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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과 역경은 행복이다
향수는 병든 고래의 몸에서 짠 기름을 원료로 만듭니다.
우황청심환은 병든 소에게서 얻어 집니다. 병들지 않은 소의 몸에는 우황이 없습니다.
로키산맥 같이 험준하고 깊은 계곡에서 비바람과 눈보라의 고통을 뚫고 죽지 않고 살아난 나무가 공명에 가장 좋은 원료가 되어 세계 명품 바이올린이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고난과 역경 뒤에 위대한 작품들이 나오고 명품들이 나오듯이 우리도 시련과 환란을 통해 귀하게 쓰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생활이 궁핍하다 해도 여유 있는 표정을 짓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에게 섭섭하게 해도 그 동안 나에게 그가 베풀어 주었던 고마움을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밥을 먹다가 돌이 씹혀도 돌보다는 밥이 많다며 웃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밥이 타거나 질어 아내가 미안해 할 때 누룽지도 먹고 죽도 먹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대범하게 말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의 행동이 다른 이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가를 미리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남이 잘 사는 것을 배아파 하지 않고 사촌이 땅을 사도 축하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직위가 낮아도 인격까지 낮은 것은 아니므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처신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비가 오면 만물이 자라나서 좋고 날이 개면 쾌청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루 세끼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비가 새도 바람을 막을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느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좋았던 추억을 되살리고 앞날을 희망차게 바라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당신에게 행복한 일만 있기를~~ 🎶
= 옮긴 글 =
주님의 셈법과 우리의 셈법은 철저하게 다릅니다!
포도밭 일꾼’ 비유에 대한 교부들의 해석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이른 아침에 불린 일꾼들은 아담과 에녹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아홉 시에 불린 일꾼들은 노아와 셈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열두 시에 불려간 일꾼들은 할례의 법이 세워진 아브라함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후 세 시에 불려간 사람들은 모세와 다윗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후 다섯 시에 불려간 사람들은 이민족 사람들이었습니다.
저같이 게으름뱅이며 늑장부리기의 대가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빨리 온 사람이든 늦게 온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한 데나리온, 곧 성령의 은총을 선물하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되게 하십니다. 우리 각자의 영혼에 하느님의 인장을 찍으시며 불멸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맨 먼저 포도밭에 와서 하루 온 종일 일한 사람들의 불평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오 복음 20장 12절)
이 사람들의 투덜거림에서 또 다른 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아들의 얼굴이지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복음 15장 29~30절)
이 대목에서 우리는 주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철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은총의 햇빛과 단비를 선물로 주시는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리 죽을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끝내 회개하기를 인내롭게 기다리십니다.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크신 은총과 축복에 깊이 감사하고 찬미 드리면 그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은 더 큰 은총과 축복을 보고 시기질투 하거나 배 아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으로부터 관대한 사랑을 받았다면 함께 기뻐해 주고 축하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역시 맨 먼저 포도밭에 온 사람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어쩌면,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저 감지덕지하면서 겸손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먼저 불림 받았다는 것에 대한 우월감, 자만심으로 가득했고, 그 결과 주님으로부터 큰 질타를 받은 것입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 14-15)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https://m.blog.naver.com/syj1212ad/223190008478
목표를 이룬 이들이 하게 되는 것들
2023년 가해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오 20,1-16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서 어떤 사람들이 더 사랑을 받고 어떤 사람들이 덜 사랑 받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품삯은 한 데나리온, 곧 구원이라는 같은 은총입니다. 그런데 같은 은총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높고 낮음이 결정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은 더 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그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결국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겸손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들어가는 하늘 나라라면 첫째를 노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원의 값인 한 데나리온에 어떻게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리스도의 피 값입니다. 그것에 충분한 감사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것을 바라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을 바랄 때 이것에 대한 감사가 적어집니다. 우리의 바람이 오로지 구원, 하나로 모아질 때 하늘에서 그만큼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 먼저 하루 종일 일한 종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아주 오랜 시간 자신들이 구원을 당연히 받을 만하다고 여긴 이들입니다. 일찌감치 구원의 길로 들어선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의 문제점은 더는 목표가 없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십일조를 내고 한 가지 죄로라도 끊임없이 고해성사를 할 수 있다면 구원을 확신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열심한 신자들 대부분은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더는 목표가 없습니다. 