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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13)
소 모는 막대기로(삼갈)
본문 : 삿3:3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할 때마다
그들을 이웃 나라에 붙이셨습니다.
-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붙이셨고....
-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속에
부르짖을 때 ‘옷니엘’을 들어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을 때....
하나님은 모압 왕
에글론의 손에 이스라엘을 파셨습니다.
18년 동안에 그들의 압제를 받은 끝에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왼손잡이 사사 ‘에훗’을 세우셔서,
에글론을 죽이게 하시고
결국 이스라엘을 모압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후 80년 동안 평안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사람은
사람의 상식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습니다.
- 첫 번째 사사 ‘옷니엘’은
거의 80세에 이르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 또 왼손잡이 ‘에훗’은
그 시대의 소외되었던 인물
(오른 손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삼갈의 등장>
오늘 우리가 살펴볼 ‘삼갈’의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의 '용인술'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삼갈’의 이야기는
(에훗 이야기에 뒤이어) 단 한 절의
분량에 불과합니다.
31절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삼갈’과 같이 짧게 기록된 사사를 가리켜서
우리는 ‘소(小) 사사’라고 부릅니다.
이에 비해서 ‘옷니엘’이나 ‘에훗’처럼
상대적으로 길게 서술되어 있는
사사를 ‘대(大) 사사’라고 합니다.
사사기에는 모두 6명의 소사사와
6명의 대사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기록된 분량의 차이에 따른 구분이지,
그 위대함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예언서를
‘3대 예언서’(이사야 예레미야、에스겔)와 ...
‘12 소예언서’(아모스、호세아、미가、스바냐、
나훔、요나、하바국、학개、말라기, 스가랴、
오바댜、요엘)로 구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또한 예언서의
분량의 차이로 나누는 것이지.....
결코 그 예언자의
비중이나 영향력의 차이는 아닙니다.
사실 어느 인생이 다른 인생보다
더 위대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면 누구나 다 위대한 인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한 절로 기록되었지만.....
‘삼갈’은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쓰임을 받은 위대한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자체를 통해서는
‘삼갈’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을 알 수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힌트가 사사기 5장의
‘드보라의 노래’ 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삿5:6-7>
6절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7절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여기에 분명히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삼갈이 살고 있던 시대적인 상황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대로’, 즉 큰길은 이미 다른 민족,
블레셋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요 거점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여행객들을 괴롭히면서 행패를 부리거나...
강제로 통행세를 뜯어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뒷길로
몰래 숨어 다녀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다’고 합니다.
이 말은 ....
‘마을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사실 ‘이스라엘의 마을 사람들이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개의 아내요 어머니였던
여인 드보라가 나서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앞에서 이미 살펴본
옷니엘과 에훗 이야기로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전 사사들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악순환의 반복’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을 것이고....
이에 하나님은
블레셋의 손에 붙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삼갈’을 사사를 세우셨을 것입니다.
<블레셋의 등장>.....
여기서 잠깐 살펴 볼 것이
불레셋의 등장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지속적으로 가장 무서운 원수는
블레셋 족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당시에도
블레셋은 강성한 족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변의 좋은 길로 인도하시지 않은 이유가 ....
바로 블레셋 족속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13: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훗날 삼손이 등장했을 때도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 삼손이 블레셋과 싸우려고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히려 삼손을 묶어서
넘겨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블레셋은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에는
블레셋과 싸우다가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기는 큰 패배를 겪었고....
실로의 성막이 불타기도 했습니다(삼상13-14장).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때에는
블레셋과 끊임없이 부딪쳤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불러 모았습니다
(삼상14: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 ......
그래도 블레셋을 이기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특히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이
활동하던 때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다행히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쳐
전쟁에서 간신히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삼상 17장).
그러나 블레셋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훗날 사울 왕은 요나단을 비롯한
3아들과 함께 블레셋과 전쟁에서
전사하고 맙니다(삼상31:1-6).
이렇듯 블레셋 족속은 내내
이스라엘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참고 - 성경에서 블레셋의 멸망이
마지막 예언되기는 유다가 포로에서 돌아온 후
스가랴를 통해서였습니다(슥9:5~7).
블레셋이 완전히 망하기는
알렉산더 대왕 때였습니다(주전 332년).
마침내 블레셋 족속도 다른 민족에게
흡수되고 역사에서 그 이름이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오늘 본문이 블레셋과의 첫 번째 부딪침입니다.
<아낫의 아들 삼갈>
그럼 ‘삼갈’은 누구일까 ?
31절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삼갈’에 대한 개인 정보는 나오질 않습니다.
