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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8:1~10(51) 말씀대로 부활하심. 2021. 4. 4.
팻 윌리엄스(Pat Williams)는 “권력의 역설”이라는 책에서 2차 대전 당시 덴마크의 국왕이었던 ‘크리스천 10세(X)를 소개합니다. 오늘날까지 덴마크 국민은 그를 “인격의 사람, 용기와 원칙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10세 국왕은 매일 아침 홀로 말을 타고 경호원도 없이 수도 코펜하겐 거리를 다닙니다. 모든 백성들을 국왕을 믿었기에 언제든지 가까이 나와 인사하도록 한 것입니다.
1940년 독일 나치가 덴마크를 점령합니다. 나치가 점령한 상태에서도 매일 아침 말을 타거나 마차를 타고 코펜하겐 거리에서 시민들을 만납니다. 이런 국왕의 거침없는 행진은 덴마크인 들에게 암묵적으로 독일에 저항하는 운동(resistance)의 기폭제가 됩니다.
독일 나찌는 자신들이 점령한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유태인 말살정책을 차근차근 진행합니다. 독일군은 모든 유대인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였고, 유대인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유대교의 상징물인 다윗의 별이 그려진 노란 완장을 팔에 차거나 가슴에 붙이도록 합니다.
덴마크뿐만 아니라 유럽 곳곳에서 유대인들은 완장을 차고 있다가, 결국에는 개스 수용소로 끌려가 참혹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덴마크에서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덴마크 거리의 모든 사람이 한쪽 팔에 유태인 완장을 차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리뿐만 아니라 상점, 가정, 공원 등 어디를 가나 모든 사람들이 유대인인양 완장을 차고 있습니다. 독일 점령군 사령관은 이 모든 것이 바로 국왕이었던 크리스천 10세가 주도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짜고짜 국왕의 집무실로 찾아 가서 협박과 겁박을 하려 갑니다.
그런데 궁전을 찾은 독일군은 또 다시 놀라고 맙니다. 그것은 국왕 크리스천 10세 또한 유태인 완장을 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극도로 분노한 독일군 사령관이 국왕을 죽이겠다는 표시로 국왕의 이마에다가 권총의 총구를 가져다 댑니다.
그때에 크리스천 10세는 태연스럽게 “나는 덴마크에서의 최초의 유대인이오.”라고 말을 합니다. 실제로 유태인이라서 그리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그리 말한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나치는 덴마크에 사는 8천명의 유대인들을 색출해 냅니다. 그리고는 유태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기로 합니다. 이 정보가 국왕에게 전해지자, 국왕은 저항단체들을 동원하여 7천5백명의 유대인들을 스웨덴으로 도피시킵니다. 나머지 5백명의 유대인들은 나치에 붙잡혀 체코슬로바키아 격리수용소에 수용됐습니다. 유대인 90%를 구한 것입니다.
그 일로 덴마크 국왕은 나치에게 대가를 치루게 됩니다. 1943년에 감옥에 갇히게 되고, 1945년 독일의 패전으로 왕은 풀려납니다. 하지만 옥중생활로 건강이 나빠진 크리스천 10세 국왕은 2년 만에 죽게 됩니다.
그러나 크리스찬 10세의 행동은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크리스천(기독교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았던 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름만 기독교인이 아니라 행동과 믿음까지 기독교인으로 존경을 받은 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은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기독교의 일 년 중에 가장 의미가 깊은 날이 바로 오늘 부활주일입니다. 이 부활주일 아침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돌아보아야 할까요?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는 기독교인인가요? 부활의주님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6절,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천사는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을 향해 부활의 소식을 전합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의 기반이 되는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대로 어김없이 살아나신 분입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은 걱정과 근심, 두려움을 가지고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여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걱정과 근심, 두려움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과 많이 동일합니다. 코로나 19에 대한 감염의 두려움, 생계의 근심, 신앙의 위기를 겪는 우리의 처지와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복된 생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현장을 목격한 여인들은 변화됩니다. 바뀌어 집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1. 부활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독일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담당 군의관 베스게 (Martin Baethge)는 1945년 4월 9일 일기를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새벽 5시와 6시 사이에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된 독일의 루드비히 제독과 오스트 장군을 포함한 여러 명의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그중에 나의 영혼을 사로잡은 사람은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목사였다. 그는 처형장으로 끌려가기 전에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었다. 교수대에 올라가서도 잠시 기도했다. 지극히 평화롭게 보였다. 수많은 사형수를 보았지만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나는 저렇게 평안하고 기쁘고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본회퍼는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었기에 죽임을 당했지만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였습니다. 부활을 품고 있었기에 죽음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생명 싸개에 싸여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생명의 모습이 보여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임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 회퍼(1906-1945) 목사는 당시에 독일의 ‘살아 있는 양심’으로 불릴 정도로 선한 영향력을 드러내던 분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베를린 대학의 신학교수로 임용될 정도로 뛰어난 학문의 깊이도 있었던 분입니다. 그런데 히틀러가 일으킨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을 멸망으로 이끌고 유럽 전체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으로 판단하고, 히틀러 반대 운동을 합니다.
그러다가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한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결국 히틀러가 사망하기 3주전에 강제로 교수형을 집행하면서 돌아가신 분입니다. 현재까지도 독일인들과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
본 회퍼가 남긴 유명한 어록들이 많습니다. 부활절과 어울리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 본다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본 회퍼목사님이 희망하였던 영생의 모습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6절 보세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여기의 ‘살아나셨느니라’는 원어로 ‘에게르데(생명)’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참된 신앙인이냐? 어설픈 신앙인이냐?’를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신 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절대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마무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심으로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대로 살아나시어 영생의 주가 되었습니다.