이유는 한 데나리온을 받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늦게서야 부름을 받고 일하러 온 종들은 ‘이렇게 적게 일했는데도 과연 한 데나리온을 다 주실까?’라며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한 시간을 일해도 하루 종일 일한 사람보다 열심히 합니다. 결국 그들이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보다 더 인정받게 됩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핵심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더라도 끝까지 정진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축구계에서는 호날두, 네이마르, 벤제마 등 유명 선수들이 사우디 리그로 발을 옮기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제공하는 엄청난 연봉 때문입니다. 메시도 호날두 연봉의 두 배에 달하는 연봉 6,000억에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연봉 700억에 미국을 택했습니다. 그에게 축구를 잘하는 능력이 곧 돈과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능력을 돈으로 바꾸려고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의미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메시는 현재 매우 행복해 보입니다. 메시 덕분으로 미국 리그가 세계적 조명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는 미국으로 건너가 꼴찌팀 인터 마이애미를 일곱 경기만에 전승으로 창단 이래 최초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몇 번의 은퇴를 번복하며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고 축구의 길로 들어서게 한 할머니께, 그리고 성호경을 그으며 하느님께 쉬지 않고 가고 있습니다. 그가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는 것이 행복할까요, 아니면 돈을 바라고 안주하는 삶이 행복할까요?
만약 어떤 아이가 ‘나는 이미 자녀인데 뭐!’라며 더 좋은 자녀가 되기를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이제 집에서 하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불평’입니다. 자녀인데 왜 부모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마음에 드시기 위해 영원으로부터 노력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우리가 정진을 멈추어야 하겠습니까?
제가 신학교 때 들은 말 중에 “사제가 되려고 하지 마라!”였습니다. 사제가 되고 나면 더는 할 게 없어서 이제 누리려고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술이나, 여자, 돈이나 비싼 차, 돈 많이 드는 운동이나 여행 등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내심 ‘내가 사제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했는데 생각보다 보상이 적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그 보상을 채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수 신부님은 사제가 되려고 하지 말고 ‘성인 사제가 돼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이 목적이라면 결혼하기까지 고생한 것을 누리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즐겁지 않습니다. 그러니 불만이 생기고 그 탓을 상대에게 하거나 아니면 밖에서 그 보상을 찾으려 합니다. 혹은 배우자보다는 자녀에게서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그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목적이 없는 삶은 편한 것 같지만 여러모로 우리 삶을 피폐하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는 편해 보여도 사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정진하지 않는 삶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성자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거나(“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요한 1,1.2) 아버지와 가까이 계신다고 말할 때(“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요한 1,18)라고 말할 때 전치사 ‘프로스’(pros)를 쓰거나 ‘에이스’(eis)를 씁니다. 이것은 사실 ‘함께’나 ‘가까이’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들입니다. 이는 움직이는 사물이 어디를 향하고 있음을 말할 때 사용하는 전치사들입니다. 요한은 결코 아드님과 아버지를 이미 고정되어버린 관계로 여기지 않습니다. 계속 움직이는 역동적인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
영원히 멈추지 않고 서로를 향하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마치 당연히 구원된 사람들처럼 이제 누리려고만 해서는 되겠습니까? 이 지상의 삶에서, 그리고 영원한 삶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영원히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뒤처지지 않는 방법입니다. 목표를 이룬 이들이 하게 되는 것들은 불만과 죄뿐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멈추지 않는 목표를 세웁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3년 8월 23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https://m.cafe.daum.net/bbadaking/4Zol/6813
그저 감사하라
어려서는 삼촌이나 누나에게 용돈을 얻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명절이 되면 서울의 일터로 떠난 누나를, 삼촌을 동네 어귀에서 기다렸습니다. 누나를, 삼촌을 기다렸다기보다 용돈을 기다렸습니다. 그 액수가 얼마가 되든지 상관없이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학년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용돈을 기대하게 되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용돈을 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어느 날 그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삼촌께서, 누님이 용돈을 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용돈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습니다.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포도원 일꾼의 품삯에 관한 비유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아홉 시에 일을 시작한 사람이나 열두 시, 오후 3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시작한 사람과 똑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일꾼들은 계약을 맺을 때는 그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러나 품삯을 받게 되는 시간이 되자 일찍 일을 시작한 사람은 뒤늦게 시작한 사람보다는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 기대를 채울 수 없었고 그래서 투덜대며 급기야 따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상대와 비교하는 순간 자기의 첫 마음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분명 그는 계약한 만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받지 못한 것처럼 느꼈습니다.