다른 사사들처럼 어느 지파 출신인지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단지 아버지의 이름만은 밝힐 뿐입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이라고 소개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상상을 총동원해야 합니다.
먼저 이름에서 풍기는 의미가 있습니다.
보통 이름에는 특정 민족의 전통이나
종교적 의미가 내포 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한국 사람의 이름은 보통 세 글자이고,
가문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돌림자가 있습니다.
요즘 믿는 집 아이들 중에서는
예수님의 ‘예’자나 하나님의 ‘하’자,
또는 은혜의 ‘은’자가 많이 들어갑니다.
이것은 그 아이가 믿음 안에서
성장하기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삼갈’이라는 이름은
전통적인 히브리식의 이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보통 히브리식의 이름은
세 개의 자음이 어근을 이루는데 비해서....
‘삼갈’은 네 개(sh-m-g-r)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아버지의 이름 역시 이상합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낫’은
가나안의 바알 종교에 등장하는
‘전쟁의 여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삼갈’이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최소한 그 가족이 ‘아낫’을 숭배하는
가문이었을 가능성입니다.
물론 ‘삼갈’ 자신이 가나안의
‘아낫’ 신을 섬겼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워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삼갈’이 전통적인
이스라엘 지파의 뿌리를 가지지 않은
이방인 출신이었을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계약 백성 안에 들어와서
이스라엘과 함께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한 가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삼갈’이
그리 내세울만한 집안 출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해석하고 보면
‘삼갈’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용인술이 놀랍기만 합니다.
앞서 나이 많은 ‘옷니엘’을 들어
쓰신 것도 그렇고,
왼손잡이 ‘에훗’을 들어 쓰신 것도 그렇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사람의 상상을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야’ 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믿음의 가문 출신이냐
이방 신을 섬기던 가문의 출신이냐’ 하는 것도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믿음의 사람이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실 때를 상상해 보세요.
좋은 가문의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
바리새인들의 모임이나 사두개인들의 모임을
기웃거리지 않았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약하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약한 자들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연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고전1:26-29).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께 불가능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할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제지하자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19: 40)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가문(출신)의 불리함을
믿음으로 뛰어 넘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육체의 연약함을
믿음으로 뛰어 넘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붙잡히기만 하면,
하나님의 귀히 쓰시는 그릇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소 모는 막대기로>.....
그런데 오늘 본문은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삼갈’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을 물리쳤다는 것입니다.
31절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우리는 삼갈의 직업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농부’였습니다.
‘소 모는 막대기’는 끝이
뾰족하게 되어 있는 길쭉한 막대기입니다.
쟁기질을 시킬 때에 뒤에서
소를 쿡쿡 찔러서 방향을 통제하는
그런 농기구입니다.
즉 평소 그가 잘 쓰던 물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모세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를 부르실 때 모세의 손에 들려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손에는 칼도 없었고 창도 없었습니다.
그저 양을 치는데 필요한 ‘지팡이’
하나만 달랑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붙잡으시니까,
그 지팡이가 살아 있는 뱀으로 변하기도 하고,
그 지팡이로 홍해가 갈라지기도 하고,
그 지팡이로 반석을 치니까
샘물이 터지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모세의 손에 들렸을 때는
한낱 지팡이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면
능력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소년 다윗이 가지고 있는 도구는
물맷돌이었습니다.
짐승을 쫓는 돌멩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그렇습니다.
그 순간 다윗이 들고 있던 것은
‘물맷돌’이 아니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할 때 사용한 도는...
나귀의 턱뼈였습니다(삿15:14-17).
이 모두가 한결같이 초라하고
평범한 물건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될 때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삼갈이 어떻게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는지
우리는 그 내막을 알 수는 없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삼갈의 개인적인 힘이나
능력으로는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실 때에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삼갈이 블레셋 군사들을 향해 들고
나갔던 것은 ‘소 모는 막대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삼갈을 사사로 세우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블레셋 군사 육백 명을
삼갈의 손에 붙이셨던 것입니다.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오늘 본문을 마지막 부분은 우
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31절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삼갈은 유명한 가문의 자손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이방인일 가능성조치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갖추고 있는 배경이나
능력이나 스펙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시면
그 또한 얼마든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나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고,
‘너도’ 구원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으시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물맷돌’이든
아니면‘소 모는 막대기’이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기적과
승리의 충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께서 붙잡힌 바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내가 가지고 있는 도구가
‘소 모는 막대기’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붙잡으시기만 하시면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쓰러뜨릴 수 있는
능력의 도구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 좋은 배경이나 뛰어난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온전히 붙잡히면,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멋진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