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세 분의 어머니가 있다>_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께 꽃다발을 *엄마! 왜 이래요? 1965년 4월이었다. “ㅇㅇ야! 지금 곧장 집으로 가거라.” 고등학교 2학년 2교시, 교실로 들어온 선생님께서 굳은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말씀하셨다. 나는 무슨 영문지 몰라 어리둥절해 선생님을 쳐다보며 물었다. “예? 왜요?” “어머니가 좀 편찮으시다고 한다. 얼른 집으로 가 보거라.” 선생님은 나보다 먼저 책상에 펼쳐놓은 책을 집어 급히 가방에 욱여넣으셨다. 그러고 보니, 매일 어머니가 아침마다 밥과 도시락을 챙겨 주셨는데, 그날은 할머니가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셨다. “할매! 어매는?” “어미가 밤새 마이 아팠다. 들여다보고 핵교 가거라.”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어머니가 계시는 방을 들여다보지 않고 도시락만 챙겨 곧장 학교로 향했다. 핑계 같지만, 집에서 20여 리나 떨어진 고등학교까지 걸어 다녔으므로 마음이 바빴다. 버스도 자주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차비가 아까워 20여 리 되는 먼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게 다반사였다. 그랬기 때문에 늘 해뜨기 전에 집을 나서서 저물어야 돌아오곤 했다. 급히 학교를 빠져나와 정류소로 향했다.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초조했다. 우리 집은 울진 죽변에서 1km쯤 떨어진 농촌이었다. 농번기로 한창 바쁜 시골로 가는데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초조함과 긴장감이 뒤섞여서인지 온몸에서 땀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무엇보다 아침에 어머니를 뵙지 않고 학교에 간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매, 쪼매만, 쪼매만 더 기다리게. 내가 퍼뜩 갈게.’ 집으로 가는 동안 어머니가 괜찮기를 빌고 또 빌었다. 길모퉁이를 돌아 우리 집이 보일 때 내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뛰고 또 뛰었다. 집안사람들이 집 앞에 모여 있었다. “아이고, 큰아가 온데이, 이걸 우짤꼬~.” 여느 때 같으면 활짝 열려 있을 대문과 방문이 그날따라 모두 닫혀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마당에 들어섰다. 친척 할머니가 눈시울을 적시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내 등을 두드리셨다. “왔나? 와 이리 늦었노? 쪼매만 더 일찍 오지. 어이구! 불쌍해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으려다 마지막 힘을 다해 급히 방문을 열었다. “어매~ 지 왔니더~” 어머니는 가지런히 아랫목에 누워 계셨다. “어매~ 뭐 하십니꺼? 어매~ 지가 왔다니까~ 퍼뜩 인나 보이소~.” 기척 없는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 한없이 무거웠다. “어매! 왜 이카니껴? 지가 왔다니까. 퍼뜩 눈 좀 떠 보이소! 어…매…” 아버지가 내 등을 도닥이며 흐느끼셨다. 어머니 얼굴에 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끝내 대답이 없으셨다. 내 목소리에 한 번도 응답하지 않으셨던 적 없던 우리 어머니가… 오늘따라 유난히 깊이 잠에 빠지신 거라며… 나는 어머니를 안고 부르고 또 불렀다. “아이고~ 이 사람아! 눈 좀 떠보게. 큰아가 왔잖아. 당신 그리도 든든해 하던 큰아가 왔네.” 아버지도 늘어진 어머니 손을 잡고 흐느끼셨다. 해가 넘어갈 무렵 내 목소리는 너덜거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꿈이라고, 이건 꿈일 거라고 몇 번이고 외쳤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는 말,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어머니 나이 이제 겨우 마흔 하나, 오 남매를 두고, 그것도 세 살짜리 여동생을 두고 어머니가 이렇게 가시다니……. 아니,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이리도 매정하게 가시는지. 오히려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어머니의 노여움이 있다면 무릎 꿇고 빌어서라도 다시 깨어나시도록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아침에 방문도 열어보지 않고 학교로 간 것이 너무나 미안해서 용서를 빌고 또 빌었다. *떠나갔다 의료시설이 턱없이 부족했던 옛날에는 자녀를 모두 집에서 낳았다. 어머니는 우리 오 남매를 낳을 때마다 후유증을 심하게 앓으셨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멀쩡하게 미역국을 한 그릇씩 거뜬히 드셨다고 한다. 그날은 달랐다. 이틀 전부터 산기(産氣)가 있었다. 아이는 쉽사리 세상으로 나오지 못했다. 거듭되는 산통(産痛)으로 방바닥을 기시던 어머니는 신음조차 못 할 만큼 지쳐갔다. 할머니는 뒤뜰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삼신할머니께 연신 빌었고, 집안 아지매들은 어머니의 출산을 돕기 위해 방으로 분주히 드나들기를 했다고 한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할매요, 저러다 사람 잡겠니더. 퍼뜩~ 퍼뜩 의원부터 부르소!” 방안에서 집안 아지매가 소리쳤다고 한다. “퍼뜩~ 퍼뜩요.” 급히 밖으로 나온 아지매의 음성이 비명에 가까울 만큼 다급했다고 한다. “할매요. 아가… 아…가… 숨을 안…쉽니더…” “뭐라노? 아가 죽었단 말이가?” “산모가…산모가 위험 하니더. 퍼뜩 의원을…….” 당황한 아버지는 급히 읍내로 가서 의사를 모시고 왔다고 했다. “출혈이 심해 잠시 정신을 잃은 것뿐입니다. 