누가 용돈을 주면 주는 대로 감사히 받을 것이지 투덜댈 자격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계약대로 받았으면 족해야지, 왜 따집니까? 주인은 분명 정의를 지켰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시기심 때문에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5).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십니다(로마11,32). 주님께서는 언제나 후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선을 베풀고자 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선은 주님께서 자유로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분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품삯을 받기 위해 일을 한 사람과 일 자체를 고마워하며 일을 한 사람과는 분명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지만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나라에서는 결과보다는 동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급은 인간이 노력해서 이룬 업적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물은 감사히 기쁘게 받는 것입니다.
“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성 아우구스띠노). 포도원에서 일을 할 수 있음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일을 해도 해야 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마태20,16). 하느님 아버지는 너그러우시고, 나는 쩨쩨하고 시기 질투하며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임을 뉘우칩니다.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택하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생활성서 - 소금항아리
2023/8/23/연중 제20주간 수요일/처서
https://m.blog.naver.com/biblelife83/223176951176
230823.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
오늘 <복음>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하늘나라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 속에는 ‘하느님의 보화’인 ‘자비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신비는 <첫째>로,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하루 일과가 다 끝나갈 저녁 무렵까지, 다섯 차례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손수 장터로 나가,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일의 능력이나 실적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오히려 병들고 노쇠해서 팔려가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입니다. 도대체가 계산이라고는 모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주인입니다. 사실,주인은 애시 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다기보다, 그들을 살게 하기 위해 불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입니다. 이는 하늘나라가 당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쌍한 우리를 위하여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자비임을 맗해줍니다.
<둘째>로는,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줍니다. 오후 늦게서야 일터로 부름 받게 된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온 일꾼들의 몸 고생과 나중에 온 사람들의 마음 고생도 함께 돌보십니다.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없는 까닭에, 하느님의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입니다. 가난하고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는 하느님 사랑의 우선적 선택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능력과 성과가 아니라, 필요한 만큼 주시고 함께 살도록 하십니다. 하느님의 공정은 ‘나’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고,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이며, 당신의 호의와 자비는 부족함이 없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셋째>로는, 모두에게 똑같이 고루 품삯이 주어집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한 만큼의 공평에 맞게 정당하게 노동의 대가를 셈쳐주지 않았습니다. 일한 시간이나 일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 똑같은 품삯을 고르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온 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아니라 계약으로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으며, 단지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을 뿐이었습니다.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쳐주는 이러한 포도원 주인의 권한행사와 너그러운 처사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하늘나라가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이요, 자비임을 밝혀줍니다.
결국,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 비유’는 이 지상에서의 꼴찌들에게 대한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교회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자와 나중 온 자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큰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자비로 돌보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앞세우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를 내세우는 데는 “꼴찌”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
주님!
당신은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을 주십니다.
일한 시간이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으십니다.
애초부터 당신께서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
저를 당신 포도밭에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당신 부르심이 제게는 영광이옵니다.
나의 주 나의 임이시여, 영원무궁토록 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멘.