특히 6절 상반절‘그가 여기 계시지 않다(He is not here)’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없다’는 말은 ‘죽은 사람이 묻혀 있는 무덤에 없다’는 말입니다. 무덤은 살아 있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 죽은 자가 거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여인들에게 당당하게 “그가 여기에 없다”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천사가 선언한 이 말, “그가 여기에 없다”는 말씀이 앞으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또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죽은 이후에는 무덤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무덤에 머문다고 슬퍼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믿는 모든 성도들 역시 사망 권세를 깨고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 사실을 믿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한 수도사가 성지 순례를 가서 갈보리 언덕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가시로 만든 관을 하나 발견합니다. 가시는 부러져 있고 모양은 너무나 볼품이 없었지만, 가시관의 의미를 생각하고 소중히 수도원으로 가져옵니다. 하지만 볼품없는 모습에 그냥 창고 구석에다가 방치해 버립니다.
얼마 후 부활절을 맞이하여 수도사들이 창고 문을 열었는데, 창고에 있는 곰팡이 냄새가 아니라 놀라운 향기를 맡게 됩니다. 이상히 여기고 사방을 둘러보니, 구석에 방치된 가시관에 장미꽃이 많이 피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장미 가시관에서 나는 장미꽃 향기였습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외형적으로 볼품없는 모습이지만 주님의 부활이 주는 변화를 말합니다. 부활의 향기와 기쁨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죽음은 공포라는 것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부활의 향기는 인생으로 하여금 변화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줍니다. 오늘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사망권세를 이기는 부활을 향기가 가득 머물기를 소망합니다.
2. 부활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8절,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여기에서 여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깨닫고 난 뒤에‘큰 기쁨’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큰 기쁨의 원어로 ‘메갈레스 카라스(메갈레스:매우 큰, 카라스:기쁨)’을 의미합니다. ‘매우 큰 기쁨’이라는 말은 부활의 소식을 들은 여인들의 심적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의 처참한 죽음을 눈으로 목격한 여인들이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있습니다. 반면, 부활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무덤으로 달려가는 기쁨의 감정이 함께 공존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기쁨의 감정이 함께 공존하기 어렵지만, 놀라운 주님의 부활을 본 여인들은 두려움과 기쁨의 감정을 함께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 봅니다. 믿음을 말하면서 불신앙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생명을 말하면서 질병과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소망을 말하면서 절망이 더 커지지 않습니까?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불평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이런 마음과 행동을 가진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나의 구세주가 되었다’는 기쁨의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부활의 소식을 들을 때 슬픔이나 고통과 절망이 사라질 줄로 믿습니다. 여인들은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기쁨이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부활의 소식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일본 샐러리맨들의 멘토로 추앙을 받았던 미타니 야스토 (三谷康人)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야스토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으나, 일본에서는 찾기 어려운 매우 독실한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분이 평사원으로 출발해서 나중에 가네보회사의 회장까지 올라갔고, 가네보 회사를 세계적인 제약회사로 만들었던 대단한 능력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야스토가 쓴‘역전인생’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만나 부활 신앙을 체험하고 제 인생이 역전되었습니다. 때로는 눈물의 계곡을 지나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곳을 기쁨의 샘으로 바꿔주셨지요.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며 모든 역경을 극복했습니다.”
45년간의 가네보 재직 동안 수차례 위기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 안에 든든히 서서 모든 어려움과 역경을 이겨 나가며 신화를 기록합니다.
회사의 모든 행사를 진행하던 인사과장 시절, 회사에서 제공한 사택에서 온 가족이 함께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회사에서는 ‘회사에서 제공된 시설을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시설로 이용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사택에서 가정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면 사택을 비워주고 나가야 합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회사에서 문책을 받고 쫓겨 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야스토는 ‘부활하신 주님이 나의 주님이기에 나는 세상의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가정예배를 계속드립니다.
나중에 회사 경영진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야스토가 가진 성실함이 너무나 뛰어나고, 야스토를 대신할 사람이 없는 관계로 야스토의 가정예배를 묵인합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결국 회사의 회장자리까지 올라갑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모두에게 크고 참된 기쁨의 원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여자들뿐만 아니라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밤에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고난을 받으며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그들 또한 인간인지라 슬퍼하며 근심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마음에 생각하였던 것이 잘 풀리지 않고 꼬이기만 하면 우리는 걱정과 근심을 합니다. 내가 예상하지 않았던 장애물이 나타날 때에도 걱정하며 근심부터 먼저 합니다. 제자들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기쁨을 곧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기쁨은 부활하신 주님을 곧 만나볼 수 있다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빼앗길 수없는 기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눈물만 거두어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시고 눈물을 앗아 가신 예수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국을 근세기 복지국가로 만든, 최고의 경제학자로 꼽히는 윌리엄 베버리지 남작(William Beveridge, 1943-1963)의 이야기입니다. 베버리지 남작이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치매와 기억력 감퇴로 인하여 가까운 친척은 물론 가족들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애제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를 아시겠습니까?” “당신이 누구요?”. 아내가 물었습니다.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당신은 또 누구요?” 아내까지 알아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태였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라고요?” 예수라는 말에 베버리지는 이전과 달리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는 마치 기억이 돌아온 것처럼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요. 나는 지난 40년간 그와 사겼어요. 그 분은 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얼굴에 화한 미소를 띄웠고, 곧 숨을 거두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을 확인하였던 여인들이 가졌던 큰 기쁨의 놀라운 소식을 우리 모두 가지기를 원합니다. 이 놀라운 기쁨으로 힘든 코로나 시기를 잘 극복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불평과 원망하지 마시고, 감사하고 찬양하면서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기쁨을 가지고, 힘차게 앞으로 달려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