강심제를 한 대 놓았으니 곧 차도가 있을 겁니다.” 주사를 놓은 의사는 금세 돌아갔다고 한다. 난산으로 인한 심한 출혈이 문제였을까? 의사가 놓았다던 강심제가 더 문제였을까? 의사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이 숨을 몰아쉬시던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장례 기간 내내 나는 가슴을 후려쳤다. 머리를 벽에 받으며 울부짖었다. “아이고 야야~ 왜 그라노? 니가 그란다고 죽은 니 어매가 살아 온다 더나? 생목숨 다치지 말고 고마 아서라.” 고모들이 나를 말리며 울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날 방문을 열고 누워계신 어머니 얼굴을 잠시라도 보았더라면…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다.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을 스스로 자책하는 비난이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때늦은 후회를 한들 죽은 어머니가 돌아올 리 만무하지만, 이렇게라도 철없던 내 행동을 빌어보고 싶었다. 넋을 놓은 나는 피멍이 들 만큼 가슴을 후려치고 또 쳤다. “오빠야~ 머한다고 사람들이 이래 마이 오노? 어매는? 어매는 어디 갔노? 알라 낳으러 갔나?” 어린 동생들은 어머니의 죽음이 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녔다. 동생들이 노는 마당은 너무도 눈부셨다. 이튿날 오후, 가족의 오열 속에 어머니의 시신을 염했다. 수의를 입히는데 어머니의 오른쪽 얼굴과 목 언저리 화상 자국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나뿐인 누님을 떠나보내는 외숙부의 제문(祭文)이 너무도 애절하여 듣는 이들이 모두가 오열하였다. 장례식 아침, 집 앞 텃밭에 상여가 꾸려졌다. 푸성귀가 푸르른 4월의 텃밭은 너무도 싱그러웠다. 상여에 매단 원색의 종이꽃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꽃보다 더 고왔다. 상여꾼들은 상여를 매고 상여 앞머리를 집 쪽으로 돌려 몇 번이나 조아리며 작별인사를 했다. 동네 사람들도 상여를 향해 몸을 숙이며 눈시울을 적셨다. 상여는 서서히 동구 밖을 벗어났다. 요령 소리에 맞춘 상두꾼의 만가(輓歌)가 내 가슴을 쥐어짰다. 해맑게 놀던 철부지 막내 여동생도 어머니의 죽음을 감지한 것일까. 조막손으로 연신 눈시울을 닦아댔다. 나는 그런 동생을 꼬옥 안았다. 어머니 품에 안겨 살던 막냇동생에게서 어머니 냄새가 났다. 나는 동생을 안고 숨죽여 울었다. “오빠야, 어매가 꽃가마 타고 어디 가노? 가믄 언제 오는데?” 나는 대답할 말을 잃었다. 품에 안긴 동생의 등을 토닥이며 흐느낌은 더 깊어졌다. 장지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동산이었다. 동산에 구덩이가 깊게 파여 있었다. 저 구덩이에 어머니를 모신다 했다. 나는 차마 하관을 눈 뜨고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맏상제, 뭐 하노? 퍼뜩 와 취토(取土)하거라.” 집안 어른이 고함을 쳤다. 어머니는 구덩이 속에 가지런히 누워 내 취토를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상복 자락에 흙을 담아 구덩이로 내려갔다. 나의 손은 심하게 떨렸다. “어매, 다음 세상에는… 부디 고통 없는 어매로 태어나이소.” 어머니 시신 위에 흙을 뿌렸다. 천천히 천천히 어머니 위에 흙을 얹었다. 취토가 끝나자 인부들이 삽질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시신 위에 한 삽 한 삽 흙이 얹어지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반나절 후 잔디를 올린 어머니 묘가 완성되었다. 어머니를 동산에 묻고 돌아오는 길, 나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며 울고 또 울었다.
*아버지, 그 단호한 거부 “그게 무슨 소리요? 부검이라니?” 장례 다음날, 노한 아버지의 음성이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읍내 경찰서에서 두 명의 경찰이 찾아왔다. 어머니의 사망이 의료 사고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일 왕진 차 우리 집에 왔던 의사가 정식 의사가 아니라 조수였다고 하였다. 사망의 원인을 찾기 위해 무덤을 파 어머니의 시신을 부검하자는 것이었다. 경찰의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했다. “우리는 어떤 의혹도 제기한 적이 없고 부검도 원치 않소. 돌아간 사람이 살아올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겠지만, 고통 속에 돌아간 사람에게 칼을 대 더한 고통을 주는 것은 가당치 않소. 그날 왕진 온 이가 의사든 조수든 우리는 상관치 않소. 그날은 너무도 위급한 상황이었소. 누구라도 모셔 와 환자를 보도록 해야만 했소. 오지 않겠다던 그 양반을 제가 애원하다시피 사정사정해서 모셔왔고, 그분 또한 최선을 다하셨소. 그거면 된 거 아니오. 우리는 그분에게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소. 앞으로 이런 얘기는 더 하지 말길 바라오. 더는 할 말이 없소. 돌아들 가시오.” 아버지는 흥분해서 온몸을 부들부들 떠셨다.