김홍주 신부의 짧은 묵상
/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열린 하느님 나라
https://m.blog.naver.com/donamsado/223190950267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선한 포도밭 주인>
맨 나중에
부름 받은 일꾼들이
생각지도 못한
한 데나리온을 받고
기쁨에 겨워 돌아간 후에
맨 처음에
부름 받은 일꾼들이
정당한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음에도
서운한 마음으로 돌아간 후에
일꾼들과 가족들이
하루의 고운 땀의 결실로
오늘 하루 삶의 이야기 곁들여
맛난 저녁식사를 즐기며
내일의 꿈으로 가득할 시간에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
아무도 없을 듯한 장터이지만
여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아무도 사지 않은 일꾼들이 있을까
선한 포도밭 주인이 홀로 애타게 서성인다
2023년 8월 23일 연중 제20주간 (수) 복음 묵상 (마태 20,1-16) (이근상 신부) https://m.cafe.daum.net/ignatius/OPYg/999
230823.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노사연의 노래 중에 ‘만남’이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 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어도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사랑해” 만남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아무런 느낌이나 영향이 없는 스쳐지나가는 만남이 있습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애증의 만남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운명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노사연의 노래는 그런 만남 모두가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바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저에게도 삶의 방향을 바꿔버린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사나 군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조직에 속해 있는 것이 편했고, 가르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성당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사제가 되겠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구교우 집안에서 자란 영향도 있었고, 친구들의 영향도 있어서 저는 신학교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사제가 되었습니다. 교사나 군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세상 어느 조직보다 견고한 조직에 속해있고, 복음을 선포하는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운명처럼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는 갈릴래아의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던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되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사도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사도들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세리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가정은 구원받았다.” 하혈하던 여인은 감히 말은 못하고 예수님이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러자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간절한 갈망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운명처럼 만난 사람이 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을 박해하였던 ‘사울’입니다. 그는 로마의 시민이었고, 바리사이였습니다. 유대교의 율법과 계명의 수호자를 자처하였습니다.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신비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이 묻습니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은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데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처음부터 함께 했던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제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제자도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과 마지막을 함께 했던 죄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만났던 그 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오로는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세례 받은 신앙인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서열과 나이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 하루를 살았어도 구원에 대한 갈망과 확신이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높은 직책과 연륜을 지녔어도 구원에 대한 갈망과 확신이 없다면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능력, 업적, 직책을 기준으로 하느님과 셈을 하려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랑, 연민, 자비를 기준으로 셈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어놓은 곳에 우리가 마음대로 마침표를 찍어서도 안 됩니다. 늦었다고 후회할 것도 없고, 먼저 왔다고 교만할 것도 없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요셉 신부님 -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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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한 가지 질문해 보겠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갈까요? 아니면 임종 전에 대세를 받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갈까요?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 포도밭에서 일한 모든 사람에게 그 품삯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침 일찍 나와서 일한 사람들이 저녁 늦게 와서 일한 사람들을 보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왜냐하면 늦게 온 이들에게도 주인이 품삯을 자신들만큼 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일찍 온 이들에게 더 주던지, 아니면 늦게 온 이들에게 덜 주든지 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일꾼들이 따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함께 만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인도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내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대신해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과 내가 함께 사랑으로 걷는 길이 신앙의 길인데, 우리는 가끔 이렇게 말합니다. ‘왜 나만 힘들지요?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있지요? 다른 사람은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나에게만 이런 것을 허락하시지요?’라고 하느님께 질문합니다.
이런 질문이 옳은 질문입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나의 사이에 다른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볼 필요도 비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남을 바라보지 말고, 남과 비교하지도 마십시오. 오직 하느님과 내가 만나고 사랑하길 희망하십시오. 이것이 참 신앙생활이고 이것이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신 복음의 의미입니다. 남 따라서 연애하는 사람 없듯이 하느님과 나만의 만남을 키워가십시오.
만남 혹은 돌아옴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신부님이세요?
얼마 전
식사 전 기도를 하며
사람과 음식을 축복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물어보십니다.
신부님이세요?
그리고는 반갑게 말씀하십니다.
저도 신자입니다.
저의 세례명은 oooo이고….
그러고는 ‘제가 쪼금 냉담 중입니다.’라고
부끄럽게 고백합니다.
만남은 돌아옴의 문입니다.
