제철소가 생겼다면 금상첨화 였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