*나일론 치마저고리 “아! 이 옷도 태워야 한다니……. 어머니가 얼마나 아껴 입으셨는데.” 삼우제(三虞祭)를 마친 후, 누님과 함께 생모의 유품을 정리하여 뜰에서 태웠다. 유품이라 해야 입던 옷가지 몇 벌과 신발이 전부였다. 유품을 불구덩이에 던질 때마다 어머니 냄새가 났다. 불꽃은 순식간에 유품을 삼켰고, 타오르는 불꽃마다 어머니의 환영이 어리었다. 마지막으로 밤색 나일론 치마저고리를 태울 차례였다. 나일론은 1960년 초에 처음 나온 귀한 옷감으로 큰 외숙부가 어렵게 구해 여동생인 어머니께 선물한 것이었다. 옷감을 받아든 어머니가 그날 밤 잠을 못 주무실 만큼 기뻐하시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는 옷감으로 치마저고리를 만들 때 딱 한 번 입어보고는 아까워 장롱 속에 고이 넣어두기만 하셨다. 누님은 차마 치마저고리를 불구덩이에 던지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누나! 이건 안 된다, 태우지 말고 나중에 누나가 입으면 안 돼?” “그건 안 돼. 이 옷도 불에 사려야 한대. 그래야 어매가 저승에서 이 옷 입고 가뿐히 놀러 다니실 거 아니가.” 불더미에 치마저고리를 던지고 누님은 울고, 또 나도 울었다. 다 타고 불씨에 희나리가 내릴 때까지 누님은 결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외가 “아이고~ 이 몹쓸 것~ 거기가 어디라고 이 애미 보다 지가 먼저 가다니.” 어머니상을 치르고 우리 남매는 누님과 외가로 갔다. 우리 마을에서 십 리 떨어진 외가는 어머니를 따라 숱하게 오가던 길이었다. 어머니와 쉬어가던 고갯길, 어머니가 나와 동생들의 손발을 씻기던 내평들의 냇가, 동생이 엎어져 무릎에 생채기가 났던 황톳길까지 굽이굽이 길목마다 어머니가 서 계셨다. 우리가 도착했다는 소리를 듣고 외할머니는 마루에서 다급히 맨발로 마당에 내려와 맏인 나를 끌어안고 통곡하셨다. 그리곤 어린 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쓸어 만지시며 울고 또 우시다가 결국엔 마당에 엎드려 당신의 가슴과 땅바닥을 하염없이 치곤 하셨다. “아이고~ 이 못된 것~ 이 불쌍한 것들을 두고 어찌 눈을 감았을꼬~ 아이고~ 이 불쌍한 것들~” 새하얀 할머니의 저고리에 흙이 묻었지만, 오열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외가의 친척 아지매들도 모두 우셨다. 외가 마당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내 등을 토닥거려 주고는 사랑방으로 들어가신 외할아버지는 저녁때가 되어도 기척이 없으시더니, 늦은 밤에 나를 사랑방으로 부르셨다. “밥은 마이 뭇나? 크면서 점점 어미를 닮는구나. 너 어미는 이제 이 세상에 없는 기라. 니 어미 없다고 기죽으면 안 된데이. 그렇다고 너 어미를 잊으라는 건 아니다. 니 어미는 어디서든 니를 따라다니며 도와줄 기다. 어미가 니를 얼마나 아끼고 미더워했는지 알제? 죽은 어미 생각해서라도 니가 잘 돼야 한다. 어미가 없다고 외가를 멀리하면 안 된데이. 어미가 그립다고 아무 데서나 눈물 보이지 말고 곧장 외가로 오너라. 니는 누가 뭐래도 우리 손준 기라.” 외할아버지 목소리는 한없이 젖어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당부는 어머니의 당부와도 같았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챙겨 주시던 외할머니는 어머니와 다름없었다. 흔히들 외할머니 안 계신 외가는 발길이 멀어진다고 하지만, 나는 외가를 가까이하며 자랐다. 세월이 흐르면 잊힐 법도 하건만, 날이 갈수록 사무치는 그리움이 베갯잇을 적셨고, 가슴골이 미어질 때면 나는 외가를 찾았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내 나이 칠순을 넘겼지만 지금도 외가를 자주 찾는다. 외가는 어머니의 체취가 숨 쉬고 있다. 1965년 봄, 열여섯의 나와 마흔을 갓 넘긴 곱디고운 어머니와의 추억이 멈춰 있기 때문이다. 내 아내와 자식들이 할머니의 모습을 궁금할 때면 나는 말을 잃는다. 무엇보다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도 남기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칠 남매 중 둘째로 외동딸이었다. 여섯 명의 외숙부는 모두 고등 교육을 받고, 대학을 나오셨다. 큰집 외가는 보기 드문 대농(大農)이었다. 어머니는 영리하셨으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당시 딸은 멀리 보내 공부시키기보다 살림을 가르쳐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던 시절이었던 같았다. 아버지는 남들보다 늦게 공립초급중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열여섯에 중매로 어머니와 결혼하면서 큰할아버지의 양자(養子)로 입적되었다. 큰할아버지는 성균관의 전신인 명륜학원 3년제 경학과(經學科)에 다니셨고, 스물다섯에 요절하시고, 후사(後嗣)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부터 큰집에 아들이 없으면 작은집 맏아들을 양자로 들이는 것이 마땅한 법도였다. 큰할아버지의 처가도 명문가였다. 큰할머니의 남동생은 일본의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다니면서 좌익 운동했고, 졸업 후,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공산당 핵심 간부로 활약하다 투옥되기도 했으나, 6‧25가 일어나기 직전 가족을 모두 데리고 월북했다고 한다. 훗날 들은 이야기로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거쳐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했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큰댁 양자로 들어갔을 땐 6‧25전이었고, 남달리 아버지를 예뻐하셨던 외숙부와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소소한 심부름도 해줬다. 그러나 이것은 훗날 아버지에게 큰 화(禍)가 되고 말았다. 6‧25가 터지고, 외숙부의 월북을 알게 된 당국은 아버지를 찾아와 빨갱이에게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끌고 가신 것이었다. 그땐 전시 상황에서 부역자로 몰리면 이유를 불문하고 무더기로 총살하던 시기라 아버지의 신변은 풍전등화와도 같았다. “숙질간의 문안편지가 전부였니더. 혹여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철없을 때의 일이니 부디 선처하여, 이 젖먹이가 아비 없는 자식이 되지 않게 해주이소.” 어머니는 젖먹이인 나를 업고 아버지가 갇힌 유치장을 찾아다니며 경찰 간부들에게 애원했다. 