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왕을 생각하며(사무엘서)
사무엘 상권 1-15장까지는 이스라엘 역사에 걸출했던 두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판관시대 판관)임금이며 대사제였던 사무엘과 그에 의해 도유된 왕정 시대 최초의 왕 사울이 주인공이다.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나는 사울 왕에게 자꾸 마음이 기울어져 연민과 동정이 간다. 어쩌다 운명처럼 다가온 왕권을 다윗에게 뺏기고 못난 지도자로 회자되어야 하는지 참으로 짠하다.
판관 시대 말기에서 왕정체제로 이행되는 과도기, 왕) 판관이며 예언자요 대사제였던 일인 통치자로 막강 권력자였던 노련한 사무엘 앞에, 초대 왕으로 도유된 풋내기 사울은 마음과 몸을 겸허히 낮추었어야 했다. 사울은 서른 살이 왕이 되어 겨우 2년 왕 노릇을 한 뒤 축출되었다.
사울은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면서(1사무14,47)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감히 사무엘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필리스티아와 전쟁을 앞두고 승리를 기원하며 직접 경신례를 행하였다.(1사무 13,8-10;15,15), 하느님의 계약궤를 불충한 경신례로 폭망한 왕년의 성소가 있던 실로에 재 안치하였고(1사무 14,18), 미크론 전투에서는 실로의 엘리 가문 아히야를 전속 사제로 고용하여 곁에 두면서 대놓고 사무엘을 자극했다.(1사무 14,1-3)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사무엘의 전멸 규정 명령을(1사무 15,3) 방자하게 무시했다. 주님도 후회하시고, 사울을 왕으로 세운 사무엘도 얼마나 분노했는지 밤새도록 부르짖었다고 한다.(1사무15,10) 밤새도록 부르짖은 것이 안타까움인지 노여움인지 둘 중 하나겠다. 전리품으로 취한 가축의 고기를 피째 먹었고 전멸 규정을 무시했으며 기념비를 세웠다.(1사무15,12) 그 기념비에는 무슨 내용을 아로새겼을까?
동네 아저씨처럼 사람 냄새 풀풀 풍기시던 고故 노무현 대통령, 퇴임 후 봉하 마을에서 연신 몰려드는 사람들과 찍은 사진이 매일 전국에 도배될 때, 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눈에 질투와 그 이상의 화덕 불이 켜질지도 모르는데...아니나다를까...비극적 그 사건 후 오랫동안 나는 오래 속이 편치 않았다. 좀 자중하시지.... 클래식한 유머 감각이 압권이신 한 신부님이 그러셨다. “후임 신부가 못산다고 하면 속이 상해요. 그런데 후임 신부가 잘 산다는 소문이 들리면 창자가 꼬여요”라고. 편한 사람끼리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나름 솔직하기도. 이 기념비도 사무엘에게 눈엣 가시였을 것이다.
역성 혁명? 사무엘과 다윗의 결합은 그렇다고 치고, 아버지 정적인 다윗을 위해 ‘계약’체결까지 맺는 병든 우정을 보이는 사울 아들 요나탄, 애정 행각에 올킬하는 사울의 딸 미칼, 그는 참으로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었다.
분기탱천한 사무엘이 드디어 사울 왕 축출의 칼을 빼들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냐고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해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이 굳기름보다 낫다. 거역은 죄이고 고집은 우상숭배이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했으니 주님도 임금님을 배척하셨다.“(15,22-23) 라고. 하는 짓마다 주님을 거슬렀으니, 이제 축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무엘과 사울은 서로 각자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저자와 본문은 사무엘 편을 들지만, 과연 사무엘 당신, 하느님 앞에 한 점 껄끄러움 없는 순결한 신심이었을까? 나는 그가 권력과 명예 앞에 100% 자유인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후세에 엘리야보다 더 칭송받았어야 한다. 그러나 구약의 두 위대한 인물로는 모세와 엘리야가 회자된다.
내가 말하고 속내는 하느님은 다 알고 계시니 ‘하느님 이름 헛되이 팔지 말자‘라는 것이다. 사실 행간을 보면 두 사람이 권위와 권세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것이고, 사무엘보다 약한 사울이 추락한 것이다. 사람은 이래 저래 교묘히 속일 수 있겠으나 하느님은 속일 수 없으니,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삼사일언행三思一言行‘ 하는 삶과 신앙이 되어야 한다. ‘획죄어천이면 무소도야,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받을 수 있지만, 사람이 하느님께 죄를 지으면 누가 그를 위해 죄를 빌어줄까?’(사무2,25) 세상과 사람 앞에서도 솔직해야겠으나, 하느님 앞에 더욱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