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열두 번째 이야기 -2
독립운동가 김구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출생 - 사망
1876. 7. 11.(음력) ~ 1949. 6. 26.
사형직전 광무황제의 특사로 살아나다
1897년 7월 사형을 언도받고 동년 8월 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되었다. 그런데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다.
광무황제의 특지로 사형은 면하였으나, 석방될 날은 기약할 수 없었다. 이에 김구 선생은 왜놈의 원수를 갚으려면 탈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898년 3월 9일 밤 감옥을 탈출하였다. 김구 선생은 호남지역을 돌아 충남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고,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썼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경전을 배우고 외웠다. 다음 해에 평양의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지만, 출가생활은 반년도 못되어 환속해서 고향 텃골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누구도 김구 선생을 신고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민심이었다.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진력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김구 선생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1899년 다시 방랑길에 올라 강화에서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지냈다. 그 뒤 김창수(金昌洙)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곤란하여 이름을 거북 구(龜)자 한 글자로 쓰고 자를 연상(蓮上), 호를 연하(蓮下)라고 고쳐지었다.
1904년에 최준례와 혼인한 무렵 김구 선생은 본격적으로 신지식인을 길러내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일제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뒤 갖가지 침략 조약을 강요하다가,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정식체결 절차도 빠트린 ‘제2차 한일협약’이란 것을 강요하여 외교권을 빼앗아 갔다. 이에 김구 선생은 진남포 예수교 교회 청년회의 총무자격으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조약 폐기를 촉구하는 상소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무너지는 나라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서, 장기적이지만 근본적으로 새로운 인재를 길러 나라를 지키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이것이 바로 애국계몽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치는 출발점이었다.
김구 선생은 황해도로 돌아가 문화군 초리면(신천군 초리면)의 서명의숙(西明義塾)과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 교사, 면학회(勉學會) 사범강습소 강사, 재령의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 등을 지내며 교육 구국운동에 힘을 쏟았다. 또한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여 학무총감(學務總監)에 추대되어 각 군을 돌며 계몽운동을 펼쳤다.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활동을 전개하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김구 선생은 서울 양기탁 집에서 열린 신민회(新民會) 모임에 참석하였다. 논의한 끝에 두 가지 대응방법을 정했다. 하나는 도독부와 각도 총감을 두어 행정을 장악하여 나라의 맥을 이어가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워 인재를 기르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를 맡을 지역별 대표를 선정하였으니,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 그리고 황해도에 김구 선생이 선임되었다. 대표들은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안악으로 돌아온 김구 선생은 기부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1911년 1월 5일 일제는 신민회의 존재를 알아채고 회원들을 잡아들였다. 이에 따라 김구 선생도 붙잡혀 서울에서 징역 2년 형으로 갇혀 지내는 동안, 또 다시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이 더해져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가출옥이 되었다.
김구 선생은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바꾸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딴 것이다.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도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해야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김구 선생의 의지가 여기에 담겼다.
나라 되찾으려 망명길에 오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구 선생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던 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고,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불러들였다.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니, 국가와 정부, 그리고 의회를 세우는 일을 논의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22년이 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차츰 쇠락해졌다. 임시정부가 원격으로 국내 행정을 운영하던 연통부와 교통국 존재를 일제가 알아챈 것이 가장 주된 이유였다. 그 어려움을 이겨내려고 논의하다가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주비회(國民代表籌備會)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러시아로부터 받은 독립자금 사용 문제로 다투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김구 선생은 안창호․김덕진․신익희․차리석 등과 1922년 7월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위기를 이겨내려고 노력하였다.
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김구 [金九] -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