그냥, 편하게 집으로 돌아오세요.
누구도 비난하지 않으니까요.
[강론] 김홍언신부님 <[영성의 샘물] ep 186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니다.
https://youtu.be/cgTtcpsiLXI
정주 삶의 축복
-제자리에서 제분수에 맞는 삶-
쉴 사이 없이 침묵중에 끊임없이, 한결같이 일하시는 참 부지런한 하느님입니다. 배밭사이 길을 걷다가 이마를 부딛쳤고 위를 쳐다 봤습니다. 흰별들처럼 주렁주렁 달린 흰 배봉지 열매들중 하나에 부딪쳤던 것입니다. 그동안 참 놀랍게 많이 컸습니다. 작은 배꼭지에 찰싹 붙어 무럭무럭 자라나는 열매를 보며 믿음의 배꼭지를 연상했고 이 또한 저에겐 잔잔한 감동이었습니다.
가을 열매 익어 수확될 까지는 믿음의 배꼭지는 꼭 나무에 붙어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늘 거기 그 자리의 중심에 계신 정주의 하느님은 쉴 사이 없이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정주 삶의 축복에 제자리에서 제분수에 맞는 삶이 참 지혜로운 삶입니다. 참으로 무식하고 용감하면 괴물이요 답이 없습니다. 현 시국을 대할 때 통감하는 진리입니다. 아침식사후 부지런히 불암산 계곡길을 걷는 것도 기쁨이요 얼마전 써놓고 재미있어 한 글을 나눕니다.
“산에 가고 싶을 때
산을 바라보며
산이 되네
바다에 가고 싶을 때
바다를 바라보듯 하늘을 바라보며
바다가 되네
강에 가고 싶을 때
강물처럼 걸어서
강이 되네
누가 알리?
이 행복, 정주의 축복
아마 하느님은 아실 거다”
늘 거기 그 자리, 제자리, 꽃자리에서 산이 되어, 바다가 되어, 강이 되어 살아가는 정주 삶의 축복입니다. 언젠가 써놨던 “하루하루가 축제인생이다”라는 글도 생각납니다.
“자리 찾지 않는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야생화 청초한 달맞이꽃처럼
그 어디든
제자리에 뿌리내려
하늘 사랑
활짝 꽃피어 내면
거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다
절망은 없다
하루하루가 축제인생이다”
이 또한 정주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저는 제 집무실을 수도생활 잘 하라고 하늘이 숨겨둔 천장암天藏庵이라, 또 제분수를 알아 만족한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지족암知足庵이라 부르곤 합니다. 천장암은 불교의 대선사 경허스님이 머물던 충남 서산 개심사에 위친한 암자이고 지족암은 흔히 일컫는 암자 이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오늘 복음인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 삶의 신비를 엿볼수 있는 예화입니다. 하느님의 계산법과 인간의 계산법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아침 일찍 와서 일한 이나 오후 가장 늦게 와서 일한 이가 똑같은 급료를 받자 항의하는 일꾼, 일견 타당하고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하느님의 권리에 대한 도전이요 월권입니다. 제 분수를 잃은 무례하고 무지한 이의 반응입니다.
