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퍼드는 초기 한국선교 과정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는 1888년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해서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교회에서 목회하였습니다. 이때 기퍼드는 외부의 도움 없이 교인들의 헌금과 노동으로 새로운 예배당을 짓도록 하였으며, 몸소 노동의 본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1890년에는 같은 북장로회 선교사로서 정동여학당(정신여학교)의 2대 당장이던 메리 헤이든과 결혼하였습니다.
기퍼드는 <The Korea Repository>에 한국에 관한 많은 글을 기고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저서 <조선의 풍속과 선교>에서는 자신이 선교를 하면서 느끼고 체험한 사실들을 담담하면서 세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최초의 근대식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잠시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1900년 4월 10일 남부지방을 순회하던 중 이질에 걸려서 소천 하였고, 그의 부인 (Mary Hayden Gifford, 1857.8.23~1900. 5.5)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초의 왕립학교 육영공원 교사 경신학교장 다니엘 기포드
다니엘 L. 기포드(Gifford, Daniel Lyman, 奇普, 1861~1900)는 1861년 1월 9일 출생했다. 1888년 10월 27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에서 새문안교회 교역자와 경신학교 교장으로 목회와 교육분야에서 폭 넓은 활동을 하였다.
1890년, 헤이든과 결혼하였으며 1892년부터 발행된 선교잡지 에 많은 기고를 했다. 1892년 우리나라 최초의 왕립학교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죠션 셩교서회' 창립위원으로 일을 했다.
1898년 뉴욕에서 '조선의 매일 생활(Every Day Life in Korea)'이라는 책을 발간, 우리 나라의 풍속을 세계에 알리고 선교사들이 활동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00년 4월 10일 경기지방 선교여행 중 이질에 걸려다. 가난한 이 땅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가 별세하여 돌보는 이 없이 양화진에 묻히게 됐다 (바-7)
기포드 어머니는 1898년 8월, 60세가 넘은 나이에 이 땅에 들어와 아들 다니엘과, 며느리 헤이든이 별세한 뒤에도 조선의 가난하고 병든자를 구제하며 성경을 가르쳤다.
최초의 공인 찬송가집 발간한 정신학교 교장 헤이든 기포드(1857~1900)
다니엘 기포드의 부인 헤이든 기포드(Mary Hayden Gifford, 奇普夫人, 1857~1900)는 1857년 8월 23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파크대학을 졸업했다.
1888년 9월 29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정신 여학당장과 여성 선교사역으로 경기 지방과 황해도 지역의 선교를 담당하였다. 다니엘과 결혼 후에도 가냘픈 여성이지만 선교 활동과 전도에 힘쓰다가 남편과 함께 1900년 5월 5일 양화진에 묻혔다.
O. R. 에비슨 박사는 양화진 묘역에서 거행된 추모사(追慕辭)에서 "헤이든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독신으로 한국에 왔고, 결혼한 후에도 어떠한 선교 활동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포드는 서울 남쪽 지방을 순회하는 동안 이질에 걸렸으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어 이곳에 장례하였습니다"라 하였다.
헤이든은 1895년, 54곡의 찬송가집을 처음 출판하고, 1898년에는 83곡을, 1900년에는 87곡의 제3판을, G. 리와 공동 출판하였다. 장로회 선교 본부로부터 최초의 공인 찬송으로 채택되어 장로 교단 모두가 사용하게 되었다.
1895년 양화진 한강변에서 피서를 하다가 뜻을 가지고 언더우드와 함께 지금의 서교동교회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세문안교회에서 여성사역을 담당하면서 성전신축 담당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2002년 4월 10일 서교동교회가 세운 비문에는 "풍요로운 고국을 버리고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11년 간 활동하였다. 기포드 부부의 숭고한 선교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감사하며 제102주기를 맞아 추모사업으로 이 비를 세운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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