그때마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살리고자 논밭을 팔았다. 누군가의 주머니 속에 돈뭉치를 찔러 넣어 주고, 아버지의 목숨을 이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법원의 선처로 1년 만에 풀려났다. 그 당시 중학교만 나와도 웬만한 공직에 임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일로 아버지는 공직 임용의 결격사유가 되어 한평생 시골에 묻혀 사셔야만 했다. 어머니는 낙심하는 아버지를 위로하셨다. “ㅇㅇ아부지, 괘안심미더. 우리는 당신이 무사히 살아나올 수 있어서… 이 어린 것들이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면한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니더.” *혼절하신 어머니! “애미야! 왜 카노?” 내가 세 살 되던 가을이었다.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어머니가 정신을 잃고 부엌 아궁이에 쓰러졌다. 밖에 계시던 할머니가 놀라 불구덩이 속에서 다급히 어머니를 끌어내셨다. 얼굴은 불에 타 피투성이 되었다. 시골에서의 응급처치래야 종양이나 고름 주머니에 붙이는 고약(膏藥)이 전부였다. 정신을 놓은 어머니는 사경을 헤매다 사흘 만에 겨우 눈을 떴으나, 기력도 약한 데다 화상으로 인한 통증이 참기 어려워 입에 천을 물고 신음을 삭이셨다고 한다. 불에 덴 어머니의 얼굴과 목은 쉽게 아물지 못하고 나날이 흉측해졌다.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살아있다는 자체가 더 고통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나는 어머니의 일그러진 얼굴이 너무 무서워 그 방에 들어가려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어머니가 누워 있는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려 할 때마다 겁에 질려 울음을 터트렸다곤 했으니깐. 아버지는 이런 나를 달래고, 행여 섭섭해할까 봐 어머니를 더욱 극진히 위로하셨다. “얼른 털고 일어나게. 나보다 어린 애들을 위해서라도 자네는 꼭 살아야만 하네. 지난날 감옥에 있던 나에게 자네가 했던 말 기억하시는가? 나도 저 애들을 애미 없는 자식으로 만들 수 없잖은가. 이젠 자네가 지켜야 하네. 어서 자리 털고 일어날 생각만 하게.” 아버지의 사랑은 정말 지고지순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데워 어머니를 닦이고, 약과 미음을 떠 입에 넣어 주셨다. 반년쯤 지났을까. 꺼져가던 어머니의 기력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훗날 어머니는 간간이 들리는 아버지의 애절한 호소로 당신을 일어나게 했다고 회상하셨다. 그리고는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숙명이라며 스스로 위로하셨다. “뭘 그리 숨기오? 흉터 애써 숨길 필요 없소. 당신은 늘 내 옆에 당당하게 있으면 되오. 당신은 세상에서 누구보다 이쁜 내 사람이라오.” 아버지는 어머니를 진정 아끼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따금 읍내 나들이 가셨다. 흉터가 생긴 후 의기소침해진 어머니를 위한 아버지의 배려였다. 아버지와 함께 가는 날이면 어머니는 거울 앞에 오래 앉아 계셨다. 머리엔 동백기름을 발라 곱게 빗고, 얼굴엔 동동구루무를 찍어 바르고, 분칠도 곱게 하셨다. *새어머니라니요? “뭐요? 새어머니라고요?” 할머니 말씀은 충격이었다. 나는 얼굴 붉히며 볼멘소리를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마저 기운을 잃으셨다. 가족들의 삼시 세끼와 줄줄이 다섯 손주,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엄마 찾아 칭얼대는 막냇동생을 업어 키워야 하니 할머니에겐 벅찬 일이었다. 아버지도 웃음을 잃으셨고, 머리가 굵어질 대로 굵은 나조차도 어머니의 정(情)이 그리워 말문을 닫아버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나도 늙었다. 집안 살림을 감당하기는 힘에 부친다. 애비도 혼자 있는 거 보기 좋지 않고. 새 사람을 맞이해야겠으니 너희도 그리 알 거라.” 생모가 돌아가시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집안 어른들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안 됩니더. 어매가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났다고 벌써 새어머니라니요? 지는 새어머니 필요 없슴니더.” 밥을 먹다 말고 나는 숟가락이 털컥 내려놓았다. 열여섯 살밖에 안 된 철없는 나는 우리 집의 형편이나 아버지의 처지보다 생모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컸던 까닭에 할머니가 야속했다. 그러나 나의 반대에도 새어머니를 모시는 일은 은밀히 진행되었다. 1965년 11월 초, 어느 토요일. 읍내 외숙부댁에서 학교에 다니던 나는 저녁 무렵이 되어 시골집으로 왔다. 마음이 무거웠다. 새어머니가 우리 집으로 오시기로 한 날이었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친정에 머무르던 아낙이라고 들었다. ‘무조건 싫다고 화를 내고 방으로 들어가 버릴까?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싫음을 보일까? 아니야, 조용히 그분 귀에 대고 우리가 싫으니 그냥 돌아가 달라고 정중히 부탁할까?’ 집으로 오는 내내 온갖 망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이마에 뿔이 난 여자면 우짜지? 내 동생들을 굶기거나 몰래 때리면?’ 무서웠다. 어릴 적에 읽은 ‘콩쥐 팥쥐’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장화홍련전’의 의붓어미도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집에 오니 마당엔 집안 어른들로 북적거렸다. 