새삼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은 요즘 세계적으로 활발히 논의되는 기본소득제도의 원조임을 봅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이들, 일하고 싶어도 심신의 허약이나 장애나 연로함으로 일할 수 없는 이들을 포함해 국민이라면 모두가 인간의 기본적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매달 국가가 전국민에게 기본적 급료를 지급하는 것이며 이것이 실현될 때 복지국가의 완성이요 이런 방향으로 가리라 봅니다. 바로 이런 복지사회의 완전한 실현의 모델이 우리 요셉 수도원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공동체가 소임에 무관하게 모든 이가 기본적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너그럽게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깊은 배려의 사랑은 늦게 온 사람의 속사정을 통찰했음이 분명합니다. 많은 식솔이 딸린 무거운 짐을 진 가장이라면 일 시간에 개의치 않고 기본적 하루 생활비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상식일 것입니다. 자비와 지혜를 겸한 포도밭 주인을 통해 예수님 마음, 하느님 마음을 만납니다. 포도원 주인의 이런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제분수를 벗어난 무지한 이의 항의를 깨끗이 매듭짓는 포도밭 주인입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시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네가 뭔데?”, “너나 잘해!” 꾸짖는 말투처럼 들립니다. 네 분수를 알아 네 자리에서 네 일에 충실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하루가 끝날 때까지 완전 고용을 위해, 모든 이들의 완전 구원을 위해 흡사 천국문을 활짝 열어놓고 끝까지 기다리는 주님을 연상케 하는 복음입니다. 참으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역할에 충실하며 제대로 살았던 정주의 사람이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나 이 짧은 생각의 사람은 후에 자신의 생각을 바로 잡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또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마음을 배우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 판관기의 요탐의 우화가 깊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줍니다. 역시 악순환의 반복의 인간 역사를 보여줍니다. 어제 기드온 판관의 등장으로 좋았던 분위기가 아비멜렉 임금 독재자의 등장으로 급전직하急轉直下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이 또한 어리석은 백성이 자초한 재앙으로 우리의 현실을 연상케 합니다.
요탐의 우화에 등장하는 올리브 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 나무로 상징되는 이들은 자기 분수를 알았기에 절대 임금이 됨을 사양합니다. 이래야 맞는 것입니다. 반면 가시나무로 상징되는 무지하고 무식하고 무례한 대책 불가능한 아비멜렉은 제자리를, 제역할을, 긍극적으로 자기를 몰랐습니다. 절대로 지도자가 될 사람이 아니라 혼자 떨어져 살았어야 할 백해무익한 사람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개입으로 아비멜렉은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잘못된 선택으로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참 유익한 공부가 되는 예화입니다. 제발 이런 악순환의 반복은, 이런 공부는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포학하고 무지한 지도자 잘못 뽑으면 지옥문이 활짝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배도 바다의 풍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이길 수 없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민심이 천심입니다. 민중이 바다라면 지도자는 일엽편주(一葉片舟) 배와 같습니다. 민중의 바다가 노호하여 태풍처럼 휩쓸면 배는 흔적없이 사라짐은 역사의 교훈입니다. 참된 지도자라면 겸손히 공동체의 의견을 경청하여 공동체의 뜻에 따라, 민심에 따라 자비롭게, 지혜롭게 공동체를, 공동체의 성원들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각자 제자리, 꽃자리에서 제분수에 충실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섬김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 한상우 바오로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상선 바오로 신부 https://m.cafe.daum.net/36370/aRqL/9633?svc=cafeapp
🍇 “나는 프라이팬 위의 오믈렛을 뒤집을 때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했습니다. 하다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일까지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 사랑하는 법을 찾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하면 됩니다.”(로렌스 수사)
로렌스 수사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귀한 가르침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점이다.
미사를 드리거나, 성체 앞에 머물러 있거나, 영적 독서나 깊은 묵상기도 중에 있을 때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빨래를 하든, 밥을 짓든, 사무를 보든, 다리를 놓든, 그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일로 여기고 정성을 다해서 할 때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To learn that I am here always!”
(명심하여라. 내(하느님)가 함께 있다는 것을!)
- 펌 -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1-16)
포도밭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시간의 주인 또한 하느님이십니다. 꽃 피는 시간이 따로 있고 열매 맺는 시간이 따로 있습니다. 시간의 짧고 김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다 하느님께로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시간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시간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시간앞에 다시금 꺼내어 놓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봅니다.
주님의 후한 사랑을 잊고 살곤 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쓰러뜨려야 하는 죽음의 시간에서 이제는 벗어나야겠습니다.
모두를 살리시는 하느님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포도밭에서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늘 문제입니다.
하루의 시간, 일생의 시간 그 어떤 시간도 소중하지 않은 시간은 없습니다.
시간을 통해 꺼내어 놓아야 할 품삯은 언제나 감사뿐입니다.
오늘 이 하루는 시기와 비방, 판단에서 벗어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한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8월 23일 성인 축일 축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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