마당에 들어선 나는 선득 방안에 들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왔냐? 퍼뜩 들어 온나.” 집안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끌려 들어간 나는 거절할 틈도 없이 낯선 여인께 큰절을 올리고 말았다. 친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찰나, 그 여인이 얼른 내게 다가와 다정히 손을 잡았다. “장손이구나. 얘기 많이 들었어. 만나게 되어 반가워.” 서른셋에 불의의 사고로 청상(靑孀)이 된 새어머니는 망설임 끝에 아버지와 재혼을 결심하셨다고 했다. 본 남편의 사고로 빚이 많았던 새어머니, 그 빚을 모두 갚아주는 조건이었다고 했다. 그래도 오 남매나 딸린 시골 홀아비에게 재가하기란 쉽지 않았을 거다. “이유야 뭐가 됐든 내가 이 집의 귀신이 되기로 한 이상, 이 한 몸 다 할 테니 나를 믿어주었으면 좋겠어.” 새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어느새 눈물이 볼을 적시고 있었다. *새어머니, 외가를 찾다 “아버지 어머니! 부족하지만 딸 노릇 하려고 왔습니더. 부디 친딸로 받아주이소.” 그해 겨울방학, 새어머니는 우리 오 남매를 앞세워 외가로 가 큰절부터 올렸다. 외할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새어머니의 두 손을 꼭 잡으셨다. “암! 그렇고말고. 우리는 벌써 자네를 우리 딸로 여기고 있다네.” 새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간곡한 당부도 받으셨다. “잘하고 있다는 소리 익히 들었네. 어린 것들을 돌보려면 마음고생이 심할 텐데 고맙네. 너희들도 어머니 말씀 받들어야 한다.” 새어머니는 가족에게 정성을 다하셨다. 처음엔 새어머니의 관심과 정성이 썩 내키지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진심이 느껴졌다. 자식 하나 없이 세상에 혈혈단신으로 남겨진 허전함 때문인지 새어머니는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셨다. 특히 어린 막냇동생을 더없이 보듬으셨다. 옛말에 과부는 혼자 살아도 홀아비는 혼자 못 산다며, 상처(喪妻)의 빈소가 있을 때 재취(再娶)를 구해야 집안이 펴인다는 속설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사실을 훗날에 알았다. 아버지의 재혼을 외가에서 먼저 서둘렀다는 것도……. 매사에 재바르신 새어머니는 집일에 몸을 사리지 않으셨다. 우리 집의 분위기는 하루가 다르게 밝아졌다. 돌아가신 생모의 빈자리가 새어머니로 채워졌다. 새어머니는 우리를 앉혀두고 늘 당부하셨다. “아는 게 모자라서 실패하는 것보다 성실치 못해 낭패 보는 경우가 더 많으니, 매사에 성실해야 한다.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는 기라.” 새어머니는 천성이 부지런하여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아버지께 부탁해 마당 한구석에 있는 디딜 방앗간을 잠실로 개조해 봄가을이면 누에를 몇 장씩이나 쳤다. 우리 집 가세는 눈에 띄게 늘었다. 새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나는 〇〇교육대학교에 입학하여 무탈하게 졸업했다. 그리고 동료 교사인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맞벌이로 정신이 없던 우리 부부에게 새어머니는 또 다른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 우리 아이 삼 남매를 정성으로 돌봐 주셨다. 아내와 약속했다. 생모께 못다 한 효를 새어머니께 다 하자고. 생모의 정이 천륜이라면, 새어머니와 맺은 정 또한 뜨거운 인륜 아니던가. *외숙부님의 회갑 선물 “아버지! 얼마 후면, 큰 외숙부님의 회갑이라고 하시던데, 제가 양복이라도 한 벌 지어 드리면 어떨까요?” 내가 결혼하고 몇 년 후, 외숙부님이 생모가 살아 계실 때 선물로 주신 나이론 처마저고리를 장례 후 불에 태웠던 얘기 끝에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그래? 깊이 생각했구나. 너의 큰 외숙은 아들도 없고 딸만 늦게 하나 두었으나, 아직 어려서 예물을 할 사람도 마땅치 않은데 생질인 너라도 예를 갖추어 선물한다면 외숙이 아주 좋아하실 거다.” 생모가 살아 계실 땐 내가 너무 어려서 밥 한 끼 대접하지 못했고, 옷 한 벌도 사 드리지 못했지만, 생모께 나이론 처마저고리를 선물해 주신 외숙부님께 생모를 대신해서 꼭 답례하고 싶어 누님과도 상의했다. 며칠 후, 우리 부부는 읍내의 외숙부님 댁에 들러 지난날 생모의 나일론 치마저고리 옷감을 얘기하면서 간곡히 말씀드렸다. “큰 외숙부님! 곧 회갑을 맞이하시는데, 저가 양복을 한 벌을 맞춰 드리고 싶습니다. 저가 고등학교 때 외숙부님 댁에서 숙식하며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셔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고, 지금 이렇게 교단에 설 수 있었습니다.” 나의 말에 큰 외숙부님은 얼굴을 붉히며 말씀하셨다. “말만 들어도 고맙다. 네 어멈이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꼬.” 한사코 사양하는 두 분을 설득시켜 나는 큰 외숙부님께는 양복을, 누님은 외숙모님의 한복을 맞춰 드렸다. 외숙모님은 고마워하시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외숙부의 회갑이라고 예물까지 챙기는 생질들이 있었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네. 두고두고 좋은 얘깃거리가 될 걸세. 정말 고맙네.” *새어머니의 병세 “환자의 병명은 소뇌가 주름이 잡히는 ‘소뇌위축증’입니다.” 내가 결혼한 지 8년이 될 무렵, 고향에서 살던 집을 허물고 새로 지었다. 우리 부부는 학교 근처에 집을 얻어 분가하였고, 1988년 3월 1일 자로 승진하여 대구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다. 새어머니의 기력이 급격히 떨어졌고, 읍내 병원에서는 원인을 찾지 못했다. 나는 어머니를 대구 대학병원으로 모시고 와 며칠간 종합검진을 받게 했다. 결과는 충격이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노화에 의해 소뇌에 주름이 자연스럽게 잡히는데 새어머니는 급속히 주름이 잡히는 희소병 ‘소뇌위축증’이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언어 장애와 사지 마비가 온다고 했다. 아버지는 지그시 눈을 감고 계시다가 한참 후 당부하셨다. “어멈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하자구나.” 병실로 간 아버지는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처방한 약만 잘 먹으면 곧 나을 수 있다고 하네.” 아버지의 말끝에는 습한 기운이 묻어났다. *늘어나는 약봉지 “애비야, 듣는가?” 어느 날, 고향 집에 들르니 새어머니께서 긴히 나를 부르셨다. “예, 어머니! 말씀하십시오.” “누가 그러는데 내 병은 청심환을 한 말만 먹으면 나을 수가 있다네.” “그래요? 어머니! 청심환을 한꺼번에 한 말씩이나 사두는 것은 변질될 수 있으니, 우선 열통쯤 사 드릴게요.” 어머니가 서운한 표정을 지으셨다. “한 말 치 비용을 아버지께 드리고 가겠습니다. 떨어지면 말씀드리세요.” 그제야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알고 있었다. 한 가지 병에 만 가지 소문이 돈다는 것을. 어느 날, 어머니는 더 둔한 어투로 내게 말씀하셨다. “애비야! 내 병에는 사향(麝香)이 제일 좋다고들 하네.” “그래요? 사향은 중약재(重藥材)인데, 그럼, 저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사향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구한 사향을 약전골목 한약방에 가서 다른 약재와 제조하여 복용토록 했다. 그러나 그것도 다 드시지는 못했다. 이번엔 웅담이 좋다고 하시며 드시고 싶어 하셨다. 한약방을 수소문하여 어렵게 구해 드렸으나, 그것도 조금 드시다가 그만두었다. 급기야 미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굿이라면 펄쩍 뛰시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부탁으로 우리가 모르게 집에서 굿판을 벌이기까지 했다. 병세가 악화할수록 어머니의 낫고 싶은 집착은 더 강해졌다. *오호! 새어머니……. 1996년 2월 새벽,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환자가 있는 집에는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울리는 전화벨은 사람을 무척 긴장케 한다. “애비야! 너 어미가 방금……….” 아이들을 깨워 급히 고향으로 향했다. 새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숱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지난가을, 나들이가 어려운 어머니를 위해 준비해드린 휠체어를 보고 그리도 좋아하셨거늘. 날씨가 따뜻해 새어머니를 태워 바다에 갔다. 새어머니는 등을 돌려 나의 손을 어루만지며 띄움 띄움 말씀하셨다. “애비가 나 때문에 고생이 많지? 내가 빨리 죽어야 애비도 편할 텐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어머니가 계셔서 저도, 아버지도 재미있게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어머니.” “아닐세.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어 이런 몹쓸 병에 걸려서 애비를 이렇게 고생시키는지 면목이 없네.” “어머니가 아니시면 누가 우리를 이렇게 잘 거두어 주실 수 있었겠습니까?” “고맙네. 자네들은 누가 뭐라 해도 내 자식일세. 나는 한순간도 달리 생각해 본 적 없었네. 자네들도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었네. 내가 죽어 저승 가서 형님(나의 생모)을 만나면 자네들의 고마운 마음을 꼭 전하고 싶네.” “어머니는 누가 뭐래도 우리 어머니십니다.”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이 새어머니께서 내게 남긴 마지막 말씀이었다. 새어머니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을 다 열었던 것이었다. 집 마당에 들어서니, 숨이 멎는 듯하였다. 방 윗목에 눕혀진 새어머니의 등을 와락 안고 통곡하였다. 30년 넘게 이 가냘픈 등으로 모정(母情)에 굶주린 우리 오 남매를 모두 짊어지셨던 분이 아닌가? “너희에게 고마워하며 편히 눈을 감았다.” 나의 눈에는 눈물이 그칠 줄 몰랐다. “너희 5남매는 내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모두가 속 썩이지 않고 잘 커 주었다. 어느 집 자식이 이보다 더 잘 하겠노!” 새어머니 장례는 고향집에서 엄숙히 치렀다. 오 남매의 애끓는 통곡 속에 새어머니를 마을 어귀 양지바른 산으로 모셨다. 생모와 새어머니, 두 분의 어머니를 잃은 나는 밀려드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우리 오 남매는 안다. 당신의 피를 이은 자식 하나 남기지 못하고 떠난 어머니를. 생모의 얼굴조차 기억 못 하는 어린 동생에게, 기른 정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일깨워주셨던 분이다. 불치의 병으로 4년이라는 시간을 누워서 보낸 새어머니의 고통이 저승에서는 말끔히 사라지기를 바랐다. 상여를 타고 마을을 떠나는 길은 오 남매의 애곡(哀哭)이 어떤 장송곡보다도 더 애처로웠다. 나는 간절히 빌었다. ‘어머니! 부디부디 극락왕생하옵소서.’ 어느 철학자가 말했다. ‘하얀 안개꽃 같은 삶을 꿈꾸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족이 있으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라고. *세 번째 어머니 “고향에서 텃밭이나 가꾸고 집이나 지키며 사는 것이 더 편하다.” 두 번째 어머니를 보내고 아버지를 대구로 모시려고 했다. 칠순을 훌쩍 넘긴 아버지를 홀로 고향에 두시려니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하셨다. 둘째 숙부 내외가 근처에 살고 계시고 여동생이 읍내에 있어 자주 들여다본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문안 전화를 드릴 때면 아버지의 음성은 어둡고 쓸쓸함에 젖어 있었다. “아버지! 접니다. 잘 계시지요?” 두 분의 어머니를 보낸 아버지의 등은 삶의 무게만큼이나 굽어 보였다. “그래, 내야 잘 있지. 대구는 별일 없지? 아이들도 잘 있고? 그래, 작은집에서 국이랑 찌개를 자주 끓여 오고, 읍내 애(나의 여동생)도 자주 들러 밑반찬을 갖다 주니 내사 잘 먹고 있다. 걱정 말거라.” ”제가 주말쯤 한번 올라가겠습니다.” “그래? 시간이 되거들랑 모두 왔다 가거라. 의논할 것도 있고.” 모처럼 5남매 내외가 고향집에 모여 왁자지껄하게 식사를 했다. “너희한테 할 말이 있다. 이 큰 집에 내가 혼자 지내기는 너무 적적하고, 밥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 그렇다고 대구로 내려가서 큰애 집에 얹혀살기도 뭣하고. 함께 지낼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떻노?” 나는 조심스레 여쭈었다. “혹시, 마음에 담아둔 분이라도 있으신지요?” “그래, 있기는 하다.” “아버지, 마음에 둔 분이 있으시다면 좋은 일이지요.” 그분은 읍내 노인 교실에서 만났고, 아버지보다 세 살 많다고 했다. 아버지 말씀을 들어보니 교양도 갖춘 분 같았다. 얼른 날을 잡아 그분을 뵈었다. 참 단아한 분이셨다. 배우자를 잃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지고 계셨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성당 교우들과도 친화력이 있었다. 서로 의지하며 위로하며, 동반자로서 황혼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진심으로 환영했다. 그렇게 세 번째 어머니가 우리 집으로 오셨다. 어둡던 아버지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두 분은 노후의 말벗으로 지낼 수 있어 무엇보다도 다행이었다. 아버지가 직접 짓던 농토를 남에게 대신 경작도록 하였고, 텃밭만 가꾸며 집에서 가까운 바닷가 둘레길을 산책하며 지내셨다. 어머니가 돋보기를 끼고 매일 읽어주시는 성서(聖書)를 듣다가 아버지도 어느결에 성서를 믿게 되셨다. 세 번째 어머니와 인연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아버지와 오손도손 정성껏 사시는 모습에서 진심 어린 고마움을 품게 되었다. 한학에 밝은 아버지는 〇〇군 시조협회장을 맡으셨고, 즐기던 시조창을 세 번째 어머니께 가르치며 일상을 보내셨다. 주일마다 성당에도 함께 나가셨다. 즐겨 드시던 약주와 담배까지 끊으신 걸 보면 세 번째 어머니의 간곡함이 있으셨던 모양이었다. 비록 늦게 만났지만, 주저리 엮어가는 일상이 달콤한 신혼과도 같이 웃음꽃이 피어났다. 이젠 나도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아! 옛말에 악처 한 사람이 효자 열보다 낫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한 말이었던가. *오! 세 번째 어머니마저……. “급성 골수성 백혈병입니다. 약물과 주사 치료를 병행하는 방법과 항암치료가 있습니다만, 고령이라……. 우선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복용하신 후에 경과를 봐서 다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 어머니가 집으로 오신 지 5년이 되던 해, 기운이 없다며 식사도 제대로 못 하셨다. 읍내 병원을 전전하다 서울에 있는 아우가 모시고 가서 큰 병원에서 종합검사를 받은 결과는 참담했다. 아버지는 큰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스르셨다. “이 사람아, 약만 잘 먹으면 곧 좋아진다니, 걱정하지 마시게.” 어머니의 병세는 점점 나빠졌다. 수발은 모두 아버지가 감당하셨다. “애비야! 네 애미가 방금 숨을 거두었다.” 2004년 10월, 차가운 바람이 불던 새벽, 아버지의 전화였다. “아! 세 번째 어머니마저…….”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탄식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늘 슬픔이 앞섰다. 아내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이 떠올라 목이 메었다. 우리 집에 오신 지 7년, 향년 82세였다. 세 명의 아내를 모두 불치병으로 먼저 보낸 아버지는 과연 처복이 많은 건지, 아니면 박복한 건지……. 어머니의 유해는 서울에서 내려온 친딸 내외가 모시기로 했다. 내가 고향에 모실 것을 원했으나 살아생전 그리하기로 고인과 얘기했다 하니 더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평소 어머니가 오라버니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외로운 어머니의 마지막 삶을 따뜻하게 채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동생 내외는 예를 갖추어 나를 대했다. 세 번째 어머니의 시구를 강릉으로 운구해 화장한 후, 친딸에게 정중히 인계했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늘 품위를 잃지 않고 학처럼 우아하게 사셨던 분이라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돌아오는 길,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니, 하루하루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를 알뜰히 계획하여 실행해야 후회가 적은 삶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시던 세 번째 어머니의 자애로운 말씀이 마당에 맴돌고 있었다. 아버지의 뒷모습에도 겨울이 오고 있었다. 탈무드에 ‘신이 곳곳에 갈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드셨다.’라고 했다. 생모의 품만으로는 나를 보듬을 수 없었기에 두 분의 어머님을 더 보내주셨는데도 오래 모시지 못하고 모두 이렇게 보내드리면서 또 그리움에 헤매야만 했다. *오호! 아버지시여……. “아버지, 고뿔이라도 드셨어요? 목소리가 쉰 것 같네요.” 2008년 1월. 저녁 답에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더니 음성이 낯설었다. “얼마 전부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약을 먹는데도 차도가 없구나.” “그래요? 그럼, 얼마 후면 설이니, 대구로 오시는 김에 며칠 앞세워 내려오셔서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월 초, 아버지를 모시고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내진한 의사가 나를 진료실로 불러 종합병원으로 가 검사를 받아보라며 진료의뢰서를 써 주었다. 의사의 표정이나 말투를 들으니 불길한 예감이 스쳤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아버지를 대학병원에 입원시키고 하루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꿈이 얄궂었다. 화상에 일그러진 어머니가 보이다가, 어머니와 함께 죽은 갓난아이가 울다가, 어린 내가 어머니를 안고 울다가, 그러다가 깨서는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늘었다. 주치의가 나를 찾았다. “폐암입니다. 암세포가 목 성대까지 전이되어 수술은 어렵습니다.” 암세포가 더 자라지 못하도록 항암치료를 먼저 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호전될 기미가 없었다. “아비야! 이제 그만해도 된다. 내 나이 여든하나다. 살 만큼 살았다. 우리 조상님 중에서 나보다 오래 사신 분이 없으셨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라.” 기력이 떨어져 더는 거동이 어려워질 무렵 아버지는 내게 당부하셨다. “셋째 어머니는 서울로 모시고 갔으니 할 수 없고, 내가 죽거들랑 고향에 흩어져 있는 두 어머니의 묘를 내 곁으로 옮겨다오. 모두 같이 있고 싶다” 가실 날을 예감하고 주변을 정리하시는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무엇보다 세 분의 어머니를 챙기고 싶어 하셨음을 알 수 있었다. 세월의 숫자만큼이나 아버지 가슴에 쌓인 이야기도 많았으리라. ‘아는 것만큼 보인다.’라며, 배움을 게을리하지 말라시던 아버지는 2008년 8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폐암과 폐렴이 반복되면서 대학병원과 요양병원을 오가던 여든하나의 한 많은 인생을 모두 거두어 가셨다. 아버지의 위독함을 듣고 병실을 지키던 나는 흐느끼며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아직 남은 아버지의 체온이 싸늘히 식을 때까지 그 손을 잡고 마냥 흐느꼈다. 주치의가 사망을 선언하고 간호사들이 와서 흰 천으로 덮을 때까지도 차마 아버지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도 나의 등을 토닥여주시던 손이셨으니까. 밖엔 비가 엄청나게 퍼부었다. 아버지를 보내는 내 슬픔이었다. 발인 당일은 비가 숙졌다. 운구차는 고향을 향했고 아버지가 평생 걸어 다니시던 신작로를 지나 고향집을 돌아 근처의 동산으로 향했다. 두 어머니를 보낼 때처럼, 동산엔 커다란 구덩이가 깊게 파였다. 열여섯의 내가 했던 것처럼 나는 다시 맏상제가 되어 아버지를 위한 취토를 해야 했다. 나이를 먹어도 눈물은 마르지 않는 것인가. 내 나이 내일이면 예순이건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버지!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저는 그때도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날게요.” 이듬해 2월, 한식을 맞아 아버지 유언대로 두 어머니의 묘를 아버지 무덤 곁으로 옮겼다. 묘터가 좁다는 지관의 의견이 있어 집안 문장(門長) 어른과 의논한 끝에 먼저 돌아가신 생모를 아버지와 합장하고, 새어머니는 그 옆에 평장(平葬)으로 모셨다. 생모만 아버지와 합장한 것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새어머니의 파묘제(破墓祭)를 올리면서 나는 무릎을 꿇고 한없이 용서를 빌었다. *그리운 이름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사람의 입에 올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 ‘어머니’라고 한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세 분이나 모셨고 또 떠나보냈다. 요즘은 유난히 어머니가 그립다. 꿈에라도 뵙고 싶은 생모님! 우리를 낳고 기른 정이 얼마나 거룩한지를 깨닫게 해주신 생육지모(生育之母)다. 당신 피붙이 하나도 두지 못하고, 몸과 마음을 태워가며 헌신으로 우리를 거두어 주신 두 번째 어머님은 양육지모(養育之母)이며, 우리를 낳거나 키우지도 않으신 세 번째 어머님은 우리가 아버지를 극진히 모셔야 하듯 이분 또한 함께 모셔야 할 어머님, 곧 봉양지모(奉養之母)가 아니신가. 그런가 하면 ‘아버지’도 ‘어머니’ 못지않게 나의 가슴을 울린다. 맏아들이라고 무척 아껴주시던 아버님, 당신의 굴곡진 인생 역경 속에서도 세 분의 어머니를 하나같이 극진히 사랑하시던 지아비이기도 하셨다. ‘배운 건 머리에 넣고, 그리운 건 가슴에 품는다.’라고 했다. 하나 머리에 넣은 건 쉬 잊을 수 있어도 가슴으로 품은 건 쉽게 잊지 못하는가 보다. 내 나이 칠십을 훨쩍 넘겼지만,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나와 이렇게 인연을 엮으신 세 분의 어머님께 커다란 꽃다발을 안겨드리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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